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7년의 선물
나는 1966년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중등학교 음악교사를 하면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교사생활은 3년간 했다. 당시 내가 아는 미국대학은 모교인 서울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은 주립 미네소타 대학뿐이었다. 틈틈이 영어도 익혀야 했고 유학시험도 준비해야 했으며 유학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드디어 TOEFL과 유학시험에 합격하고 미네소타대학에서 입학허가도 나왔다. 어렵게 유학절차를 마치고 1969년 7월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행 비행기가 연착이 되어 몇시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행기 안에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미국 아저씨에게 마중 나올 host family에게 연락해달라고 손짓, 발짓으로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도착 예정시간으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미니아폴리스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젊어서인지 두려움과 불안감 없이 대학교에서 연결한 미국 가족을 만났고 한밤중에 자가용으로 한참 달려 와이자타(wayzata)라는 교외에 있는 새로 지은 넓은 집에 도착했다. 나는 지쳐서 바로 아래층에 마련한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내던져버리고 누워 버렸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뒷마당에는 잔디가 잘 정리되어 있었고 멀리 보이는 넓은 호수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탄부터 나왔다. 내 생전에 이런 전망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미네소타주는 호수가 10,000개 있다고 한다)
안주인 루트 얼트(Ruth Ault)에게 사람들은 왜 안보이냐고 물은 것이 첫마디였다. 서울에서 사람 틈새에서 생활했던 나로서는 이것이 제일 궁금했다. 그리고 마당을 걷다가 뱀이 튀어나와 한국말로 “뱀이다!” 라고 소리쳤다. 독이 없는 뱀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미국 가족도 영어 대신 “뱀” 이라고 불렀다.
일주일이 지난 후 정식 학기 등록 전에 여름방학 집중 영어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미국 가족은 두 달 동안 매일 버스 정거장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올 때도 버스 정거장에 데리러 나왔다.
정식 개학이 가까워져 학교 근처에 방을 구했다. 석 달 호강하고 구한 방은 낡은 공동주택(rooming house)에 8명이 거주하며 공동 부엌을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캠퍼스까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어서 별 불만이 없었다.
학교는 국제학생 사무실(International students office)이 있어서 등록 절차 등 필요한 사항들을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등록하기 전에 음악이론 등 학부 과목을 통과해야 하는데 나는 그것 대신에 대학원 과목을 하면서 학부 과목도 같이 신청했다. 힘든 공부가 시작되었다. 수업 끝나고 저녁에는 연습실에서 성악 연습도 해야 했다.
또 미네소타는 추운 곳이다. 첫 겨울 너무 떨면서 이곳은 “시베리아” 라고 했더니, 친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뜻을 짐작하려 애쓰더니, “사이베리아” 라고 고쳐주었다. 추위도 언어장벽에 부딪치곤 했다.
실기는 언어장벽이 없어 그런대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성악 문헌 등 이론 강의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저렴한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공부해야 했다. 한 번은 녹음하는 중에 기계가 찍찍 소리를 내니까 교수가 녹음기가 아픈가 보다 라고 말해 강의실이 웃음으로 소란해졌다. 나는 무안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려웠던 오페라 연습(Opera Workshop) 시간도 극복했다. 다른 학생들 동작은 유연한데, 나는 경직된 사회에서 자란 탓인지 몸놀림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코치는 ‘기계같은 인형’이라고 지적했다. 그래도 시간이 가면서...... 내 동작도 커졌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니 학교생활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나의 경제사정은 점점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당시는 등록 후 일년이 지나야 취업허가(Work Permission)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은 빈곤 국가로 인정되어 장학금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지만 생활비는 내가 벌어야 했다. 틈틈이 학교식당 계산대에서 계산원(cashier)으로 일했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저녁 시간에 미시시피강이 보이는 일식당에서 웨이트리스(waitress)로 일했다. 가끔은 기모노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신기한지 사진 찍으려는 손님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일본인이 아니예요. (I’m not Japanese)”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내 성격을 거기서도 노출한 것이었다.
주일날은 교회 유급 성가대원으로 찬양했다. 바쁜 생활 중에도 어쩌다가 한국 유학생들이 공원에 모여 불고기 파티를 하는 여유가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이 잘 알려지지 않아, 백인들이 호기심으로 중국인이냐, 일본이냐고 묻곤 했다. 당연히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짓궂게 남한인지, 북한인지 캐묻기도 했다. 우리는 국위선양으로 ”남한! 대한민국!“이라고 외쳤다.
내가 받은 학위는 M.F.A(Master of Fine Arts) 였는데 이 학위는 다른 석사보다는 능히 20학점 많은 65학점 이상 이수해야 했고 독창회도 2번하고 논문도 써야했다. 공부하면서 일하는 힘든 생활을 마치고 1974년 학위를 받았다. (요즘 유학생활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학교 생활을 마치고 전공과 관련되는 직업을 구한 것은 사설 학원이었다. 2년 동안 개인레슨을 하는 경험을 했다. 더이상 미국에 남아 있기에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조건 귀국해야겠다고 결정하고 곧바로 귀국을 서둘렀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이 1976년 7월이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가 아니고 창조주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나는 1977년 3월부터 영남대학교에 부임했다. 그곳에서 30년 교수 생활을 마쳤다. 제자 몇 명은 돌아가면서 안부 전화를 한다. 이것이 나의 삶의 흔적이겠다.
지금은 치열했던 젊은 날의 삶도 지나가고 모든 집착을 내려 놓았다. 노블카운티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주어지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평온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미국에서 첫 인연을 맺은 미국 가족과의 인연은 계속 지속되었고 그 집 안주인 Ruth Ault 와는 임종 이틀 전 국제 통화를 했던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나는 지금 미국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가사에 곡을 부친 아론 코프란도(Aaron Copland)의 곡 “Ah, To be all alone, must go alone”을 흥얼거리며 내 졸필을 끝마친다.
이영순 명예교수(성악과)
첫댓글 교수님, 멀리서 잊지 않고 추억 묶어 보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보지 못하던 시절의 모습도 볼 수 있어 더욱 반갑습니다. 이 코너에 첫번째로 글을 올리면서, 교수님의 '정성'에 힘입어 부지런히 이 코너를 채우려고 계획합니다. 널리 만남의 장을 마련하겠습니다. 건강하셔요! 겨울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