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진 않겠지만 어릴 적 내 꿈은 테마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이유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앞뒤 없는 꿈이었다. 돌이켜보면 피로한 일상의 도피처로 여행은 쉽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떠나는 곳이 테마파크고 그래서 나는 이곳을 일상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떠났다. 이왕 떠나는 여행길에 비현실적 꿈의 나라까지 얹으면 겹경사 아니겠는가.
시작한 건 내일인데 끝난 건 어제, 파리 디즈니랜드
파리의 디즈니랜드는 저만의 뚜렷한 색깔로 도심 속에 당당한 테마
파크가 아니다. 파리의 거리가 그대로 스며든다. 티켓을 구매하고
입장하자 갑작스레 벌어지는 동화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디즈니 캐릭터가 하나 둘씩 고개를 내민 느낌. 그
래서 돌아가는 길에도 여운이 이어진다.
가이드맵을 손에 쥐고 두리번거리는 누군가에게 가장 먼저 추천할
곳. 지도 따위 제 구실을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구불구불 미
로 앞에 서면 화살표가 제멋대로 솟구친다. 오른쪽을 향하지만 왼쪽
이라 쓰여 있고, 보라색 털의 미친 고양이가 사람들을 내려 보며 비
웃는다. 수풀 위로 여왕이 어흥 화를 내고, 주전자에 걸터앉은 졸린
쥐가 진짜로 졸고 있다. 시작한 건 내일인데 끝난 건 어제.
마당에는 콩나무가 구름 향해 손을 뻗고 잘도 자란다. 잭의 집 앞에
몇몇의 당근이 담소를 나누고, 나팔꽃이 얼굴 붉혀 내민 손을 아무도 잡지 않아 무안하다.
철없이 마냥 해맑은 캐릭터들이 간지러워질 때쯤 유령의 집이 보인다. 999명의 유령들이 사는 대저택을 방문하자 나를 1000번째 유령
으로 맞이하겠다며 소란을 피운다. 열차가 느릿해지고 오른쪽에 대저택 단면이 보인다. 열차를 허공에 띄운 채 유령이 각각의 속도로
유영하고, 먼발치 펼쳐진 탁자에 사람과 귀신이 한데 모여 식사를 는데 원근법을 감안해도 어째 이곳과 저곳이 뒤섞이는 느낌이다.
한참을 달리다 거울 앞에 각각의 의자가 섰는데, 갑자기 곰만한 유령이 덥석 문다. 죽은 것이 산 것을 움켜쥐자 다들 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인간의 음역대는 엄청나다. 은 땅 곳곳에서 제 역할을 마친 캐릭터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며 한에 모이는 시간, 바로 레이저쇼다. 성 하나를 두고 디즈니의 모든 야기가 구현된다. 피터팬과 팅커벨이 첨탑 사이사이 숨바꼭질을 즐기고, 알라딘과 자스민이 융단 타고 날아올라 사랑놀음을 한다.
뒤이어 노트르담 성당의 뿌리에서 튀어 오른 콰지모토가 꼭대기에 매달려 인생사 외로움을 울부짖는다. 이어지는 불꽃쇼, 분수쇼. 짧
은 시간 안에 화려함을 불사르고 그대로 숨죽이는 모양에 어지간히 아쉬운 지 집 향하는 발걸음들 풀이 죽어 한번 씩 뒤를 돌아보더라. 작은 고추 아주 맵다, 윈저 레고랜드 레고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었다. 우주선, 자동차 등 단순 모형은 재미가 없다. 네모진 블럭을 하나하나 얹어 손수 만든 우주정거장 위에 놓아야 혹은 꿈꾸던 집 앞에 세워야 그래야만 그들도 의미가 있다. 레고랜드는 이 원리에 입각해 신세계를 만들었다. 모든 거리,가게, 사람, 색색의 조각이 오밀조밀 모여 완전체를 이뤄낸다. 단 하나도 덩그러니 놓인 게 없다. 크든 작든 나 하나는 완벽하지 않다. 지팡이 짚고 앉아 책을 읽는 레고 신사 옆에서 함께 지도를 살피다 보니 독특한 곳이 보인다. 피라미드 옆 잠수함? 정말 레고로 만든 잠수함을 타고 입수한다. 금발과 흑발의 인어공주가 조개에 앉아 노래를 하고, 포세이돈이 산호로 만든 의자에 자리 잡고 뻗은 팔엔 힘이 실렸다. 물이끼 몰려 자란 바위 뒤로 값비싼 보물이 수북하다. 속세 떠나 한가롭던 열대어들이 공기방울에 놀라 한걸음에 달아났다.
주춤대고 서있지만 연신 셔터를 누르는 곳이 있다. 바로 레고랜드호텔. 춤을 추는 붉은 깃발 옆에 애꾸눈 해적이 함성을 지르고, 졸개들이 낑낑대며 기둥을 받치고 서있다. 눈에 익은 꽃송이, 소나무, 원숭이가 반갑지만 어렸을 적 기억보다 몇 배는 몸을 키우고 섰다. 아마 호텔의 침대도 어쩌면 변기까지도 레고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백미는 숨은그림 찾기다. 덩굴 아래 원숭이가 숨어 쳐다보고, 쓰레기통 옆에는 도마뱀이 고개만 빼꼼 내민다. 걷다 보니 건물위에 앉은 새가 심심해 보이고, 나무에는 빨간 다람쥐가 붙어 햇살을 느낀다. 돌덩이 사이로 꿀벌이 머리를 처박고 궁둥이만 내놓았다. 뒤집어져 있으니 멀미가 날 법 한데, 엉덩이를 당겨내면 분명 제 더듬이가 멀쩡하게 달렸는지 확인할 것이다. 레고랜드 한가운데에는 분지 형태로 전 세계가 압축돼 있다. 세계 각국의 자존심들이 1/20 크기로 축소돼 한데 모여 있고 군데군데 떠오른 열기구가 느긋하다. 아이들은 골목골목 가로질러 뛰놀고, 사방으로 펼쳐진 언덕 위로 어른들이 편히 누워 맥주를 마신다. 대낮이고, 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점은 동요라는 것. 하지만 발아래 전 세계를 두고 보니 아무래도 걸리버가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곳의 모습을 이곳의 느낌을 한 품에 안지 못하는 내 카메라가 어지간히 무식해 보인다. 하늘은 맑고 맥주 옆에 짭조름한 팝콘까지 곁들였는데, 이러니 내가 맥주가 들어가 안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