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
신 언 필
화려한 의상의 여가수가 TV 화면에 등장했다. 한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현란하게 돌며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외친다. 그 모습이 흡사 군중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어느 철학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모르 파티’, 내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릴 적 아버지의 밥은 언제나 고봉밥이었다. 비록 고구마나 무, 콩나물, 시래기 등이 들어 있는 잡곡밥일지라도 커다란 사기그릇에 수북하게 담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일꾼이 일을 하려면 배가 든든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마 중학교 때 쯤으로 기억된다. 봄에 초목들이 새잎을 피워 녹음이 짙어지기 전, 아버지는 매우 분주하셨다. 줄기가 단단해지기 전에 농사에 쓸 퇴비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화학비료는 ‘금비(金肥)’라고 해서 귀하고 값이 비쌌다. 그래서 연한 나뭇잎과 줄기를 베어다가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가축 배설물 등을 섞어 썩혀서 퇴비를 만든 후 농작물의 밑거름으로 활용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풀을 베러 산에 갔다가 어둑해지도록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걱정이 되어 어머니를 따라 마중을 나갔다. 작은 집채만 한 풀 짐을 지게에 지고 고샅길을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오시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인 양 무거워 보였다. 또래에 비해 힘이 센 편이었던 나는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내가 지게를 지고 갈게요.”
“……”
대답 대신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마지못해 내게 넘겨주셨다.
지게에 얹힌 생풀 더미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역시 몇 걸음도 못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술 취한 사람처럼 다리는 후들거리고, 가슴이 꽉 조여 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왜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밥을 항상 고봉으로 담으셨는지. 그리고 왜 일꾼은 밥심으로 산다고 하셨는지를.
청소년기를 거치며 사람은 밥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밥은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있어도, 사춘기 시골 소년의 가슴속 공허함을 채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님께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집안 형편은 나를 또 다른 삶의 방식에 눈뜨게 했고,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 물결을 따라 새로 뚫리는 신작로는 그 끝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을 부채질했다.
여기에서 ‘꿈’이라는 새로운 양식(糧食)을 발견했다. 그것은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부모님께 호강을 시켜드리는 것. 그러기 위해 도회지로 나가 좋은 학교를 나오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그것은 6,70년대를 관통하는, 시골 젊은이들의 공통된 꿈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삶의 중심을 잡고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또 다른 밥심이 되어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 꿈꾸는 편이 낫다고 했다던가.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마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내디딘 사회생활은 그야말로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2등은 의미가 없었다. 여기에서 새로운 마음의 양식을 발견했다. 그것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였다. 호승심이 강했던 나는 어리석게도 모든 경쟁에서 남보다 우위에 서려고 분투했다. 그 덕분에 영광의 순간도 맛보았지만, 부단히 노력해도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후회하며 내 자신을 탓하곤 했다. 운 좋게 그 목표를 달성하여 명예를 얻었다 할지라도 기쁨은 잠깐이었다. 마약과 같아 곧 더 큰 명예를 갈망하게 되고 마침내 내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린 후에야 멈추었다.
이제 한때 삶의 중심이자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던 꿈과 명예에 대한 욕망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앞으로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누군가는 “젊어서는 명예에 살고 나이 들어서는 추억에 산다.”고 했다. 하나 지난날을 돌아보면 즐거웠던 추억보다는 아픈 기억이 먼저 떠오르고, 그 아픈 기억들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은 시지포스의 형벌처럼 끊임없는 고통을 줄 따름이다.
밥심은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의 원동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생의 늦가을에 들어선 내 삶의 진정한 밥심은 운명애(運命愛), ‘아모르 파티’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싫든 좋든 오늘의 나는 어제 내가 한 선택의 결과이다. 후회는 어리석음에 또 다른 어리석음을 더하는 것일 뿐이다. 개나리나 진달래는 추운 겨울을 거쳐야만 춘화(春化) 현상이 나타나고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렇듯 지난날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시련과 고통은 앞으로 다가올 생에 있어서 축복의 꽃을 피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 평생 지게를 벗지 못하신 채 오래 전에 레테의 강을 건너셨다. 하지만, 주어진 길을 담담히 걸으며 산전(山田)을 일구어 여덟 송이의 새로운 꽃을 피우셨다. 이제 내가 ‘아모르 파티’를 불러야 할 때이다. 비록 어릴 적 나의 꿈은 아직 미완으로 남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아왔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그리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된다.’고. ‘인생은 지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