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작사:백창우 작곡:백창우 편곡:류형선)
1 당신은 하늘의 아들 사랑의 노래를 갖고 온 이 당신은 땅의 사람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잠든 이들을 깨우고 평등세상을 여는 이 새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속에 우뚝 서 계시는 이
2 당신은 하늘의 아들 맑은 눈물을 가진 이 당신은 땅의 사람 슬픈 것들을 감싸는 이 갈라진 것들을 잇고 대동세상을 여는 이 새 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계시는 이
3 당신은 하늘의 아들 정의의 노래를 부르는 이 당신은 땅의 사람 자유의 아침을 여는 이 묶인 이들을 풀고 해방세상을 여는 이 새 날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우뚝 서 계시는 이
4 당신은 하늘의 아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 당신은 땅의 사람 죽은 것들을 살리는 이 분단의 사슬을 끊고 통일세상을 여는 이 새 날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계시는 이
민중복음성가/기독노래운동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피복 노동자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는 절규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했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권리를 처절하게 부르짖은 외침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 1974년 민청학련사건 그리고 일련의 긴급조치들이 잇따르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민주화 운동에는 기독교도 함께했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정의를 외치는 운동은 기독교의 진리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 그런 의지는 노래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한국의 복음성가는 민주화운동 속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는 "뜻 없이 무릎꿇는" 같은 찬송가를 비롯해서 "가라 모세", "오 자유" 같은 흑인영가 그리고 미국의 흑인민권 운동에서 불리던 "우리 승리하리라" 같은 기독교 노래들이 불려졌다.
70년대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민권운동의 노래가 드물었다. 민주화 운동에서 문화적인 움직임, 특히 음악적인 움직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노래가 자연스럽게 시위 현장에 등장했다. 이렇게 초창기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기독교 노래들이 자주 불리면서 일반인들도 이런 노래에 익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60년대부터 파격적인 문화 형태를 예배에 도입한 경동교회에서는 김문환을 중심으로 외국의 기독교 노래를 번안해 소개했다. 70년대 중반 이후 경동교회를 비롯한 진보적인 교회를 통해 알려진 "외딴 섬과 같이","형제가 쓰러져가네" , "미칠 것 같은 이세상" 등의 노래들은 현실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동안 미국에서 들어오던 가스펠 송과를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러 움직임은 이후 기독노래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노래운동의 시발점은 김민기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노래는 70년대와 80년대 시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렀는데 그 중엔 교회에서도 복음성가로 널리 불리던 것이 있었다. 바로 "금관의 예수" 였다. 이 노래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였다. 이 노래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도입부에 나오는 시를 토대로 1973년에 작곡되었다. 제목에 '예수'가 들어 있어서인지 복음성가 가수들이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70년대 후반 심의문제로 "주여 이제는 그곳에" 로 양희은이 발표했던 "금관의 예수"는 나중에 김민기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 로 원래 제목을 찾아 다시 발표했다. 김민기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서 노동자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해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민기의 노래는 자연스럽게 기독교계에 스며들었다.
복음성가를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는 7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점차 확산되어 갔다. 진보적인 기독청년회인 EYC의 문화부에서는 『젊은 예수』와 『노래하는 예수』라는 노래집을 내는데 거기에는 기존의 번안곡들과 함께 운동가요도 꽤 들어있었다. 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은 합법적인 공간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민주화 세력들은 교회 안으로 많이 들어왔고 교회를 통해서 운동권 음악이 나왔다. 1978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테이프로 만들어 냈다. "공장의 불빛"은 70년대 노동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노래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게 교회와 연관을 맺은 김민기 노래는 뒤에 나온 『민중복음성가』,『평화의 아침을 여는이』같은 노래집에 실려서 진보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불렀다. 여기에 실린 김민기의 노래는 "금관의 예수", "상록수",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 ", "이 세상 어딘가에" 등이었다. 한편 민족성을 찾고자 하는 국앙풍의 노래들도 나왔다. 소설 『어둠속의 자식들』,『꼬방동네 사람들』의 배경이 된 달동네의 빈민공동체 운동을 주도했던 서울 동월교회에서는 이성재가 국악 찬송을 만들어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그가 만든 "우리의 고난을 주께서 아시네"라는 곡은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자주 벌렸다. 이성재는 후에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되기도 했다. 광주에서 우리소리연구회라는 모임을 이끌었던 정세연도 80년대 초반 국악찬송과 민중복음성가를 만들었다. "가시버시 맺음날"(결혼 축하 노래), " 사랑과 평화를 위한 노래 ", "마침찬양" 등의 기독교 음악이 있었고 "꽃아 꽃아", "광주출정가", "통일은 언제일까" 같은 민중가요도 있었다. 그의 노래는 주로 민요에 바탕을 둔 것들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건용도 기독교적인 정서와 국악어법을 충실히 담아 낸 곡을 많이 만들었다. 그는 여러 국악성가 외에도 합창곡 "황색예수" 같은 곡을 만들어 냈다. 농민들의 정서를 잘 담아 온 채일손 목사는 "십자가(윤동주)", "정의를 심어라", "부활의 몸으로" 등을 작곡했다. 마산에서 활동하던 감리교인 고승하는 "고백", " 자랑스런 노동자", "여공일기", "편드시는 주님" 등 다수의 곡을 내놓았다. 1983년부터 감리교 청년회 노래선교단에서 활동하던 고상미도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문화 간사로 일하면서 노래를 만들어 냈다. 목사인 김용수도 1980년대 초중반에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살아온 이야기",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 "노동의 새벽" 등의 노동자의 삶과 정서가 담긴 노래를 창작항 교회와 민요연구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에서 움튼 기독노래운동은 80년대 중반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발전해나가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장청노래선교단과 감리교의 감청노래선교단이 생겨났다. 1986년 장청의 초대 단장이었던 주현신은 "한반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를 발표했다. 주현신은 "부활의 노래", "새날에 선 겨레여"를 만들어 내면서 기독노래운동이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과 역사의실을 나타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차원에서 기독교 진영에 몸담았던 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면서 기독노래운동은 주춤했다. 그러자 순수한 기독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들만 남았고 이들은 1990년 노래집 『민중복음성가』1991년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를 내면서 기독노래운동의 방향을 다시 세웠다.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민중찬송가 편찬위원회가 펴낸 『민중복음성가』는 민중교회를 중심으로 널리 쓰여졌다.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는 장빈, 백창우, 고상미, 전희안, 주현신, 류형선, 정서영 등 기독노래운동에 꾸준히 관여해오던 이들이 엮어 낸 것으로 자문위원에 문익환, 장기천, 조화순 목사, 그리고 노동은, 이건용 등이 참여했다. 이들 노래집에는 기존의 복음성가뿐만 아니라 운동권에서 불리던 기독교적인 노래와 민중가요가 두루 실려 있었다. 1992년 가을 앨범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가 나왔다. 백창우, 주현신, 류형선 세 명의 작품집인 이 앨범은 90년대 기독노래운동을 새롭게 열어간 이정표가 되었다. 80년대 초반부터 복음성가계에 관여했던 백창우는 노래패 '노래마을'을 이끌면서 복음성가, 어린이 노래, 창작민요를 발표해왔고, 장청에서 활동하던 주현신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참교육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민족음악연구회에서 활동하던 류형선은 이들을 만나 기독노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류형선의 "그대 오르는 언덕", 주현신의 "새날에 선 겨레여", 백창우의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90년대의 기독노래운동의 역사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1992년 4월 기독교 장로회는 희년을 위하 노래 모임을 만들자는 뜻을 논의했고 그 결과 정의, 평화, 생명, 창조질서의 보전을 뜻하는 JPIC 노래패가 탄생했다. JPIC 노래패는 1993년에 '새하늘 새땅'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1994년 가을 첫 앨범을 냈다. 희년복음노래1집으로 나온 이 앨범의 타이틀은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이었다. 한편, 진보 진영이 아닌 복음주의적인 기반 위에서 노래운동을 이어간 모임이 등장했다. 1991년에 창단된 노래운동모임 '뜨인돌'이었다. 1990년 가을 서울대학교 안에서 기독교 연합모임이 생겨났고, 그 모임에 속한 91년 6월에 창단한 것이다. 함께 사는 삶, 민족, 역사 등의 진실을 담아 내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구원을 드러낼 노래를 뜨거운 심장으로 찾는 것이 뜨인돌의 목적이었다. 이들은 대학가에서 기독 청년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발표해 나갔고, '새하늘의 찬양 새땅의 노래', '이제 우리 역사의 휘장 속으로 ', '말씀이 노래가 되어 찬양은 육신이 되어' 등의 주제로 공연을 열면서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본 현실을 노래했다. 뜨인돌은 악보집도 함께 내면서 기독노래운동의 이론을 함께 전개해 나갔다.
글 출처 : http://www.c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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