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근본원리는 부정원리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다. 부정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것은 처세술이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대표자가 집단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세가 무리를 이끌고 광야로 나서는 것이다. 철학은 원래 집단의 것이다. 개인은 처세술로 충분하다.
지도자가 부정하면 내전이 일어난다. 집단은 움직이고 움직이는 방향은 외부다. 지도자는 외부를 연결해야 하므로 긍정해야 한다. 환경변화를 받아들이고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악수해야 한다. 외부로 길을 열어 타개하지 않고 내부를 쥐어짜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글라이더가 이륙한 이후로는 나쁜 것을 제거하는 부정만 가능하다. 추가로 동력을 조달하는 긍정은 불가능하다. 글라이더가 외부의 비행기와 연결하여 이륙하는 것은 긍정이다. 긍정은 지도자의 몫이다. 이륙한 다음은 나쁜 것을 차단할 수 있을 뿐 좋은 것을 조달할 수 없다. 이건 대중의 몫이다.
인간이 부정적 사고에 매몰되는 이유는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총을 주고 적을 조준하여 쏘게 하면 말을 듣는 병사는 20퍼센트 이하다. 훈련하면 80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긍정은 특별히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이 존재한다.
나는 아홉살 때 인류가 틀렸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30억 대 1의 대결이다. 당시 지구 인구가 30억이었다. 정사론正邪論은 그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굴복하지 않듯이. 남들 눈치 보고 묻어가는 처세술은 부정이다. 정사론은 정을 추구할 뿐 사는 필요없다. 헤겔의 정반합 물타기 필요없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에서 물꼬를 터주면 입자, 힘, 운동, 량은 에너지 낙차를 따라 자동진행이다. 흐르는 물은 스스를 물꼬를 찾아간다. 긍정만 필요하다. ‘예스’로만 대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질문해야 한다.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는 포지션에 서면 이미 ‘노’가 되어 있다. 부정은 갑이 아니라 을이다. 이미 망해 있다.
에너지는 긍정이다. 정상에서 눈을 굴리는 때는 긍정이다. 기슭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긍정이 불가능하다. 아기는 긍정한다.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긍정은 세력에 포함되었을 때다. 종교의 긍정은 헌금을 강요할 때다. 보통은 사탄을 부정한다. 동성애 비난, 이교도 비난, 공산당 비난, 음주흡연 비난, 성생활 비난이다. 거의 비난 밖에 하는게 없다. 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력이 없고 세력에서 밀려나고 환경이 나쁘면 긍정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철학은 실력자가 세력을 얻고 환경이 좋을때 하는 것이다. 철학이 고픈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 철학은 도구를 가졌을 때, 기운이 있을 때, 무리가 모였을 때, 물이 들어왔을 때 그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1+1=2다. 이게 되는 사람은 진작에 뜨는 주식을 샀고 비트코인도 샀다. 인류의 90퍼센트는 1+1=2가 안 된다. 호르몬 때문이다. 총을 쥐어줘도 쏘지 못한다. 적이 나를 향해 쏘는대도 대응하지 못한다. 윤석열한테 모욕을 당해도 맞대응을 못한다. 그냥 당한다.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행하려면 철학의 훈련이 필요하다. 강자는 철학이고 약자는 처세술이다. 약자는 세력을 모아 강해지는 방법으로 철학할 수 있다. 강자의 긍정은 철학이고 약자의 부정은 처세술이다. 프랑스철학은 처세술이다. 철학은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이다. 칼이 있어야 무사의 철학이 있고 펜이 있어야 작가의 철학이 있다. 개나 고양이는 철학이 없다.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