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떤 것이 은밀한 善이고 드러난 선(陰陽)인가?
무릇 선을 행하여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은 드러난 선(陽善:陽德)이고, 선을 행해도 남들이 모르는 것은 은밀할 선(陰德:陰善)이다. 은밀한 선행(陰德)은 하늘이 보답해 주고, 드러난 선행(陽善)은 세상의 명예를 누린다. 이름(名) 또한 일종의 복(福)이다.
그러나 이름(名)이라는 것은 조물주(造物:하느님)도 꺼려 한다. 세상에서 성대한 명예를 누리면서도 그 실질(實)이 이름(名)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는, 기괴망칙한 재난이 상당히 많이 생긴다.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도 없이 갑자기 악명(惡名)을 뒤집어 쓰는 경우에는, 그 보상(補償)으로 자손들이 순식간에 번성하는 일도 왕왕 있다. 이처럼 음양 사이의 이치는 지극히 미묘한 것이다.
4. 어떤 것이 옳은 선과 그른 선(是非)인가?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의 법에는, 노나라 사람들이 만약에 다른 나라 제후(諸侯)에게 예속된 자기 나라 사람(신하 또는 첩)을 속죄(贖罪)시켜 구해내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했다.
그런데 자공(子貢:위나라 사람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부자였음)이 남을 대신 贖罪(속죄:지은 罪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시켜 주고 노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지 않았다. 공자(孔子)가 이 소식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탄식했다. “아! 賜(사:子貢의 이름)가 실수했구나! 무릇 성인이 일을 행함에는, 그 일로 세상의 풍속과 습관을 바꿀 수가 있다. 그러기에 가르침의 道가 백성들에게 시행될 수 있으며, 단지 자기한테 맞는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노나라에는 부자가 적고 빈곤한 자가 많은데, 관아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는 일이 청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속죄시켜 주기를 기대하겠느냐? 아마도 앞으로 다시는 남을 다른 나라 제후로부터 속죄시켜 주는 사람이 없을까 두렵다.”
敷衍(부연):노나라 사람이 타국에 끌려가거나 구금되어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놓일 경우, 그들을 안타깝겨 여겨 금전을 납부하고 구원한 후 노나라 정부에 그 금액을 요청하면 장려금을 주는 제도였다. 이것은 당시로는 노나라 백성을 민생고에서 구제하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로(子路)가 물에 빠진사람을 건져 줬는데, 그 사람이 소(牛)를 사례로 주자, 자로가 이를 기꺼이 받았다. 그래서 공자가 기뻐하며 자로를 칭찬했다. “지금부터 노나라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일이 굉장히 많겠구나.”
위의 사례를 세속 사람의 눈으로 보면, 자공이 보상금을 받지 않은 처사가 훌륭하고, 자로가 소를 받은 일은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자로를 칭찬하고 자공을 폄하했다.
그래서 성현은 사람의 선행을 논할 때, 현재 눈 앞에서 행해지는 것만을 따지지 않고, 그 후에 그로부터 말미암아 생길 영향을 고려한다. 또 잠시 일순간을 따지지 않고, 긴 안목을 가지고 살핀다. 다시 말해서 성현은 자기 일신의 청렴을 따지지 않고, 천하 만민과 함께 하는 대승적인 경지(兼善天下)를 염두에 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 행하는 것이 비록 선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이 족히 사람을 해칠 만하면, 설령 선처럼 보인다고 해도 실제로는 선이 아닌 것이다. 반면 현재 행하는 것이 비록 선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을 파급 효과가 능히 남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설사 선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선이 된다. 그밖에도 겉보기는 예절이 아닌 예절, 신의가 아닌 신의, 자비가 아닌 자비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도 모두 위의 사례를 참고하여 옳고 그른지를 잘 가려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敷衍說明(부연설명): 현재 행한 일이 비록 善하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결코 善이 아니다. 만약 현재 행한 일이 비록 善하지 않을지라도 그 영향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善에 해당한다. 이것은 위의 사례를 부연 설명한 것이나, 다른 여타 문제도 이에 준하여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런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것 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고 향후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서 자세히 분별하여 판단해야 할 것이다.
5. 어떤 것이 치우친 선이고 올바른 선(偏正)인가?
명나라 재상 여문의공(呂文懿公)이 재상 자리를 막 사임하고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갔을 때,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마치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처럼 우러렀다. 한번은 어떤 동네 사람이 술에 취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는데, 여공(呂公)은 거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인에게 “술에 취한 사람과는 더불어 따질 필요가 없다.”그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 고 분부한 뒤, 문을 닫고 아예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서 그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가자 여공이 비로소 후회하며 탄식했다.
만약 당시에 내가 그와 조금만 시비를 따지고, 그를 관가에 보내 따끔하게 다스리도록 했더라면, 작은 징계로 말미암아 큰 경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때에 후덕함만 마음에 두어, 그의 죄악이 커질 줄은 전혀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이처럼 사형당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敷衍說明(부연설명): 작은 행실을 키워 대죄인을 만든 결과가 되었다. 최초의 무례한 행위를 보고 적절한 조처를 했음이 마땅했는데, 스스로 후덕하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 시기를 놓침으로써 큰 죄악을 짓게 만든 꼴이 되었다.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다. 즉 미리 조치를 했으면, 적은 힘으로도 충분한데, 쓸데없이 많은 힘을 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일상 생활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 악한 마음을 품었어도 선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큰 부자가 어느 해 흉년을 만나, 가난한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저잣거리에서 곡식을 강도질 했다. 이에 부자가 현(縣)에 고발했는데, 관청에서는 이 사건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기세가 더욱 방자해졌다. 마침내 부자는 스스로 자력(自力)을 동원해 양식을 약탈하는 이들을 붙잡아 수치심과 모욕을 주고 고문을 하는 등 혼내 주었다. 이에 대중들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물론 착한 일이 올바른 것이고, 악한 일이 편협한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 다 안다. 그러나 선한 마음(동기)으로 악한 행위(결과)를 한 경우는 올바른 가운데 치우침이 있는 것(正中偏)이고, 악한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한 경우에는 편협함 가운데 올바름(偏中正)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까지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