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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내게
01.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당신의 때는 반드시 온다
02. 삶은 내게 감당할 만한 정도의 고통만 줄 테니까.
03. 무엇이든 항상 끝이 있기에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04. 돈을 벌기 위해 행복을 포기한다면, 과연 의미가 있는 삶일까?
05. 로망을 사랑하는 로망
06. 행복이 목표일 필요는 없다
07.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08. 속 없이 산다는 것
09. 포기할 수 없고 멈출 수 없고
10. 물론, 나는 나의 인생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1. 오늘도 치열한 행복을 살아간다
12. 나의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13. 서로 다른 사람들
14. 놀라운 힘이 있는 책보기
15. 글을 쓸 수 있어 기쁘다
16. 삶에 연습은 없다
17. 눈물겹지만 편안한 길을 걷는 신통한 다이어리다
18. 단순복잡한 삶
19. 욕하면서 감동받고 있구나
20. 나는 천국에서 마음껏 즐기고 있을 테니, 그대들은 이승에서 정성껏 즐기다 오게나
21. 내 미래는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2. 쓰러져 기댈 수 있는 막막함
23. 가슴 한편에 흐르는 푸르른 눈물
24. 마음이 눈이 없는 사람은 될 수 없다
25. 희생 같은 거 서로 하지 말자
26. 불행한 사람들에게
27. 질투의 저울이 크게 휘청대는 쪽에 내 인생을 걸어봐도
28. 진짜 선물
29. 적당한 배려의 거리
30. 여백의 아름다움
01.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당신의 때는 반드시 온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떠오르지 않아도 무작정 써보려 애써서 자리를 잡고 있다. 무엇인가를 하려다가 포기한 경험이 한두번만 있는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할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데, 가끔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함몰된다. 때로는 아무리 해도 포기가 되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이 꼭 글쓰는 일만은 아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매일 하다 보니, 하루가 너무 짧다. 삶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라면서 자각하는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덧 시간이 많이 흐른 후다. 지난 날의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해낸다. 더 이상, 나 스스로 못한다고 자책하지 않는구나. 하나하나 이루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구나. 비록, 그 노력의 결실이 언제쯤 맺어질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꾸준하고 열심히 살다보면, 뭔가가 되긴 되겠구나. 그런 생각들로 하루하루 채워가고 있다. 거짓이 아닌 인생이라 참, 다행이다. 때론, 인격적으로 무너지기도 하고, 때론,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소망이고 희망이고, 오늘 뭔가를 하겠다는 그리고 해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나의 때는 반드시 올 거란 믿음, 그 믿음을 지켜가고 있다. 다시 한 번 되뇌어본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당신의 때는 반드시 온다. 이 글을 보시는 당신에게도 그런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02. 삶은 내게 감당할 만한 정도의 고통만 줄 테니까.
나는 항상 허덕이며 살았던 것 같다. 돈이 언제 사라지고 내 생활에 지장이 올까봐,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돈은 어느 정도까지는 있어야지, 마음 졸이며 살지 않게 될까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자신이 여유를 가지지 않는 한, 늘 허덕이게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내 삶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중이고, 그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삶은 분명 내게 감당할 만한 정도의 고통만 줄 테니까.
매일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자신에게 다짐을 해 본다. 매일 글을 쓰겠다는 다짐. 어느 순간까지는 이게 지켜졌던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삶에 지쳐서, 또 앞날의 희망이 막막해서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써나가기로 결심했다. 매일 매일이 사색의 연속이 되었을 때, 내 삶도 지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테니까. 허덕이며 살던 시간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오늘을 관조하며 살아보기로 한다. 정말로 행복한 인생은 내 자신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이루어질 테니까.
오늘 나의 작은 결심이 큰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 글을 보는 당신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삶이란 정말 모르게 왔다가 모르게 가는 것일 테니까.
03. 무엇이든 항상 끝이 있기에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무엇이든 항상 끝이 있기에 시작할 수 있는 거 같다. 끝이 없다면 시작하는 것이 엄두가 안 나지 않을까.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의미없는 삶을 사는 건, 그 허황된 꿈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끝이 없이 헛발질을 하다가 결국 지쳐서 죽거나 나가 떨어지거나, 포기하거나다. 그런 인생은 허무하다.
무언가 끝이 있다는 것은 명확한 목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목표가 실현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끝이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사람도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지금 현재에 더욱 더 충실할 수 있는 것이고, 언젠가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고난을 인내하고 있다.
나의 지금 이 순간의 괴로움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루를 좀더 알차게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순간순간 괴로운 순간들도 있고, 즐거운 순간들도 있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열심히 살아간다.
언젠간 끝날 것을 아므로, 나는 지금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작해야지. 모두, 시작합시다. 끝을 보고 희망을 품고 그렇게 시작합시다. 나는 그렇게 끝의 희망을 보고 시작하기로 한다.
04. 돈을 벌기 위해 행복을 포기한다면, 과연 의미가 있는 삶일까?
요즘 나는 성공이란 뭘까.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에 푸욱 빠져 있다. 그래서 『골든룰』이라는 책도 봤는데, 결국 성공은 실천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다소는 뻔한 결론에 도달했다. 언제나 생각해왔던, 성공을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과연, 성공하기 위해서 "행복"이란 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과연 진정한 성공일까?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에 성공의 의미를 두고 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대부분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그런데 저 말. 성공은 다만 행복의 한 요소는 될 수 있다는 말. 뼈저리게 가슴에 사무치는 말이다. 성공은 행복의 한 요소일 뿐이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면,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행복의 한 요소인 물질적 풍요가 따라온다.
돈이 많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하루하루 돈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살 필요가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돈은 많은데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른다면? 돈은 많이 있는데, 이걸 어디다 써야 할 지 몰라, 그냥 이자만 마냥 불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그런 삶이 행복할 것인가. 또한, 그런 삶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보탬이 될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행복의 팁이 하나 생긴다. 그 돈을 현명하고 가치 있게 쓰기 위해선, 돈을 벌고자 계획했던 순간부터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먼저 세워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행복은 돈만 쌓아두는 삶은 아닐 것이다. 그 돈이 가치 있게 쓰일 때, 행복은 같이 따라온다. 이 행복을 위해 나는 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행복하기 위한 꿈을 꾼다.
05. 로망을 사랑하는 로망
문득, 나의 로망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신문을 보고, 글을 쓰다가, 책을 보고 가끔 산책을 하는 것. 그러다가 돈에 여유가 생기면 훌쩍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로망일까. 아니면, 그저 상상력에 의해 길러진 환상일 뿐일까.
그러고 보면, 나의 로망에는 누군가와의 만남은 없다. 만날 사람도 없지만, 만남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꼭 고립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름대로, 최소한의 인간관계는 하고 있으니까.
내가 꿈꾸는 로망이 손쉽게 생겨난다면 그 로망이 쉽게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붙잡기 위해 아등바등 최선을 다해 본다. 나의 로망은 언젠가 내가 쓴 글을 영어로 내가 직접 작문하는 것. 이게 나의 가장 큰 로망이다. 이루기 힘들 것 같아서, 로망이라 하고, 그 로망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키워간다.
무언가를 꿈꾸기 시작하자 나는 비로소 행복해졌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이 결코 괴로움으로 가득한 길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고민하는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고,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짜는 괴로움이 또 즐거움이 된다.
나의 조그만 방에서 생겨난 행복은 로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나의 미래를 더 큰 나로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 작은 로망부터 꿈꾸자구요. 그 로망을 향해 함께 나아가지요. 나는 이렇게 꿈꾸는 나를 비로소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나까지도. 내가 지금 이룩한 로망과 앞으로 이룰 로망들을 같이 사랑한다. 그 로망이 있기에 나는 오늘 더 행복할 수 있다.
06. 행복이 목표일 필요는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갑자기 내가 행복했던 그 전까지의 삶은 모두 거짓된 삶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들이 가끔씩은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럴 때, 그런 건 그저 기우일 뿐이라고 애써 외면하면서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 미래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걱정 같은 건, 아예 마음의 저편으로 묻어두고 잠가버린다. 그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떡 하니 나타난 한 문장. 행복을 추구하지 마라. 그렇지, 사람은 행복하다가도 순식간에 불행해질 수도 있지. 그걸, 실패한 인생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리겠지.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에 처절하게 공감이 간다. 그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누리다 보면 얻게 되는, 행복은 내게 주어지는 부가적인 몫이다. 그 부가적인 몫을 목표로 삼을 이유는 없다. 행복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다 보면,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해질 때도 있고, 그러다가 또다시 행복한 날이 오고, 그렇게 살다 보면, 인생이 의미 있게 느껴져서 더불어 나만의 "성공"이란 놈은 저절로 따라올 거다. 그리고 그 "성공"이 꼭 행복일 필요는 없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 그 삶을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그 "행복"이란 놈을 쫓지 않았는데도, 나 정말 행복했었다. 불행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조차 행복했었다 말하는 순간이 오겠지. 웃음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요즈음, 강박적으로 추구하던 "행복"이란 놈을 잠시 밀어내고 나의 삶에 "가치"를 부여해 보려고 한다. 그 가치가 어떤 식으로 빛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모르는 미래에 나의 삶을 투자해 본다. 말 그대로 "투자"다. 이익을 낼지, 손해를 볼지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걱정일랑 말고! 더운 건지, 추운 건지, 조금은 헷갈리는 요즘 날씨. 조금은 헷갈리는 투자에 나는 모험을 해 본다.
07.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불공평하다.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공평해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질 수도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질지도 모른다. 지금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더 많은 행복을 위해 살아갈 것이며, 지금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불행에 빠져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불·공·평·하·기·에
그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가진 것 없다고 해서 절망스럽지 않다. 어떻게?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 내가 세상을 평등하게 바꾸려는 억지는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길은 열린다.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갈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불만이 쌓이고 억지 주장을 하며, 해결하지 못 할 일들에 힘을 쏟게 된다.
불공평하다는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겐 너무도 많은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왔던 길에 불공평함, 내가 가는 길에 불공평함, 내가 갈 길에 불공평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나는 비로소 그 불공평함이라는 서운한 감정에서 벗어나,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똑바로 보고 갈 수 있다.
날씨도 불공평하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씨다. 이런 날씨가 계속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또한 그렇게 되면, 이런 날씨가 좋다는 것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 좋은 날을 위해, 오늘 불공평함을 받아들인다. 나의 삶에 불공평이 깃들더라도, 그건 온전히 나의 삶을 가꾸기 위한 길임을.
08. 속 없이 산다는 것
때론, 속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가 있다. 물론, 그 오해를 받는 사람이 나일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일 때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속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도, 견디고 견디다 결국 견디지 못해 속을 비우기로 선택한 거지. 속을 비우기로 한 결정은 너무도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끝에 이루어진 선택이다. 그 선택에 어떤 토를 달거나, 비난을 가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오겠지.
지하철에서 나오는데, 누군가 큰 소리로 전화를 하는 걸 본다. 뭔가를 따지는 듯한 목소리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소리로 무언가를 따지고 있을까. 그런 사람에게도 속없다고 따질 수는 없다. 뭔가 화나는 이유가 있겠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람에게도 속사정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사건에 대한 화가 아니라, 사실은 화가 나는 다른 사건이 원인이 되어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당한 사람은 또 얼마나 억울할까. 어쩄든 깊은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실 풀리지 않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풀리지 않을 때는 속을 비워 두는 선택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09. 포기할 수 없고 멈출 수 없고
가끔, 모든 걸 놓고 싶을 때가 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예전의 나를 떠올린다. 그럴 때, 나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과감하게 놓았다.
그 결과는...
수많은 비난과 자괴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의 도피. 무언가를 포기하는 삶이란, 그다지 유쾌한 것 같지는 않다. 때로 포기할 것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함을 느낀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것은 포기해도 좋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더위에 지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쳐서 때로는 나 자신이 욕망하는 것들에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이 말을 꺼내어본다. 실패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 멈추었을 때 끝난다는 말. 그러므로 나는 계속 도전해야 한다. 삶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이 놈의 책보기를
이 놈의 글쓰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절대로 멈출 수 없다. 가끔, 내가 쓰는 글들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를 생각할 때도 있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진실에서 멀어지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약속한, 이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놈의 진실과의 싸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멈추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나므로. 나의 삶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10. 물론, 나는 나의 인생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어떤 것을 열심히 했는데, 묘하게도 아무 만족도 느끼지 못하는 날. 그런 날은 왠지 그날 했던 일이 후회가 되곤 한다. 난,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말이다. 어떤 날은 그런 날도 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묘하게도 성취감이 돋는 날. 따져 보면, 별 의미 없는 것들을 한 날도 있다. 후회가 되는 날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늦게까지 잠을 못 잔다. 어떻게든 졸음을 쫓아버리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왠지 허송세월을 보낸 듯한 느낌이 든다. 성취감이 든 날은, 나름 만족감에 여유 있는 시간에 할 만한 것들을 한다. 평소에 안 읽었던, 조금 재미없는 책을 읽기도 하고, 평소에 안 보던 TV프로를 보기도 하고,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잠을 청해 보기도 한다. 가끔은, 인터넷 신문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물론, 나는 내가 인생을 걸어 온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유혹들 속에서, 무너질 뻔한 나를 다잡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힘에 의해 억지로 끌려 다니기도 하면서 그렇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어떤 분일까. 내 글을 보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그분들이 내 글을 보고 좋은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어떤, 특정한 다른 목적으로 이 글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의 앞길이 무너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길에 좋은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이 함께 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나의 앞길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할 거라 믿는다. 그분들은 행복할 것이며, 혹시 지금 행복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 믿는다. 나를 계속 가게 하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한 성취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을 걸어 온 이유, 지금 전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어쩌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11. 오늘도 치열한 행복을 살아간다
아무 인사도 없이 누군가가 날 떠난다면.
사실, 그런 경우는 살면서 참 많이 겪는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친구가 있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나서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기도 하다. 때로는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내가 될 때도 있다. 인사도 없이 누군가가 떠나는 이유는 많고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사람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없어도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존재. 물론,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 마음속에까지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처음 겪었을 때에는 참 많이 속상하기도 하다. 그래서 자존감도 많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나를 다시 다잡고, 더 나은 내가 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 사람이 떠난 것이 내가 못나서가 아니란 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당황스럽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은 언제든 다시 오게 마련이다. 그 “처음”을 현명하게까지는 모르지만, 잘 극복하였기에, 나의 지금은 별로 당황스럽지 않다.
때로는 불편한 어떤 사람과는 내가 먼저 연락을 끊기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람과 내가 안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과거에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도 없이 떠났듯이.
누군가가 떠나는 것, 누군가에게서 떠나는 것. 지금 그것을 불편해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잘 살아가는 방법이기에. 지금, 연락이 안 되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하는 것도 그 사람이 불편해할 것이기에 나는 일부러라도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기도 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아주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주변에 아주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로 나를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몇 사람만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윳돈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시간을 매일매일 보낼 수 있을 것이므로.
뭐, 내가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나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많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지 않아도, 돈이 많이 있지 않아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꿈이 있기 때문이겠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실컷, 마음껏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른다.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나는 많이 애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 애쓰는 시간이 오래 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행복한 죽음의 순간에, 나는 잘 살았다고, 나는 정말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를 위해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오늘도 치열한 행복을 살아간다.
12. 나의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요즘은 시민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줬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과연, 그것이 시민의식이 향상되어서 그런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오늘날에는 심리학 서적, 자기계발서, 에세이 등의 패턴이 과거와 달라졌다. 무조건 열심히, 무조건 착하게, 무조건 된다, 라는 강박적 의식을 가진 책들은 더 이상 오늘날의 트렌드가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힘들고, 별로 행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과거에는 자신의 생색내기 수단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생색내기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생색내기조차 "생명"의 소중함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생명을 그다지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있기에 오늘날에는 생명의 소중함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에 대해서 지배를 당하고만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 주저앉아 생명을 구제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배하고 그로 인해 오늘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더 나은 오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도 어떻게든 나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더 나은 미래를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도 있고, 웃음이 떠오르는 기억도 있지만, 그 과거들이 모여서 내일의 나를 만들어갈 발판을 만든다. 그러므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저 말. 어떤 과거든지, 나의 오늘로 승화시켜 나간다면 내일의 나는 창조된 삶,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 희망에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거웠던 순간들은 마음껏 회상하면서 오늘 또 하나의 정진을 이루어나간다. 슬픈 순간, 기쁜 순간,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내게로 오는 오늘. 더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13. 서로 다른 사람들
세상이 날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 외에 모든 사람은 옳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다르다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었다. 다른 사람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은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니, 사는 게 덜 힘들어졌다. 나만 옳은 게 아니라, 나도 옳지만, 다른 사람도 옳은 것이다. 나도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틀릴 수 있는 것이다. 모두는 다르기 때문에, 싸울 수도 있고, 화합할 수도 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삶의 작은 발견이 삶의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큰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그 성장은 나의 능력을 무한대로 키우도록 도와준다.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기에, 오늘 조금만 더 힘써서 그 차이를 인정하자. 인정하고 나면, 세상을 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길 위에서, 나는 오늘의 우연을 발견한다. 그 우연은 필연이 되어 나의 글들을 밝히곤 한다. 마치, 하루 먼저 일거리를 마치고 느긋하게 마지막 날 여유를 부리는 우리 사회 대부분의 직장인처럼.
내일, 조금 더 느긋하게 하루를 맞이하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보다 더 가벼워지기를. 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14. 놀라운 힘이 있는 책보기
시집을 읽다 보면, 가끔 아득한 기억이 떠올라서 한참동안 명상에 잠길 때가 있다. 그 명상들은 때로는 복받친 감정으로 내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이 진실이었든, 거짓이었든, 아련한 추억들은 나를 감정의 세계로 몰고 간다. 예전에 느꼈던 그 감정만큼, 치열하지는 않지만, 그 감정은 내게 새로운 활력소를 주고 새로운 영감을 떠오르게 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는 어떤 것들. 또,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기억했을 것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필요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철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도 필요에 따라서 잊어버리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하는, 필연적인 어떤 상황들 속에서 지금까지 내가 살 수 있었던 날들도 내가 "철새"였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철새"의 삶처럼 내가 머물 장소를 때에 따라 이동한 것은 아니지만, 삶의 곡절에서는 잦은 이동이 있었다. 그 이동이 때로는 낯설어서 적응하기 힘들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철새와 같은 삶처럼, 편안해졌다. 그 편안해진 삶 속에서 이제 나는 나에게 뭔가를 묻는 여유까지 생겼나 보다. 나, 앞으로 뭘 하고 살 건데? 그 물음에 나는 이제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내 인생을 꾸려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삶의 계획이 지난 반년여 사이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역시, 책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오늘을 또 살아낸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즐거운 소망이 가득한 날이 있다는 것이다.
15. 글을 쓸 수 있어 기쁘다
관심법을 발휘해 볼까. 당신의 생각, 내가 다 안다. 나의 글은 왜 다 저 따구야? 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렇다면, 나는 독선자? 결국엔, 누군가에 의해서 쫓겨나버리는 인생? 으아! 안돼!
누군가 자꾸 문틈으로 들여다보면서 이러고 있는 나를 한숨 쉬면서 쳐다 본다. 그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하고, 걱정의 한숨이기도 하다. 그렇게 걱정하고 안도하는 누군가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 거의 죽음이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는 나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 구원은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행복해하는 내가 되었다. 내 죽음을 막고 있는 누군가. 그렇다, 그 누군가 없이는 죽을 수도 없다.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이라도 한숨 쉬면서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기에 나는,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글을 쓸 수 있어서 기쁘다. 그런데, 난 대체 뭐가 기쁜 것일까? 도대체, 그 작가란 타이틀이 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게 바로 성취감이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작가의 꿈을 이루게 되어 나의 글을 보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왜 기분이 더 좋은 걸까. 함께 길을 가는 많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다 보면, 더 많은 분들과 함께 꿈들을 이루어갈 수 있지 않을까. 멀고 먼 길, 가는 길에 혼자가 아니란 사실, 그 사실이 더욱 기쁘다.
누군가 자꾸 문틈으로 들여다봐주길 원한다. 그 들여다보는 누군가에게 진심이 담겨있기도 바란다. 내 죽음을 막고 있는 누군가도 행복하길 바란다. 그 누군가는 내 행복을 빌어주리란 걸, 나도 안다. 더 행복하게, 더 아름답게, 더 나누면서 살아가자는 다짐, 오늘 한번 해 본다. 아름다운 세상 속에 신통한 다이어리란 녀석이 살고 있다.
16. 삶에 연습은 없다
언제였던가. 나 다시 태어나고 싶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그때는 분명, 이번 생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 생은 분명 존재할 거라, 그때는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라고, 더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 더 좋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삶을 부정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 이대로 죽으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거라고 이 따위 세상에서는 다시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란 것은 수십 번씩 바뀌는 순간순간의 어느 시점에, 나는 비로소 나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으며, 그 삶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을 거라는 나의 어리석었던 다짐과는 달리, 나는 지금도 소소한 글을 이렇게 쓰고 있으며, 그 소소한 글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행복하다.
한번 쓴 글은 다시는 소비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 거다. 누군가는 같은 글을 몇 번씩이고 다시 보고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 글과의 재회는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에 자꾸만 반복시청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반복시청에 나의 글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반복되는 하루는 없지만, 반복되는 일상이 나를 새롭게 하기에, 나는 존재한다. 나는 글만 달랑 남겨두고 사라지지만, 내 글은 여기에 남아 아름답게 남겨질 것이다. 남겨진 글들아, 사람의 마음에 속속들이 파고들어라,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삶에 연습은 없고, 삶에 훈련은 없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무대 위에서 상연 중이다. 이 무대가 조금 더 아름답고 흥미롭길 바란다. 누군가는 나의 본모습을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조차 나의 모습임을 알기에, 나는 무대 위에서 열심히 연기 중인삶을 살아간다.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 무대 위, 나는 누구보다 뛰어난 대배우가 되어 간다. 무대 위에서 같이 연기 중인 수많은 연기자들과 힘께, 무대를 보고 즐거워하는 관중들과 더불어!
17. 눈물겹지만 편안한 길을 걷는 신통한 다이어리다
어머니의 구수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잔소리꾼일 듯한 어머니가 투박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가을 저편에 있는 봄비. 가을에 오는 비가 봄비 같을까. 조금은 다른 느낌이긴 하다. 봄비는 조금 따스한 느낌이지만, 가을비는 조금 차가운 느낌이다. 그래도 봄이나 가을이나, 비가 오는 날은 조금 서늘하다. 그 서늘한 기운에 정신을 못 차릴 때도 있다. 집에 있는 날, 비가 오면, 마냥 신이 난다. 빗방울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낭만적인 느낌이랄까. 물론, 외출할 때 오는 비는 그리 반갑지 않다. 우산도 써야 하고, 차는 막히고, 길바닥은 젖어서 조심조심 걸어야 하고, 전철을 타러 들어갈 때면, 비에 젖은 우산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고. 그래서 게으름쟁이한테는 비가 오는 날, 집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게 정말로 신나는 일이다. 무엇을 해도 신이 난다. 무엇보다도 이런 날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신이 난다. 그 신나는 마음에 내 마음은 또한 들뜨기 시작한다.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그 순간의 분위기, 그 순간의 즐거움에 취해 하루를 만끽한다. 정말, 게으름쟁이 잘 자게 비가 오시는 날이다. 봄비도 그렇고, 가을비도 그렇다. 여름이나 겨울이 아닌 한, 비는 그렇게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한다. 저 너머에 있는, 눈물겹지만 편안한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신통한 다이어리다.
18. 단순 복잡한 삶
한때는 용돈이 부족해, 학교에서 먹어야 하는 식사를 사발면 하나로 때우던 때가 있었다. 어쩌다가, 돈이 좀 생겨나서 가끔 학교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때, 그때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밥을 매일 먹을 수는 없을까, 하며 고민을 해 봤지만, 그럴 방도는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저 중첩된 산더미 산더미 산더미를 혼자 타고 오르려면 괘나 먼 길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신앙은 아주 큰 힘이 된다. 이 세상이 아주 고맙고 예뻐 보인다.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주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준다. 한때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나를 더욱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까지 했지만, 신앙은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건져내었다.
아무것도 안 하다 가는 인생은 왠지 의미가 없을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 또 시에 대한 단상을 올려본다. 물론, 시에 대한 얘기인지, 나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인지는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런 단상을 올리는 재미도 쏠쏠하고,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있어 그 의미는 더해진다.
나 오늘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나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얘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부닥치지 않아도 되고, 조금 더 인생은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면 발전이란 게 없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나의 짧은 생각을 올린다. 내 짧은 생각이 누군가에게는 그 의미가 더해져서 삶에 대한 열정이 마구 불타오르기를 바라면서. 삶, 그것 참, 단순 복잡하다. 헐.
19. 욕하면서 감동받고 있구나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는 나를 본다. 책을 보면서, 뻔한 이야기인데도, 욕하면서 감동받는 나를 본다. 뻔하지만 감동받아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본다.
내 글도 그렇다. 어떤 이에게는 내 글이 명작이고 어떤 이에게는 쓰레기가 된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렇다. 어떤 이에게는 이 글이 쓰레기 이외의 것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쓰레기라 욕하면서도 감동받는 어떤 이들을 위해 글을 쓴다. 또한 뻔하다는 걸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자극받고 싶어, 또한 그냥 그렇고 그런 감동을 한번 느끼고 싶어 책을 보는 이를 위해서도 글을 쓴다.
누군가는 연명치료를 해 나가면서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가 닿기를 바란다. 지금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말도 소용없음을 안다.
그런 분들에게 내가 절망의 절정에서 들었던 말들이 너무나 큰 용기를 주어서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 절망에 처해 있는 분들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시절을 버티게 할 만한 힘은 나누고 싶다.
뻔하지만, 감동받는 글, 울면서 웃는 글, 그런 글을 지금 바로 그대에게 뿌리고 싶다. 인생의 막장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 모두, 울다가 울다가 울다가 지쳐서 웃는 삶이 되기를……
20. 나는 천국에서 마음껏 즐기고 있을 테니, 그대들은 이승에서 정성껏 즐기다 오게나
나의 마지막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문득,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얼굴일까, 떠오르는 걸 혐오하게 되는 얼굴일까> 궁금해진다. “차마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다”는 고백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엄청나게 현실적이어서 괴롭기까지 하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오래 잊지 말자는 말.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은 남아서 살 길을 도모해야 하니까, 너무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하면 안 될 거다.
가끔은,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때로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글을 쓰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서 어떻게 글에 집중할 수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은 적막은 내게 꽉 막힌 길을 선물해준다. 바로, 무념이라는…
그 무념의 시간은 내겐 휴식의 시간이지, 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은 아니다. 살아있는 걸 느낄 수 있는 소음과 혼란의 시간. 그 혼란의 시간들 속에 글은 써지고, 탄생한다. 나의 마지막에도, 마지막 글을 정돈된 소음과 함께 장식할 수 있을까.
무언가가 되려는 건, 쓰고 싶어 하는 나의 소망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지, 무언가가 되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매일 매일, 글을 써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다수. 나의 마지막 날도, 나의 마지막 얼굴도, 쓰는 행복 같은 얼굴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혼자서 가겠지만,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지. 마지막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울겠지만, 나는 웃으면서 가고 싶다고. 마지막 순간에 웃을 그날을 위해, 오늘도 또 써나간다. 나의 작은 소망을. 나의 묘비명엔 이렇게 써주오.
“나는 천국에서 마음껏 즐기고 있을 테니, 그대들은 이승에서 정성껏 즐기다 오게나.”
21. 내 미래는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난 잠시 한눈을 팔았다. 어쩌면, 글쓰기를 포기하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씀에 휘둘려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잠시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달부터 새로 하려는 공부 역시도, 내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글을 쓰는 길이 너무 막연해서, 미래가 불투명해서 잠시 안정된 삶을 꿈꾸었던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었던 듯하다. 안정된 삶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는 않을 거란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조금은 불안한 삶이더라도, 조금은 더 힘겨운 삶이 닥친다 할지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고 나는 글 쓰는 것을 놓지 않는다. 있었던 것이 있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으니까. 나는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그 과거의 자리는 사람은 안 바뀌어 있으나 색깔이 더 맑은 색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았으니까.
내 삶의 푸른 미래는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 있음을 깨달으며, 나는 오늘 나에게 작은 파문을 던져본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잊지 마라. 나의 글쓰기는 천직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나에게 암시를 걸어본다. 아… 이렇게 글쓰고 나니, 다시 살 것 같다! 숨을 쉬는 내가 행복하다!
22. 쓰러져 기댈 수 있는 막막함
때로는 절망이란 게 있어서 새로 기댈 곳을 찾게 된다. 나의 경우도 그러했다. 기댈 곳을 찾아야 했고, 결과는 교회를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퍽퍽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나는 그분께 충분히 기대면서 살고 있다. 그분은 내가 아무리 기대어도 뭐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막함이 있을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못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막막한 순간은 올 것이라는 것,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도 뜻대로 되지 않을 거고, 나의 꿈도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는 건,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또한 이 삶을 멈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꿈을 꾸기 때문이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절벽 같은 거 그딴 거 없어도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평평하게만 가면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살게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평하게만 갈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쯤, 잘 알고 있다. 아무런 어려움 없어 보여도 누구에게나 굴곡진 삶은 있게 마련이며, 그래서 인생이란 알 수 없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절벽, 그 절벽에서 쓰러져서 막막함이 느껴진다면, 그때가 바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기라는 것. 그 흔하고 진부한 말이 진리라는 것쯤은 기억하자. 그 절벽이 떨어져야만 하는 절벽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로막고 서서 오히려 기댈 수 있는 절벽이라는 사실. 그 하나만 기억한다면, 나도, 우리도 그 절벽을 기어오를 준비를 할 수가 있을 게다. 막막함 하나만으로 쉬어갈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러므로 나도 오늘 어느 막막한 공간에서 절벽에 기대어 볼란다. 잠시, 쉬었다 가 보련다. 그러다 보면 길이 다시 보일 테니까. 쓰러져 기댈 수 있는 막막함이 오히려 멋지게 보일 테니까.
23. 가슴 한편에 흐르는 푸르른 눈물
가슴 한편에 흐르는 푸르른 눈물, 그 눈물을 삼키며 소년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주길, 누군가 다가와 줘서 그 눈물을 닦아주길. 그러나 소년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소년은 아무도 오지 않는 이 쓸쓸함을 뒤로 하고, 가슴 속에 증오를 키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자라난 증오는 그의 인생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결국 그 사람을 마음 속에서 죽였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기어코 입히고는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은 사람. 그 증오는 소년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그 사람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자살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슴 속의 증오가 병이 되어 암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소년은 매일 스트레스로 시달리다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은 병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소년의 죽음은 그 사람에게 큰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소년을 가슴 속에 묻었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그 사람은 소년에게 아픔을 준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 그리 아픈 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죽어서 아픔을 주는 방식으로 복수를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평안을 안기지 못한 이 죽음. 머나먼 그곳에서는 평안해지기를. 남모르게 외쳐대던 이 은은한 아픔이 누군가의 아픔이 되지를 않기를. 그 아픔이 아픔이 되고 눈물이 되지 않기를. 오늘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저에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할 수 있게 하시고, 제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 또한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24. 마음의 눈이 없는 사람은 될 수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내일은 오늘보다 너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은 날로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미래의 내가 쓰게 될 글들은 세상에서 널리 읽힐 만큼 좋은 글이 될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글을 쓰기 위해 나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겉모습에 드러난 인상들은 저마다 제각각이어서 실제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진심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 역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 어떠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내 글이 오만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내 글이 자만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내 글을 중언부언하는 글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그러면서도 나의 개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내면의 준비를 끊임없이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정말로 내가 작가가 된다면, 그때에 나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가난한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
처음에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지만, 이젠 정말 구체적으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보다는 내가 작가가 되었을 때의 나의 생활이 어떠할까를 자꾸만 생각해보게 된다. 글 쓰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기에, 작가가 되는 꿈도 포기할 수는 없다. 내면의 힘이 나를 이끌어 주겠지. 그런 마음으로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나의 인생을 만나고 싶고, 그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 꿈이 어디에서 멈출지, 또 꿈을 계속 꾸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가 되는 그 순간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행복하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책에서 보게 되는 많은 것들에 공감하며 기뻐하고, 또 새롭게 알게 되는 인생이란 철학에 감동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나의 인생을 만나러 간다. 그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내가 숨 쉬면서, 아주 경박하지만 행복한 웃음을 깔깔대고 있다. 마음의 눈이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지 하면서. 마음의 귀가 없는 사람은 안 될 거야, 하면서.
25. 희생 같은 거 서로 하지 말자
가끔,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한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나를 위한 게 아니고."
그 말의 이면에는 너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을 언뜻 보면, 많은 희생을 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란 말 자체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희생한다면, 나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하고 있다는 그런 말을 듣는다면 마음속에서는 정말로 많은 부담이 되어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 오히려 거리를 두게 된다.
나를 위한 삶이란, 나 때문에 누군가를 희생하는 삶도 아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삶도 아니다. 그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선다는 것. 그것은 결코 자신을 희생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식을 위한 희생.
부모를 위한 희생.
친구를 위한 희생.
사실, 따지고 보면 "희생"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 자신을 다치게 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말자.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 때, 내 주위의 사람도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다.
"너때문에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그 말의 결과는 서로에 대한 원망이다. 희생적 원망을 받은 사람은 고맙다기보다 오히려 부담스럽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기만 한다. 껄끄러워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희생당사자는 분노를 토해낸다. 그렇게 관계는 멀어져간다.
멀어져가는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거짓 희생은 하지 말자. 싫은 건 싫은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26. 불행한 사람들에게
내가 "엄마"가 아니라서 그런지, 요즘의 사교육 열풍이 얼마나 거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의 사교육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아마도, 더 이상 "주입식 교육"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기계적으로 주는 것만 받아먹는 교육으로는 미래에서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창의력 있는 사람이 살아남을 테니, 지금은 다각도에서 사교육을 하는 듯하다. 내가 학습지교사를 하던 시절, 초등학생 교과서가 사고력을 요하는 교과서로 바뀌는 걸 보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생에게 너무 많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지만, 초등학생 때 다양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어서 사고하는 건 조금 버거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발표력도 토론하는 능력도, 누군가를 설득하는 능력도 뛰어난 사고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작가가 되려는 게 출세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내가 유명해지고 그래서 책을 많이 팔고 돈을 많이 벌고, 그리고 호화생활을 누리고....! 그런 것들을 꿈꾼다면, 나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쓰려는 진짜 이유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답은 간단하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어,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불행을 느끼는 소년 또는 소녀, 성인들에게.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물론, 그분들이 이 글을 볼 가능성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음이라도 전할 수 있게 써 보는 것이다. 내가 작가가 되려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다. 마음의 금이 있는 어떤 이들에겐 무슨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느낌을, 진심을 담아 말없이 전달할 수밖에. 그 마음의 금이 모난 금이 아니라,보드라운 풀로 착 붙을 수 있게. 그분들의 마음을 위해 글을 쓴다. 언젠가 그분들의 마음에 나의 희망찬 글이 걸어 들어갈 수 있기를 오늘도 바라면서.
27. 질투의 저울이 크게 휘청대는 쪽에 내 인생을 걸어봐도
질투를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나도 그렇고. 이 책을 읽다가 질투에 관한 반가운 문장을 만났다. "나는 무엇을 이룬 사람에게서 더 질투를 느낄 것 같은가?"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 질투의 대상도 많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먼 사람에게까지. 사실, 이 글을 읽고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관심없는 분야에서 잘 되는 사람을 질투해 본 적은 없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잘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분야에서 잘 되는 사람들에게서 질투를 느끼곤 하지. 그러니까 질투란, 그것이 치기어린 이기적인 욕망 같은 것이 되지만 않는다면, 나를 아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건설적이고 현명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나, 질투 많이 한다. 그런데, 그걸 잘 표현하지는 않는다. 표현하지 않아도 질투의 대상이 될 것임을 아시는 분들이라 생각하기에 애써 표현할 이유를 못 느낀다. 뭐, 나도 가끔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 결국은 셈셈인 셈이다. 나의 글도 질투의 감정으로 인해 더욱 더 발전된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웃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어느 순간에 만족스런 글로 바뀐다. 만족스럽지 않은 글 때문에, 또 다른 글을 쓰게 되고, 만족할 때까지 글을 계속 쓰게 된다. 질투의 힘이다. 질투가 예전엔 나쁜 감정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질투가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현명한 질투의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해 왔다. 질투의 저울이 크게 휘청대는 쪽에, 내 인생을 걸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28. 진짜 선물
예전에 비해, 요즈음은 정성이 들어간 선물은 찾기 힘들다. 시대가 바뀌어서, 요새는 정성이 들어간 선물보다는 실용성이 우선이다. 아무리 정성이 들어간 선물이라도 내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그다지 기쁘지 않다. 그래서 돈을 선물로 받았을 때 제일 좋아한다.
소중한 사람이 특별한 뜻을 담아 선물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큰 감동은 없다. 물론, 선물한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그 외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정성스러운 선물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진 않는다. 지금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도 해도, 관계는 변하기 마련이어서, 당장 실용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오히려 나에 대한 상대의 마음에 대해 그 진정성을 의심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것이 현 세대의 문제점이면서,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꼭 필요한 것만 사야 하는, 어려운 사람이 많은 시대. 일부 부유한 층을 제외한다면, 웬만해서는 사치를 하지 않는 시대. 사치가 미덕일 수는 없지만, 더 나아가 사치가 악덕이기까지 한 시대. 정성 가득한 선물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 사치에서 멀어져간, 정말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는 현실적인, 그래서 상대를 정말 배려해주는 선물이 아닐까.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해, 그래서 이렇게 정성스럽게 선물을 만들고 있어, 하고 보여주려는 마음보다는, 나 너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고 은근하게 배려해주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선물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의 선물이라면 조금 사치라 생각되더라도, 기꺼이 받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을까.
조금은 여유롭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천천히 정성스럽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선물. 그 선물을 갖고 싶은 마음, 그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문장을 전송한다.
29. 적당한 배려의 거리
때로는 아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의도치 않은 사소한 일 또는 사소한 말 문에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 의심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그 관계가 깊지 않아서, 진심으로 대하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너무나 가까워서 더 이상 서로를 배려하지 않다 보면, 사소한 한 마디에 속이 상하게 된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필요한 걸 거다. 누군가를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나의 조언이 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될 때, 서로 간에 균열은 시작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단점은 쉽게 보이게 마련이고, 그 단점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단점을 고치려 든다. 때로는 너무 가깝기에 이런 말은 해도 괜찮을 거야, 하며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 버리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서로간의 앙금은 점차 쌓이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어도, 이 사람에게만은 반드시 사랑받아야겠다는 마음이 싹트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그곳을 건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거리를 둔다는 것은 나를 지키면서 상대를 존중해주는 적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간에 진정으로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스런 거리. 그 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통해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내자.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안 해도 되는 거리. 그래서 무엇이든 한다면 의미가 되고, 사람의 마음이 죄가 되지 않는 거리. 그 거리에서 나도 있을 거다.
30. 여백의 아름다움
세상을 오로지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생각하려는 사람들의 단점은 여백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글의 행과 행 사이에는 드러난 사실보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더 많다는 걸 잘 모른다. 그 여백을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심은 보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아주 오래된 만남보다도 단 한 번의 만남이 더 진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더 이상 이성에 의지해서만 물건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 반드시, 감성에 호소해야만 물건도 팔리는 시대다.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평가하게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한번 생각해 본다. 어떤 그림들의 얼굴과 표정이 모두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두려움을 반영한 그림이기 때문이 아닐까. 감성이 없는 얼굴. 왕을 위해 어처구니없는 희생만을 강요받았던 시절. 이성적인 판단이 냉정하게 요구받던 시절. 그 시대에 감성은 결코 오늘날처럼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어떤 경우에는 마치 "왕"을 연호하듯 맹렬한 충성을 바치는 비합리적인 이성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단체도 있지만, 그들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합리적인 감성시대이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5천원, 6천원 무제한 반찬과 밥을 제공해주는 식당들이 오늘날은 즐비하다. 그리고 거기서 밥을 먹을 때는 누구는 많이 먹고, 누구는 적게 먹는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내가 적게 먹어서 손해 볼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다른 식당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너무 많이 먹는다고 자신이 먹을 밥과 비교하지 않는다. 5천원, 6천원을 주고 이만큼 먹으면 되었다고 나만 배부르면 된다고, 그렇게 심리적으로 평준화된 사회가 무제한 식당이다. 이성적인 사고라면 이것처럼 불합리한 시스템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많게 먹든 적게 먹든, 똑같은 돈을 내고 먹으니 말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감성이 등장한다. 이성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법한 밥이, 합리적인 감성에 의해 이 5천원, 6천원짜리 밥은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게 되며, 내가 먹는 것에 충분한 만족을 준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무제한 밥상이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왕을 연호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마악 당선되면, 당장 눈에는 환호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저마다의 셈법은 따로 있다. 왕이 왕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반역의 씨를 키우게 되듯이, 대통령도 대통령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탄핵의 씨를 뿌리게 된다. 그리고 이 씨는 대통령 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 어느 기관, 어느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합리적인 감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리더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백의 아름다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너무 빡빡하게,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오로지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만 상대를움직이려 한다면, 이미 여백의 아름다움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 생각만 해도 너무 갑갑하지 않은가. 가을이 가고 있는 길목, 조금은 여백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 글과 글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는 여백을 마음껏 누리는 내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조금 여유로운 나로 돌아간다. 그때는 심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별것 아닌 것들이 많다. 합리적인 감성의 힘이다. 여백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나를 기쁘게 한다.
후기
<그대를 내게> 에세이를 보아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가 그대를 내게 가까이 하는 그래서 사랑도 이루어지고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오게 되기를 마음으로 빕니다.
앞으로의 길이 그대의 길이 되고 그대의 길을 갈 때
가끔은 돌보아 주는 그런 사람도 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기를 바라며, <그대를 내게> 에세이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사랑이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