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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2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공(空)은 충만하다★ 253~288p
<.명상이란 무엇인가? (4)-무(無)가 곧 자유다. 272 ~277
▷ 일 시 : 불기2569(2025)년2월17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동 참: 이병기 포교사
2025년2월17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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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교리를 전하였으며,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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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내용:
선지식 라즈니쉬 오쇼의 가르침( 반야심경 The Heart Sutra)중 ★공(空)은 충만하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4)-무(無)가 곧 자유다. 272 ~277
우리의 개별적 자아(self)는 거짓 실체이다. 272
이 거짓 실체는 의존할 수 있는 버팀목을 찾아야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세 가지 보물(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중심적인 종교 행위다.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가 불교의 기본행위다.
그러나 여기서 붓다는 이것을 반박한다.
이것을 모순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내 말에서도 수많은 모순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들은 제각기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말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장할수록 나의 말은 달라질 것이다. 나의 말은 그대에 대한 감응이다.
나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말할 수 있다.
그대의 의식이 더 높고 깊은 경지에 오를수록 나는 점점 더 다른 말을 할 것이다.
당연히 이 서로 다른 말들은 매우 모순될 것이다.
내 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찾는 사람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붓다의 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이 붓다가 죽은 바로 그날 불교가 서른 여섯 개 파(派)로 갈린 이유다.
붓다가 죽은 바로 그 날 그의 제자들은 서른 여섯 개 파벌로 분열되었다.
왜 그랬을까?
붓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수많은 말을 했다.
그들의 의식과 이해 정도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가 죽고 나자 그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붓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라.
붓다가 최초의 제자 다섯 명에게 '나는 도달했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들을 저기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이 다섯 명의 제자가 사리푸트라를 만났는데 사리푸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무득(得)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나는 얻었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틀렸다. 그것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273
이 말을 듣고 그 최초의 제자들이 뭐라고 했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우리는 최고 오래된 고참 제자다.
그리고 붓다가 우리에게 말한 제일 첫 번째 말은 나는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선언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를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는 얻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따른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얻었으며 우리 또한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나는 그대들의 귀의처이다.
와서 내게 귀의하라. 나를 안식처로 삼으라' 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붓다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당신은 뭔가 오해했음이 틀림없다.
아니면 당신이 붓다의 말을 왜곡했거나!"
이 반야심경은 사적(私的)으로 행해진 설법이었다.
이것은 특별히 사리푸트라를 상대로 한 가르침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편지와 같다.
사리푸트라가 증거를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당시에 녹음기가 있었을 리도 만무하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맹세할 뿐이다.
"나는 진실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는다.
붓다는 분명히 내게 '오로지 그대의 명상에 의지하라.
그 밖에는 아무것도 의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항상 명상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한다. 그 마음은 거짓 자아다.
그것은 에고이다. 그리고 에고는 버팀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에고는 지지대를 원한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버팀목이 모조리 제거되면 에고는 순식간에 쓰러져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렇게 에고가 사라져야만
그대 안에 영원한 의식, 시간을 초월한 불사(不死)의 의식이 떠오른다.
여기, 붓다는 말한다. 274
"사리푸트라여, 귀의처는 없다.
구원의 방법도 없다.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데로도 갈 곳이 없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만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충만한 공(空) 안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두려움에 전율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에게 떠밀려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간혹 사람들은 깊은 사랑과 존경심을 품고 내게 와서
'오쇼` 왜 저희들을 더 세게 밀어주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는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떠밀려 들어가는 것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여러 생 동안 그대의 진보를 방해할 것이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속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파랗게 질려 버릴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몇 번의 생 동안은
무(無)와 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 곁에 다가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는 꽁무니를 뺄 것이다. 그대 안에 두려움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떠밀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아주 서서히 들어가야한다.
그대가 준비된 만큼만 밀려들어 가야 한다.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인
쇠렌 키에르게고르(Søren Kierkegaard)의 유명한 말을 들어 보았는가?
그는 '인간은 두려움에 전율한다. 끊임없이 전율한다'고 말한다.
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는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에 관한 한 그의 말은 옳다. 모든 인간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의 문제가 언제나 따라다닌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항상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그대는 자신이 무(無)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무섭고 끔찍한 일이다.
그대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그곳에서 그대는 무(無)라는 개념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의 전율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존재하기를 원한다.
지속되기를 원한다. 영원히 유지되기를 원한다. 275
이것이
자신의 내적 존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이유이다.
그들은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믿는다.
이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음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이것은 일종의 희망 사항이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바보천치라 해도
그대는 그 말에 끌려들 것이다. 그대는 그의 말에 말려들 것이다.
이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사자인 그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매우 호소력 있게 들린다.
인도인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들보다 더 겁 많은 사람들은 없다.
천 년 동안이나 인도인들은 노예였다. 그것도 아주 작은 나라들의 노예였다.
인도를 침략한 사람들은 아무 어려움도 없이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영혼의 불별성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노예가 되어버린다.
사실,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나라는 쉽게 정복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정복하겠는가?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맞을 것이며,
어떠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복자에게도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도는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노예였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노예가 되어 버렸다.
영국은 아주 작은 나라이다.
인도의 몇 개 주(州)는 영국보다 더 크다.
그런데 영국은 이 큰 나라를 손쉽게 지배할 수 있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는 인도인들이 너무나 쉽게 정복당했다!
이들의 믿음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276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인도인들은 겁쟁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영혼은 불멸한다는 믿음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들이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실을 알거나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주변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이 죽음이 그들은 너무나 두렵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무릎 꿇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인간이 불멸성을 믿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신을 믿는다.
그것은 두려움에서 나온 믿음이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의 마음에 관한 한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옳다.
또 한 명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샤르트르(Jean-Paul Sartre)는 ‘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있다' 고 말한다.
왜 자유에 대해 '형벌' 이라는 단어를 쓰는가?
자유가 형벌이라고? 그렇다, 일반 대중에게는 자유마저 형벌이다.
자유는 위험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아무것에도 의존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오직 그대 자신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유는 모든 지지대와 버팀목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무(無)를 뜻한다. 그대는 무(無)일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
여기, 샤르트르의 말을 들어보라.
"인간은 자유이다.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고통에 처한다."
고통이라고? 자유 때문에? 그렇다. 그대가 자유로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자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자유는 괴로운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를 원한다.
노예가 되면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예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277
나는 노예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자유로울 때 그대는 두려워한다.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행동 하나 하나에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튼다.
그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두려움을 낳는다.
일반 대중의 마음에 관한 한 샤르트르의 말은 옳다. 자유는 괴로움을 낳는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는 두려움을 낳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려운 자유다.
자유로울 때에는 나자신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의지처로 삼을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제공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과 우주의 의미를 홀로 결정해야 한다.
아무것도 정당화시키거나 변명할 수 없다.
나는 아무 걸림도 없는 하나의 자유이며, 그대 또한 그리하다.
나의 자유는 내 존재가 끊임없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대의 자유 또한 그러하다.
우리들 각자는 각기 고유의 방식으로 이런 일을 해나가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독자성(獨自性, uniqueness)이 있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자유가 고통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자유가 일종의 형벌이며 저주라고 생각한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대가 이 자유 안으로, 이 무(無)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를 위해 당연히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 사리푸트라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보디사트바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278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득(無得) 때문이니라.
사념의 장막이 없으므로
그는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된 마음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열반(涅)에 이르니라
그는 전도(顚倒)될 가능성을 극복했다.
그는 무(無) 안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일반적인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내가 사라지고 있는데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미지(未知)의 세계로 녹아 들어가는데
어떻게 두려움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말인가?
어떻게 달아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지지대나 의지처를 찾아 다시 에고라는 느낌,
자아라는 느낌을 창조하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붓다가 20년이나 기다려야 했던 이유이다.
그렇게 기다린 후에도
붓다는 이 진리를 공개적인 설법이 아니라
사적인 대화를 통해 사리푸트라에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리푸트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또한 옳다. 붓다는 그들에게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에 관해서도 이 점을 명심하라! 나의 말은 모순투성이다.
그 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 의식의 차원이 제각기인 사람들을 상대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장할수록 나의 말은 점점 더 모순될 것이다.
나는 전에 말했던 것들을 계속 반박해야 할 것이다.
그 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대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279
그대의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내가 감응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그대의 의식에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나의 말도 바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떠난 후에 서른 여섯 개의 학파를 만들지 말라.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무(無)는 자유를 가져다 준다.
자기(self)'로 부터의 자유,
이것이 궁극적인 자유다.
이보다 더 높은 자유는 없다.
무(無)가 곧 자유다.
그것은 샤르트르의 말처럼 괴로운 것도 아니며,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두려움의 전율도 아니다.
그것은 축복이다. 궁극적인 지복이다. 그것은 두려움의 전율이 아니다.
두려움에 전율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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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반야심경』초판2쇄;서울:태일출판사,2001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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