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몽
김홍섭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 꿈속에서 커다랗고 둥근 보름달을 보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달은 하늘 높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안에 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엄마는 마음이 무거우셨다고 한다.
"아니, 저 둥근 보름달이 왜 중천에 뜨지 않고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떴을까."
꿈속에서도 그렇게 걱정하셨다는 이야기를 나는 여러 번 들으며 자랐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모두 '식(植)' 자 돌림이었다.
나 역시 그 돌림자를 따라 이름을 지을 차례였지만, 엄마는 태몽이 마음에 걸려 아버지께 다른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해서 내 이름은 클 홍, 빛날 섭 자를 써 '홍섭'이 되었다.
초가집에 떠 있던 보름달이 언젠가는 더 높이 떠 세상을 밝히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다.
어릴 적 나는 얼굴이 늘 붉은 편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야, 붉을 홍!" 하고 놀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붉을 홍이 아니라 클 홍이야." 하며 웃으며 고쳐 주곤 했다.
그때는 그 이름에 담긴 부모님의 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과묵한 분이어서 함께 여행을 가거나 놀아 준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말없이 지어 주시던 미소만으로도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면 아버지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으셨는지 나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키우셨다. 먹을 것이 생기면 언제나 내 몫부터 따로 챙겨 두셨고, 여름이면 수박 한 통을 사 오시며 "이 절반은 우리 홍섭이 거다." 하고 웃으셨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건강마저 점점 나빠지셨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나도 군인이 되었다.
제대를 앞둘 무렵 결국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나는 무너져 가는 집안을 지키기 위해 유흥업소 네 곳을 오가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하루 한 끼를 밀가루 수제비에 고추장을 풀어 먹으며 버틴 날도 적지 않았다.
뒤늦게 아버지가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천향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진단서를 발급받아 용산 보훈청에 제출한 끝에 원호 대상자로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약간의 연금을 받을 수 있었고, 나 역시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직장을 따라 서울을 떠나 이천으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부모님을 모시며 두 아이를 키웠고, 아버지는 병세가 호전되어 작은 텃밭을 가꾸며 소박한 행복을 누리셨다. 그러나 이천에 정착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예순아홉의 나이로 지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
또다시 십여 년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들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섯 번의 뇌수술을 견디는 동안 나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기를 기도했다.
가까스로 아들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고, 오랜 재활 끝에 아들은 건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아내와 평생 알뜰히 모은 아파트와 땅을 모두 처분해야 했다.
그래도 원망하지 않았다.
든든한 직장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들이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건강을 회복한 아들은 좋은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나는 대기업에 다니는 든든한 며느리를 맞이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엄마의 손은 늘 거칠었지만, 내 이마를 짚어 주던 손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다.
돌아가시기전 나는 엄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었다.
엄마의 마지막 말씀은 " 왜이랴 " 였다.
엄마를 떠나보낸 뒤 나는 한동안 카카오톡 프로필에 '왜이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두었다.
그 말을 볼 때마다 엄마가 아직도 나를 불러 주시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장례를 마치고 지난 삶을 돌아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떠 있던 달이었구나.'
가난도 있었고, 아버지의 병도 있었으며, 아들의 사고도 있었다.
삶은 늘 무너질 듯한 초가집 같았다.
하지만 나는 쏟아지는 비를 등지고도 불빛 하나 꺼뜨리지 않았고, 뜨거운 볕 아래에서도 가족에게 내어 줄 그늘만은 거두지 않았다.
흙담에 주름이 깊어질수록 달빛은 더욱 깊고 환하게 집 안을 비추었다.
아이들이 마당을 뛰놀던 웃음소리는 어느새 각자의 삶을 찾아 멀어졌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달은 한결같이 밤을 밝히며 우리 가족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십 년쯤 지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는 것을... 남들보다 조금 늦었을 뿐이었다.
지금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어두운 밤을 조금이나마 밝혀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둥근 보름달이 내 방 창문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나는 그 달빛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초가집에 떠 있던 달은 마침내 중천에 올랐다.
그 달을 하늘로 밀어 올린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평생 나를 위해 기도하며 이름 속에 희망을 담아 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https://youtu.be/vQnbKz5a-3A?si=c3mAGgUn2tobBZj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