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요즘 와서 탈 [假面]에 관심이 많이 간다. 인터넷에 들면 '봉산탈춤'이나 '하회탈춤' 사이트를 찾아가는 일이 잦다. 봉산탈의 샌님, 노장, 말뚝이, 취발에 관심이 가고, 하회탈의 양반, 백정, 초랭이, 파계승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탈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고장에서 낳고 자랐다. 동네 큰 굿인 정월 대보름 동신제洞神祭에서도 탈이 없었다. 걸립패도 맨얼굴이었고, 판굿하는 상쇠도 설장구도 상모도 포수도 각시도 무동 탄 아이도 모두 맨얼굴이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탈이 없는 고장에서 탈을 모르고 살았다.
탈이란 걸 처음 알게 된 것은 도시에 유학한 고등학교 적, 국어 시간에 <봉산탈춤>이란 단원을 배우면서였다. 마부 말뚝이가 걸쭉한 말솜씨로 상전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게 신기하고 신이 났다. 그 뒤, 교실에서는 엄격하던 선생님이 소풍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우스갯소리를 할 때나, 알려진 모범생 급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볼 때면 사람의 얼굴이 딱 하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대학 시절 <산대극山臺劇>이란 것을 배우면서 탈의 역사가 유구하며 세계에서 두루 사용함을 처음 알았다. 그리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본디부터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니고 싶어했던 것 같다.
우리 과에는 여학생이 많았다. 그 중 1년 선배인 한 여학생은 임신으로 불룩한 배를 내민 채 등교하곤 했다. 그 선배의 곱상한 얼굴을 볼 때면 그 얼굴 뒤에 숨은 질펀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아줌마의 얼굴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대학 4학년 겨울방학 때 집에 내려가 있다가, 며느리 없이 아버지의 회갑을 지낼 수 없다는 어머님의 주장과 그렇잖아도 손이 귀한 집안이니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안아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강권에 떠밀려 생판 모르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첫날밤부터 수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짐승 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얻은 직장이 바뀌고 그럴 때마다 하숙을 바꾸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늘 사람들의 주변만을 맴돌며 살았다. 기껏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을 뿐 팔짱을 끼어보지도, 어깨동무를 해보지도, 팔을 벌려 안아보지도 못한 채 항상 그만큼의 거리에 머물렀다. 밤새워 걸쭉하게 막걸리를 마셔보지도 못했고, 침을 튀기며 입 싸움을 해본 적도 없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살았다. 안에서 일어나는 요동을 단단한 거죽으로 눌러 막아 놓고 태연을 가장하였는지도 몰랐다. 남이 알까 무서운 일 앞에서는 별것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자위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는 걸 버릇으로 굳혀갔다.
머리카락이 희어지면서부터 거울 앞에 서는 게 두려워졌다. 젊었을 적 거울 앞에서 눈살을 찌푸려도 보고, 눈을 치켜떠보기도 하고, 입을 앙다물어보기도 하고, 입꼬리를 치켜보기도 하고, 입을 헤벌려도 보던 그런 장난을 할 수가 없었다. 사나운 표정도, 정겨운 표정도, 쌀쌀한 표정도, 근엄한 표정도, 헤픈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은 이마에는 굵은 선이 어지럽고, 눈꼬리는 힘없이 처져 있으며, 입 주변에는 칼자국 같은 주름이 선명한 채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이 탈바가지라는 걸 깨달은 건 안동 하회마을에서였다. 탈을 파는 가게 앞에서 죽 걸어놓은 탈바가지들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였다. 하고 싶으면서도 하고 싶지 않은 채, 하고서도 안한 채, 모르면서 알은체, 점잖 빼고 있는 내 낯바닥이 양반 탈과 다를 게 없었다. 부네에게 음심淫心을 품고 짐승 같은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 파계승 모습은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내 모습이었다. 내 푼수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토할 것 다 토해내는 백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양반 탈과 파계승 탈과 백정 탈에 둘러싸여 몸짓은 말할 것도 없고 손짓 하나, 소리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갇혀 있는 내 얼굴은 또 하나의 탈이었다.
마음을 감싸 도는 강둑을 걸어 나오면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물에 잠긴 파란 하늘에 얇은 구름이 무늬져 흘렀다. 강바람이 산들산들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 물과 하늘과 바람이 남의 것인 양 낯설었다.
<봉산탈춤>을 열 때마다 '말뚝이'에게 빨려든다. <하회탈춤>에선 '백정'이 부럽다. 얼굴이야 검거나 붉거나, 생김새야 못났거나 말거나, 또 신분이 노비면 어떻고 천민이면 어떤가. 속에 엉킨 덩어리 다 풀어 토해놓고 얼쑤얼쑤 춤사위로 넘어가는 그런 시원함이 있으면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