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곧 변화다. 공간은 팽창하고 시간은 흐른다. 가만 있어도 환경이 변한다.변화에 대응하려면 능동적인 액션이 아니면 안 된다.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놀랍게도 변화에 대한 인간의 입장은 없다. 변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사물이 멈추어 있어야 편안해진다. 존재는 멈추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공간이 멈추지 않으므로 존재는 멈출 수 없다. 나란한 것과 나란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믿는 것은 나란한 것이다. 나란함은 관성력을 감추고 있다.
변화를 해명한다는 것은 존재의 나란함이 어긋났을 때 포착되는 관성력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없다. 갈릴레이의 발견 이전에는 관성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고 갈릴레이의 등장 이후는 인간들이 죽어보자고 생각을 안했기 때문이다.
변화와 관련한 말로 인과율이 있지만 부족하다. 인과율은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원인과 변화한 다음의 결과를 대칭시켜 비교한다. 변화 자체의 논리가 아니다. 변화 바깥에서 관측할 뿐 변화 내부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변화 내부에서 작동하는 엔진은 무엇인가?
변화는 동력, 엔진, 결정, 전달, 출력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의 관측을 배제한 객체 자체의 논리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변화는 계 내부의 모순이라는 자체 원인에 의해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활이 쏜 것은 원인이고 과녁에 맞은 것은 결과다. 인과율은 활을 쏘았다고 말할 뿐 어떻게 쏘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해명하지 않는다. 변화를 해명하려면 화살은 반드시 그 과녁에 맞게 조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축구선수의 슛은 골이 될 수도 있고 노골이 될 수도 있다. 왜 골이 되고 노골이 되는지 필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과율은 공을 찼다는 원인과 골인 혹은 노골이 되었다는 결과를 연결만 할 뿐 동일하게 골을 복제하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곧 복제한다는 것이다. 1+2를 알면 2+3도 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것은 지식의 복제다. 지식은 복제되어야 한다. 궁수의 명중을 다른 궁수가 복제하지 못하면 참 지식이 아니다. 인과율은 복제할 수 없으므로 인류는 변화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인과율은 추론의 단서를 제공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결과에서 원인을 추적하므로 귀납이다. 귀납은 진정한 추론이 아니다. 진짜는 연역이다. 연역은 원인에서 결과를 찾아간다. 활에서 화살을 타고 과녁을 따라가며 변화를 복제한다. 인과율로는 연역을 할 수 없다.
연역하려면 대칭의 상대성 이원론을 극복하는 비대칭의 절대성 일원론의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인과율은 귀납하므로 화살의 존재를 모르고 활과 과녁 사이에서 순환의 오류에 빠진다. 인간들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오류가 순환논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