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사랑의 여인 두향 ... 봄은 꽁무니 내빼듯 사라지고 어느듯 한여름의 중간에 서 있는듯합니다 함안대산 42회 동기회님들 잘들 계시는지요?
오늘은 조선시대때 선비와 기생(妓生)간의 사랑 이야기중 " 퇴계 이황과 두향"의 사랑이야기를 올려 봅니다. 도산서원을 짓고 세계적인 성리학 태두(泰斗)인 퇴계 이황 선생도 근엄한 느낌과는 다르게 관기(官妓)인 두향(杜香)과의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요 퇴계의 어린 시절에는 불우하였지요 7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별세하여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리고 또 아버지같이 의지했던 형도 잃었지요 단양군수로 부임할 무렵인 48세 때에는 첫 부인에 이어 재취부인마저 사별(死別)하였고 또 둘째 아들이 죽어 인생의 깊은 고뇌로 심신은 쇠약할때로 쇠약 했어요 두향(杜香)은 단양에서 이름난 기생 이었지요 전하는 말에 의하면 두향이는 세조때 금성대군이 순흥현(順興縣)에 내려와 단종복위를 도모할때 함께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이라고 하지요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집안이 몰락하게되고 그로인해 은둔생활을 하면서 두향이는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워 시문에 능하였다고 하네요 두향이 열살때쯤 부모와 사별하였는데 그녀의 빼어난 자태를 보고 한 퇴기(退妓)가 그를 데려다 기르며 기적(妓籍)에 올렸다고 하지요 얼굴도 아름답고 거문고와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그리고 난(蘭)과 매화(梅花)를 기르는 분매(盆梅)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하네요 일화로 두향의 어머니(퇴기)는 죽기 전에 매화 화분 한 그루를 잘 길러 두향에게 남겼는데 두향은 이 매화를 잘 기르며 어머니처럼 대하였다 하지요 그러다 관기(官妓)인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어요 그러나 퇴계 이황은 밤마다 그를 물리첬어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신임군수는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요 다른 군수들은 부임하자마자 수청을 들라고 재촉을 했는데 신임군수는 달랐지요 두향은 그런 그가 좋았어요 관기로 취급하지 않는 그런 성품이 좋았고 이것 저것 챙겨주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꼈지요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 모르게 수심에 잠겨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어요 퇴계가 단양으로 부임하던 시기는 이른 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도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지요 두향은 사별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애지중지 키우던 매화 화분을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어요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하여 마음의 수심을 잊게하기 위해서 였지요 그러나 퇴계는 두향이 갖다놓은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곧 아전을 시켜 매화 분(盆)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주라 명하였어요 퇴계는 고을을 다스리는 군수가 백성으로부터 어떠한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을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일을 접한 두향은 더더욱 퇴계 이황이 좋아 졌어요 그러면서 두향은 간곡한 청을 하였지요 이 매화는 어머님의 유산같은 것이고 제가 가장 아끼는 것이니 두향을 보는듯 매화 한그루를 받아 달라고 ... 퇴계는 두향이 매화 한 그루를 그의 처소에 가져다 논것을 차마 물리칠수가 없었어요 그날밤 매화를 물리칠수 없듯이 두향 또한 물칠수 없었지요 두향은 처음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퇴계를 모셨고 퇴계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을 보냈지요 이때 퇴계의 나이 48세 였으며 두향의 나이는 18세였어요 이때부터 두 사람은 남다른 감정으로 시화(詩話)와 음률(音律)을 서로 논하고 산수(山水)를 거닐며 새로운 인생의 낙을 느끼고 사랑을 나누었지요 특히 두 사람은 강가 강선대(降仙臺)에 자주 나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많은 시를 지으며 서로 화답하였지요 이들은 얼마뒤에 있을 긴이별을 예견이나 한듯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어요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푸른 산은 북쪽 밭 재를 둘러 있고 白水汚東城(백수요동성)-맑은 물은 동쪽 성을 돌아가도다.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오늘밤 여기서 한번 헤어지면 孤逢萬里征(고봉만리정)-외로운 나그네 만리를 가리 퇴계(退溪)가 이런시를 지으니 두향(杜香)이 화답 했지요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떠가는 저 구름은 임의 마음이요 落日故人情(락일고인정)-지는 이 해는 나의 정이 로다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손 흔들며 그대는 떠나가니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가는 말 울음소리 못내 서러워 그러나 퇴계의 단양군수 기간은 길지 못했어요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 만에 단양을 떠나야만 했지요 퇴계의 친형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할수 없고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수 있다 하여 퇴계는 그 날로 사표를 제출했어요 퇴계의 청렴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일이었지요 그러나 퇴계의 성품을 안 조정에서는 그를 멀리 경상도 풍기 군수로 다시 임명하였어요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10개월만에 끝나게 되었지요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어요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게는 견딜수 없는 충격이었지요 이별을 앞둔 마지막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지요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 두향이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지요 그리고는 시 한수를 썼어요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들고 슬피 울제 어느덧 술이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지요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21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요 그렇지만 두향은 진정으로 사랑한 그님을 위해 관기 생활을 정리한후 평생을 수절하며 퇴계를 그리워했어요 어쩌면 단 10개월 동안 이었지만 자신의 모든것을 주어버린 그님에 대한 예의 였는지도 몰라요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 강선대를 혼자 거닐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퇴계와의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어요 그러면서 강선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야금소리에 도수매(倒垂梅)란 시를 지어 보냈지요 一花纔背尙堪猜(일화재배상감시)-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胡奈垂垂盡倒開(호내수수진도개)-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賴是我從花下看(뢰시아종화하간)-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昴頭一一見心來(묘두일일견심래)-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퇴계 또한 두향과 이별한지 4년이 되는 어느 봄날 퇴계의 나이 52세되던 해에 인편에 시 한수를 적어 두향에게 보냈지요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햑요금탄절현)-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지요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그 님을 그리워 했다 하네요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날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어요 이때부터 퇴계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지요 퇴계선생은 두향을 보듯 매화를 애지중지했어요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까지 했다 하네요 퇴계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 도산서원에 은거했어요 그리고 세상을 떠날때 퇴계선생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지요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죽움에 이르기까지도 선생의 가슴에는 오직 두향이만 가득했다는 증거였지요 그리고 그 때 두향이가 퇴계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도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고 하는군요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어요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수 있는 기구한 운명이었지요 두향의 사랑은 죽어서도 잊지못할 지고한 사랑이었어요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음식 먹기를 중단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지요 두향은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가 강선대(降仙臺) 아래에 묻어 달라 하였지요 지금은 강선대가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퇴계의 후손들이 두향의 묘를 단양팔경중의 하나인 옥순봉(玉荀峰) 맞은편 제비봉 기슭에 이장하고 두향지묘(杜香之墓)라는 묘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고 하네요 그후 조선영조때의 문인(文人)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는 두향 사후 150년이 지나 묘앞을 지나면서 두향을 흠모(欽慕)하는 시를 남겼지요 一點孤墳是杜秋(일점고분시두추)-외로운 무덤하나 그 이름 두향 降仙臺下楚江頭(강선대하초강두)-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芳魂償得風流價(방혼상득풍류가)-미인 이 멋있게 놀던 상으로 絶勝眞娘葬虎丘(절승진낭장호구)-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문일평의 화하만평(花下漫評) 기록 중에서는 고려시대의 문신(文臣)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난(蘭)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라 하고 조선왕조의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매화(梅花)를 특별히 사랑하여 매화를 읊은 시가 무려 4500 수(首)라고 적혀 있지요 이것만 봐도 퇴계의 두향 사랑은 너무도 지고지순 했나봐요 끝으로 퇴계선생이 지은 매화라는 시를 올려 볼께요 梅萼迎春帶小寒(매악영춘대소한)-봄을 맞는 매화송이 찬 기운을 띠었기에 折來相對玉窓間(절래상대옥창간)-한 가지 꺾어내어 옥창(玉窓)에서 마주 보네 故人長憶千山外(고인장억천산외)-산 첩첩 저 밖에 옛사람의 추억 그리워라 不耐天香瘦損看(부내천향수손간)-여위고 축나는 천향(天香)을 못 견디리 ★ 퇴계 이황과 두향의 발자취 ...
▲ 퇴계 이황 모습 ...
▲ 도산서원 전경 ...
▲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하지요 ...
▲ 도산서원에 있는 매화꽃 너무도 순수한 모습이 두향이를 닮았나봐요 ...
▲ 퇴계 이황과 두향의 모습 ...
▲ 두향제의 모습 ...
▲ 두향의 묘소...
▲ 두향의 묘비...
▲ 두향의 비석...
▲ 두향의 묘소에 있는 꽃바구니...
▲ 두향 묘소에서 바라본 강선대...
▲ 충주호 물 건너의 두향묘 - 가운데 우묵한 곳...
▲ 아름다운 설중매 ...
▲ 아름다운 매화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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