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옹달샘에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
제1회 독후감상
정영일
원종린 선생님의 수필 「어느 멍청이의 인생 일기」를 읽었다. 원종린 선생님이 『현대문학』 조연현 주간에게서 수필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야기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미국 유학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고 맛깔스럽게 쓴 수필이다.
나는 이 한 편의 수필을 읽으면서 원종린 선생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수필 제목에 사용한 ‘멍청이’라는 낱말은 내게도 낯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른들에게서 멍청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대여섯 살 때 어떤 할머니를 외할머니로 착각하고 매달리기도 했고, 소낙비로 물이 불은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져 냇물에 속수무책으로 떠내려가기도 했고, 개헤엄도 못 치면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 직전에 구출되기도 했고, 오줌통에 빠지고, 얼음판에서 수렁에 빠지고, 감나무에서 떨어지고, 머슴이 부은 끓는 물에 발이 데이기도 했다. 청년이 되어서는 6.25 동란 중에 중학교 선배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그 뜻을 몰라 혼란을 겪었다.
수필의 중간 부분까지 읽으면서 ‘나도 멍청이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개헤엄도 못 치는 주제에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강에서 멱 감다가 익사할 뻔한 적이 있었고, 결혼한 후에는 누가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냉장고 문 열고 웃는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너무 슬퍼서 실성하면 그리되나 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제목으로 선택한 어휘인 ‘멍청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비슷한 의미로는 ‘바보’ 또는 ‘푼수’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선생님의 수필을 꼼꼼히 읽어보면 선생님은 ‘멍청이’가 아니다.미국 유학 시험을 어렵게 통과한 머리 좋은 수재형 젊은이였다. 미국 유학 중에 다른 학생들은 20~30매 정도로 요약해 내는 과제물을 그 몇 배 분량을 제본까지 해서 제출하는 열정까지 보였다. 게다가 한국의 문인들이 동경하는 문학지 『현대문학』 수필 영역에서 세 번째 등단한 작가가 아닌가.
그런데 다음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은 어쩌면 멍청이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어학연수 중에 수면제를 처방받아 며칠 분량의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고 사경을 헤맨 일이라든지, 서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낯선 젊은이에게 꼬여서 카메라를 절취당한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웃을 수 없는 코믹한 이야기였다.
이 일화는 선생님이 ‘멍청이’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 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약간 덜렁대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고, 잘 따르고, 좋아하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생님 자신이 선량하고 꾸밈없고 거짓 없이 진실하므로 다른 사람도 모두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실수였고 해프닝이었다.
선생님은 이 글에서 인간의 부류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것은 ‘참고서적 성격’과 ‘교과서적 성격’이다. ‘참고서적 성격’은 융통성 있고 요령과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교과서적 성격’은 꼼꼼하고 관습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어느 쪽이냐 하면 후자라고 스스로 진단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교과서적 성격’을 지녔음을 인정한다. 선생님의 행동이 정말 융통성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의 익살스럽고 여유 있는 이런 모습을 좋아한다. 공자께서도 ‘넘치는 것보다는 모자라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선생님의 넘치지 않는 인품을 좋아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남을 모함에 빠트리거나 남의 인격을 밟는 행위는 위선자들이 하는 일이다. 선생님은 정직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이 있어도 남을 해코지하는 일은 하지 못하지만,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문장 속에 ‘촌철살인’ 같이 급소를 찌르는 삶의 지혜가 있다.
수필은 문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도 가장 자신에게 솔직한 영역이다. 그래서 수필을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종린 선생님의 수필은 어느 작품을 읽어도 문장이 단아하고 유순하며 솔직하다. 그러면서 재미가 있다.
원종린 선생님의 수필을 읽고 난 후 내 마음은 맑은 내에 얼굴을 씻은 듯 상큼해졌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읽고 난 후 느낀 감정이 마치 잘 정돈된 가야금 현의 소리 같았다면, 원종린 선생님의 수필을 읽고 난 후 느낀 감정은 마치 깊은 산속 옹달샘에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원종린 선생님의 수필은 인간의 작위作爲를 벗어나 누에가 실을 뽑듯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소리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