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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2)
그레고리 K. 비일은 요한계시록 연구의 대가이다. 비일은 요한계시록 21:1-22:5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요한계시록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학계의 큰 주목을 받게 된 신약학의 권위자이다. 비일은 요한계시록 연구를 확장하여 연구의 결정판『성전 신학』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환상은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울 마지막 때의 성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함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와 같은 견해는 신구약 전체의 성전 신학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 도움을 주는 통찰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결론적 주장을 염두에 두고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환상과 이 환상이 성전의 성경신학에 대해 가지는 의미
요한계시록 21:1-22:5은 수많은 논의의 대상이 된 잘 알려진 텍스트로서 성경 전체의 마지막 환상을 포함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직 거의 발견되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1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면서, 21:2-3; 21:10-22:3에서는 동산처럼 생겼으되 성전의 형상을 가진 도시를 보고 있는 것일까? 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는 전 세계에 걸친 풍요로운 새 창조 세계의 무수한 숲과 강, 산, 물줄기, 계곡 같은 다른 특징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불일치 현상을 고대의 묵시적인 꿈과 환상이 가질 수 있는 불합리적인 특징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요한이 이 환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주장했음을 기억한다면 이 가정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말이다(예. 계 21:9을 1:1; 22:6과 비교하라). 또한 이 환상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선교 사명 완수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 및 사도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주요 쟁점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서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말한 다음, 요한은 환상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직 수목(樹木)이 우거진 도시-성전(city-temple)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 구절들에 묘사된 도시의 여러 치수와 건축적 특징은 미래성전의 치수와 건축적 특징에 대한 예언인 에스겔 40-48장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예. 계 21:2, 10-12:21:27-22:2 등). 요한계시록 21:18-21에서 성전의 기초를 이루는 보석들은 금으로 입히고 값비싼 돌들을 기초석으로 삼았던 솔로몬 성전에 대한 묘사를 반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열왕기상 6:20-22(5:17도 마찬가지)과 7:9-10을 차례로 보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21:16의 여러 치수가 열왕기상 6:20에 묘사된 "지성소”의 치수(지성소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전부 같은 수치로 되어 있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1:1에서 요한이 새로운 창조 세계를 보았으면서도 환상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만 성전의 모양과 구조물을 가진 도시에 대해서만 묘사하는 명백한 불일치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요한이 먼저 새로운 세계를 보고 나서 나중에 그 세계 안에 있는 도시-성전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로 다음에 묘사되는 "도시-성전"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창조 세계를 도시-성전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요한계시록 21:27을 묵상할 경우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텍스트는 도시의 성전에 "속된 것…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성전 경내에서는 어떤 부정함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보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예. 대하 23:19; 29:16; 30:1-20)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새로운 도시-성전 지역이 새로운 창조 세계 전체를 포함할 것이라는 점은 요한계시록 21:27이 어떤 부정함도 새로운 세계 안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이런 관찰은 어떤 부정함도 새로운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렇듯 도시-성전을 새로운 세계와 동일시하는 입장은 새로운 도시에서 부정한 자들을 배제하는 요한계시록 22:15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텍스트도 부정한 자들이 새로운 창조 세계의 거주지로부터 배척당할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원토록 불못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제10장을 보라).
또 다른 관찰에 의하면, 새로운 우주도 도시-성전과 동일시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21:1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요한의 환상으로 시작하고, 다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 관해 설명한다(2절). 그 후에 사도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선포하는 "큰 음성"을 듣는다(3절). 2절의 둘째 환상은 새로운 우주에 관한 첫째 환상을 해석하고, 3절에서 장막에 관해 그가 들은 음성은 1절과 2절을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1절의 새로운 창조 세계는 같은 절의 새 예루살렘과 동일하며, 이 둘은 공히 3절의 "장막과 동일한 실재를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보기-듣기"(seeing-hearing) 양식은 1-3절이 동일한 실재를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 사도가 보는 것은 이어서 그가 듣는 것에 의해 해석되며, 그 역방향도 마찬가지다. 좋은 예를 우리는 요한계시록 5: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텍스트에 의하면 요한은 승리를 거둔 "유대 지파의 사자에 대해 듣는다. 이어서 6절에서 그는 탁월한 권위를 가진 죽임 당한 어린 양을 보는데, 이 구절은 어린 양인 메시아가 어떤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 즉, 역설적이게도 그는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자격으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요한계시록 21:1의 "새 하늘과 새 땅"이 21:2; 21:9-22:5의 지상 낙원인 도시-성전에 의해 규정되고 그것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하늘과 땅"이 때때로 예루살렘이나 그곳의 성전을 가리키는 방식일 수 있다는 레벤슨(J. D. Levenson)의 견해에 의해 뒷받침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성전을 가리키는 일종의 환유법(metonymy)(환유법은 저자가 의도하는 것을 그것과 관련된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방식을 일컫는다(역자 주-예를 들어 왕을 가리키기 위해 왕관을 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레벤슨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사야 65:17-18을 인용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비일 강조).(Levenson 1988: 89-90; 1984: 294-295.) 이 텍스트에 나오는 두 개의 새 창조 진술은 동의어적 평행 관계에 놓여 있는 듯하다. 이사야 65:17이 요한계시록 21:1에서 언급되는 사실로 볼 때, 요한계시록 21:2의 새 예루살렘을 21:1의 "새 하늘과 새 땅”과 같다고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앞에서 언급한 레벤슨의 견해처럼, 그리고 우리가 이 책 전체에서 계속 보게 될 내용처럼, 1절의 새로운 창조 세계와 2절의 새 예루살렘이 3절에서 온 인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장막"으로 이해된다는 점 역시 자연스러운 동일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 세계와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장막을 가리키는 것과 다름없다. 이 장막은 요한계시록 21장 전체에 걸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드러내는 참된 성전이다.
요한계시록 주석을 집필한 이후(출간은 1999) 이 성경의 책을 계속 묵상하던 중, 특히 요한계시록 21장의 성전에 대한 내 결론을 성찰하던 중, 나는 구약과 신약의 다양한 성전 텍스트들 사이에 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의 목적은 요한의 묵시, 그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환상에 묘사되어 있는 성전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왜 요한이 자신의 책의 마지막 환상에서 새로운 창조 세계를 수목이 우거진 도시-성전과 동일시하는가라는 앞의 질문에 간략하게 답하고자 한다. 이미 나는 수년 전에 쓴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여기에 대해 간결한 답을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런 답변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답변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보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구약성경의 성막과 성전들은 본래 지성소에 한정되었던 하나님의 성막 임재가 실제로는 지상 세계 전체에 걸쳐 있다는 우주론적 차원의 종말론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 21장의 환상은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울 마지막 때의 성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함이 가장 타당하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내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21장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신구약 전체의 성전신학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 도움을 주는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이 주장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려는 과정에서 나는 구약성경의 성전과 고대 근동의 신전에 있는 우주적인 상징성의 증거를 개관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에덴동산이 최초의 원형(原型) 성전이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만들어진 모든 성전의 모델이었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에덴에 대한 이런 이해는 구약성경의 성막과 성전들이 피조 세계 전체의 축소판(소우주)을 상징한다는 개념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우주의 축소판을 상징하는 구조물로서 전 세계에 걸쳐 발견되는 성막과 성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종말론적인 성전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품고 만들어졌다. 이처럼 우주적으로 확대된 종말론적인 성전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환상이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성전에 관한 신약성경의 다른 관련 구절들을 추가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책의 해석 방법론에 대한 간략한 설명
이 책에서 내 연구의 기저에 놓인 중요한 한 가지 전제는 신구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초적인 견해는 성경에 통일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서 공통의 주제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비록 가장 중요한 공통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자들의 견해가 다르겠지만,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논의하는 데 필요한 공통의 자료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중요한 전제는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전달된-가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이 의도를 완벽하게 깨달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특히 구원의 목적이나 거룩한 삶(성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등의 주제에 있어서 그렇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주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이 책을 마무리하는 장(제12장을 보라)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전체에 걸쳐서 어떤 특정한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 일련의 증거 자료를 제시하는 전형적인 논의 전략을 사용할 것이다. 이런 자료 중 일부는 다른 자료보다 더 설득력 있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관련 자료 전부를 전체로서 두고 살펴본다면, 설득력이 약한 자료는 그것 홀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해석을 지지하기 위한 논의 중 일부가 자체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논증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나타나는 더 큰 설득력을 얻기 위해 의도된다는 것은, 때때로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 또한 이런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축적된 논의들의 총량이 여기서 주장되는 주요 개념의 타당성이나 개연성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레고리 K. 빌 지음, 강성열 옮김, 『성전 신학』(새물결플러스, 2014), pp. 31-36.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신학은 물론이고 성경을 묵상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유익한 내용입니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 '새 하늘과 새 땅'은 사65:17과 66:22을 반영한다.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논'(* )은 '시간적으로 최근이나 새로운'을 의미하는 헬라어 '네오스'(* )와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Johnson). 그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임재하사 그분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다(3절;벧후 3:13, Beasley-Murray, Johnson, Mounce).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앞서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본절의 강조점이 '새 하늘과 새 땅에의 거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음을 나타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범죄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이 하늘과 땅은 죄와 사망이 온전히 사라지는 종말론적 구속의 날을
고대한다(롬 8:31). 한편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관된 것으로 '바다' 역시 지리적인 것이나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이다(Johnson). 구악성경에서 '바다'는 악과 연관되어 비유되고 있으며(사 57:20), 본서에서는 사단이 나오고(13:1)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20:13) 이해된다. 이러한 사실은 '바다'가 악을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의 '바다도 있지 않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질서, 즉 타락과 죄와 사망으로 가득 찬 질서와는 엄격하게 분리된 새 질서임을 시사한다(Ladd).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같더라 - 본절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새' 역시 앞절에서 사용된 '카이넨'(* )으로 지상의 옛 예루살렘과는 달리 질적으로 변화된 하늘의 예루살렘을 암시한다. 본절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두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능력과 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곳은 죄와 사망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물이요
하나님의 거처이다(Morris, Johnson).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본문의 남편과 신부의 비유는 새 예루살렘이 지리적인 것이거나 공간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남편과 신부' 의 비유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19:7사 61:10)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백성간의 교제를 암시한다(Mounce, Kiddle, Ladd, Johnson).
매우 좋은 설명입니다.^^
매우 잘 읽었습니다.
열왕기상 6:20 그 내소의 안은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이십 규빗이라 정금으로 입혔고 백향목 제단에도 입혔더라
<호크마 주석>
내소...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이십 규빗이라 - 내소, 즉 지성소는 완전한 정육면의 입방체(立方體)였다. 모세 성막의 지성소 및 장차 천상의 거룩한 성 역시 입방체의 모양을 띠고 있다(계 21:16). 분명 이것은 정방형으로서 '절대 완전' 또는 '절대 거룩'의 개념을 상징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J. Hammond). 그런데 본래 성전의 높이는 10규빗의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가장 무난한 견해는 지성소 위의 공간에 10규빗 높이의 '윗 다락'(대하 3:9)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Keil, Stingers).
정금으로 입혔고 - 본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 방식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금으로 입히다'(* , 예차페후 자하브)란 말은 금으로 두텁게 싸는 것일 수도 있고, 도금(鍍金)을 의미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말을 얇은 금판을 못으로 목재에 부착시키는 방식일 것으로 말한다(Hammond).
특히 대하 3:9은 금 못의 사용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주장이 옳다고 본다. 아마 그러한 기술은 애굽에서부터 익힌 기술일 것이다(출 25:11, 13). 한편 만일 그랬다면 성전 벽에 입힌 금은 엄청난 양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침략자들이 그 같은 금을 약탈해 갔다는 기록이 구체적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점(왕상 14:26;왕하 14:14)을 들어 본절의 사실성을 부인하는 학자도 있다(B. Stade). 그러나 대하 3:6로 미루어 이방 침략자들이 약탈해간 보물, 즉 '보석'은 성전의 금을 포함한다. 실제 성전 내부에 사용된 금은 600달란트(약 20,400kg)나 되었다(대하 3:8).
백향목 단에도 입혔더라 - 개역 성경 및 KJV의 번역은 '백향목 제단에 금을 입혔다'라는 의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원문은 '제단에 백향목을 입혔다'라고 되어 있다. 원문대로라면 제단의 몸통은 백향목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 제단에 또 나무를 덧입혔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2절과 함께 연결해 보면 제단은 백향목을 입힌 다음 다시 도금을 한 것이 된다(Bahr). 즉 성전 내부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의 공정(工程)을 거친
것이다. RSV 및 기타 영역본들은 무난하게 '백향목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made an altar of cedar) 정도의 의미를 취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백향목 단'(제단)은 '향단'을 가리킨다(Keil, Patterson). 비록 향단은 지성소 바로 입구의 '성소'에 위치하고 있었지만(출 30:6;40:5, 26), 그 기능면에 있어서는 '지성소'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지성소에 속한 것처럼 묘사된 것이다. 22절의 '내소(지성소)에 속한 단'이란 표현 역시 이와 같다.
좋아요. 😄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호크마 주석>
65:17
본절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이후 새로이 회복될 공동체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통치시대의, 더 이상 고통과 슬픔 따위가 없는 완전한 세계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갈렙이 그 발로 밟았던 바로 그 땅을 물려받았듯이(신 1:36), 메시야와 그의 백성들은 전혀 새롭게 변화된 새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34:4;66:22;히 12:26-28;벧후 3:13;계 21:1).
매우 좋은 책입니다. 성경 신학의 책이니 깊이 있는 말씀 묵상에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더욱 좋아 보입니다.
서론만 읽어도 계시록의 핵심과 성전 신학의 깊이와 맛이 느껴지는 매우 훌륭한 글이라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