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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리에 이르는 길 원문보기 글쓴이: 知友
보통수준의 현대인들이 이미 천년전 최고과학자나 지성인보다 더 뛰어난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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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 정도문제일뿐
이런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모든것이 다 공하다하면서
아공(我空)뿐만아니라 법도 공(空)하다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이런 금강경의 법은 법중에 최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모순아니겠습니까?
모든것이 공하다면
그공하다는 그법마져도 공해야지요.
거기에 예외를 두는것은 자가당착입니다.
또 최초엔 우리가 부처였는데
홀연히 무명이 생겨서 번뇌중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홀연히 무명번뇌가 생길까요.
이점을 모르는체 그냥 그렇다니까
무조건 닦아서 없애자고 닦기만 하면 다해결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닦아서 부처가 되어도
다시또 언제 무명번뇌가 홀연히 생겨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때가선 대체 어쩔건가요?
물론 이런 교리나 이론들자체가
종교가 가진 진리를 판단하고 추구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것들이 스스로 부족하고 하자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기존의 종교는 실제로는
진리그자체인 하나님,부처님이 직접 만들고 지어낸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만든 하나의 거대한 생각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 우리 인류의 사고체계가 발전한 만큼
솔직히 이런 종교의 부족한 문제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기존종교들이 사람들을 인도하기전에
먼저 자신들의 교리와 이론들을 되돌아보고
시대에 맞게 개혁하고 바꿔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기존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라는 고매한 목표가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성경에 손을 대서 수정하고 교리를 바꾸었던
과거 니케아 종교회의 라든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열던 시대가
지금보다 더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가 아니던가하는
생각마져 할때가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훌륭한 선각자분들의 언행을 보고
우리 인간들이 만든것들입니다.
(불교 만든이 : 부처님 행적을 보고 크게 감화 받아 어느 특정왕)
(기독교 : 기독교 공인이후 로마제국 영향력 깊숙히 개입하여 만듬)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인공종교(人工宗敎)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만든것을
지금 지혜가 발달한 사람들이 볼때에는 논리적으로
합리성이 부족한면을 가진것은 어쩔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생각으로 만든 인공(人工)종교가 있다면 반대로
그것이전에 자연(自然)종교 즉 진리라는 것을 말과 글이전에
자연적으로 보여주고 암시하는 차원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그것에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말을 한다고
제가 기존종교나 수행인들의 훌륭한 점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굿
(토론주제 삼으면 되겠다.
멘토하고 ------------------ 인공종교와 자연종교에 대해 )
그분들은
이런 부족한 종교의 형식적인 컨텐츠를 통해서도
자신들을 잘 발전시키고 업데이트하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편파적이고 비상식적인 소프트웨어를 더 개량하면
더나은 업데이트가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말은 다시말하면
더많은 사람들을 기성종교에 대해 열리게하고
더열린 자세로 기존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귀를 귀울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수록 그들의 영성은
더효과적으로 빨리 더크게 넓어지겠지요.
이러한점을 자각하면서
어렸을때는 20년을 기독교에 묻혀살았고
청년시절이후엔 불교를 믿어 츨가까지 했던 제가
이제는 자연종교라는 제3의길을 선택한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제가 기존종교들을 믿지말자거나
그들의 좋은 점을 다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들의 겉모습은 이미 낡거나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중에 상당수 성직자들은
자기만이 옳다는 독단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마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눈먼 도서관 사서(司書)같이.
저는 기존의 종교들은
마치 어린이 교과서에 나오는 바위가 말하고 바람과 대화하며
태양이 생각하는 그런 신화(神話)의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불경이
최초로 만들어 지던 그시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그시대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최고의 방편이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그때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인지(人智)가 발달한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성직자들이
몇천년전 그 신화들을 아직도 문자그대로 고집하고 있는데서
바로 이모든 넌센스퀴즈같은 문제들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기존의 종교속에 있는 신화적 요소를
문자그대로 해석하는 방식에 따른 해석들은 오해와 편견을 막기위하여
이제는 상당부분 수정되어야 하며
그에 아직도 빠져있는 신앙인들이나 수행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방식같은 의인법(擬人法)적 신화의 내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뜻하는 것인지를 보다 더 열린 방식으로
고찰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으로서 그들은
더나은 지혜로 판단된 소프트웨어에 의해
더나은 영적 서어비스를 받아
문자 이전의 진리에 대해 내적으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가치가 있는 영혼들입니다.
시대는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제 우리들은 시대에 뒤쳐진
우리들보다 인지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만든
질낮은 교과서를 그만 볼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 시대는
제3의 종교혁명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종교들은
수천년의 시간동안 실험을 했지만
세상을 바꾸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기독교에는
신(新)신약성서가 나와야 하며
불교에는
대량으로 더많은 깨달은 사람들을 양산하는
새경전과 새수행법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진리의 길만을 걸어가신 예수나 석가의 문제가 아니며
그분들을 자기종교에 끌어다 쓴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이제 종교분야에서도 과거에만 얽매인 보수수구세력들은
혁신신진세력들에게 그 독점의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진리의 길을 가르치신 분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방식으로 재해석하며 그것만이 옳다고
타인에게 주장한 사람들의 부족함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이라면
기독교나 성경안에만 갇혀계실 분이 아니며
부처님 또한
불교안에만 갇혀계시는 그런분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진리는
그것을 가르키고 표현하는 매체(종교)가 있든 없든
스스로 본래부터 그대로 잘 존재해 왔습니다.
저는 이제 그래서
그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는 보완책으로 <명상>을 제창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명상의 길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명상의 길에서는
경전에 <오직 이것>만이라는 그어떤 제한도 두지않으며
반대로 또 그어떤 종교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명상에 있어서는
실로 세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경전이며
삼라만상과 우주가 그대로 살아계신 하나님,부처님의 몸통이십니다.
요즘 적지않은 목사님,신부님들이
깨달음에 관심을 가지시거나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종교에 대한 기존의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자세를 버리고
열린 가슴으로 자기의 양심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또 적지않은 스님들이
기존의 방법만으로는 안된다고 제3의 수행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백봉(白峰) 김기추거사님의 "거사풍(居士風)수행과 깨달음
(출가하지않고 세상을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공부방법에 구애받지않고 자유로이 수행하여 깨치는것)"이란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저의 앞으로의 살날도 이런 목표를 향하여 바쳐질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이나 불교라면 무조건 싫어하고 타종교인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게 바로
"내가 누군데,무얼 믿는 사람인데...."하는 아상을 가져서 그렇습니다.
서로 한생명이고
서로 하나의 진리인 하나님,부처님을 따르고 모시는 놀라운 우주생명인 형제들인데
서로가진 생각하나만으로 상대를 부정하고 전쟁까지 한다는 것이 바로 비극아닙니까?
그런데 이비극을 누가 조장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비극은 바로
우리들이 잘못가진 생각들로 인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생각이 잘 창조되면 그결과는 아름답지만
잘못 창조될때에는 그결과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도 초래합니다.
이것을 보다더 포용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깨우쳐주고
서로 부드럽게 융화시켜주어야 합니다.
진실로 더 큰것만이 더작은 것을 품에 안을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열린 시대에는
목사님이든 스님이든 속인이든간에 훌륭한 말씀은
우리가 받들어 배워야하며
그가 어떤 종교종파인이냐와는 상관없이 그의 영성과 진실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를 평가하고 그런 선각자의 가르침을 배워나가야 할것입니다.
이는 마치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그의 국적이 남한이든 북한이든 심지어는 재일교포,재미교포이든간에
그의 나라사랑하는 그마음을
우리가 기리고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언컨대 진리는
어느종교나 책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미 온누리에 진리가 넘쳐나고 우리가 오히려 지금 살아있는 그진리안에 들어 있건만
우리마음이 분별하고 한쪽만 바라다보는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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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연종교와 인공종교
저는 앞장에서
자연종교와 인공종교에 대해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장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개념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그개념을 잘이해하셔야
앞으로 제가 하려는 말들이 보다더 잘 이해되실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교문제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좀 생소하지만
<자연(自然)종교>라는 참신한 개념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생각속에서 만든 인공종교와
그렇게 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진리 그자체를 있는그대로 담고 있는
원래의 자연종교를 구별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하거니와 불교 기독교 이전에 자연종교가 있었다.)
지금 이세상에 있는
기독교나 불교,이슬람 그리고 그외 크고작은 종교들은
다 누군가 창시자가 있고 그는 신격화되며
나머지 중생은 그를 믿거나 혹은 그에 의지하여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성종교들은
앞장에서 말씀드린바처럼 여러가지로 합리성이 부족한
지적인 문제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수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가 별것아니라고 말할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걸려서
그종교를 통째로 백안시하거나 등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문제에 걸려서
해당 특정종교를 통째로 부정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적인 눈을뜨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그런 흠결이 없이 완전무구하며
인간의 영혼에 직접 교신을 해왔던
또다른 내적인 변화의 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태양을 비롯하여 삼라만상속에 깃든
신성한 힘을 경외하는 직관과
종교적 감성에 근거한 믿음과 깨우침입니다.
또는 지금 여기 나와 내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
실재하는 살아있는 생명과 사랑의 힘을 느끼는 신앙입니다.
여기엔 아무런 학문적인 성서(聖書)나 말과 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세계에 눈을 뜬이에겐
이세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경전이요,바이블입니다.
예를 든다면 먼옛날
북미대륙에 살았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런 신앙을 가졌지요.
그런것을 저는 바로 <자연종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책과 생각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여기 내삶속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내삶속에서 재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자기자신에게 깨어있는 명상이야말로
우리안에 본래 깃들어 있었던 자연종교를 다시 깨워내는 길이라고 봅니다.
또 그래야 제대로 된 명상이라고 봅니다.
자연종교는 사실 인공종교의 모태요,
인공종교가 태동하기도 전 먼먼 옛날에
이미 인간과 함께 인간의 영혼속에 서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더 원류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더 직관적이며 더 깊고 심원합니다.
그것은 말과 글의 차원을 넘어서 있으며 더근원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는 그시대엔 말과 글이 아닌
직관과 영감을 통하여 서로 직접적인 교류를 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현대를 사는 인간들은
뭐든지더 요약되고 일기쉽고 정리된,
소위 갖기쉽고 믿기쉬운 비타민 알약같은 종교를 원합니다.
그러나 간편주의와 요약주의 바로 거기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매일조금씩 각성이란 도움은 주지만
그댓가로 결국은 전체적으로는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빼앗아가는 커피중독과도 같습니다.
바쁘다고 진리조차도
다이제스트(Digest)로 소화하거나 가지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기존종교를 믿으면
무조건 다그렇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기존종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연종교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의 영혼문제만큼은
남의 해석이나 이론에 맡기지말고
자기가 직접재배하고 가꾸어서 섭취하라 이말입니다.
인스턴트식품처럼 가공된 오늘날의 신앙이나 교리들은
그것들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을
자연종교에서 처럼 진정한 영성으로 깨어나게 하기보다는
집단의 고정관념속에서 고정된 생각에 갇히게 만들어
그들을 집단동물농장처럼 사육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실에 살아있는 자연종교에서는
우리안에 그리고 온누리에 이미 하나님,부처님이 충만하게 계십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숨쉬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움직이는 지금바로 이순간이
다 이미 진리의 그힘이 움직이시는 도리입니다.
세상이 이미 신(神)의 몸통이며
우리는 이미 그의 품안에 사는 분신이자 그의 일부분들입니다.
우리가 내면으로 눈을떠서
살아있는 현실인 이세상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린 더 깊어지고 지혜로와져 그분의 심장과 머리의 세포가 되고
더나아가 그분과 온전한 하나를 이룰것입니다.
그길은
우리가 선택하고 가는대로 끝없이 생겨납니다.
길에게 길을 물으면
길은 어떤길로 가라고 말해줄수 없습니다.
우리가 찾아내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합니다.
남이 만든 길들은
비록큰문과 큰길로 안내한다할지라도
그것은 뻔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그들이 이미 무한성의 우리를
그렇게 사상적으로 한계설정을 하고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쩌면 여러분에게
너무 좁은 문으로 가라고 요구하는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런 깨어있을줄 아는 영혼을 더욱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기존의 고정관념과 한계를 무너뜨리고 도전하는
그런 위대한 영혼들에 의해 창조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진리로 가는 길을 오늘날처럼 간단한 믿음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믿음과 관련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들이 왜 간단히 믿으면 한번에 될일을
평생을 다바쳐가면서 자기를 신(神)에게 헌신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기성종교의 말과 글이전에 있는
자연종교의 진리를 스스로 느껴보고 체험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한 신중하고도 진실한 정신자세가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기존의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깊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모든 전세대의 수행과 신앙은
반드시 후세대에 비판과 교정을 받아왔음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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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행은 나에대한 공부이다
우리가 수행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깊게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바뀌고 자기가 변하는 자기에 대한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어렸을때부터 우리는 수많은 공부속에 자랍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공부를 자기가 해서 자기가 가지는 것이라는 소유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세상의 대다수 모든 교육은 거의 모두 먹고 사는데 대한 정보의 습득교육이므로 그에 필요한 지식의 전달과 축적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미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고 사람을 진정거듭나게 바꾸는 참교육에는 그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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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의 의미와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런 세상의 공부습관이 이공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되게해야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사찰을 다니며 기도하고 수행하지만 수십년 그런 삶속에 산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이 전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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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해 머리로 알려고만 할뿐 그리고 잠시 그맛만 보려고 할뿐 그지식과 그감동에 의해서 자기가 진정으로 변하고 거듭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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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아는것>과 <되는것> 사이에 있는 중간계단인 자각(自覺), 즉<깨어있음(awakening)>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깨어있지못하며 자기영혼에 대해서 혼미한 상태에서 아직 어두운 가운데 졸거나 자고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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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짜와 그때 그시간의 구체적 상황들을 다 기억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다른 날들은 하얗게 다 잊어버리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유독 내인생에 중요했던 그사건에 대해서만 깨어있었단 밀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깨어있었다면 우리는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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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그냥 흐리멍덩하게 살아왔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금도 그런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수행했다는 사람들도 이런사람들이 많습니다.
수행을 했으면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보다 더 온유하고 보다더 큰 사랑을 가진사람, 보다 더 현명하며 보다 더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으로 변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가 자신에 대해 깨어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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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세상의 일반수행자들은 자기가 변하기보다는 자기가 가질수있는, 그래서 남에게 과시하거나 내놓을수 있는 어떤 상태나 경지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가질려고 하며 신(神)의 은총을 마치 은행에 저금한 예금인양 자기가 소유할려고 합니다. 그에대한 정서적 완고함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아닌 어떤 체험체계나 수행이론을 가지고 이런경지 저런경지에 채점을 매기며 분별을 합니다.
"나는 진리란 이런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으니 난 당신과 가까이 할수가 없어!"라고 선언합니다.
심지어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저주하거나 공격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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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생각이나 가치관등의 소유한것으로 상대를 판단하겠다는 태도이며
상대가 누구인지는 관심이 없고 그가 가진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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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않은 훌륭한 선각자분들을 그분들이 살아계셨을때 직접 만났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것은 큰 영혼을 가진 존재들은 상대가 무엇을 가졌냐 혹은 무슨 생각이나 그에 따른 수행을 하는 사람이냐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바로 상대 그자체에 대해 깊은 사랑과 열린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릇이 작은 수행자가 아상과 법상이 높기마련입니다.
진정한 수행은 바로 다름아닌 <나>에 대한 공부입니다.
뭐 대단한 신통을 얻거나 이세상에 모르는게 없이 뭐든지 다 알게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십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비로소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것인지 그리고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것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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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깨달음을 얻는다> 혹은 <이것이 천국가는 길이다>라고 주장들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기발한 공부방법을 하기 이전에 내가 뿌리채 진정으로 비워지고 바뀌어야 참으로 깨달을수 있으며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아직도 자기업습속의 추한 냄새가 나면서 아는것만 바뀌었다고 그가 깨닫거나 거듭난것은 아니라고 말이지요. <도를 하기전에 먼저 기본적인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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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초의 한생각
제가 이책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생각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것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진정 깨어나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한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못벗어나면
평생을 그생각에 끌려 온갖수고를 다합니다.
제가 어떤 수행방법을 굳이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한번 생각에 갇힌다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한다는 의미에서
예를 한번 들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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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도 다아시다시피
우리나라 불교는
화두참선법아니면 공부가 아니라고 말할정도로
회두참선에 대단히 집착하고 올인하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절에 머리깎고 들어갔더니
바로 <책보지말라!>하며
모든책을 덮고 바로 참선할것을 지시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두참선법이
어떤 논리하에 나온 공부방법인가에 대해 한번 깊게 생각해 봅시다.
모든 수행방법은
사실 그나름대로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와 그논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화두참선법은 우리가 원래 맑고 청정한 본심을 가진 부처인데
홀연히 번뇌망상이 생겨 무명심이 일어나고 십이연기에 의해 탐착이 일어나서 몸을 받아 지금 이렇게 중생이 되고 세상 삼라만상의 만물이 생겨져 나왔으니
우리가 고해의 바다에 들게 되었다는 기본전제하에 우리가 이마음을 깨끗이 닦고 또 닦아 미세번뇌망상까지 다 닦아
티끌하나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청정한 마음본심으로 돌아가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
즉 원래 깨끗했는데
더렵혀졌으니 다시 깨끗이 지우고 닦으면
본래로 돌아가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참선수행을 하다보면 깨치기 직전에
모든것을 다모르는 상태의 <미지(未知)>라는 경지가 나옵니다.
다 끊어지고 다 모르는 이상태를
어디로 갈려고 나섰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가야하는지도 몰라서
그냥 다시 돌아오는 그자리가 이<일체모름>의 자리인데
일체가 다 끊어지고 생멸이 다 단절된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모를뿐>이라는 자리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야 비로소 깨달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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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번 이논리를 가만히 살펴 봅시다.
이렇게 <일체모름>의 경지에 들었다면
그수행자가 거기서 어떻게 어디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더 할수가 있을까요? 이거 좀 이상하지요?
또 일체 모르는 그자리에 간 수행자가
어떻게 이런 설법을 폭포수 쏟아지듯
전문용어로 유창하게 설법할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자기모순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기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사실은 <최초의 한생각>
즉 <공부란 이런것이다>라는 자기의 기본생각을 아직 못떠났기 때문입니다.
그생각이 자기를 끌고가기 때문에
다 몰라도 이공부에 대한 생각만은 안놓고 계속 붙잡고 있기에
또 공부하고 있는것입니다.
참말로 다 모르게 되면 자기가 사람인지 아닌지
지금 무얼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다 몰라야 앞뒤 말이 맞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이 또 되기위해
수행을 더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또한 이렇게 단순히 깨끗이 닦으면 부처가 된다는 논리는
홀연히 생긴 무명(無明)번뇌가 부처가 된후에 다시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하느냐란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을 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이런 자가당착적인 문제가 생겨날까요.
그것은 왜냐하면 이런 수행논리는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생각에만 그근거를 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화두참선이라는 거대한 수행법의
모든것이 이런 논리하에 구축되고 쌓아올려진 것이니
전체가 다 최초의 한생각에서 시작된것입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공즉시색(空卽是色)"도 마찬가지로 동등한 진리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자,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말은 다시말하자면
<일체 만물과 생각이 다 본래 공한 것이다>라는
전구(前句)이자 동시에
<그공에서 일체의 만물과 생각이 다시 또 생겨나온다>는
후구(後句)이기도 합니다.
이 후구에 관심을 기울여보면 <홀연히 생겨나는 무영번뇌>가
왜 생겨나는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알수 있게 됩니다.
사실은 거기엔 다만 말이 <무명번뇌>이지
사실은 고정된 본래의 무명번뇌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제생각에 매이고 걸려서 똑바로 서질 못한것이었을뿐
그래서 그일어나는 상태의 생각을 다만 <무명번뇌>라고 이름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고 그생각을 쓰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능력임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 <색즉시공>이자
동시에 <공즉시색>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생각이 다 끊어졌다면
그것은 치매환자이거나 아니면 정박아이거나
아니면 일시적이지만 고도로 정신이 한쪽에 집중된 집중삼매상태일 뿐입니다.
홀연히 생겨난 <무명번뇌>란
우리가 그렇게 이름지은 상태였을뿐
사실은 그것이 본래 중생과 부처의 동등한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인 것입니다.
자, 이것을 깨닫는다면
진리란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니
어디서 다시 무엇을 닦고 깨끗이하고 할여지가 더 있겠습니까?
다 최초의 한생각에 놀아나서
여태가지 이런저런 수행과 체험을 하며
거기에 온갖화려한 이름을 다붙이고 책까지 쓰고 했지만 사실은 다 아무것도 아니요,
헛일만 한것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수행이란 행위의 본질은
사실은 그 본질이란것이 우리가 만든 한생각속의 창조행위요,
그에의한 체험일 뿐이더란 말입니다.
사실 모든것은 다 이러합니다.
위빠사나든 몽중일여든 오매일여든 그어떤 경지나 상태이든간에
우리의 모든 수행이나 기도나 종교활동은 다 그본질상
우리의 창조행위이자 체험행위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더 집중해서 바라다보고 자각함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체험들일 따름입니다.
이깊은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일체를 우리가 짓고 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신비한 본성을 제대로 알아가는 첫걸음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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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단과 사이비
우리나라처럼 종교에 교파도 많고
한종교안에서도
서로 진리를 탐구하는 생각이 다양하게 다른 나라도 드물것 같습니다.
최근들어 기독교 교파안에선
서로 이단(異端)논쟁이 치열하고
명상단체나 수련단체들사이에서는
사이비(似以非)논쟁이 아주 활발합니다.
그런데 어떤 단체나 사람이
이단이냐 사이비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요?
기존의 종교에서는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면
주로 이단이라 몰아붙이는 것 같습니다.
또 수행단체에서는
그단체가 수행자들에게 자유를 별로 안주고
탈퇴가 부자유스러우며
지도자가 돈이나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추문이 있으면
그단체를 사이비라고 판단하는듯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아시다시피 중세유럽의 종교재판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갈릴레오를 지동설을 주장한다하여 이단이라고 재판까지 했습니다만
무조건 상대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다 이단이랄수는 없겠지요.
또 기숙사가 있는 학교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명문학교의 교장이 재색(財色)에 관한 추문이 있다해서
그학교가들이 다 사이비고 가르치는 것이 다 엉터리는 아닌것처럼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뭐든지 단순하게 비판하고 몰아붙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뭐가 사이비 이단의 판단기준일까요?
제가 보기엔 이단이나 사이비의 판단기준은
<진리를 말이 아닌 실제로 잘 행하고 있는가?>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대로된 진리의 실천이란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겉으로 하는 말이나 생각이 어떠하냐에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깨어나게하고 거듭나게 하며
사랑과 지혜와 지비와 포용을 가진 존재로서
변하게 하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행하라는 것인데
그뜻이란 <서로 한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고
불교는
부처님을 따라 살며 부처님이 되기를 힘쓰라는 것인데
부처님의 뜻이란 바로 <한없는 자비와 중생구원의 지혜>를 얻음입니다.
그래서 이 두개의 큰 종교는
인류사랑과 구원이란 대의(大意)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도 아니고 사이비도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종교에 너무나 친숙하고 그와 같은 취지를 가진
수행단체에서 수행을 하는 우리들은 지금 과연 하는 언행이 어떠합니까?
사소한 일로 남을 싸울듯이 비난하고
나와 조금 생각이 다르다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만들어 거래를 끊으며
내가옳으니 네가 옳으니 다투는 일이 그치질 아니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깨우쳐주고
서로 모시라는 가르침아래에서
우리들은 전혀 반대되는 언행을 지속적으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에 정반대되는 일을 서슴치않고 저지르면서도
말로만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합니다.
머리로 아는 깨달음의 이론은 기가막힌데
실제로 그이론에 따라 행하는 자신은 너무나도 부끄럽고 이기적이며
아상과 법상에 빠진 언행을 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鐘)은 왜 만듭니까?
멋진 종을 만들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만듭니까?
아니지요.
종을 만드는 진짜이유,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종을 치고 소리를 듣기위해서 입니다.
소리가 나지않는 종은 종이라 할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서거나
혹은 그이론을 남에게 자랑하기위해서도 아니요,
바로 자기자신이 향기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과연 누가 이단이고 사이비입니까?
내가 지금 그런 나자신에 대해 정말로 깨어있다면
진리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나의 언행이
바로 이단이고 사이비로 보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오늘도 사람들은
자기내면으로 눈길을 돌릴 생각은 아니하고
밖으로 비난하고 평가할 상대방을 찾기에 바쁩니다.
참으로 자기자신이 진정한 공부대상이건만
사람들은 공부는 책과 생각으로만 하고
그마음은 온통 남의 생각이나 남의 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것이 깨달음이다>란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것만이 옳고 다른것은 다 아니다>란것도 누구의 생각일 뿐입니다.
남이 생각하거나 타인에게서 들은 얘기를 가지고 자기주인으로 모시지 마십시오.
자기주인은 자기자신이어야 합니다.
자기의 체험이나 자기의 생각조차도 자기의 소유물이고
자기를 한번 스쳐지나가는 경험이지 자기가 아닙니다.
무엇이 자기의 진정한 주인이고
무엇이 종인지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
바로 그런사람이 진짜 이단이고 사이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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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생각과 창조능력
저는 앞장에서 화두참선의 예를 들면서
한생각에 입각한 다음행동들이 자칫 그한생각에 매이면
수십년을 그길로 빠져들게한다는 말씀을 드린바가 있습니다.
사실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다 그렇지요.
그런데 깨달아보니까 진리란게 별게 아니고 <본래그대로> 있는그대로 더란 말입니다.
이거참 알고나서는 억울하지 않아요?
세상에 깨달았다는 분들 만약 깨달아서 옛날에 비해
이런저런 체험외에 무엇을 더 새로이 얻은게 있다면 말씀해보세요.
제가 보장하는데 결단코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나(참나)>는
모든 체험을 넘어서 있는 <체험하지 않는 체험을 가진자>란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우리가 <입맛>이란게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혀를 혹사시키는 수행과도 같습니다.
<과연 입맛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생각에 빠진 사람들은 온갖 고행을 다해봅니다.
어떤이들은 아주 맵고짜고 쓴 맛까지 다 경험해보면 안다고 하고,
또 어떤이들은 담백한 물맛을 보면 안다고 하고,
또 어떤이들은 일체의 아무것도 안먹어보면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맛>은 모든 맛을 다 끊는다고 알아지는것도 아니고
자극적인것들을 많이 먹어본다고 알아지는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혀와 더불어 있는 그대로 제자리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보통음식이나 음료를 마시면서도
우리가 깨어만 있다면 저절로 간단히 알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입맛>은 알지언정
<진정한 입맛의 능력과 그세계>는 제대로 알지는 못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소리일까요?
입맛이 무엇인지 아는것이 깨달음이라면
입맛을 제대로 알고 잘즐기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아무리 입맛이 무엇인지 알았다해도
평생을 같은 음식만 먹는 사람에겐 색다른 맛의 세계를 체험할 기회가 없습니다.
이말은 다같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어떤이는 아프리카밀림속의 오지에만 평생 갇혀살고
또다른 사람은 문명사회에 태어나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체험과
사랑과 여행등을 맛보는 차이 같은 것입니다.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롭고 다양한것이겠습니까?
성공하기 이전의 오프라 윈프리나 성공한 이후의 오프라 윈프리는
다 똑같이 인간의 한사람에 불과하지마는
그전과 그후의 그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깨달음을 넘어 거듭남의 문제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도 성문,연각,보살,부처가 있듯이
깨달았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이후에 존재의 능력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문제,
즉 거듭남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른말로 해서
<생각의 창조능력>이라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생각은 그것에 우리가 걸리고 매이면
우리를 한없이 끌고 다닙니다.
우리가 그생각의 본체를 발견하고 깨어날때까지
그것은 우리를 한없이 헤메이게 합니다.
이때의 생각은 우리자신에게는
매우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능력이랄수가 있습니다.
수십년 수행끝에 돌아온자리가 바로 원래 그자리더라하면
그것은 설사 깨달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수행이라는 그한생각에 그만큼 스스로 끌려다닌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오늘날 한국의 불교나 수행문화가
너무나 이쪽에 치우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깨달은 이후의 경지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의 그런 능력을 깨닫고 알아차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생각의 주인이 됩니다.
평생을 제생각에 끌려다니면서도
아직 그진실을 눈치채지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이한마디에 눈치채고 자기의 본래자리를 단숨에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입학검정고시를
이십년 걸려 합격하거나
몇개월공부해서 합격하거나
그가치는 똑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생각의 주인이며 생각을 내고들이는 <나>는
마치 세상을 다비추는 거울이 거울자신을 스스로 비추어보지 못하듯이
그렇게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에만 매여
무조건 생각을 끊고 벗어나려고만 하기보다는
<공즉시색>의 진리도 알아서
균형을 갖고 어디에 치우침없이 자기가 가진 능력의 하나인 생각을
오히려 창조의 능력으로 바꾸어 쓰라는 것입니다.
그자리에서 생각과 상념을 창조적으로 쓸줄아는 사람은
비로소 신(神)으로 거듭난 사람이며 제안에 신계(神界)를 창조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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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행의 본질에 대한 생각
저는 이단락의 앞장에서
수행에 대해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전제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우리들은
그동안 너무 <수행이란 이런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앞서 살아간 선배나 조상들이 남겨놓은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든 다른사회분야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데
왜 유독 종교나 수행분야만은
수백수천년전 생각속에 갇혀서
새로운 생각을 단한마디도 못한채 꼼짝을 못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역시 우리가 <깨달음은 이런것이다>
혹은 <구원은 이런것이다>라는
고정관념만을 서로 주고받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진리란 변하지 아니하는 것이지만
그진리를 찾아내거나 발견하는 방법이나 안목조차도
반드시 구태의연한 옛날방법이나 예사람들의 눈에만 의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옛날사람에 비해 너무나 많이 변해왔는데
우리는 과거 우리들보다 인지가 발달하지도 못한 그런 수준의 사람들얘기만 듣고
우리들보다 이세상을 더 알지못한 그들의 판단만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들의 판단에만 모든것을 의지해야 할까요.
수행이란 결국
우리안에 있는 우리의 본성 혹은 신성(神性)을 발견해내고 끄집어내는 것이지
우리안에 없던것을 새로이 만들어 내거나 찾아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우리가 고정관념을 벗어나
창조적으로 되찾아 느껴보는 것이고
우리의 참모습을 다시한번
자기 스스로 체험해보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돌아가야할곳이 다적멸한 자리인 공(空)으로만 돌아가야 하며
또한 왜 우리가 만든 죄(이것을 번뇌무명이라해도 마찬가지 얘기입니다)와
구원(혹은 깨달음)이란 논리안에서
그것을 없애야먄 한다고 고민하고 수행해야먄 할까요.
우리는 왜 다 모든것이 다 공하다는 <색즉시공>만이 공부방법이고
그공이 죽은 공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나의 본면목으로서 모든것을 다 창조할수 있다는
<공즉시색>은 공부법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걸까요.
우리는 왜 이렇게 다 여태까지 한쪽에만 치우쳐 난리를 치고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제안에서의 개체마음의 사라짐과 거듭남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지금 사로잡혀있는 이거대한 생각과 관념의 늪이
바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벗어나야할 고정관념이고 원죄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태까지의 우리의 수행이란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그대로 관찰하지 않고
마치 수학에서의 미분(微分)처럼
우리자신을 자꾸 쪼개고 분석하고 나누고 분리하여 들어간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진실한 것을 따로이 놔두고
그것을 생각속에서 <진리란 이런것>이라고 만들어 그이론속에 빠져 들어간것과 같지요.
왜 미분만이 진리이고
우리의 모든것을 통합해 보는 관점의 적분(積分)은 진리가 아니란 말인가요.
왜 우리의 현재삶을 통찰하는 방법은 무시되고
생각과 논리안에서만 그것을 그렇게 찾으려 했던것일까요.
여러분, 이런 균형잡힌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으로 깨어나서 다시 볼때
우리에게 실제로 무명업장이란 없으며 다만 우리 생각속의 그이름만이 무명업장입니다.
또한 원죄(原罪)란 따로이 없으며
다만 우리생각속에서 창조해낸 그이름이 바로 원죄입니다.
이미 지금 우리는 본래그대로의 존재그대로이며
다만 우리가 가진 능력인 이생각하는 힘을 제대로 쓰지못한 나머지
우리가 자신이 가진 그힘에 휘둘리어
우리능력의 하나인 생각하고 창조하는 힘을 번뇌의 대상으로 삼고
그안에서 방황하면서 우리의 관념속에서 진리란것을 따로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아 안다면
우리가 원래부터 대자유의 존재이며
이미 완전한 존재이며
이미 축복받고 구원받은 존재이며
이미 천국에 살고 있는 존재라는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이미 누리는 살아있는 힘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남에게 구걸하며 물어서 <진리란 이러하느니라>라고 들어야만 하는 이현실에
저는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다고 느껴왔습니다.
진리는 아니계신곳이 없으므로 (무소부재)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 내가 갖추고 드러나있는 그대로가 바로 본래그대로이자 진리이지
지금여기는 없고 여기가 아닌 다른곳에 치우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수행이란
지금여기 있는 내가 이미 진리이므로
그것의 온전함을 자각하고 그것에 눈뜨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여기 나의 상태가 이미 진리속의 상태입니다.
지금여기가 이미 천국이어야 합니다.
다만 내가 그동안 남이 만들어준 생각에 빠져들고
속아넘어가서 그렇게 살지못했을 뿐입니다.
나는 이미 완전하며 죄와 벌은 내생각속에서만 오로지 나에게만 힘을 써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내가 나를 그동안 내생각이란 감옥에 스스로 가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관념속의 수행은
그만두고 우리는 제대로 깨어나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온전한자가
다시 온전함을 찾는 어리석은 찾기를 그만두고
이미 우리가 가진 능력에 대해 창조적 깨어남으로 다시 바라다봄과
그로인한 아름답고 놀라운 체험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수행이라면 수행인것입니다.
실로 제가 진리에 눈을 뜨고보니
우리가 가진 원죄란
우리가 하나님을 더가까이 느껴보기위한 반어법(反語法)에 불과했으며
무명업장이란
우리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쓰기위한 방편(수단)의 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직도 모른다면
그대는 아직더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대는 스스로 만들고 잊지못한채 붙들고 있는 죄를 더 반성해야 하며
더 닦을 수도, 닦을 필요도 없는 나를 무명번뇌라는 환상속에서 채찍질해야 합니다.
지금 여태까지 우리들이 해왔던 수행의 종류와 그본질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