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은 노벨철학상이다. 철학은 전쟁이다. 문명과 야만의 전쟁에서 일선 공격수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왔으면 상을 줘야 한다. 잘했다고 상을 주는게 아니다. 집단에 돌아오는 이득이 있으므로 보상이 따른다. 우리는 문학의 전사들에게 신세를 졌다.
구조는 접점이 있다. 밸런스의 균형점이다. 소실점이 있고 안테나가 있다. 연결고리가 있다. 칼은 칼날이 있고, 총은 공이가 뇌관을 때리는 지점이 있고, 전축은 바늘과 레코드판의 홈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일점이므로 둘은 들어올 수 없다. 인류 중에 한 명만 입장할 수 있는 정상이 있다.
음악에도 화음이 있고, 그림에도 소실점 있다. 시는 어떤 둘의 만남에 의한 전율을 드러낸다. 그게 없는 지하철 시는 시가 아니다. 이육사의 시가 전율을 드러낸다. 시라는 것은 딱 요렇게 쓰렸다 하고 모범을 보여준다. 너절하게 써도 시라고 쳐주는 것은 어린이에 대한 격려 차원의 말이다.
다섯 살 꼬마가 개떡같이 그려도 '장래 피카소가 될 소질이 보이는군요.' 하고 덕담을 해주는 법이다. 거기에 낚여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면 어른이 정색하고 눈을 치켜뜨는 지점이 있다. 문학은 칼이다. 이외수가 말했다. 이 바닥이 살벌하다.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은 일곱살 까지만이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백만 명을 묶을 수 있다면 그 끈은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 백남준이 묶어낸다. 백남준의 퍼포먼스에 눈이 휘둥그래진 사람은 묶인 것이다. 눈덩이 효과를 보려면 정상에서 눈을 굴려야 한다. 정상은 일점이다. 바이럴 마케팅은 유명인을 앞세워 일점에서 시작한다.
전체를 통제하는 일점의 발견이 예술이다. 자동차의 핸들과 같고 배의 키와 같다. 밸런스의 균형점을 통제하여 전체를 지배한다. 마음에도 그러한 소실점이 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다. 김기덕 영화에서는 물이다. 한국인 중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런게 있다.
예술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공격무기다. 수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능동적인 공격이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반예술이 오히려 예술이 되는 이유다. 예술이 타락하여 대중의 기호에 굴복하므로 백남준이 피아노를 때려부수어 예술가의 명성에 굴복하는 마음을 타격한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긍정은 철학이고 부정은 처세술이다. 똥은 밥이 아니고 프랑스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차대전에 진 패배자의 변명술이다. 유교의 정사론正邪論은 정과 사를 구분하지만 헤겔은 정과 반을 합으로 물타기 한다. 타협의 굴복이 철학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문학은 인간을 옹호해야 한다. 한강은 인간을 옹호했고 하루키는 부화뇌동하는 대중에 아부했다. '네 잘못이 아냐.' 그것은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어른이 아이를 어르는 말이다. 독자를 어린아이 취급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서점가의 처세술 코너가 다 그렇다.
모욕을 듣고 좋아하는 독자가 대다수다. 99 퍼센트 포장지는 1 퍼센트 내용물을 보호한다. 99 퍼센트 돌은 1 퍼센트 보석의 포장지다. 예술을 이해 못하는 99 퍼센트는 진가를 알아보는 한 명의 탄생에 기여한다. 너무 쉽게 알아보면 전율이 없기 때문이다. 호르몬을 폭발시키지 못한다.
철학은 긍정이다. 긍정이 의사결정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방향전환이 의사결정이다.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은 방향전환이 아니고 의사결정이 아니다. 의사결정이 아니므로 철학이 아니다. 변화를 끌어내는 만남이 의사결정이고 가만이 있는 것은 똥이다. 만나서 전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긍정과 부정
철학과 처세술
시와 지하철 시
그림과 이발소 그림
음악과 뽕짝
문명과 야만
인간과 동물
이성과 본능
지성과 폭력
전체와 부분
에너지의 방향이 다르므로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처럼 만나지 않는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과 시와 그림과 음악은 야만을 치는 문명의 칼이다. 칼날은 뾰족하다. 뾰족한 정상에 한 명만 설 수 있으며 두 명은 기슭이다. 정상에 한 명을 세우는데 기슭의 80억이 동원된다.
인류를 전진시켰는지가 중요하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은 문명으로 야만을 치는 전쟁이다. 전쟁에 이기려면 공격한다. 공격은 무기가 있고, 무기는 칼날이 있고, 칼날은 뾰족하고, 뾰족하면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한 사람만 들어오면 군중이 아니고 대표자다. 대표자라야 대화가 된다.
왜 이게 중요한가? 대화가 안 통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비철학, 문학과 비문학, 예술과 비예술, 시와 지하철 시, 그림과 이발소 그림, 음악과 뽕짝, 문명과 야만, 인간과 짐승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언어가 다르므로 대화할 수 없다. 다른데 같다고 믿으니 소통이 불통이다.
먼저 언어의 일치를 끌어내야 한다. 남자와 여자와 성소수자의 뇌구조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사랑할 수 있다. 같다고 착각하므로 원한이 쌓인다. 긍정과 부정의 다름을 인정해야 말이 통한다. 스승과 제자가 같다고 주장하며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려고 하니 수업이 진행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