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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01장. The Mustard Seed/겨자씨 하나 (1/4)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인간 관계는 많이 변했으며 잘못되어 있다, 모든 차원에서 깊은 인간 관계는 사라져버렸다, 아내는 이제 더 이상 아내가 아니라 여자친구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 또한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일 뿐이다.
친구 관계는 좋은 것이긴 하나, 거기에 더 이상 깊은 만남은 없다, 결혼이란 깊은 만남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깊은 강물 속에 내맡기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그대는 강의 얕은 곳에 머무르게 된다, 그대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도약할 수가 없다, 그대는 그 표면 위에 떠다닐 수 있다, 그러나 그 깊은 곳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물론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표면에서의 그대는 더욱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표면에서의 그대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일할 수 있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대는 더욱 깨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깊은 곳에서는 어느 순간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의 두려움은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얕고 천박한 것들을 창조해 냈다, 인간 관계는 유치해졌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는 재미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그대 자신이나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지는 못한다.
여자친구와 더불어 그대는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은 자라지 않는다, 사랑은 깊은 뿌리를 필요로 한다, 성은 표면에서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동물적이며 생리적인 것이다, 만일 성이 깊은 사랑의 한 부분이라면 성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성이 깊은 사랑의 부분이 아니라면 성은 가장 추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영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에 가장 추한 것이다, 그저 서로를 만지고 헤어진다, 만난 것은 오직 육체일 뿐 너와 내가 아니다, 모든 인간 관계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만일 그대가 한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의 차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아내는 여자친구로 남편은 남자친구로 그 관계가 변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했던 관계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그 관계는 전혀 상반되는 관계인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처럼 되었다.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는 병리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환자는 진리를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며 건강을 구하러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건강(health)이란 단어는 매우 의미가 깊다, 그것은 전체성(whole-ness)을 의미하고 신성(holiness)을 의미하며 자기 존재 내면의 깊은 치유를 의미한다.
환자는 건강을 위해서 오지 않는다, 만일 그가 건강을 위해서 온다면 그는 제자일 수밖에 없다, 환자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다, 그 자세는 전적으로 소극적인 것이다, 그는 단순히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오기를 주변으로부터 강요받아 의사에게 오는 것이다.
그저 다시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오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적응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재조정이 필요하며 정신과 의사는 그가 다시 적응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무엇에 적응하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이토록 완전히 병들어 있는 이 사회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그대들이 말하고 있는 정상인들이란 다름 아닌 정상적인 병, 정상적인 광기, 또는 정상적인 정신 이상을 가진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 역시 정신 이상자이며 사회와 문화가 허용하는 영역 안에서 미쳐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주 그 영역을 벗어나는 짓을 한다면 그는 병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병들어 있는 그 사회 전체는 말한다, 이 사람은 병들었다고, 그러면 그 영역에 존재하는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도록, 군중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배우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혼란 상태에 있으며 그 혼란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의 노력은 오직 적응을 위한 것이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서양에서 그들이 스승 행세를 하고 또 머지않아 동양에서도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그들은 결코 스승이 될 수 없다, 그 자신 스스로가 병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들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좋다, 어떤 면에서 한 병든 사람이 다른 병든 사람을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병든 자가 다른 병든 자에게 완전함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한 광인이 다른 광인에게 그 광기를 극복하도록 도울 수는 없는 것이다.
프로이드나 융, 그리고 아들러 학파의 정신분석의들도 완전히 병들어 있다, 평범한 정신분석의뿐만이 아니라 그들 중 뛰어나다고 하는 이들조차 병리적인 환자들이다, 이제 그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겠다.
프로이드는 누군가가 무엇이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몸을 떨곤 했다, 두 번이나 그는 기절하여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이집트의 미라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역시 융이 죽음과 시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프로이드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면서 바닥에 쓰러졌으며 기절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프로이드에게 죽음이 그토록 두려운 것이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죽음이 왜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을까? 그대는 한 깨달은 자, 붓다가 죽음을 두려워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라고 할 수 없다.
융은 로마에 있는 바티칸 궁을 방문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었다, 특별히 그는 바티칸 궁에 있는 도서관을 방문하고 싶어했는데 그곳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종교들의 가장 희귀한 극비 문헌들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의 도서관이다.
그러나 그는 차표를 사러 갈 때마다 몸을 떨곤 했다, 그저 로마에 가는 것 뿐인데...... 그는 차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결코 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아니야, 나는 갈 수가 없어"라고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정신분석 학자인 그가 로마로 가는 것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로마가 종교들의 상징이며 대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융이라는 사람은 그의 마음 둘레에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그 철학이 무너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낙타가 히말라야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낙타가 히말라야 가까이에 이를 때 그는 처음으로 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융이 만들어놓은 모든 철학은 유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그토록 방대하고 우주적인 체계들을 창조해 냈지만 그 모든 체계들이 지금 붕괴되고 있다, 그가 로마 행을 그토록 두려워한 것은 과거가 창조한 모든 위대한 체계들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대들의 작은 체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대가 닦고 치장해 놓은 그 작은 구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대의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위대했던 철학들이 무너져버리고 한낱 먼지로 변해 버렸다, 로마에 가보라, 무엇이 일어났는지 보라, 아테네에 가보라, 그리고 무엇이 일어났는지 보라.
그 모든 것들이 먼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위대한 체계들이 이제는 먼지로 변해 버렸고 모든 사상들은 결국 쓸모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사상이란 한낱 인간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고가 없는 상태에서만 그대는 신성을 알게 된다, 사고를 통해서 그대는 영원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는 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는 영원의 것일 수가 없다, 철학이나 사상 체계는 영원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융의 두려움이었다.
융은 적어도 네 번이나 다섯 번쯤 로마 행 예약을 했었고 또 그것을 취소하였다, 이 융이라는 사람은 가장 위대한 정신분석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에 가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대들은 두렵지 않다 해도 그것은 그대가 융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그대가 융만큼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에 가면 그의 머리가 뒤집혀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위대한 사상 체계들의 폐허를 보는 순간, 전율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나의 체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그를 사로 잡을 것이다.
그는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그의 회상록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마침내 나는 그 모든 계획을 포기했다, 나는 로마에 가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일이 프로이드에게도 여러 번 일어났다, 그 역시 로마에 가려고 시도했었다, 그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여길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 역시 로마 행을 두려워했다, 왜? 프로이드 역시 그대처럼 화를 내는 인간이다, 프로이드 역시 그대처럼 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도 그대처럼 죽음을 두려워했고 그대처럼 신경질적이었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가 그대보다 더 지성적인 인간이었고 천재적이었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에 관한 한, 가장 심오한 정수에 관한 한은 그도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장님에 불과했다.
그렇다, 정신의학은 종교가 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병원이 될 수는 있겠으나 사원이 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병들고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아니고 환자는 제자가 아니다, 만일 그대가 환자로서 스승에게 온다면 그대가 얻을 것은 없다, 왜냐하면 스승은 정신분석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말한다, "나는 이러저러한 정신적인 불안과 신경증 증세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불안을 치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 자신을 치료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질병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뿐이다, 병이란 바깥에 있는 것이지 그대 존재가 있는 곳에 병은 없다."
일단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 모든 질병은 사라진다, 그대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피해 왔고 그대 자신을 숨겨 왔기 때문에 그 병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의 본 모습을 보고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만남을 피해 왔다.
왜 그대 자신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가?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녕 그대가 그대 자신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기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스승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승은 오직 그대가 그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왜 그대는 그렇게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어느 곳에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강요된다, 아이는 훈련되어져야 한다, 아이는 사회와 부모들이 허용하지 않는 많은 부분들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들은 거부되고 억압되어진다.
오직 아이의 일부분만이 허용이 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아이는 허용되지 않는 자기 존재의 많은 부분들을 부정해야만 한다, 아이는 자신이 부정해야 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들이 자신에게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억압이라는 것이며 사회 전체가 이 억압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의 가장 큰 부분은 억압되어야 하며 그것은 어둠 속에 완전히 던져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억압된 부분은 그 스스로를 주장하며 반란과 반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원하지만 그대는 계속 그것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대 자신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억눌렀던 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렇게 그대의 내면에 존재할 것이다, 그 무의식의 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만일 그대가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대는 그 무의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대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한 아이가 가진 모든 부분들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 두려움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는 한 아이의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리고 아이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억압은 많든 적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얼굴과 마주 대해야 하는 이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그대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분별을 잊는 바로 그날 그대는 제자가 된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가를 잊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존재 전부를 드러내어놓는 바로 그날 그대는 비로소 한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스승이란 한 사람의 산파에 불과하다, 그는 그대가 거듭나고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제자는 스승을 신뢰해야 한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제자가 의심을 갖는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놓을 수가 없다, 그대가 누군가를 의심할 때 그대는 움츠리게 되고 자신을 확장시킬 수 없다.
한 낯선 사람에게 그대가 의심을 가질 때 그대는 스스로를 닫는다, 그 낯선 사람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열 수가 없다, 그대는 그 사람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을 방어해야 하고 마음에 무장을 해야 한다.
스승과 함께 있을 때, 그대는 그 무장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연인 앞에서도 조금은 무장을 한다,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조차 그대는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함께 할 때 그 열어놓음은 완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아주 조금이라도 움츠린다면 거기에 더 이상 스승과 제자 관계는 없다,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오직 그럴 때 비밀들이 드러나게 되며 열쇠가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숨길 때, 그것은 그대가 스승과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며 그땐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싸움은 스승과 함께 하는 열쇠가 아니다, '내맡김(歸依)'이 열쇠이다, 그리고 이 내맡김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부추겨왔다, 지난 3~4세기 동안에 인간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이 되도록 배웠다, 항복이 아니라 투쟁을, 복종이 아니라 반란을 하도록 배워왔다, 신뢰가 아니라 의심을 하도록 배워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과학이 의심을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깊은 회의주의이다, 그것은 신뢰를 통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와 주장 그리고 의심을 통해서 일한다, 그대가 더욱 의심할수록 그대는 더욱 과학적으로 된다, 그것은 종교적인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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