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조선 상고사도 흐른다. 2
ㅡ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ㅡ
신석기시대는 굵고 짧았다.
인류는 신석기시대에 들어 서자 구석기시대에 비해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 발전이 된다.
우주역사 137 억년, 지구역사 46억년, 초기인류 역사 500만 년에 비하면 신석기시대는 몇 천년에 불과한 찰라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혁명의 시간이었다. 돌하나 갈아쓰는데 걸린 구석기시대 69만년에 비하면 정말 혁명적으로 인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석기시대 동안 인류는 채집과 사냥을 하고 살았으며 이동 생활을 했다. 얼마간은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가 공존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같은 석기시대였지만 뗀석기를 갈아서 더 뾰족하고 날카롭게 만들어 낸 간석기(마제석기)를 사용했다.
지금으로부터 1만년 2000년 전 부터 5천년 전까지 약 5천년 시간를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단군조선이 탄생하기 이전 선사시대를 말한다.
신석기시대는 돌을 갈아 쓰는 것만 아니었다. 인류사에서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러방면에서 혁명적인 발전이 있었다.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가 식량 '채집경제단계' 였던 데 비해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단계'에 까지 이른다.
내가 학창시절 신석기시대를 배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마제석기'와'빗살무늬토기'( 즐문토기)였다. 명칭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저 외우기만 했다. 당시 역사 선생들은 설명조차 안 해줬다. 의미도 모르면서 무조건 암기했다. 역사공부가 재미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역사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들 의미와 흐름이다.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만 년 전 지구는 빙하기 시대였다. 빙하기가 끝나고 온화한 기후인 홀로세(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現世: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로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면서 기후가 안정되었다.
1만 년 전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따뜻한 날씨가 되면서 인류는 정착했고 농사 짓기 시작했다.
'호모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 가 말한 두 번째 혁명인 <농업혁명> 즉 '<신석기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편 '선사시대와 인류출현' 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그러나 인류 초기 농사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초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우리보다 체구도 훨씬 작았다. 영양 상태 또한 불량했다. 식량 대부분은 일부 잡곡 (조, 피, 수수, 기장)에만 의존했다. (벼농사는 어려워서 못 지었음) 흉년에 대처할 농사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그전까지 각자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되면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후기구석기시대 사람들 처럼 소통과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해 나갔다.
시간이 흘러 농경과 가축사육으로 인한 식량생산이 증대되고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먹고 남은 식량을 보관할 토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 생각으로 토기가 별거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 어떤 토기도 없을 때 그 불편함을 상상해 봐라!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가 나오게 된 이유이다.
여기서 역사시험에 자주나와 헷갈리는 데 주의할 것이 있다. '민무늬토기'이다. 무늬가 없는 토기라 빗살무늬토기 보다 먼저 나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뒤에 나왔다. 일반 상식으로는 무늬없는 토기가 먼저 나와야 했다. 당시 정확한 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상식선에서만 생각하고 답을 찾았다. 이것 때문에 중요한 시험(?)에서 틀려 이 한 문제 때문에 당락이 결정된 바 있다. 내 인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 중 하나 이다.^^
이처럼 정착하여 농업 발달은 마침내 각 분야 별 전문기술자도 낳았다.
신석기시대 인류생활은 동물가죽을 다듬는 기술도 발전한다. 또 실을 만들어 옷감을 짜는 방법을 알게 된다. 멋진 옷에 조개껍데기로 만든 팔찌와 목걸이, 동물 송곳니로 만든 발찌로 멋을 부리기도 했다.
이쯤에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가족관계(?)도 알아 보자.
인류가 인류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는 69만년을 이어 왔다. 그 69만년 동안 아버지라는 단어는 없었다. 아버지 의미도 없었다. 엄마의 주도하에 숫컷들이 공동으로 자식들을 양육했다.
당연히 그 당시는
프리섹스(섹스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였다.
그 이유가 진화론적으로 보면 이해되고 아주 현명한 일이었다.
당시는 동굴에서 백 명 이하로 모여 살았다. 생식행위는 지금 동물들처럼 자유로웠을 것이다.
누구 자녀인지는 암컷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엄마만 확실했을 뿐이다.
동물 세계에서 숫컷들은 자기 자식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미래 경쟁자로 생각하고 가차없이 죽여 버린다. '동울의 왕국'이라는 티브 프로에서 사자가 그러는 경우 자주 봤을 것이다.
구석기시대 인류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서 암컷들은 모든 숫컷과 성행위를 해서 그 자식이 숫컷자식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자식을 보호했다. 그러한 일이 69만년을 이어왔던 것이다.
지금 원숭이들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영악한 암컷 원숭이들은 배란기 때는 힘센 대장 원숭이하고만 성행위를 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그 집단 숫컷 모두하고 성행위를 한다고 한다. 원숭이도 좋은 유전자를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고,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다.
이처럼 인류는 69만년 그 긴 시간 동안은 당연히 모계사회 일 수밖에 없었다. 숫컷들은 암컷이 출산한 모두를 자기자식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사냥해서 먹여 살렸다.
그때나 이때나 불쌍한 숫컷들 이었다.ㅎㅎ
그러나 그 기나긴 69만년동안은 인류역사상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가 되고 농업혁명이 일어나 인류가 정착하고 식량도 보관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 인구가 늘면서 보관된 식량 약탈도 시작 한다. 그러다 보니 힘을 합칠 필요가 있었다. 힘센 집단에 정복당해 씨족이 부족이 되고, 부족이 국가가 된다. 사회가 커지니 계급이 생긴다. 원시종교도 정식종교화 되어 간다. 그러면서 인류는 전쟁시기에 빠져든다.
이렇게 국가단위로 커진 사회를 지탱할 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일부일처제' 였던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나쁘다는 것 아니니 오해말길 바란다. 인류는 일부일체제 없이도 일부일체제 있었던 시기 거의 100배 이상 긴 시간을 숫컷끼리 싸우지 않고 잘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힌 것 뿐이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인류가 드디어 초기 문명시대에 들어 선 것이다.
수 백만 년 동안 초기 인류가 몰랐던 돌 하나 갈아 쓰게 된 것이 이처럼 기하급수적 진화속도로 인류는 혁명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조금 딱딱하지만 역사 시험에 자주 나오는 부분이니 복습삼아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알기쉽게 구분하여 비교해 보자!
<구석기 시대>
인류는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나 동물의 뼈 등을 도구로 사용하였고, 차츰 돌을 깨뜨리거나 떼어 내 만든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찍개, 긁개, 주먹도끼등 다양한 쓰임새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막집을 지어 살았으며 열매를 채집하고 사냥과 고기잡이로 식량을 마련하였다. 먹잇감이 많은 곳을 찾아 무리지어 이동하는 생활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은 하였다.
사냥의 성공을 바라며 동굴 벽화를 그리거나 풍요를 기원하는 조각품을 남기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면서 한곳에 정착하며 생활했다. (신석기혁명) 농사를 짓기위해 강가에 움집을 집고 살았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점점 부족사회로 형성해 나갔다.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부족을 이끌었다.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생산물을 골고루 나누는 평등사회였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갈돌과 갈판으로 재배한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가락바퀴로 실을 뽑아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었다. 그물과 동물뼈를 이용한 낚시등으로 물고기를 잡거나 날카롭고 뾰족하게 갈아만든 간석기로 사냥을 했다. 동물의 뼈나 뿔, 조개껍데기로 장신구를 만들었다.
신석기 인들은 원시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태양, 물 등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주는 무당과 그 주술을 믿고 숭배하는 '샤머니즘', 특정 동식물을 부족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숭배하는 '토테미즘'이 대표적이다.
신석기 유물 발굴지로는 서울 암사동 유적,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 등이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공통점>
둘다 평등사회 였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는 오늘날 제사와도 같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고인돌 같은 무덤은 만들지 않았다.
여기서 구석기, 신석기인류가 정착생활과 부족생활을 한 또 다른 이유가 있어 소개한다
인류가 두 발로 걷고 불의 사용으로 뇌가 커지면서 머리도 커지는 쪽으로 진화한다. 머리가 커짐에 따라 사람의 출산이 다른 동물에 비해 엄청 힘들어 졌다. 이처럼 출산이 힘들어 지면서 부족생활을 했다는 가설이 있다.(다음 편에서 불의 사용이 인류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정리하겠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인류가 드디어 초기 문명시대에 들어 선 것이다. 499만 년 동안 초기 인류가 몰랐던 돌 하나 갈아 쓰게 된 것이 이처럼 인류의 엄청난 진화속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이끌어 낸 것이다.
이제 인류는 신석기시대부터 문명의 시대로 들어 서면서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인류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 어떤 금속을 발견한다. 불에 잘 녹는 구리였다. 그러나 구리는 너무 잘 구부러지고 약했다. 그래서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금속이 탄생한다. '청동기'이다.
이와 함께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면서 이제 인류는 인류 스스로 문자로 기록을 남길 수 있게까지 된다.
드디어 우리는 몇 가지 화석이나 유물을 보고 추측만이 아닌 문자 기록에 의한 진짜 역사 세계로 들어 서게 된 것이다.
'청동기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청동기시대 청동은 농기구로도 발굴되어 가끔 쓰인 것으로 보이나 전체적으로는 아니였다. 청동은 지배층 장신구나 군인들 무기로 사용했다.
일반 농민들은 여전히 신석기를 사용했다.
청동기로 무장한 선진 부족들이 곧 바로 대규모 정복전쟁이 시작되면서 부족끼리 통폐합으로 부족국가가 탄생한다.
청동기시대부터 거대 권력을 잡은 자들이 생기게 되고 권력을 잡은 자들은 그 들을 신격화하기 시작 한다.
그들은 그들 신격화를 위해 죽은 뒤에도 거대 무덤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고인돌'이 탄생이 청동기시대부터 시작 되었다.
고인돌이 돌로 만들어져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국사시험에서 많이 헷갈려 하는 부분이다.
청동기시대 발굴지로 유명한 곳은 '암사동유적지'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위치한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암사동유적지'는 1925년에 처음 발견되어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청동기 유적지는 너무나 많아 여기서 밝히기 힘들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가장 유명한 유물은 '비파형청동검'이다.
비파형청동검은 청동기시대 칼의 일종으로 만주에서 한반도, 랴오닝성에 걸쳐 출토되고 있는 동검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랴오닝 지방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전후이다. 비파형청동검은 지배 계층과 집단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조선 유물 가운데 하나로 추측된다.
이런 청동기시대는 더 짧아진다.
곧 바로 철기시대로 들어 간다.
청동기시대 때부터 권력자들이 탄생된다. 이들 권력자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신비로와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게 모든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건국신화'이다.
이런 건국신화는 지금까지 이어져 종교화되기도 했다.
사실 현 기독교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 건국신화이다.
우리민족에게도 건국신화가 있다.
'단군신화'이다.
이 또한 종교화 되었다.
일제강점기시절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이다.
이제 인류는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기록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그 기간은 기껏해야 오천년 밖에 안된다.
이어서 이제 진정한 우리 한민족 역사인 '단군신화'로 들어가기 전 앞서 정리해야했는데 우리나라 상고사를 정리하니라 빼 먹은 '선사시대와 인류탄생' 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역사서들에 대해 먼저 정리를 해 나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첫 번째 사진: 신석기인 움막생활
두 번째 사진: 신석기시대 간석기들
세 번째 사진: 빗살무늬 토기
네 번째 사진; 비파형청동검
다섯 번째 사진: 고인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