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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도강도(국립중앙박물관소장)
고려 후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그림
화면 오른편은 거대한 바위와 필선으로 처리한 왼편의 낮은 산 사이를 꺽어져 흐르는 강을 표현하였다.
오른편의 무너져 내릴 듯한 바위에 꺽어져 매달린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강기슭에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잎이 다지고 가지만 남아 있으며 바람이 불어 오른편으로 휘어져 있다. 맨앞에 서서 무리를 인도하는 고개를 떨어트린 백마의 표정이 동료를 부르는 주인의 심정과 대조적으로 무심하다. 전반적으로 가늘고 여린 필선을 사용하여 섬세하고 유연한 느낌을 준다.
익재 이제현 1287(충렬왕13년)~1367(공민왕16년)
자는 중사(仲思). 초명은 之公(지공). 호 는 익재(益齋), 시호는문충(文忠) 본관은 경주. 검교정승(檢交政丞)인 진의 아들.
1301년(충렬왕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또 문과(文科)에 급제, 1308년 뽑혀서 예문춘추관(藝問椿秋館)에 들어갔다.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르러 충선왕에게 불리어 원나라 연경에 건너가 원나라 학자 요수(姚燧閻) . 조맹부(趙孟俯)등과 교우하여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크게 칭찬하여 글로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 되어 있다.
1323(충숙왕10년) 유청신.오잠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건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매 제현은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가메 그곳에따라 갔으며, 밀직사사(密直司使).첨의평리(僉議評理). 삼사사(三司使)를 역임하였다. 1339년(숙충왕 복위8) 정승 조적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꾀하여 모역(謀逆)하다가 사형되자 그의 무리가 연경에 많이 남아 있어 인심이 매우 동요되매 제현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잘 절충하였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피봉되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하매 우정승에 임명되고 정동성사 를 맞자 원종공신(元從攻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시기함을 알고 그 벼슬을 내 놓았으므로 후에 조일신의 난(亂)때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다가 1357년(공민왕6년) 벼슬을 떠났으며 왕명으로 집에서 실록을 편찬하고 종묘 위패의 서찰을 정하였으며 사후 공민왕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고려 후기 문인화가 익재 이제현의 대륙 장정 (시,서,화에 뛰어났다)
서정록을 찾아서』는 시를 읽기 위하여 여행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고려 대시인 익재 이제현이 여행한 곳을 이 책의 저자가 직접 찾아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두 여정이 같을 수는 없다. 700년을 사이에 두고 여행 방법이 많이 달라져 익재는 여름 · 겨울 없이 역마를 타고 고달픈 길을 갔지만, 저자는 냉나방 시설이 갖춰진 비행기 · 기차 · 버스 · 승용차로 편안한 여행을 했다. 다만 익재는 시를 짓기 위해 여행했고, 이 책의 저자는 그 시를 읽기 위해 여행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친다.
익재는 누구인가?
익재(益齋) 이제현(李濟賢, 1288~1367)은 '자주성을 읽은 고려'라는 특별한 시대를 살았던 여행가요 시인이다. 당시 동아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든 몽골에 대항하여 고려는 28년간이나 항쟁했으나, 끝내 굴욕적인 강화를 체결하고 이후 100년 동안 몽골의 간섭과 수탈을 받았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익재는 14세의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한 천재로서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1313년, 그의 나이 26세 때 송도 왕궁에서 열린 팔관회 자리에서 그의 운명을 바꾸는 만남을 갖는다. 고려 제26대 국왕 충선왕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익재가 '여행'한 까닭...
충선왕은 우리 나라 역사상 국력이 가장 취약한 시기에 옥좌를 지킨 왕으로서, 이 난국을 타개할 여러 가지 방책을 시도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 세계 제일의 도시요, 팍스 몽골리아나의 중심이었던 중국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일종의 사립 도서관을 세운 것은 고려의 문화 위상을 높이는 일이자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 친(親)고려 여론을 형성하는 고도의 외교방책이었다.
익재는 이러한 충선왕을 도와 시로써, 여행으로써 원나라 황실과 조정에 고려의 정당성과 우수성을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몇 달에 걸친 대륙 여행을 여러 차례나 하였다. 개성과 북경을 오가는 여행을 여섯 또는 여덟 차례, 중국에서 아미산, 보타산, 도스마를 오가는 대장정을 세 차례 하였다. 그 거리만도 4만 35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익재 이제현 및 이항복 사당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 180호
지정일: 1995 12월 26일
시대 조선후기(18~19세기)
소재지: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 895
구곡사는 익재 이제현(1287∼1367)과 백사 이항복(1556∼1618)의 영정이 모셔져 두 분을 제사지내 온 사당이다. 구곡사에 소장된 두 영정은 필자나 제작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두 18세기 이후에 추화된 이모작품으로 생각된다 구곡사에 모셔진 두 영정 가운데 여말선초의 인물인 이제현의 영정에서는 여말 초상화의 한 유형을,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이항복의 영정은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비록 이모상이지만 한국의 초상화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이제현의 초명이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으로 고려 충렬왕 13년(1287)에 태어나 공민왕 16년(1367)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공민왕때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에까지 오른 문신이면서, 정주학을 정립한 한학자, 문장가, 시인, 서화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많은 저서와 작품을 남겼다. 전신입상인 이 영정은 사유보행상(思惟步行像)으로 약간 동세가 비치며 복식에서 중국 송대 사인도상(士人圖像)의 양식과 유사함이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을 통해 고려시대 초상화가 송대 형식을 바탕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존하는 작품이 거의 없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형식을 유추할 수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이제현 초상은 1870년 도화서 화원인 조중묵에게 의뢰하여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현 영정 입상은 화격으로 보아 조중묵이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항복은 경주이씨로서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보인 호종공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오른 명신이다. 그는 자를 자상(子常), 호를 백사(白沙) 또는 필운(弼雲), 청화도인(淸化道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이라고도 했다. 구곡사의 이항복 영정은 후학과 후손들에 의해 추앙받은 덕망과 호협하고 의기로운 성품을 읽을 수 있는 대작이다. 비단 위에 채색으로 그려졌고 사모를 쓰고 가슴에 모란·공작 흉배를 한 대례복 차림의 정장한 전신의좌상이다.
바닥에는 재감이 표현된 화문석이 깔려져 있고 족좌 위에 발을 얹고 곡교의(曲交椅)에 앉아 있는 약간 우측면상이다. 이러한 영정은 조선시대 중기(17세기)공신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현재 모셔진 강진 구곡사 소장의 이제현상과 이항복상, 이 두 초상화는 18∼19세기에 이모된 것으로 당대의 원본을 충실히 옮겨 그려 초상화의 회화성도 제격을 갖추었고, 사료적 가치도 높다. 또 두 인물의 역사적 위상으로 보아서도 의미가 크다.
위험에 처한 이항복을 구한 조상신
이항복이 태어난 지 1년이 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유모가 우물 가까이 가서 그를 땅 위에 놓아두고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때 어린 항복이가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이내 우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 때 유모의 꿈에 수염이 희고 얼굴이 긴 한 장부(丈夫)가 나타나, 지팡이로 유모의 정강이를 탁 치면서 꾸짖었다.
“어찌해서 애를 보지 않느냐?” 유모가 몹시 아파서 화들짝 꿈에서 깨어보니, 저만치에서 항복이 우물로 막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냅다 쫓아가서 항복이를 얼른 붙잡았다. 이렇게 하여 간발의 차이로 항복이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유모는 꿈에서 차인 정강이가 실제로 여러 날 아파서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집안에 제사가 있어 방조(傍祖)1) 이제현의 영정을 대청에 걸어놓게 되었다. 그런데 유모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서 외쳤다.
“앞전에 제 정강이를 때린 이가 바로 저분이옵니다!” 이삼백년전 조상인 익재 이제현 선생이 한참 후손인 이항복을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것이다.
강진의 경주이씨(慶州李氏)
후손들 칠량.대구구곡마을등에 집단 세거
2005년 02월 21일 (월) 00:00:00 김철 기자 kim72@gjon.com
경주이씨의 시조는 표암공으로 불리우는 알평(謁平)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후손들에 대한 자료가 불확실한 가운데 신라말 진골출신의 이거명을 중시조로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말 익재 이제현을 배출하면서 삼한의 명족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 이제현(1287~1367)은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로 명성을 떨쳤다.
경주이씨는 17세조 이규를 시조로하는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의 동생이 사인공파(舍人公派)등으로 크게 나뉜다.
이후 70여개의 소파로 분류됐으나 상서공파의 백사 이항복과 익재공파의 익재 이제현, 이완대장이 포함된 국당공파가 크게 융성하게된다. 관내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경주이씨는 익재공파에 해당한다.
이제현의 후손으로는 8문장을 꼽을 수 있다. 이제현의 7대손 이공린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사위였다. 이공린은 오, 구, 원, 타, 별, 벽, 경, 곤 8명의 아들을 두었고 아들들은 모두 글솜씨가 뛰어나 8문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강진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한 선조는 응경(應慶)이다. 응경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피해를 입은 기축사화를 예견하고 충북 청원군 말원면에서 도암면 월하리로 은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응경이 후학을 양성하기위해 생활했던 칠량면 한림마을은 응경의 호를 따서 한림마을이라 명명됐다.
응경은 후에 3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낳게된다. 장남 효당은 약량(현재 경남 함양)군수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도암면 월하리일대에 생활하고 있고 둘째 효강은 생원시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후손들이 칠량면, 강진읍에서 살고있다.
또한 셋째 효안은 가풍을 이어받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선비로 생활했으며 대구면 구곡마을에 후손들이 집단세거하게 된다.
경주이씨는 도암면 부흥리에 강진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한 응경을 비롯한 조상을 모시는 추모재가 있다. 추모재에는 넓이가 5m가 넘는 대형 왕릉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왕릉의 형태를 갖춘 묘소는 강진에서 생활을 시작한 응경의 묘소이다.
당시의 경주이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엿볼 수 있는 한대목이다. 그 옆으로는 응경의 선조인 오, 해, 사권이 단비의 형태로 모셔져있다. 후손들이 조상들의 묘소를 찾지못해 단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추모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 문중 종친회원들이 모여 행사를 갖고 있다.
대구면 구수리에는 익재서원과 구곡사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는 매년 유림들이 직접 찾아 봄, 가을 제사를 지내며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원래 구곡사는 군동면 금곡사에 설치돼 있었으나 후손들이 100여년전 대구면 구곡마을로 옮겨온 것이다.
구곡사는 익재 이제현과 백사 이항복의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내 온 사당이다. 구곡사에는 이제현과 이항복의 초상화가 놓여있고 두점의 초상화는 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모사본이지만 한국 초상화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00여년을 넘긴 세월이 더해지면서 이제현과 이항복의 초상화는 유형문화재 189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집성촌을 찾아서]고려말 학자 이제현선생의 후손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 신기마을(경주 이씨)
울산시 울주군 봉계버스터미널에서 언양방면으로 250여m를 가다 "황우쌀마을, 인빌(정보화마을)"이라는 입간판 오른쪽으로 나 있는 활천교를 지나면 경부고속도로 아래로 난 작은 굴다리가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서 복안천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즈막한 배나무가 줄지어 있는 배밭과 함께 잘 정리된 논들이 이어진다.
배밭을 지나 처음 나오는 버스승강장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인 외길을 따라가면 마을경로당을 비롯해 기와를 그대로 얹은 채 집을 개조한 농가 20여 채가 보인다. 경주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신기마을이다.
신기마을을 비롯해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음지, 양지, 활천, 복안, 미호, 내와, 차리, 구량 등 두서면 일대에는 경주이씨가 170여가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신기마을에는 17가구가 살고 있다.
울산에 경주이씨가 터를 잡게 된 것은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4대손으로 한성판윤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지대(之帶·중시조 거명(居明)의 21세)는 단종 즉위년인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두서면 구량리로 내려와 은행나무를 심었다. 이 은행나무가 두서면 은행나무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64호로 지정돼 있다.
이어 지대의 후손인 태천공 경호(26세)의 셋째아들 상겸이 복안리에 자리를 잡은데 이어 32세인 흥만이 5촌 당숙인 동택을 따라 신기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신기마을은 복안리 4개마을 중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새로운 터라는 의미의 "신기"마을이다. 중시조는 원시조 알평(謁平)의 36세손인 거명이다. 계파로는 울산의 입향조인 판윤공파에 속하고, 신기마을의 입향조는 흥만이 된다. 현재 복안리 미호산 1번지에 입향조인 흥만의 산소가 자리하고 있다.
경주이씨가 살고 있는 집의 안방에는 모두 익재공의 초상화와 원시조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의 재실인 표암재(瓢巖齋·경주시 동천동) 사진이 걸려있다.
신기마을에서 두서면 일대 문중일을 맡아보고 있는 이정우씨는 "경주이씨 화수회를 열 때 집집마다 초상화와 재실사진을 나눠줘서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음력 3월 중정일이면 경주 표암재에서 제를 지내고, 매년 3월에는 종하체육관에서 경주이씨 한마음 단합대회를 갖습니다. 종하체육관이 37세손인 이종하가 울산시에 기증한 것이거든요. 또 매년 4월에는 두서면지역을 3개구역으로 나눠 돌아가면서 화수회를 열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신기마을에 가서 "우야"를 찾으면 웬만한 이름은 다 있다. 광우, 명우, 장우, 건우, 천우, 현우, 춘우, 상우, 성우, 혁우, 택우, 환우, 관우, 채우, 창우, 용우, 동우, 만우 등 중시조 거명(居明)으로부터 38세손의 돌림자인 "우"에 붙을만한 이름은 거의 다 붙여졌기 때문이다.
이정우씨는 "경주이씨는 항렬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이름만 들으면 누구인지 알 정도"라며 "35세손부터 41세손까지 돌림자가 영, 규, 종, 우, 상, 형·희, 재"라고 설명했다.
또 신기마을에는 명절이 되면 올해 여든 셋인 규탁(36세손) 옹과 서울에 살고 있는 세살 난 준형(40세손)군이 다같이 모여 4대가 한 자리를 이루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경주이씨가 열여섯 가구, 경주최씨가 3가구, 한씨와 권씨가 각각 1가구씩 살고 있는데 경주이씨와 경주최씨는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다. 입향조인 흥만의 고손자 규삼의 누나 신리가 경주최씨의 병수와 결혼하면서 사돈지간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몰된 대곡댐 일대 잠방골이라는 곳으로 시집을 간 규삼의 누나가 병수와 함께 신기마을로 오면서 경주이씨와 경주최씨가 한동네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35년여 전에 이학이씨가 같은 동네에 사는 최석환씨와 결혼하면서 두 집안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지역의 특산물인 봉계황우쌀 마을로 불리는 두서면 복안리, 활천리를 비롯해 음지, 양지, 활천마을은 지난해 6월부터 행정자치부로부터 2차 정보화마을로 선정돼 모두 100여대의 컴퓨터가 보급돼 있다. 이 때문에 농사철이 아니면 마을 경로당에서 밥을 해먹거나 장기를 두던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인터넷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여름방학철인 요즘은 춘해대학 멀티미디어학과에서 컴퓨터 관련 자원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두북농협 조합장으로 있는 장우씨와 두북농협 직원 건우씨, 동구청 지역경제과에 근무하고 있는 광우씨도 신기마을 출신이다. 유난히 의사가 많은 것도 눈에 띈다. 울산시 중앙외과 원장인 명우씨, 또 명우씨의 아들 상문씨도 현재 서울대학교 의대에 재학중이다. 혁우, 상호, 상훈씨도 각각 서울, 청주, 수원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경주이씨와 사돈지간인 경주최씨 중에서는 북한 동포돕기와 인도 등지의 봉사활동으로 평화 및 국제이해 부문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법륜 스님(속명 최석호)이 신기마을에서 자랐다. 또 경상일보 최석복 기자가 최병수의 손자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익재 이제현의 자손 이항복
이항복 초상
(서울대학교 박물관소장)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고,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그뒤 정자·저작·박사·봉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에 특진했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조정에서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으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했고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조사 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군대를 파견했다. 1593년 세자(뒤의 광해군)가 남쪽에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볼 때 대사마(大司馬)로 세자를 보필했다. 다음해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5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군을 정비했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유성룡(柳成龍)이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탄핵하자 자신도 휴전에 동조했다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했다. 1600년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고 살해하려 했다고 하며 성혼을 공격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했다.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에도 북인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산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했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겼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해 관작이 환급되고 포천에 예장되었다. 저서로는 〈사례훈몽 四禮訓蒙〉·〈주소계의 奏疏啓議〉·〈노사영언 魯史零言〉·〈백사집〉·〈북천일록 北遷日錄〉 등이 있다. 포천 화산서원(花山書院), 북청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익재공파[이제현]계통도
http://cafe.daum.net/kungjulee/8J1A/537
http://cafe.daum.net/kungjulee/8J1A/509
相臣錄[상신록]
http://cafe.daum.net/kungjulee/8J1A/4
경주이씨시호록 [2]
實職을 역임한 정2품이상과 종친 에게 주던 군호
http://cafe.daum.net/kungjulee/8J1A/3
혜비 이씨(생몰년미상)
▶ 혜비 이씨는 경주사람으로 부원군 이제현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대신들은 공민왕에게 명문가문의 딸로서 아들을 잘 낳을 만한 여자를 왕비로 들일 것을 청하였다. 이에 1359년 5월 이제현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는 공민왕의 명령에 의해 홍륜, 한안 등이 여러 왕비를 강간하려 하자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였지만 그녀의 절개가 워낙 대단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성재 이시영 독립운동가
충무공 이수일
백사 이항복
[박물관] 중앙박물관 ‘한국서화유물도록’10집 발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지건길)이 지난 91년 이후 계속하고 있는 사업으로 박물관 소장 옛 그림과 글씨를 도록을 통해 공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서화유물도록』 발간 작업이 최근 제10집을 냈다.
이번 호에는 얼마되지 않는 고려시대 일반회화 현존작으로 작가가 이제현으로 전하고 있는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와 이징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작가를 알 수 없는 <산수도> 등 18세기 이전 회화 양식을 살필 수있는 산수화 몇 점이 소개되고 있다.
또 꽃과 새를 그린 이른바 화조화나 소나 말,나비같은 털있는 짐승이나곤충을 그린 영모화로는 조정규의 <어해도>와 한용간의 <죽수영모어해>(竹樹翎毛魚蟹)가 실려 있으며 잘 알려진 상고재의 <화조영모초충도>(花鳥翎毛草蟲圖)는 7면이 전면 수록돼 있다.
이와 함께 윤순의 <적표마가>(赤驃馬歌). 제목과 발문이 있는 윤두서의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는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 715-770)이 같은 제목으로 쓴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돼 관심을 끈다.
서예작품으로는 9집에 이어 <조선명현필첩>(朝鮮名賢筆帖)의 제 2책과이정의 <초서간찰>(草書簡札)을 비롯해 22명의 작품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