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불타는 계절 (2)
희곡 ' 연이 불타는 계절 ' 은 최헌진 선생님이 쓰셨던 책들 중에서
제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선생님은 사이코드라마의 대중화에 앞장 서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희곡에서의 찬수처럼
고독과 예술을 즐기는 예술가이시기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술을 사랑하셨던 최헌진 선생님의 이 희곡을 조금씩 올려보겠습니다.
- 찬수가 책상 쪽으로 가서 서랍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낸다.
수애가 탁자 위 술잔을 재빨리 가져다 준다.
찬수가 한 잔을 따라 마신다.
수애도 그 잔을 이용해 재빨리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방 안을 서성이며 말한다. -
수애 : 그 당시에는 확실하게 외웠는데 , 적기도 하고 ...
하지만 행여 틀리더라도 이쁘게 봐주라, 응 ?
(사이 찬수 말투를 흉내 내며)
전 자살이란 인간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혼자만의 고독 속에 파묻혀 사느냐 ,
모든 인간 관계를 끊어내고 오직 예술, 창작이라고 하는 세계에 온 몸을 바쳐 살아가느냐 ,
아니면 집시나 이방인, 아웃사이더처럼 , 뜬구름 같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느냐 ...
그 모든 선택처럼, 자살은 높은 자긍심을 가진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 삶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고 혼자서 박수를 친다. 그리고 다시 술 한 잔을 찻잔에 따라 마신다)
그리고 황홀했던 동거 생활 ... 결국 5년 만에 난 널 떠났지.
우리들, 자살 예찬론자들의 사랑의 약발은 5년 만에 끝나버린 거지.
찬수 : 난 예찬론자 아니야.
수애 : 고마워, 입을 열어줘서 , (사이)
그래 알아, 하지만 내가 어려서부터 항상 죽는 걸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에 넌 감동 받았잖아 ?
아냐 ?
넌 중학교 , 고등학교 , 두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고 , 겁쟁이인 나는 단 한 번의 시도도 없었고 ...
찬수 : 난 널 도울려고 했어.
수애 : 그래, 넌 내가 너와 살면서도 가끔 자살 이야기를 하면 ... 절망했지
네 사랑의 힘으로도 내가 여전히 죽음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
하지만 그건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
생각해봐, 내가 절름발이인데, 네가 사랑한다고 다리가 고쳐지냐고 ?
아니잖아 ? 사랑한다고 입맛이 변하고, 좋아하는 색깔이 변하고 직업이 변하냐고 ?
찬수 : 직업이 바뀌다니 ?
수애 : 몰라서 물어 ?
찬수 : 난 너 간호사 그만 두라고 한 적 없어.
수애 : 아니 , 넌 내가 피아니스트이길 원했어.
찬수 : 그건 네가 죽어라 피아노를 싫어해서 ...
수애 :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 했잖아.
찬수 : ......
수애 : 어머니의 일방적 강요 , 그리고 그 지겨운 고등학교 내내 교회 성가대 반주 ...
난 음악적 재능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는데 말이야.
- 사이 , 수애가 오디오를 튼다. 슬픈 음악이 흘러 나온다. -
수애 : 그래 , 그건 너의 슬픈 집념.
찬수 : 도망친 건 너야.
수애 : 그래, 그것도 내 병이야.
찬수 : 그래,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
난 좀 , 자야 겠다. (바다가 보이는 창문의 커텐을 닫는다)
수애 : 알았어, 내 빨리 끝내고 널 자게 해주지.
(책상으로 가서 술을 따르지만 병이 비어있다. 서랍에서 새 병을 꺼내서 한 잔 마신다)
너에겐 이 섬이 무슨 의미지 ?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 ?
너만의 고독의 장소 ?
아 , 아니지.
찬수 : 내 이야기 말고 네 이야기를 해.
(사이) 쪽지 한 장 써 놓고 사라졌고 5년간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취를 감추었고
그리고 유명한 의사랑 결혼을 하고.
수애 : 그리고 또 쪽지 하나 남기고 , 이혼하고 ...
지금 그 옛날 애인을 찾아와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 ...
아니 용서를 빌고 있는 ... 미친년
(고구마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물고 손으로 김치를 집어 먹는다)
찬수 : (오디오를 끄면서) 넌 너 밖에 없는 인간이야.
수애 : (음식을 삼키지 않은 상태에서) 인정 !
찬수 : 그냥 떠나, 더 이상 자존심 깍지 말고
수애 : 난 자존심 없어.
찬수 : 그럴지도 모르지 (사이) 넌 내 삶을 완전히 뒤집어 엎었으니까.
수애 : (다시 고구마와 김치를 먹으면서) 인정.
찬수 : 누굴 지금 놀리는 거냐 ?
수애 : 진짜야 , 인정해.
내가 떠나고 , 네가 술 중독자가 되어 그림 하나 못 그린 ... 세월들 ...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찬수 : 그러니 조용히 돌아가라고.
수애 : 가는 건 내일이잖아.
찬수 : (잠시 사이) 넌 정말, 나쁜 애야. ( 술을 한 잔 마시고)
내가 널 ... 다 알면서 ...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 넌 정말 나빠.
수애 : 인정.
찬수 : 그래, 그런데 그 의사는 또 왜 버렸냐 ?
그 남자도 너한테 집착했냐 ? 엉 ?
수애 : 난 내가 필요없는 존재라고 느껴지면 가차없이 떠나.
찬수 : 필요 없는 존재 ? 이거 왜 이래 , 나에겐 ... 네가 ...
수애 : 너에게 그림이 있었지.
찬수 : 와우 , 이거 봐라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
수애 : 아니 , 이런 말하기 싫어 (입술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 입이 방정이지.
찬수 : 그림 때문이라니 .... 너 지금 그림을 질투했다는 거냐 ?
수애 : 아니 , 난 질투할 자격도 없어.
찬수 : 내가 그림을 그린 게 누구 때문인데 ?
내가 그토록 열심히 그림에 몰두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인데 ?
네가 원했잖아.
네가 그림만 그리라고 , 신문 기자 그만두고 그림만 그리라고 ... 먹고 사는 건 네가 책임진다고 ...
수애 : 그래, 넌 , 그 당시 , 거의 천재나 다름없는 화가였지.
알아 .... 그 바다 그림들 ... 격렬함과 고요, 무서운 혼돈 속의 적막함 , 빛과 물과 어둠의 조화
상상을 초월한, 이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바다 이미지 ...
다들 영국의 터너 이후 최고의 바다 , 대양의 탄생이라고 입을 모았지.
찬수 : 다른 사람들의 칭찬, 인정은 필요 없었어.
오직 너만, 너만 나를 인정해주고 , 너만 나를 사랑해주면 되었다고 ...
너도 그걸 알고 있었잖아.
수애 : 그래, 시작은 장대했지만 , 너에 비례해서 난 한없이 쪼그라들기 시작했지.
나중에는 넌 나를 ...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어.
찬수 : 와 , 미치겠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
수애 : 아니. 말이 안 돼.
다 내 문제이니까.
그래 , 네가 옳아 ... 네가 옳고 난 나쁜 년이야.
찬수 : ...... (다시 술을 마신다)
수애 : 미안해
이런식으로 다투려고 , 잘잘못을 따지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 ...
지난 3개월 네 곁에 있으면서도 그 어느때 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 속에서도 ...
아무튼 날 섬에 머루게 해 준 것도 고맙고, 할아버지에게 날 돌봐주도록 부탁한 것도 고마운데 ...
그래서 ... 고맙다는 말도 전하고 모든 걸 깨끗이 정리하고 싶었는데 ....
미안해 ,방향이 잘못되었어.
- 잠시 사이 -
찬수 : 나를 떠나 5년간 어디 , 외국에 나가 있었다며 , ?
수애 : NGO 라고 비정부 기구에서 운영하는 의료 사업인데
주로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 파견되서 간호 일을 하는 거였어.
찬수 : 그런데 왜 돌아와 ? 5년 만에 ?
수애 : 난 인내심이 4 ~ 5년 짜리인가봐.
그리고 인류애다 뭐다 , 그런 사명의식도 강하지 못한 년이고 ...
- 잠시 사이 , 찬수가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간다. -
수애 : 어디 가 ?
찬수 : 일 보러 , (나간다)
- 수애 , 잠시 문 쪽을 바라보다가 오른쪽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커텐 뒤 창문을 하나 자물통을 풀어놓고
커텐을 제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쌓여있는 액자들을 재빨리 들쳐보다가 문소리를 의식하고 책상 쪽으로 가서 술을 따른다.
찬수가 방에 들어와 난로 가에서 손을 비빈다. -
수애 : (술잔을 내려놓고)
결혼은 한 번도 안한 거야 ? 왜 ? (사이) 아니야.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그림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
흰 캔버스에 흰색 물감뿐이야.
찬수 : 이제 그만,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아. (사이)
그만 가주면 안될까 ?
우리 내일 보자.
수애 : 알았어 , 갈게. (사이) 하지만 나도 다시 한번 물어보자.
정말 우린 불가능한거야 ? 눈꼽만치도 가능성이 없어 ?
찬수 : 없어, 전혀 ...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수애 : 그래도 나에 대한 마음은 ...
찬수 : 난 네가 누군지 몰라, 낯설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냐. (사이)
난 네가 떠났을 때 ,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
나의 영혼은 두번씩이나 완전히 고갈되었고 ...
너 또한 그 속에서 이미 두 번씩이나 지워졌었다고, 알아 ?
그러니 구차해지지 말자.
수애 : 그래 , 알아.
나 때문에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
네가 있는 이 곳을 알아내기 위해 네 과거를 다 훑고 지나왔으니까.
찬수 : 난 아무 것도 없어.
텅 비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