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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캔 두댓 영화감상문
방금 영화 “위 캔 두댓”(이탈리아/2008년/111분)을 봤다. 작년엔가? 흰둥이한테서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1달 전쯤 키위가 이 영화를 보기를 권하며,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파일을 깔아줬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오늘 청계님과의 통화 도중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우리도 협동조합운동을 해야 한다.”, “서울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대구에서도 최진옥 원장이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그러한 이야기들이 간간이 들렸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당사자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영화 “위 캔 두댓”에 대해 좋게 평하고 내게 보기를 권해주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별다른 흥미나 관심이 끌리지 않았다. 단지 “언제 시간이 되면 한번쯤 봐야겠군.”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고,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요 몇 년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겪다보니, 거창한 일에는 관심이 없어졌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영화를 보게 된 건 다분히 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청계님과의 통화 도중 “어제 사라의 열쇠 회의 동영상을 봤는데, 배교수님이 위 캔 두댓 주인공처럼 당사자들과 일대일로 대등한 입장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것 같더군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바탕화면에 깔아만 놓고 잊고 지냈던 이 영화가 생각났다. 아울러 오늘 키위와 있었던 서로 간에 조금 불편했던 일, 키위에 대한 미안함, “키위가 바탕화면에 영화를 깔아줬으니, 영화를 보고나서 감상문을 올리면 키위 마음이 조금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등이 작용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적어도 내 경우에는)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개인적인 어떤 이유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아무튼 청계님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 낯설었다. 거부감이 살짝 들기도 했다. 정신장애인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놨다는 느낌,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느낌, 내가 본 정신장애인들, 나하고 친하게 지내는 당사자들은 저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닌데 하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 봤던 환자들의 모습도 기억 속에서 더듬어봤다. 그래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뭐...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려니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봤다.
문화차이도 많이 느꼈다. 협동조합이라는 개념도, 정신과 병동의 모습도, 환자들의 투표로 주치의를 바꾸는 장면도 우리와는 달라서 생소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쉽게 계약이 성사되고, 특이한 마루깔기에 고객이 감탄하고 주문이 밀려든다는 상황전개도 우리의 시장원리와는 다르게 느껴져서 “우리 현실에서 저게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삶을 강조하는 점, 그들에게도 각자의 능력이 따로 있음을 부각한 점, 보수적인 의사와 개혁적인 의사간의 시각의 차이, 약물복용량을 줄여야할 필요성, 일과 수입이 있을 때 그들의 자부심과 자기주장이 올라가는 점, 그들의 사랑과 성을 다룬 점, 사회적 냉소와 편견과 관련된 장면 등에는 공감이 갔다. 그리고 그들이 독립적인 건물을 작업장과 숙소로 활용하는 장면에서는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에게도 저런 건물이 있다면...”
아들을 약한 존재로만 보는 엄마의 시각과 그에 대한 아들의 저항과 분노는 사실적이라 느꼈다. 오랜 세월 당사자들과 친하게 지내다보니 어느새 나도 당사자들의 시각에서 부모들을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부모들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 때문에 힘들어하고 화내는 당사자들의 심정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이던 당사자의 자살 장면에서 나는 잠시 마음의 중심을 잃었다. 눈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잊고 지냈던 일들이 떠올라서 슬펐다. 마음이 아팠고, 눈물 없는 울음을 울었다. 나는 아끼던 당사자 둘을 잃었다. 외가 쪽 친척 질녀가 조현병이었다. 집안에서는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집밖에 나서기가 두려워 한발도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 대구대학교 교수가 되고나서 내가 1년쯤 가정방문을 하며 상담을 해줬다. 내가 찾아가면 무척 반가워했다. 어느 날 10살이나 적은 남동생에게 따귀를 맞고 그날 밤 자살했다. 그 일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안 되는구나. 상담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센터가 필요하다. 따로 나와 살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1995년도에 첫 번째 사회복귀시설(대구재활센터)을 만들었다.
또 한 명도 조현병이었다. 내가 사회복귀시설을 만들기 전부터 직접 가정방문상담을 들어가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놈을 결국 밖으로 끌어낸 경우이다. 나보다 불과 6살 적었는데, 나를 돌아가신 아빠 따르듯이 따랐다. 10년쯤 알고 지냈나? 어느 일요일 너무나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그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사소한 일로 화내고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오셨다. 그냥 내버려두시라고 했는데, 나중에 또 전화가 오셨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강제입원을 시켜야겠다.” 그러지 마시라고 말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내가 그때 바로 쫓아가지 않고 다시 잠이 든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일이 터졌다. 강제입원을 시키려고 129에 전화해서 사람들을 오게 하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운이 없으려니, 3층에서 뛰어내렸는데 장파열로 즉사하고 말았다. 그 어머님께서 명절 때마다 몇 번이나 과일을 보내주셨지만, 내가 일체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자식을 잃은 어머님의 심정이 더 아팠을 텐데, 그때는 그 어머님이 너무나 미워서 두 번 다시 연락하고 싶지가 않았다.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 내가 잃어버린 두 명의 당사자 생각에, 그리움에 마음이 아리고 아프다. 영화 속의 주인공, 협동조합 매니저인 넬로에 대해서는 때로는 동질감을 느꼈고, 때로는 부러움도 느꼈다. 나는 누가 나를 위로하고 지지해줬을까? 지나치게 일에 파묻혀 사는 남편에게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의 곁에는 고비 때마다 위로하고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때로는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해주는 아내가 있었다. 나는? 생각하니 갑자기 외롭고 슬펐다. 힘들 때마다 그나마 당사자들이 내 걱정을 해주고 지지해주었던 것 같다.
친하게 지내는 당사자들을 떠올려봤다. 무소유, 조나단, 마르티노, 마르티나, 이종찬, 오아시스, 지그프리트, 착한바보, 단감, 키위, 큐티걸, 캠벌, 향기, 신형, 그리고 돌아가신 양장훈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김연수 선생도 생각났다. 우리는 뭔가를 공동으로 해보자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양장훈 선생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뭔가를 같이 한다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한 명 한 명을 떠올려보니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는 훨씬 더 멀쩡하고, 훨씬 더 건강한 모습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인터넷에서 “위 캔 두댓”을 검색해봤다. 영화장르가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코미디다. 하긴 분류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달리 마땅치가 않았겠지 싶긴 하다. 영화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루바닥 시공업체인 협동조합은... 1983년 이탈리아에서 정신병원이 폐쇄되고... 1980년대에 설립된 정신장애인 협동조합들 중 하나로서... 이탈리아에는 현재 2,500개의 협동조합에서 3만 명의 정신장애인이 일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일부 전문가들이 용기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몇몇 협동조합이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자살 장면 때문에 내가 너무 슬펐기 때문인가? 주변의 친한 당사자들을 떠올리면서도 막막한 현실 앞에 무력감을 느껴서인가? 앞뒤로 꽉꽉 막힌 법과 제도가 너무나 높은 벽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우리와는 저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의 동화를 본 듯한 느낌, 약간의 비현실감, 추상적인 느낌... 그런 느낌 속에서 애매해하고 있다. 영화평 밑에 달린 많은 소감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정신장애인 당사자들과 정신보건전문가들이 올린 글인 듯싶은데, 거의 찬양 일색인 감상문들을 몇 개 슬쩍슬쩍 훑어보았다.
그들의 "병"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100% 좋은 영화라고 인정한다. 이탈리아에서 가능한 일이었으니 우리도 그걸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원칙론적 주장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방법론은? 내 느낌은 현재로서는 법과 제도, 시장원리, 그리고 문화에서 서로에게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에, 우리가 모델로 삼고 모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공동작업장도 떠올려본다.
이러한 방식에 대해 나는 두 가지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기준(생산적이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을 고정불변의 기준으로 세워놓고, 당사자들을 그 기준에 맞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이러한 방식이 성공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경우에는 당사자들을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게 하고, 삼류시민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 한 가지 비판의식은 사회에 재진입하는 책임을 각 개인에게 또는 영화에서처럼 10여명의 집단에게 맡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일부 특출한 소수의 개인 또는 소수의 집단만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 방식으로는 애써 노력해서, 기껏해야 공장노동자 또는 단순노무직, 아니면 공동작업장 생활훈련과정의 훈련생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 이상의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사회적 기준이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내세우고, 개인/소집단의 노력여하에 따라 사회적 기준에 맞게 재진입할 수 있다는 독려를 다분히 허구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식은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을 애쓰게 만들고, 골병들이고, 좌절감을 느끼게 하고, 기껏 애쓴 보람이 사회의 주변부에서 삼류시민으로 살아가는 것 이상의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겠지만, 그러한 예외를 성공케이스로 내세우는 것은 일종의 허구적인 집단최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신장애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당사자 자신의 철저한 자각이 필요할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국민전체의 자각과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자각이란 정신장애인을 “고장난, 열등한, 고쳐야하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 즉 “정신장애인도 각자 나름의 강점이 있고, 그에게 적합한 역할을 찾아주면 된다.”는 메시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적합한 역할을 찾아가야하는 책임을 개인/소집단에게 떠넘긴다면 소수만이 성공할 뿐, 대다수는 자신에게 적합한 역할을 찾는데 실패할 것이다. 그 역할을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국가가 중앙에 강력한 지원센터(마치 거대한 콜센터회사 또는 인터넷쇼핑회사와 같은 형태의 지원센터)를 만들어서 각 개인의 강점(예로써, 컴퓨터프로그램 개발능력, 번역능력, 공예품제작능력 등)을 상품화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그 홍보와 판매를 뒷받침해줄 때만이 비로소 당사자들의 능력발휘가 가능해질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각각의 당사자를 1인 기업/생산업체처럼 간주하고, 국가가 홍보, 유통, 판매를 책임져주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만이 대다수 당사자들의 능력발휘가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영화 “위 캔 두댓”을 본 내 소감은 일부 바람직한 메시지가 있지만, 전술 전략적으로 볼 때, 우리가 모델로 삼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지나치게 낙관론적 견해를 지닌 영화라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영화에 비해 엄청나게 다양하고 높은 장벽들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개인/소집단의 노력으로 그 장벽을 헤쳐 나가보라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가 될 것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방안을 넘어서는 보다 더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발상의 전환과 법/제도/지원체계의 개혁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의 사회적 기준이라는 잣대(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노동을 해야 한다. 효율적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살 수 있는 자유(예로써, 재미나게 산다. 종교적으로 참된 삶을 산다. 타인을 돕는 삶을 산다.)를 그들에게 허용해주어야 할 것이다. 즉 치료/재활이라는 미명하에 사회의 주변부에서 삼류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그들에게 강요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현재의 방식은 소수를 제외한 그들 다수에게는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좌절/실패를 경험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좌절감/열등감만 심어줄 뿐이다.
대다수 당사자, 가족, 그리고 개혁성향의 전문가들이 칭찬하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듯 비판적인 감상평을 올리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러한 비판이 비관주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적합한 목표가 무엇인지, 그 전술전략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 나름의 깊은 고민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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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솔이에게서 처절한 삶의 몸부림을 느꼈습니다. 그냥 웃는 이야기에도 인생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솔이 보다 저가 더 약해 보였습니다. 정신장애우는 너무 약합니다. 가정에서도 돕는다는 것이 무게가 되고 돈과 여자 술과 도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게 마련이죠. 우리는 그러한 것에 노출 되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철저히 일과에 건전하고 밝게 살아야겠습니다. 카페의 방침에 순종합니다.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것 같습니다. 온 몸으로 발버둥 치는 소외되고 약한 소수의 약자들의 비명이 들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시설 생활 등을 격으면서 친했던 그리고 카페에서 친했던 사람들이 자살하는걸 지켜 보아야만 했습니다... 처음 그사실을 접했을때는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내가 해줄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후회도요... 그분들 하늘에서 다 지켜보시고 계실 겁니다... 그게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이듭니다...
따뜻한 말한마디, 좋은 음악 들려주는게 현재 제역할 인것 같습니다..카페 회원들의 서로 역할 안에서 충실히 해나간다면
조금식 촛불들로 빛이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촛불님 사랑합니다!!
키위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네. 고마워. 힘낼게.
선생님께서조언이 아닌 이야기를해주신 후 그마나가졌던 기대마져 내려놓았습니다 확실히 해탈한 제동생보다 제가 늦음을느낍니다
다내려놓고 눈높이를 맞추었을때 비로소 동생의 소리를 들을수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뵙게 되어 반가웠고, 이번에 나눈 얘기들이 저로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동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하시니 더더욱 반갑습니다. 고치려하고 가르치려 하시기 보다는 동생의 얘기를 귀담아 듣다보면 동생이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는데, 불쏘시개님의 놀라운 학습속도와 변신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늘 행복하시길...
자기해체, 내가 먼저 해체되어야 상대를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자기해체라 도데체 처음 듣는 소리인데 좀 가르쳐 주세요. 많이 궁금해요. 추석 잘 보내시구요. 건강하세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사회적 통념, 편견, 자기관점 등 담론에서 벗어난 상태. 라깡, 데리다로부터 주장되어온.
심오하고 무섭운경험을하셧네요 영화는영화다!그러나 영화는 우리에게 메시지를주고 상상력을 키워주죠~~
고마워요. 나도 이런저런 힘든 경험들이 많았죠. 그리고 영화는 때로는 나와는 무관하게 그냥 재미로 볼 수 있는 영화도 있고, 내 삶의 이야기와 엮여서 뭔가를 생각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내 삶에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게 하는 영화도 있지요.
저도 영화를 보면서 내가생각했던 느낌이 주인공과똑같이 들어맞어서 대사하나안틀리고 공감한적이있어요 근데보고나서 처음에는 잘만들었다 감동적이다 라고느끼지만그때뿐이고, 현실로돌아오드라구용ㅋ ㅋ어릴때무심코봤던 외국영화들이기억나네요~
자살의 반댓말은 살자 이죠 스스로 생명을 해하는일은 있어서도 안되는데 ,안타깝네요 빨리떨쳐버리세요 ~
이쑤시개님 재치가 번득이네요. 자살의 반댓말은 살자... 그럴 듯한데요...ㅎㅎ
아마도 나만 힘들다라는 고립감, 왜하필이런병에걸려버렸나하는 좌절감 순간적인충동 홀림 에의해서그런것이아닐까요?
아마 그렇겠죠. 다들 그 순간을 잘 넘겼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고 보면 "순간"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것 같네요
그래서 이 영화는 같이 본 사람이 끝나고 감상평을 나누면
살자 코드나, 색스코드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를하게 되고, 갣관적인 시갇으로 보게되서 그 충겯을 반감시킬 수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