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직공 비문(密直公 諱 國龍 碑文)
공의 휘는 국룡(國龍)이요. 하동정씨이다. 고려 때 벼슬하여 광정대부밀직부사에 증직되었고 묘는 하동군 적량면 하곡 갑좌에 있다. 시조 휘 도정공(道正公)은 향병 단련으로 삼한의 말에 명성을 떨치셨다. 휘 석숭(碩崇)부터 연서(延叙)에 이르기까지 4대는 연대와 사적에 대하여 상세히 알 수가 없다.
장남 휘 지연(芝衍)은 고려 충렬왕(1275-1307) 때 벼슬하여 삼중대광 첨의찬성사 판선부사에 이르렀고 중국어에 능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또한 글씨와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여러 번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頫) 등과 더불어 시가(詩歌)를 부르는 예인이 되었음에 중국인들이 칭찬하면서 따랐다. 묘는 밀직공묘 오른쪽 갑좌에 있다.
5세손 휘 양(穰)은 조선 태종(1400-1418) 때 관직이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묘는 밀직공 묘역 건너 오른쪽 자좌에 있다. 영의정 문성공 휘 인지(麟趾) 역시 공의 5세손이며 평소 덕을 쌓았고 공적이 높아 종묘에서 쓰는 제기에 명기(名器)되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신 문헌공 휘 여창(汝昌)은 공의 7세손으로 도학의 바른 계통을 이어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그 후 먼 자손들도 문장과 일세를 빛낸 업적들이 많았으나 모두 싣지 못하였다. 아! 선조의 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오직 자손들의 정성과 부지런함에 있는데 세대가 먼데까지 번졌으니 문헌이 맑지 못하면 실전되는 일이 드문드문 있다. 지금 우리 밀직공 이하 3위의 묘가 한 곳에 같이 있기에 지금까지 5백여 년 동안 향불이 끊이지 않은 것은 어찌 자손들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 자손의 도리로써 삼가 이를 지키지 못하여 오랫동안 지속시키지 못할까 두려워 이에 무진년(1748)에 경향의 모든 종중께서 재정을 모아 금년 11월에 하곡동 입구에 비석을 세우게 되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는 고로 제 분수에 넘치고 망녕되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삼가 공의 관작과 묘조(墓兆)를 함께 서술한다.
영조 34 무인년(1758) 11월10일 세움
17세손 수영(遂榮) 짓고 함평후인 이학서(李學緖)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