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내부구조다. 답은 내부에 있다. 안을 봐야 하는데 인간은 밖을 본다. 관측자가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눈으로 본다면 자연히 외부를 보게 된다. 존재는 안과 밖이 있다. 안은 구조가 있고 밖은 단위가 있다. 인간은 언제나 밖의 단위를 본다. 안에서 결정된 것이 밖으로 전달된다. 내부의 결정자를 보지 못하고 외부의 전달자를 보는 것이 모든 오류의 원인이 된다.
과학은 안을 보는 것이다. 과학자는 물질을 쪼개서 내부를 보지만 역시 밖을 보게 된다. 안을 본 사람은 없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부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안이 있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신의 신은 누구냐 하는 질문과 같다. 멈추는 지점을 찾지 못하므로 포기하게 된다. 사물을 쪼개면 멈추지 않아서 곤란하지만 사건을 쪼개면 0차원에서 복제가 멈추고 해결된다.
헤겔의 정반합.. 정과 반의 대칭이 합의 닫힌계 내부를 구성한다.
석가의 연기법.. 세상은 내부에서 서로 의존하며 맞물려 돌아간다.
대승불교의 공즉시색.. 공은 알 수 없는 안이고 색은 눈에 보이는 밖이다.
노자의 이유극강.. 내부의 에너지는 무르고 외부에 드러난 형태는 단단하다.
플라톤의 이데아.. 내부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무언가를 직관적으로 느낀 것이다.
갈릴레이의 관성.. 외부에서 건드리면 내부의 관성이 저항한다. 내부에 무언가 있다.
과학의 에너지..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내부다.
안의 문제를 생각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문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안을 살피지는 못했다. 헤겔의 정반합은 방향이 틀렸다. 정과 반으로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합이 정과 반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갈등은 있었다. 전쟁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갈등을 드러냈을 뿐이다. 정과 반은 원래부터 합 속에 대칭되어 붙잡혀진 존재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석가의 연기법은 나름 구조적이지만 외부의 관계에서 내부의 구조로 도약하지 못했다. 정과 반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정과 반을 통일하는 닫힌계 개념이 있어야 존재의 내부로 쳐들어갈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제자리를 맴돌며 순환의 오류를 저지른다. 자연의 존재는 언제나 공에서 색으로 화살을 보낸다. 색에서 공으로 거슬러 가는 것은 인간의 인식에 비친 그림자다.
노자의 이유극강에서 유는 안이고 강은 밖이다. 안이 밖을 이긴다. 내부 결정자가 외부 전달자를 이긴다. 더 나아가야 한다. 근원에 는 유가 있을 뿐 강은 없다. 강은 유의 결어긋남이 만든 패턴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먼 곳에서 찾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입구를 찾지 못하고 밖에서 겉돈다. 서구정신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적당히 해먹고 버렸다.
갈릴레이는 안을 봤지만 능동적으로 살펴본 것이 아니라 천동설의 공격을 방어하며 얼떨결에 한 마디를 던졌기 때문에 뉴턴이 해설해줘야 했다. 뉴턴은 관성이 존재의 내부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에너지라는 말을 쓴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는 뜻인데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에너지는 잘 모르는 내부를 얼버무릴 때 쓰는 말이 되었다. 둘러대는 말이다.
밖은 눈으로 보면 되지만 안은 볼 수 없다. 안에는 압력이 걸려 있다. 껍질을 까면 압력은 사라진다. 과학이 사물을 쪼개서 본다. 쪼개면 압력이 사라진다. 과학은 산 것을 죽여서 보고, 움직이는 것을 세워서 보고, 연결된 것을 단절시켜 본다. 사건의 전모를 보지 못한다. 닫힌계를 열린계로 바꾸면 내부 자체 질서가 사라진다. 내부을 보는 방법은 사물의 쪼개기가 아니라 사건의 복제다.
내부에는 압력이 있다. 자체 질서가 있고 방향과 순서가 있다. 대칭과 축이 있고 방향전환이 있다. 엔진이 있고 동력이 있다. 자발성이 있고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메커니즘이 있고 한 줄에 꿰어져 있다. 구조가 밖으로 나온 것이 관계다. 관계와 구조는 동전의 양면이다. 앞에서 유혹하면 관계다. 뒤에서 등을 떠밀면 구조다. 관계는 우연이고 구조는 필연이다. 우리는 필연을 통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