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峡を越えて】埋もれた日韓歌謡史 第2部
“해협을 넘어서” 묻혔던 한일가요사 제2부
(1)見つかった服部良一「朝鮮楽譜」
발견된 핫도리 료이치의 “조선악보”
平成5年秋、作曲家の服部克久は韓国大田にいた。「大田国際博覧会」に音楽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招かれ、韓国のオーケストラと競演して日本のポップス音楽を披露していた。
1093년 가을 작곡가 핫도리 카쓰히사는 한국 대전에 있었다. “대전국제박람회”에 음악프로듀서로 초청되어 한국의 오케스트라와 경연해서 일본의 팝음악을 피로하고 있었다.
会期中、年配の韓国人数人から話しかけられた。「お父さまにはいろいろな意味でおつきあいいただきました」。戦前、戦中に“外地”で活躍した大衆歌謡の関係者たちだった。
회기 중 나이든 한국인 수명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 부친과 여러 면에서 교제한 바가 있었지요” 전전과 전시에 “외지”에서 활약한 대중가요 관계자들이었다.
「お父さま」とは和製ポップスの創始者で作曲家の服部良一のことである。「おつきあい?」。克久は何のことかわからなかった。「意外でした。父が戦前の朝鮮 半島の音楽家たちと交流があったとは知らなかった」
“부친”이란 일본 팝의 창시자로 작곡가인 핫도리 료이치를 말한다. “교제?” 카츠쓰사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의외였어요. 부친이 전전 한반도의 음악가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어요”
服部良一はその年の1月に85歳で亡くなっており、克久は本人に確認する機会をすでに逸していた。この話はそれ以後、気に留めることもなく、国際博覧会の出来事もほとんど忘れかけていた。
핫도리 료이치는 그 해 1월에 85세로 사망했고 카츠히사는 본인으로부터 그 사실을 확인할 기회를 놓쳤다. 그 대화는 그 이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국제박람회에서 경연했던 일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ところが先月、克久は父の遺品を整理していて思わぬものを見つける。良一が戦前と戦中、朝鮮半島の大衆歌謡を編曲した約30曲の楽譜だった。
그런데 지난 달에 카쓰히사는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료이치가 전전과 전시에 한반도의 대중가요를 편곡한 약30곡의 악보였다.
明治40(1907)年に大阪市で生まれた服部良一は16歳のとき、道頓堀のうなぎ料亭「出雲屋」が作った出雲屋少年音楽隊に入り、サックスを担当。
1907년 오사카시에서 태어난 핫토리 료이치는 16살 때에 도톤보리의 장어요리점 “이즈모야”가 만든 이즈모소년음악대에 들어가서 색소폰을 담당했다.
3年後にはNHK大阪放送局で放送音楽を担当する大阪フィルハーモニック・オーケストラに入団した。ここで指揮者だったエマヌエル・メッテルに約4年間、音楽理論や作曲、指揮の指導を受けた。
3년 뒤에는 NHK오사카방속국에서 방송음악을 담당하는 오사카 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거기서 지휘자였던 엠마뉴엘 멧틀에게 약 4년간 음악이론과 작곡, 지휘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昭和8年に上京し、ニットーレコードを経て11年に日本コロムビアの専属作曲家になる。翌年には「別れのブルース」(歌・淡谷のり子)が大ヒットし、その後、ブルースやジャズ、タンゴ調の和製ポップスを数多く手がけたが、コロムビアの専属になったころにはすでに朝鮮半島の大衆歌謡の作曲者から編曲を頼まれ、これを手がけていた。
1933년에 상경, 닛도레코드를 거쳐서 1936에 일본컬럼비아의 전속작곡가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와카레노 블루스”(노래: 아와야 노리코)가 크게 히트하여 그 후 블루스나 재즈, 탱고조의 일본 팝에 수 많게 손을 대고 있었지만 컬럼비아의 전속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한반도의 대중가요 작곡자부터 편곡 의뢰를 받아서 거기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自身の作曲では「別れのブルース」や「いとしあの星」(歌・渡辺はま子)などの歌詞が翻訳され、現地で発売されている。
자신의 작곡으로는 “와카레노 블루스”나 “이토시 아노호시”(노래: 와타나베 하마코) 등 가사가 번역되어 현지에서 판매되었다.
国立民族学博物館(大阪府吹田市)がまとめた「日本コロムビア外地録音ディスコグラフィー」(朝鮮編)によると、服部が朝鮮向けにアレンジした楽曲は約50曲。これは同時代に活躍した古関裕而らに比べても圧倒的に多い。
국립민족학박물관(오사카부 수이타 시)이 정리한 “일본컬럼비아 외지녹음 디스코그래피(조선편)에 의하면 핫도리가 한국 대상으로 편곡한 악곡이 약50곡. 이것은 같은 시대에 활약한 고세키 유지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西洋の音楽を朝鮮半島の人たちに伝えるのは自分の仕事だと自負していたのでしょう」。克久は古い楽譜に目を落としながら、そう語った。
“서양음악을 한반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라고 자부하고 계셨던 거겠지요” 카쓰히사는 오랜 악보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2) 作曲家と編曲者、友情が結んだヒット曲
작곡가와 편곡자가 맺은 우정의 히트곡
日本コロムビアの専属作曲家だった服部良一が初めて編曲を手がけた朝鮮半島の大衆歌謡は、昭和12(1937)年6月に発売された「踊る乙女」(作曲・全基 玹だった。当時30歳。
일본컬럼비아 전속작곡가였던 핫도리 료이치가 처음으로 편곡에 손을 댄 한반도의 대중가요는 1937년6월에 판매한 “오도루 오토메”(작곡: 전기현)였다 당시 30세.
その後、18年10月までに約50曲の朝鮮歌謡を担当している。原曲の多くが当時を代表するメジャーな作曲家の作品だった。
그 뒤 1943년10월까지 약 50곡의 조선가요를 담당하고 있다. 원곡의 많게는 당시를 대표하는 주류 작곡가의 작품이었다.
韓国大衆音楽史を研究する韓国学中央研究院韓国学大学院の李埈煕は「モダンなアレンジができる服部だから自作の編曲を希望した作曲家は多かったと思う」とその力量を高く評価する。
한국대중가요사를 연구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이준희는 “모던한 편곡이 가능한 핫도리였으니 자작에 대한 편곡을 희망한 작곡가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そんな一人に、金駿泳がいた。朝鮮半島で数々のヒット曲を生み出し、戦前、戦中の日本では「朝比奈昇(あさひな・のぼる)」の名で音楽監督として松竹映画や松竹少女歌劇ともかかわっていた人物である。
그런 한 사람으로 김준영이 있었다. 한반도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고 전전과 전시 일본에서는 “아사히나 노보루”라는 이름으로 음악감독으로 쇼치쿠영화나 쇼치쿠소녀가 극단과도 관련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服部良一は金駿泳の作曲した8曲を編曲している。「港の女」「宵のサロン」「花賣娘」「乙女純情」…。先月見つかった“朝鮮楽譜”には、これらに混じって最大のヒット曲「泣くな紅桃(ホンド)」(歌・金英椿)もあった。
핫도리 료이치는 김준영이 작곡한 8곡을 편곡했었다. “미나토노 온나” “요이노 살롱” “하나우리 무스메” “오토메 준죠”…지난달에 발견된 “조선악보”에는 이들과 섞인 최대의 히트곡 “홍도야 울지마”(노래: 김영춘)도 있었다.
ただし、この曲が昭和14年に発売されたときは天池芳雄という別の日本人が編曲した。服部良一がかかわったのはその4年後。
다만 이 곡이 1939년에 판매되었을 때에는 아마이케 요시오라는 다른 일본인이 편곡했었다. 핫도리 료이치가 관여한 것은 그 4년 뒤의 일이다.
金駿泳は従来の大衆歌謡の枠を超えた軽音楽として世に出したかったのだろう。2度目の編曲を服部良一に委嘱した。
김준영은 종래의 대중가요 틀에서 벗어난 경음악으로서 세상에 내고 싶었을 것이다. 두 번째 편곡을 핫도리 료이치에 위촉했다.
良一の長男で作曲家の服部克久は「金駿泳さん? 初めて聞きました。ただ父がアレンジした楽譜を見るとすごくしゃれた感じに仕上がっている。オリジナルがいわゆる歌謡曲なので当時としてはかなりモダンだったのでは。編成もジャズっぽいし、金さんも驚かれたでしょう」と思いをめぐらせた。
료이치의 장남이며 작곡가인 핫도리 카쓰히사는 “김준영 씨? 처음 듣습니다. 다만 부친이 편곡한 악보를 보면 매우 멋부린 느낌을 주는 곡으로 되어있습니다. 오리지널이 말하자면 가요곡인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모던했던 게 아니었는지? 편성도 재즈다웠고요. 김 씨도 놀랐을 겁니다.” 라고 회상했다.
作曲家が書いた原曲を生かすも殺すも編曲者次第。レコーディング前に入念な打ち合わせが行われるのは今も昔も変わらない。
작곡가가 쓴 원곡을 살리고 죽이는 것도 편곡자 생각 나름. 레코딩 전에 세심한 타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金駿泳本人かあるいはその通訳者だろうか、「宵のサロン」の楽譜には「リズムはタンゴ気分濃く」、「乙女純情」の楽譜には「可愛(かわい)らしい伴奏にしてほしい」などと添え書きがあることからも、そのことがうかがえる。
김준영 본인 혹은 그 통역자였을까? “요이노 살롱”의 악보에는 “리듬은 탱고 기분 짙게” “오토메노 준죠”의 악보에는 “귀엽게 들리는 반주로 해주었으면” 등의 글이 겉에 써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くしくもともに明治40(1907)年生まれの2人に思いを寄せて、克久は想像の域は越えないと断りながら、こう話す。「きっとひざをつき合わせて真剣に議論していたに違いありません。2人の間にあった友情…。金さんの話を父から聞いておきたかった」
우연히도 1907년생인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면서, 카쓰히사는 상상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데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틀림없이 무릎 맞대고 진지하게 상의했음에 틀림없을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우정….
김 씨에 관한 얘기를 부친으로부터 들었더라면 싶었다.”
(다음 3부로)
첫댓글 goldwell 님.
【海峡を越えて】 埋もれた日韓歌謡史
“해협을 넘어서” 묻혀진 한일가요사
큰 관심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귀중한 자료는 자유게시판에서 묵혀 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연재가 끝나면 별도의 코너로 옮겨 보존할 생각입니다.
물론 반대하시지 않는다면요.
거듭 깊이 감사드리며 열렬히 성원합니다.
늘 활력 넘치고 즐거움과 보람 가득한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루 님
한국의 전통가요와 일본의 엔카는 그 원류가 자국에 있다고 서로 주장 난형난제입니다.
이 "해협을 건너서"가 그런 문제를 보는 시각에 조금이 나마 참고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투고했습니다. 그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보존까지 하시겠다고 하시니 고마울 따릅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추운 겨울철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