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밀양체육사가 90주년이 되는 실로 뜻깊은 해다. 1925년 밀양시체육회의 원조인 ‘밀양운동구락부’의 창설을 본 밀양은 제국주의의 무단정치하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의식과 애향심을 일깨우기 위해 체육인들이 스포츠 보급에 앞장섰다. 이런 앞선 선각자들에 의해 밀양은 1946년 3월부터 4개월에 걸쳐 지역민들의 피와 땀으로 현 삼문동 밀양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이 공설운동장은 서울 동대문운동장, 부산구덕운동장, 인천시민운동장에 이어 네 번째로 건립됐으며 순수 민차원으로는 국내 최초의 운동장이었음은 당시 밀양 체육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밀양체육인들의 이런 선구적 정신이야말로 항일 독립열사를 많이 배출케 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일본 방해 속 운동구락부 창설 해방까지 20회 대운동회 개최 밀양인 단결, 저항의식 고취 꺾이지 않는 밀양인 불굴정신 삼문공설운동장 조성 계기 1955년 3·1역전 첫 대회 밀양은 예부터 충절과 교육·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의 고장이다. 사명대사와 김종직·변계랑 선생의 충의와 지덕정신이 나라와 고장의 명예를 더 높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김원봉 열사를 비롯 윤세주·최수봉·황상규·고인덕 열사 등 항일 독립열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국만리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런 선각자들의 위대한 애국·애족정신은 스포츠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1925년 일본인들의 탄압속에서도 ‘밀양운동구락부’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은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밀양운동구락부’의 창립은 밀양지역 젊은이들이 체력 강화와 애향심 그리고 단결심을 고취, 이를 항일운동으로 승화시켜 왔다는 점에서 당시 밀양인들의 선견자적 기질과 대의적 발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1925년 밀양운동구락부 창설=조선체육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본제국주의의 무단정치에도 불구, 청소년 스포츠지도와 역량강화를 위해 1920년 ‘조선체육회’의 창설을 보면서 그 여파가 전국으로 미쳤다. 밀양에도 육상과 축구, 권투 등 경기 종목이 점차 보급되면서 급기야 1925년 ‘밀양운동구락부’(초대회장 오인덕)가 창설되어 밀양체육사의 태동을 보게 됐다. 밀양운동구락부는 창설 후 조용석, 김형달, 서재석 등이 주축이 되어 시민대운동회 등을 개최, 대동단결과 애향심 고취에 일대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89년 작고한 송규성 옹은 “당시 대운동회는 일본놈들이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빌려주지 않아 영남루 마당과 강변에서 행사를 개최, 나라 잃은 울분을 삼켰다”고 술회했다. 밀양대운동회는 1926년 밀양운동구락부 창설기념으로 처음 개최한 후 1945년 해방될때까지 20회에 걸쳐 육상·씨름·축구·권투·궁술(궁도) 등이 개최, 스포츠 저변이 확대되어 갔다. 그 이후 배구와 야구·농구·탁구·유도·정구 등도 점차 확대 보급되는 추세를 보였다. 육상에는 조선신궁경기대회 5000m에서 조선신기록을 세웠던 양임득 선생을 비롯 김천업·표문철·윤사오·최해수·송규성·이두병·주영석 선생 등이 활약했다. 씨름은 엿쟁이라 별명을 가진 이름모를 선수와 문창수·송수여·정상봉·박영학·백태윤·문성재·허남백·박명렬·정인덕 선생이, 권투는 박상종·조정도·장달용·이재원·유태룡·조우재·최원·박기조·박지수·백운항·김학용·김동욱·손방우 선생 등이 활약했다. 축구는 밀양축구조기회(단장 황용암) 정말봉·이종봉·윤병효·박수동·김임득·홍종철(국가대표) 등 30여 명이, 궁술은 조재진·이재원·이광수·김종성 등 20여 명이 활약했다. ▲민주도 전국 최초 공설운동장 건립과 밀양체육회 창립=1945년 해방과 함께 밀양체육은 한국체육사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다. 서울공설운동장과 부산구덕운동장, 인천시민운동장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 민주도로는 첫 번째로 ‘밀양공설운동장’이 건립된 것. 이를 기념해 군내 체육인들이 1947년 12월 21일 보래관(현 농협시지부 앞 중국요리집 2층 건물)에 모여 ‘밀양체육회’ 창립을 보게 되니 지역체육이 제2의 탄생기를 맞은 것이다. 창립당시 단체는 육상·씨름·축구 등 11개 단체였다. 밀양체육회 회장은 김형달 삼성병원장이, 부회장에 김갑득·이선주, 고문에는 군수와 경찰서장, 세무서장이 당연직으로 맡았다. 이사에는 양임득·지생업·천두생·장달용·박차득·최대림·윤기선·박도만·조재진·전경쇠·박경호·윤달영 등이 맡았다. 당시 11개 경기 단체에 등록된 선수는 397명이었다. 일제시대 학교 운동장은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어려워 부득이 남천강변과 영남루·골목안 등지서 운동을 해야만 했다. 이런 설움속에 1945년 해방과 함께 밀양운동구락부가 주도, 밀양공설운동장 건설을 결의, 삼문동 자갈밭과 묘지, 창고 등을 정리하고 이곳에 공설운동장 건립이 본격 시작됐다. 공설운동장은 1946년 3월 우마차를 동원, 하보경·양임득·천두생·정상봉·정말봉·송규성·조정도·김두원·하철수·백태만·문성재 선생 등 30여 명이 주도, 2일과 7일 밀양장날을 기해 읍·면민들이 삽과 곡괭이 소·말달구지로 일궈 착공 4개여 월만에 완공을 봤다. 체육인과 읍·면민들이 피·땀으로 조성한 이 공설운동장은 서울·부산·인천에 이어 네 번째, 민주도로는 전국 최초의 공설운동장이었으니 이 얼마나 영광의 역사인가. 이는 밀양체육 90년사의 절대적 가치이고, 밀양이 스포츠의 고장이란 역사성과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설운동장은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1956년에는 스텐드를 석축공사를 실시, 국가대표를 비롯 전국 체육인들이 이곳에서 합숙훈련을 했다. 이 공설운동장은 1951년 전국 축구대회와 1952년 올림픽 대표선수 환송 겸 제7회 경남육상선수권, 1953년 아시아 체육대회 파견선수 합숙훈련, 그리고 1953년 54·55년 3년 연속 경남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 밀양체육의 위상이 전국에 떨쳤다. 3년 연속 도대회 유치를 계기로 1955년 3·1역전경주대회가 탄생,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밀양공설운동장은 1946년 설립된 이후 전국 규모 체육행사는 물론 밀양주민들의 체육과 문화의 메카로 70여 년간 호흡을 같이하고 있으니 이를 자손대대 보존될 수 있도록 밀양인이 힘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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