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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속에서 조상을 탐하다. 편에 이어서
《소암집》 서문[疎庵集序]
처음에 내가 《주역(周易)》을 읽을 때 절괘(節卦)의 감절(甘節)과 고절(苦節)에 대한 대목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흐뭇한 심경으로 자신의 절조(節操)를 행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숭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모두가 꼭 그렇게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몸을 괴롭게 해 가면서까지 절조를 지켜 나가는 것으로 말하면 중도(中道)에 벗어나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뜻이 독실하고 신념이 확고한 자가 아니라면 또한 어떻게 이런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세도(世道)가 쇠미해져 이욕(利欲)이 마구 판치게 된 나머지 호광(胡廣)과 여온(呂溫) 같은 중용(中庸)을 가지고도 충분히 세상을 기만할 수 있게 되었는데,주1) 이와는 반대로 세상의 풍조에 따르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을 펼치면서 절조를 지켜 깨끗하게 몸을 간직하고 고통을 참아 내는 인사들은 왕왕 세속으로부터 헐뜯음을 당하곤 한다. 성인께서 향원(鄕愿)주2)을 미워하시고광견(狂狷)주3)을 그래도 허여해 주신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는 생각도 든다.고우(故友) 소암(疎庵) 임무숙(任茂叔 무숙은 임숙영(任叔英)의 자(字)임)은 세상에 보기 드문 절조(節操)의 소유자로서 강하고 곧기가 금석(金石)과 같았고 맑으면서 깨끗하기가 빙설(氷雪)과 같았으며 그 중엄한 언론(言論)은 높이 솟은 층암절벽(層岩絶壁)을 연상케 하였다.그의 집안은 문벌(門閥)이 본래 대단하였는데 생래적으로 산업(産業)을 돌보지 않은 나머지 벼슬길에 오른 뒤에 더더욱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추한 거리의 오두막집에서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고 깔개도 없이 흙평상에서 지내며 탈속반(脫粟飯 날반, 즉 애벌쌀로 지은 밥)도 제때에 먹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살 수가 있을까 하고 머리를 저었는데 무숙만은 태연자약하게 즐기면서 한 번도 근심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무숙은 또 광해(光海) 때에 정도(正道)를 걷다가 걸려들어 조정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그때로 말하면 권간(權奸)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면서 각종 함정을 설치해 놓고 무서운 형벌을 가하여 한 세상을 꼼짝 못하게 하였으므로 맑은 명성을 지닌 인사들 대부분이 몸을 낮추고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스스로 도회(韜晦)하곤 했었는데, 무숙만은 준엄한 말로 격렬하게 맞서면서 조금도 꺾이지 않았었다.그러다가 중흥(中興)을 이룬 초기에 대각(臺閣)의 직책을 역임하며 그 곧은 기상을 드높이 발휘하여 사림(士林)의 기림을 받는 가운데 이제 바야흐로 크게 쓰여질 기회를 점차 맞게끔 되었는데, 얼마 뒤에 갑자기 병이 들더니 그만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아, 고통 속에서도 절조를 지켜 나가는 사람들은 늘 훌륭한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근심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무숙의 경우로 말하면, 처음엔 뜻이 좌절되어 고달픈 세월을 보냈다 하더라도 이제 제때를 만나게 되었고 또 크게 쓰여질 기회를 맞았는데, 끝내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것이 어쩌면 천명(天命)이요 도수(度數)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한계를 지어 버렸기 때문인가. 아, 애석한 일이다.무숙은 재질이 무척 뛰어났을 뿐더러 남다른 기억력을 소유하였다. 그리하여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한 번 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학문 세계가 그지없이 넓었고 문장 역시 대부분 복고(腹藁)주4)로 금방 지어 내곤 하였다.그가 죽은 뒤에 문인(門人) 권임(權恁)이 유초(遺草)를 모아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호임) 이여고(李汝固 여고는 이식의 자(字)임)에게 가서 5권(卷)으로 정리한 뒤 중원(中原 충주(忠州)의 옛 이름)에서 간행을 하였는데, 현감 이후 배원(李侯培元)과 연원 찰방(連源察訪) 강여재(姜與載)가 실무를 담당하였다.그런데 내 생각에 무숙이 평생토록 저술한 것들이 필시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아마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문집을 살펴보건대, 배율(排律) 형식의 대편(大篇)을 통해서는 그 풍부한 학식을 알 수가 있고, 변우체(騈偶體)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그 정밀한 조예를 알 수가 있으며, ‘독국책(讀國策)’, ‘유수종(游水鍾)’ 등의 글을 통해서는 그 식견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비록 장난삼아서 감흥에 편승하여 지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이를 통해 어떠한 취향의 소유자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아, 이것만으로도 불후(不朽)하게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가령 이 세상에 훌륭한 사씨(史氏)가 있어 장차 탁행(卓行)과 문원(文苑)의 열전(列傳)을 지어서 전하려고 한다면, 무숙에 앞서서 그 누구의 이름을 거론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는 않고 그저 공허하기만 한 글을 붙잡고서 멀리 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수준 이하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주1) 호광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30여 년 동안 공대(公臺)에 있으면서 여섯 황제를 차례로 섬겼는데, 강직한 기풍이 없이 일을 좋게만 처리하며 어물쩍 넘겨 버렸으므로 당시에 “처리 못 할 일 있으면 백시(伯始 호광의 자(字)임)에게 물어보라. 천하의 중용(中庸) 호공(胡公)이 있지 않나.”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한다. 여기의 중용은 시비를 가리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말한다. 《後漢書 胡廣傳》 여온은 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의 사람으로 성질이 사특하고 험악하였으며 이익에 눈이 어두웠는데, 문장 실력으로 유종원(柳宗元)이나 유우석(劉禹錫)에게 인정을 받기도 하고 기막힌 처세술로 출세 가도를 달리기도 하다가 재상 이길보(李吉甫)를 무함한 끝에 좌천된 뒤 병들어 죽었다. 《舊唐書 卷137》 《唐書 卷160》주2) 향원은 세속에 영합하여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위선자를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이다.”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3) 광(狂)은 뜻이 높은 반면 행동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고, 견(狷)은 지식 수준은 미달이나 행동을 잘 단속하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중도(中道)를 행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하겠다.”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4) 미리부터 복중(腹中)에 시문이 조립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당서(唐書)》 문예 상(文藝上) 왕발전(王勃傳)에 “왕발이 글을 지을 때면 당초 정밀하게 생각하지를 않고서 먼저 묵을 몇 되쯤 갈아 놓은 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자다가 깨어나서는 그대로 한 글자도 고치는 일이 없이 문장을 완성시키곤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왕발을 일컬어 ‘복고’라고 하였다.” 하였다.
출처: 한국고전종합DB의 고전번역서 中 계곡집에서 발췌
※계곡집 :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선조님과 교유하던 장유(張維)가 남긴 시문집.
[참고]동래인 정유일의 묘갈명을 통한 소암 선조님 관련 기록
나는 약관일 때부터 소암(疏庵) 임숙영(任叔英)과 종유하면서 형제처럼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소암은 일찍이 그의 외왕부(外王父) 문봉(文峯) 정 선생(鄭先生)의 문학과 덕행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임기(任奇))가 지은 행장을 보여 주었다. 내가 크게 감복하여 기억을 게을리하지 않은 지 거의 40년이 되었다. 지금 공의 묘에 비석을 세우려 함에 소암의 후사 임량(任量)이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니, 행장이 자상해서 믿을 만하기 때문이지 어찌 늙어 쇠락하고 거친 자질로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유일(惟一)이고, 자는 자중(子中)이며, 문봉은 자호이다.
-중략-
숙인(淑人)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현감(縣監) 응복(應福)의 따님이다. 현명하고도 의칙이 있었다. 공보다 3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해서 장례를 치렀다. 두 딸을 낳았다. 맏사위 감역(監役) 임기는 성품이 지극하고 어려서부터 공의 문하에 있었는데 공이 평소 귀하게 여겨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둘째 사위는 현령(縣令) 한영(韓瀛)이다. 부실(副室)의 아들은 사경(思敬)과 사신(思愼)이고, 사위는 이명옥(李明玉)이다.
감역 임기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장남 숙영(叔英)은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세상에서 우뚝하게 뛰어나고 훌륭하여 사람들이 집안에 유래가 있다고 여겼다. 이 사람이 소암(疏庵)이다. 오랫동안 어지러운 조정을 등졌는데,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시점에 제일 먼저 총애를 입어 발탁되어 한 번에 한원(翰苑), 옥당(玉堂), 헌대(憲臺)를 거쳤는데,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을 떴다. 아, 운명이다. 둘째는 세영(世英)이다. 사위가 넷인데 박홍부(朴弘敷), 김한(金垾?), 한여징(韓汝徵), 신효증(申孝曾)이다.
[참고]경오유연일록을 통한 소암 선조님 관련 기록
임백연(任百淵, 1802~1866)은 본관이 풍천(豐川)이고 자는 보경(溥卿) 또는 보경(保卿)이며 호는 경오(鏡浯)이다. 그는 184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제주판관ㆍ동부승지를 역임하고 부호군에 이르렀다. 1836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 종고(鐘皐) 조계승(趙啓昇)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다녀와 《경오유연일록》 2책을 남겼다. 또한 당시 연행에 동행한 신재식(申在植, 1770~1843)ㆍ이노집(李魯集)ㆍ조계승ㆍ이봉녕(李鳳寧)ㆍ최헌수(崔憲秀)ㆍ정환표(鄭煥杓)ㆍ임백연ㆍ이상적(李尙迪, 1804~1865) 등 8명의 시 15수씩을 선발하여 총 27제 120수를 북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상간편(相看編)》이 있다.
경오는 명종 연간 한성판윤을 역임한 죽애(竹崖) 임열(任說, 1510~ 1591)을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죽애공파(竹崖公派)의 후손으로, 광해군 때의 유명 문인이자 〈통군정서(統軍亭序)〉로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은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이 7대조가 된다. 그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ㆍ신흠(申欽, 1566~1628)ㆍ장유(張維, 1587~1638)ㆍ이식(李植, 1584~1647)과 교유하여 소북(小北) 문인들의 문학적 교유를 확장한 바 있고, 소북 문인 가운데 강백년(姜栢年, 1603~1681)ㆍ박수현(朴守玄)ㆍ정창주(鄭昌胄)ㆍ신유(申濡, 1610~1665) 등, 소위 ‘팔문장(八文章)’은 모두 그와 사승(師承)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6대조 남계(南溪) 임량(任量, 1626~1671)은 처사로 일생을 보냈으나 문명이 있었고, 생부(生父)는 영흥도호부사를 지낸 임선백(任善伯, 1596~1656)이다. 5대조 임윤원(任胤元, 1645~1712)은 대사간을 지냈으며, 4대조 소은(沼隱) 임수적(任守迪, 1671~1774)은 도승지를 역임하고 시문에 뛰어나고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전주 유씨(全州柳氏) 소생으로 3남 1녀, 후처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소생으로 5남 1녀를 두었다.
증조부 호재(扈齋) 임정(任珽, 1694~1750)은 18세기 초반 소북의 주요 문인으로, 최성대(崔成大)와 함께 안산(安山)의 남인(南人)ㆍ소북(小北) 사단(詞壇)을 개창한 인물이다. 임정의 8형제 가운데 4명이 문과에 급제하고 4명이 진사로 수령을 역임하여, 당시에 ‘주계팔옥(鑄溪八玉)’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임정의 장인 백각(白閣) 강현(姜鋧, 1650~1733)은 당시 소북의 영수로, 그의 아들이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23)이다. 이후 재간(在澗) 임희성(任希聖, 1712~1783)은 풍천 임씨 문인들을 중심으로 회원시사(晦園詩社)를 결성한 바 있다.
조부 임희택(任希澤)은 임정의 서자(庶子)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누이와 혼인하고, 경오 또한 강세황의 서증손(庶曾孫)인 대산(對山) 강진(姜溍, 1807~1858)과 사돈을 맺는다. 부친 임득상(任得常, 1767~1842) 또한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정조 연간 검서관 후보로 추천되는 등 학식과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다.
경오 가문은 연행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먼저 염헌(恬軒)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은 1687년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의 부사로 연행하고 연행시를 남기는데, 그는 경오의 6대조 임량의 생부인 임선백의 손자이다. 또한 강현은 1701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연행하여 《간양록(看羊錄)》을 남긴다. 임정의 죽마고우이자 이재종(姨再從)인 광릉거사(廣陵居士) 남태량(南泰良, 1695~1752)은 1730년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연행하고 106제 138수의 연행시를 남겼는데, 〈연중십육영(燕中十六咏)〉은 임정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임정은 1736년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연행하고 147제 202수 분량의 연행시를 남긴다. 특히 차운시(次韻詩)가 많은데, 종조부(從祖父) 임상원의 연행시에 차운한 작품이 33제 38수이고, 남태량의 연행시에 차운한 시가 23제 27수에 이른다. 특히 〈이십사수(二十四首)〉 연작시는 남태량의 〈연중십육영〉을 계승하여 북경의 다채로운 모습을 형상화한다.
임득상의 외삼촌인 박제가는 1778년부터 1801년까지 모두 4차례 연행에 참여하고, 《북학의(北學議)》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긴 바 있다. 경오는 중국 지식인과의 필담에서 박제가를 거론하며 장상지(蔣祥墀, 1761~1840)의 안부를 묻는다. 또한 강세황은 1785년 중국 건륭제의 나이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진하사은겸동지사(進賀謝恩兼冬至使)의 부사로 연행하여 연행시 14수를 남긴다. 더욱이 임득상은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수행원으로 연행하여 유관(楡關)에서 중국 인사와 교류한 적도 있다. 강진은 1833년 진향정사(進香正使) 희곡(希谷) 이지연(李止淵, 1777~1841)의 수행원으로 연행하여 연행시 45수를 남긴다.
경오와 서장관 조계승은 모두 소북 가문으로 인척 관계이다. 조계승의 조부 조영(趙煐)은 임정의 동생 임원(任瑗)의 사위이고, 부친 조경윤(趙庚胤)은 임희존(任希存, 1748~1828)의 사위이며, 또 조계승은 임교준(任敎準)과 사돈이 된다. 따라서 경오는 인척인 조계승의 수행원으로 연행길에 오른다.-이하 생략-
이상의 기록으로 소암공 선조님의 1차 기록 정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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