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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성균 정진우
시인 양명문 ▲ 작곡가 변훈 ▲ 바리톤 오현명 - 명태
군 복무시절 - 변훈과 김동진 작곡가 윤용하 (1922~1965)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가 있었지요 - 오현명
한국 최초 오페라 공연 -1948년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올해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여기저기 베르디를 기념한 많은 공연과 행사가 열리고 있다. 1813년 탄생한 베르디는 세계 오페라 역사에 불멸의 유산을 남겨준 위대한 작곡가로 기록 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오페라 역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연된 오페라가 바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이기 때문이다. 춘희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이 오페라는 해방 후인 1948년 1월 16일 서울 시공관 무대에서 5일 동안 1일 2회씩 공연됐다. 해방 후 당시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부족한 상황에서 최초로 시도된 이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우리나라 일반 관객들이 ‘오페라’ 라는 서양 음악장르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다들 낯설고 생소한 이 서양식 ‘구경거리’에 눈을 반짝였음에는 틀림없다. 1월 중순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매회 인산인해를 이뤘고 언론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등 큰 화제가 됐다. 이런 높은 인기로 같은 해 4월 재공연까지 할 정도였다.
한국 초연 된 오페라 춘희의 여주인공 비올레타역은 소프라노 김자경과 마금희가 맡았다. 알프레도역은 단독으로 테너 이인선, 제르몽역에 바리톤 옥인찬 외에도 정영재, 고종익, 황병덕, 김노현, 노형숙, 박승유 등 성악을 서양식으로 교육 받고 공부했던 많은 이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거기에 서항석이 연출을 하고 임원식이 지휘하는 고려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았고 서울대학교 음대 학생들이 합창을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훗날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지내며 우리나라 성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약하는 베이스 오현명도 “저녁식사 준비 다 되었소” 이 한 마디를 하는 하인 역할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도 서울음대 학생이었다.
두 사람의 비올레타를 비롯한 출연진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감격과 설렘에 출연료도 개의치 않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너무나 열정적으로 공연준비에 임한 나머지 부작용도 있었는데 소프라노 마금희는 관객들에게 더욱 좋은 노래를 들려주고자 노래가 한 곡 끝날 때마다 수시로 날계란을 삼키다 그만 탈이 나서 3일째부터는 김자경 혼자서 무대에 서야했다. 김자경은 하루 2회 공연 일정을 거뜬히 소화하며 강철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자경
오페라가 공연된 그 해 1월은 혹독히도 추웠던가 보다. 김자경은 “1월에 공연되었는데 영하 15도의 꽁꽁 얼어붙는 강추위였어요. 어찌나 추웠는지 숯불을 무대 위에 피워 몸을 녹이려다 그만 공연 도중 숯 냄새로 까무라치는 등 고생이 대단했어요. 그리고 아리아 ‘에스트라노’를 부를 때는 너무나 긴장해서 얼굴에 땀이 송송 맺힌 것이 낮은 온도로 이상스레 고드름이 생길 정도였어요.”라고 회고했다. (1971.5.29자 경향신문 인터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왜 하필 1월 엄동설한에 공연됐는지는 모르나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무대도 허술하기 그지없어 여주인공이 신은 하이힐은 한 번 무대에 박히면 빠지질 않았고 김자경은 노래하랴 관객들 몰래 구두굽을 빼내며 이동하랴 진땀을 뺐다고 한다. 또 예산 부족으로 남자들은 그냥 본인들의 턱시도를 입고 여자들의 의상만 준비했는데 그나마도 막이 올라간 뒤 도착했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전한다.
테너 이인선 |
요즘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한국 최초의 오페라를 기획하고 무대에 올린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이 공연의 알프레도역을 맡은 테너 이인선이었다.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의사였던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도 성악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의전 졸업 후 황해도 황주에서 병원을 개업했다가 1934년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 한국 성악가 제 1호로 세계적 테너 스키파(Schipa)의 은사 체키(Chechi)의 문하생으로 수업하며 더욱 오페라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1937년 귀국해 서울 부민관, 일본 동경 히비야공회당, 중국 칭다오 등지에서 독창회를 열어 동양의 스키파라는 호평을 받았다.
귀국한 뒤 개업의로 활동하는 한편 뜻을 같이하는 동료, 제자들을 규합하여 한국 벨칸토회를 함께 창립했고 조선오페라협회를 조직하여 조선오페라협회 주최로 1948년 1월 역사적인 오페라 춘희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우리말 번역, 제작, 주역까지 맡아 1인 3역을 해냈고 오페라도 성황리에 마쳤지만 상업적인 경영에는 어두웠던 관계로 공연 뒤 집과 피아노까지 처분해야 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우리나라 오페라를 위해 노력하던 그는 한국전쟁 발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까지 합격했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테너 이인선은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한국오페라와 성악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소프라노 김자경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오페라 1세대들은 대부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었고 이인선이 만든 토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또 오페라 춘희의 성공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훗날 1964년 엄앵란, 신성일 주연의 ‘동백아가씨’란 영화가 만들어졌다. 섬 처녀와 서울 청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춘희를 각색해 만든 작품이다. 당시 엄청난 히트를 쳤고 영화 주제가 ‘동백아가씨’를 부른 이미자는 국민가수가 되었다.
1948년의 우리나라는 해방 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데다 좌우익으로 나뉜 혼란기였고 심지어 미군정 치하에 있었다. ‘문화’ 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시기에 서양의 오페라라는 장르를 소개하고 무대에 올린 열정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오페라 공연이 돈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는데도 말이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오페라가 공연 된 지 올해로 딱 65주년이다. 반가운 것은 오는 5월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이인선이 설립한 조선오페라협회를 계승한 조선오페라단이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다시 공연한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주역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이번 5월의 라 트라비아타는 65년 전 시공관의 춘희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이 땅에 오페라라는 예술을 처음 선보였던 그 시절 그들의 베르디와 똑같은 베르디가 다시 노래될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한국 최초의 여성: 카네기홀 독창회 연주자 (19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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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1950년 5월5일은 성악가 김자경의 카네기홀 데뷔일이다. 그때까지 카네기홀 공연을 한 한인이 없었으니까 최초라는 기록이 뒤따른다. 김자경이 줄리어드 음악학교로 유학온 것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그달. 미국유학도 신생정부 최초의 기록이다. 이화여자 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해방과 더불어 모교 음악교사로 있던 김자경은 정식으로 국가시험을 치루고 2년간의 풀 스칼라쉽을 얻어 뉴욕에 왔다. 오기전 그는 국내에서 가극 춘희의 주역을 맡아 명성을 얻었을 때였으므로 꿈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의 꿈은 줄리어드를 발판으로 라 스칼라좌의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푼 꿈도 잠시, 뉴욕에서 처음 맛본 경험은 좌절이었다. 당대의 릴리 폰즈 , 탈리아비니등 국제적인 성악가들을 접하고 나서 느낀 것은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날 저녁 그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모든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귀국하거나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한때 세계를 좁게 보았던 그의 교만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내리는 좌절을 겪었다. 일생을 통해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그날밤을 새우며 기도에 매달렸던 새벽녁 귀에 들리는 희미한 음성을 따라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성악가로서 대성해 보려던 당초의 뜻을 접고 후진양성을 위한 발성법 연구로 방향을 바꾼 것. 이때부터 10년간 노력끝에 이룬 발성법 연구분야에서 그는 정상의 경지에 다달았다.
줄리어드 2년간의 수학기간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카네기홀 리사이틀 일정이 잡혔다. 1950년 5월5일의 공연에서 그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발간되던 뉴욕헤럴드 트리뷴과 뉴욕타임즈등이 일제히 좋은 평을 실었다. 들뜬 마을 달래고 유럽을 돌아 귀국준비를 하던중 뜻밖에도 한국전쟁의 비보를 접했다. 6.25 사변이었다. 귀국계획을 늦추며 사태를 관망하던 그에게 미국방성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부터 오는 전쟁에 관한 필름을 보고 거기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국 아나운서로 있던 황재경과 함께 한동안 그 작업을 했다. 이승만을 비롯해 채병덕, 정일권, 손원일, 신성모, 윤치영, 장택상, 김석원, 조병옥, 김성수등 국내 주요인사들의 모습이 필름에 자주 나타났다.
전쟁이 터지기전 남편 심형구 화백이 롱아일랜드 소재 아델파이 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합류한 후로 부부는 맨하탄 548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아파트에 살면서 조국을 위해 나름대로 무언가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쯤 그의 매니저가 '원 월드 앙상블'이라는 음악여행을 제의해 왔다. 5명 그룹으로 된 앙상블은 한국을 알리는데 좋은 기회도 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전역을 순회하는 이 여행에서 김자경은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미국신문에는 매일같이 한국전쟁에 관한 뉴스가 도배되다 시피 했다. 전사자 소식 외에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아들의 모습, 파리떼가 우글거리는 비위생적인 장면등이 연일 TV화면을 장식했고 한국이란 나라는 호전적인 국가로 매도당할 때였다. 한국전선에 아들과 남편을 보낸 가족들의 안타까움을 달래주는데 음악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출연진 소개에서 한국으로 부
터 온 김자경이라고 인사를 할때는 온 청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환영했다. 음악회가 끝나면 무대 뒤로 우루루 몰려와 한국에 대해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애썼다. "한국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야만국이 아니다. 5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과 전혀 다른 나라다." 그의 음악여행은 민간외교로서의 성과도 좋았거니와 자신을 알리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1955년 로드 아일랜드에서 열린 하계음악제 '써머 투어 오페라'에서 리처드 터커를 비롯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수들과 함께 공연, 올페우스와 유리디체의 아몬드역, 칼멘의 미카엘라역을 소화했다.
김자경은 10년 뉴욕생활 동안 봉제공장과 보석공장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포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1958년 귀국후 이대 교수를 지내다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 1999년 별세한 후로 그의 아들들이 이를 계승하고 있다.
데뷔시절 뉴욕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우측부터 김자경.임길재, 모윤숙,
뒷줄 우로부터 황재경. 심형구(남편) 손원일 제독.
“한국 최초의 오페라는 누가 주최했을까?”
1934년 일제 강점하의 조선에서 이탈리아로 성악을 공부하겠다며 배를 탄 젊은이가 있었다. 세브란스의전에서 의학을 전공했던 그의 이름은 이인선.
숙련된 테너 음성을 목에 담아 4년만에 귀국한 그는 해방 후 ‘한국벨칸토회’를 창설해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1948년 ‘국제오페라사’를 창단,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를 무대에 올림으로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52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오디션에 합격한 주인공이 됐다. 1960년 54세의 이른 나이로 별세, 뜻을 미처 다 펼치지 못했지만 그가 싹을 뿌린 한국의 오페라는 오늘날 조수미 홍혜경 신영옥 등의 ‘월드스타’를 배출할 정도로 자라났다.
▲ 이인선 | ||
유선이 연전 상과(商科)를 나와 테너 가수가 됐다면 형 인선은 연전 문과에 입학해 2년을 다니다가 다시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나와 음악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유학을 다녀온 테너 가수다. 두 형제가 천부의 재질대로 애초의 진로를 바꿔 대성한 특이한 음악인들이다. 이런 내력의 뒤에는 형인 인선이 의사의 길을 잠시 보류한 채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용기와 모범이 있었던 것이고, 아우인 유선 역시 뒤에 미국에 음악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의사라면 당시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접과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직업인데 그것을 밀어놓고 음악인의 길을 간 그의 예술적 열정과 용기가 대단하자는 점이다. 1931년 그가 유학을 가기 전 언론인 홍종인(洪鍾仁)이 그에 대해 쓴 그 같은 염려 섞인 평가를 읽어보자.
“이인선 씨 「세부란쓰」에서 의사 공부를 하면서 축음기로 많이 배웟다는 재간 많은 테너 가수다. (부츠 부인에게도 지도를 받고 한때는 안기영(安基永) 씨 한데도 배웟다지만) 음이 퍽 곱다. 어느 해 가을이엇든가 공회당에서 전문학교 음악대회에 「헨델」의 「라르고」와 또 「리고렛」을 듣든 기억이 깊다. 비전문가이나 실력 이상의 인기를 가진 가수로 그의 장래는 기대할 바 많다. 그러나 지금 세부란쓰 병원 의사로 잇는 그가 어느 정도까지나 더 음악 전문을 할는지.”
이들 두 형제가 인천과 맺은 짧은 인연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여기에 다시 한 번 옮겨 본다.
▲ 1939.5.1 평양독창회 | ||
“그들이 인천에서 생활한 시간이라야 부친인 이익모(李益模) 목사가 1912년 3월 처음으로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왔을 때인 1912년 3월부터 1914년 5월까지 2년여, 그리고 두 번째 담임목사로 부임한 때인 1931년 6월부터 1934년 2월까지의 2년 8개월이 전부로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부친 이 목사가 처음 인천에 왔을 때는 인선이 일곱 살, 아우 유선이 두 살이었고, 두 번째 인천 부임 당시에는 인선은 이태리 유학중이었고 동생 유선만이 인천에서 연전(延專)을 졸업하고, 그 후 가수 활동을 했던 때였다.”
여기서 인선의 유학에 대해 오류를 집어야 할 것이다. 1934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인선은 당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安炳 王+召), 여류 피아니스트 이애내(李愛內), 그리고 테너 이인선의 유학 기사를 싣는데, 이인선이 1934년 4월 10일에 고별 음악회를 갖고 16일에 이탈리아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른 백과사전의 기록 오류로 이 같은 잘못 기술이 발생했다. 이 기회에 바로잡는다. 1936년 『삼천리』잡지의 기사도 넌지시 그것을 내보이고 있다.
“안병소 씨 이분은 일즉이 이 땅의 악단에서 그 이름이 높든 천재적 음악가이다. 얼마 전, 음악의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 결심을 품고 멀리 음악의 도(都) 이태리의 미라노로 건너가 방금 연마중에 있는 분이다.
리인선 씨 이분 역시 재작년인가 음악을 더욱 깊이 연구할 목적으로 미라노로 건너간 이후 오늘날까지 꾸준히 배움의 길을 더듬고 있는 전도가 유망한 청년음악가이다.”
결국 이인선은 부친이 두 번째 인천 부임 당시인 1931년에서 1934년까지는 국내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뒤에 나오는 『대한민국 인사록』대로 세브란스 의전을 막 졸업해서는 세브란스에 있었고, 이어 황해도 황주에서 1년간 개업의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음악인으로 서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부친이 계신 인천에는 아마도 잠간씩 다니러 오는 정도로서 인천과 그다지 밀접한 관련을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1937.6. 12 이인선 동경 독창회 | ||
굳이 이인선이 인천에 체재했던 기간을 따진다면 우리 나이 7살부터 9살 때였으니 초등학교 1, 2학년을 다녔을 정도일 것이다. 더불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부친이 내리교회 담임목사였으니 영화학교를 잠시나마 입학해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시기 이후에는 그 후 부친을 따라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광성고보(光成高普)를 우등으로 마치고 세브란스에 입학하는 과정을 밟는다.
『대한민국 인사록』에는 그의 나이를 “1949년 현재 40세”로 기록하고 있는 점, 출신지를 황해도 ‘황주’로 표기하고 있는 점 등 오류가 보인다. 다만 그의 경력과 활동을 “황주(黃州)에서 일 년간 의원을 개업하다가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음악을 연구한 후 그곳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한 뒤 환국하여 음악 교수 겸 성악연구원을 경영했다. 현재 근민당(勤民黨) 중위(中委)이다.”라고 요약해 놓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현재 근민당 중위’라는 점이다.
근민당은 1947년 창당된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으로, 참고로 그 정강 초안 서두를 보면 “근로인민당은 세계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을 짊어지고 신국면이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정시하며 우리나라의 건국의 위업을 완미(完味)할 것을 임무로 하여 조선의 노동자 농민 소시민 전 근로 인민과 애국적 정의 인사의 전위 당으로서 창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기본적 정치 노선을 규정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명 성악인으로서 이름만 올려놓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 1937.8.13 동아 | ||
그가 성악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는 유학에서 돌아온 1938년 무렵부터 1940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당시의 신문들은 이 무렵 동안 성황을 이룬 서울, 평양, 단천 등지에서의 수차례에 걸친 국내 활동과 도쿄(東京), 베이징(北京)에서 찬사를 받은 그의 해외 독창회 개최 기사를 싣는다.
1941년 『삼천리』잡지가 실시한 조선음악학교 설치론(朝鮮音樂學校 設置論)이란 설문 조사에서 이인선은 자신의 음악 교육관을 피력한다.
“학무 당국에서도 이미 음악의 정서 교육상 필요를 통감하여 중등학교에 음악 과정을 필수 과목의 일(一)로 편입시켰고 또 음악학교 창립설이 이미 있었던 만큼 동교 창설의 필요를 이제 새삼스럽게 논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현하(現下) 조선교육계를 전망컨댄 문, 상, 법, 의, 공 등 각 방면의 전문 교육기관은 거의 다 완비되어 있다 할 수 있으나 오로지 음악만은 완전한 교육기관이 1개도 없음은 숙지하는 바요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음악이 정서교육상 불가결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일보 더 나아가서 이 음악이야말로 때로는 정의와 인도의 예리한 칼도 될 수 있고 밀려오는 천병(千兵)과 만기(萬機)를 능히 무찌를 수 있는 단결과 애국의 정신을 고무 내지 배양시키는 최량의 배양기(培養基)도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시인한다면 하루 바삐 시국에 적합한 음악인의 양성을 위한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때야 말로 내지(內地)에 있는 음악학교는 별개로 치고 조선에도 1교쯤 은 설립하여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 1937.7.1 동아 | ||
이 같은 주장과 함께 교수진용에 대해서도 그는 “적어도 각과에 있어 교수의 1인쯤은 사도(斯道)의 권위자로 택함이 적당할 줄 믿습니다. 비단 조선 내에서만 교수를 구할 것이 아니라 일본 우(又)는 동맹국에까지 널리 손을 뻗혀 적임자를 구함이 학교의 장래와 결과에 있어 좋으리라고 믿습니다. 일례를 들어 제 개인의 의견을 말하자면 적어도 기악과 성악에 1인식(式)은 구라파 계통에서 상당한 교수를 초빙하되 피아노, 바이올린 등에는 독인(獨人) 교수, 성악에는 이태리인 교수를 초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고 과감한 주장을 한다. 당시로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밖에 단편적인 기록으로 이인선은 1946년 6·10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영화동맹(朝鮮映畵同盟)과 예술통신사(藝術通信社) 공동 주최한 기념 행사에 무용가 조택원(趙澤元),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등과 출연하는데 이 행사에서 그는 「안다루지아의 노래」 「그대만을 위하여」를 독창한다. 1948년에는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각계 인사 500명과 함께 참가하기도 한다.
이인선은 특히 우리 음악사에 기록될 ‘오페라운동’을 벌인 선구적 인물이다. 한국 최초로 국제오페라사를
▲ 1937.12.2 동아 의사개업 | ||
설립해 1948년 서울 시공관에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직접 번역하고, 주연을 맡아 공연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1950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카르멘」을 공연했다. 6·25가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외과의사로 있으면서도 1953년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는 미국에서 우리 민요를 번역, 소개하는 일에도 힘썼다. 1960년 3월 아깝게 50대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1년 12월 21일 YWCA 강당에서 40여 문하생들이 주최한 고인을 추모하는 추도음악회가 가수 한경진, 오현명 등과 정진우, 박정윤 등의 피아노 반주로 개최되기도 했다.
2003년 지식산업사에서 간행한 한상우는 저서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들을 펴냈다. 거기 수록된 인물 중에는 많은 이 땅의 음악인들과 더불어 이인선, 이유선 형제도 들어 있다. 우리가, 우리 인천이 기억하고 싶은 음악 선구자들! 이렇게 조용히 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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