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브 소설 '오후 네시'를 인용하자. 이웃집 사람이 오후 네시만 되면 우리집을 방문하는 이유는 우리집에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 있는 어떤 문제를 피하려는 것이다. 알아야 한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 아니라 회피의 동물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욕망이다. 욕망은 가짜다. 결벽증은 청결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회피하려고 거짓 결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저장강박, 청결강박 등 다양한 강박장애는 무언가 결정했다는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결정을 피했다.
인간은 만족하고자 한다. 만족은 채우는 것이다. Good에는 '가득'이라는 뜻이 있다. 인간은 가득 채우려고 한다. 왜 채우려고 하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어디가 비었지? 자존감이 비었는데 엉뚱한 곳을 채운다. 강박을 욕망으로 위장하므로 채워지지 않는다.
원시 부족민의 삶은 행복하다. 쉬지 않고 음식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쉽게 음식조달에 성공한다.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면 채집은 쉽다. 부족하면 끝없이 이동한다. 하루에 4시간 정도를 일한다. 쉽게 목표를 달성하므로 원시인의 일상은 쉽게 채워진다.
현대인의 삶은 채워지지 않는다. 학생의 공부는 30년 후에 보답을 받을 수도 있다. 강태공은 70살이 넘어 보답을 받았고 권율은 40살이 넘어 벼슬했다. 현대인은 활동 중에 90퍼센트는 원시 부족민이라면 필요하지 않은 집단에 맞춰주는 보여주기 행동이다.
채워진 사람은 자존감이 있다. 자존감이 높으면 강박이 없고 강박이 없으면 저급한 욕망이 없다. 채워져 있으므로 더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억지로 채우기 위해 여러가지 루틴을 만든다. 종교도, 운동도, 취미생활도, 노동도 채우기 위한 행동이다.
자기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처세술 서적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얻으라고 한다. 행복을 채우고, 힐링을 채우고, 워라밸을 채우고, 소확행을 채우고, 욜로를 채우고 마음챙김을 채우라고 한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으므로 새로운 채우기 유행이 생겨난다.
종교인들도 무언가를 시킨다. 108배를 해라. 삼천배를 해라. 1만 번을 반복해라. 점차 숫자가 늘어난다는게 딜레마다. 기도해라. 찬송해라. 금식해라. 염불해라. 루틴은 무언가의 회피다. 교회에 구원을 얻으러 가는게 아니라 자존감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의지할 형님과, 대화할 동료와, 부려먹을 아우가 필요하다. 실천이 필요하고 미션이 필요하다. 역할이 필요하고 포지션이 필요하다. 팀플레이가 필요하고 집단의 결속이 필요하다. 권력이 필요하다. 무리에 섞여서 먼 길을 함께 간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자존감의 본질은 자신에게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존감이 있다. 자신이 의지할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무사는 칼이 있고 작가는 펜이 있다. 받쳐주는 기술이 있다. 엘리트들은 엘리트 집단의 보호를 받으므로 자존감이 있다.
우리가 엘리트의식과 귀족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존감이 없으면 속물행동을 하게 된다. 외제, 명품, 골프, 오마카세, 호캉스, 해외여행 따위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 윤석열의 허세도 그게 일종의 갑옷이다. 명품이나 성형중독도 심리적인 갑옷이다.
마음의 갑옷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이다. 왜 방어하려고 할까? 무언가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 집착은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려고 하는 행동이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스스로 인정받으려고 한다. 자신에게 상을 주는게 자위행위와 같다.
차지철을 검색해 보면 이 자가 얼마나 자존감이 낮은지 알 수 있다. 괴상한 나치제복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입히고 경호원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하는 등의 각종 기행을 한다. 옷은 깨끗하고 머리는 단정하다. 12,3 사태 주범들이 이발소를 다녀간 이유와 같다.
한동훈의 가슴뽕 어깨뽕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행동이다. 자존감을 높이려면 천하인이 되어야 한다. 진리의 팀, 신의 팀, 자연의 팀, 진보의 팀, 문명의 팀에 들어서 선수로 뛰면서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동료와 손발이 척척 맞아질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
미래를 예측해야 하며 예측이 맞아져야 한다. 나의 생각대로 과연 민주화가 되었다. 세상과 내가 엇나가지 않고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자존감은 세상의 흐름과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에서 나온다. 자존은 자기 존중이 아니라 자기 관성이다.
관성은 내부에 균형을 만들어서 현재 상태를 변화시키려는 외부 힘에 저항한다. 자존감도 현재 상태를 변경시키려는 외부의 자극에 저항한다. 내가 옳고, 내가 가는 길이 바르고,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그것이 관성이다. 자존감이라는 말과 가깝다.
의지할 부모가 있고, 대화할 동료가 있고, 놀아줄 자녀가 있고, 해야할 임무가 있고 그 일이 무리없이 잘 진행될 때 인간은 자존감을 얻는다. 내면이 가득 차오르는 충일감을 느낀다. 관성을 얻고 밸런스를 얻는다. 외부의 자극에 저항하여 현재를 유지한다.
우리는 사람을 사귀고,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을 거느리고 인류에 기여하는 미션을 수행하여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 내부에서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관성을 생산할 수 있다. 내부에 자체엔진이 있고 RPM이 높아야 한다. 환경의 흔들기를 극복해야 한다.
각종 징크스와 루틴을 지키는 행동이나 여러가지 터부 행동도 자존감 문제를 우회하는 편법이 된다. 자존감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결국 자기를 공격하게 되는 문제다. 자기압박이 심해져서 자기공격으로 발전하는 것이 강박증이다.
결벽증 환자는 왜 깨끗하려고 할까? 그 방법으로 자신을 긴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틴과 터부의 진짜 목적은 자신을 긴장시키는데 있다. 왜 긴장이 풀렸지? 아무도 내게 패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명령하지 않고 할 일을 주지 않으므로 불안해진다.
자존감이 낮으면 여러가지 기행을 벌인다. 상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관종 행동이다. 내가 먼저 말을 걸 어갈 수 없으므로 상대가 나를 해치게 유도한다. 그들은 항상 화가 나 있으며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한다.
갑자기 화를 낸다. 내가 말을 거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해치려 한다는 핑계로 타인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부정주의자가 된다. 반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 언제나 비관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한다.
부정주의가 지나치면 범죄자가 된다. 타인에게 말을 걸지 못하므로 범죄를 걸게 된다. 자존감이 없으면 어떻게든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한다. 한동훈이 작은 말대꾸로 이겨먹었다고 희희낙락 하면서 큰 신뢰를 잃은 사실을 모른다. 그의 마음은 쫓기고 있다.
윤석열은 기어코 국민을 이겨먹으려 한다. 왜 이기려고 할까?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준석이 싸가지 일화는 유명하다. 모든 회의를 깽판친다. 왜 양보를 투자하여 신뢰를 벌지 않을까? 무의식 영역에서는 자신을 양아치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관성을 만들어서 자체동력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껴야 한다. 세상의 흐름과 결맞음을 이루어야 한다. 발명가나 모험가나 예술가나 스타는 자존감이 높다. 이야기 거리가 있고 먼저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