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무교동 낙지
黃 輝
무교동 낙지와의 첫 인연은 골목 선술집에서 시작 되었다. 고교를 졸업하자 동기생 몇 명과 함께 동아리 선배에게 처음 이끌려 간 곳이 바로 무교동 낙지 골목이다.
대학 입학시험이 끝나던 날 저녁, 선배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첫 잔부터 주전자 막걸리를 한 사발씩 가득 따라 주며 말했다. ‘다 마실 때까지 잔에서 절대 입을 때지 마라’ 우리는 선배 말이 법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술이 약한 친구들은 화장실을 오가기 시작했다. 나도 심한 두통을 느낄 즈음, 선배는 취기가 오른 듯 술잔을 큰 사발로 바꾸고 계속 술을 따랐다.
그렇게 고통 속에 술과의 첫 만남은 시작 되었다. 그때 나온 안주가 바로 낙지볶음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어떻게 집을 찾아 갔는지 지금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취해도 집만은 찾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곳 단골이 되어 수년이 지난 후부터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무교동 낙지에 얽인 사연은 끝이 없어 그 어느 곳보다 옛날 소중한 추억들의 보물창고에 남아 있다. 벗들과 축하를 주고받던 일도, 속상하고 우울 할 때 속마음을 터놓고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도, 식탁위에는 언제나 무교동 낙지가 놓여 있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조개탕이나 감자탕이 추가되긴 했지만 말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하나 둘씩 장가를 갈 때도 애인의 첫 소개 장소로 무교동 낙지는 피할 수 없는 필수 코스였다. 이렇게 만난 몇몇 친구 내외는 지금도 모두 무교동 낙지 마니아(Mania)들이다.
우리 부부 또한 예외는 아니다. 첫 아이를 임신 했을 때 음식을 가려 먹으라는 어머님의 엄명도 무교동 낙지만은 예외였다. 입덧을 심하게 하던 아내가 속이 불편하다고 하면 늦은 밤에도 무교동 낙지 집를 찾았다. 딸 녀석은 지금도 머리가 나쁜 것은 엄마가 임신 중 매운 것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넉살을 떨면서도 남편까지 낙지 중독자로 만들었다.
갑자기 불어 닥친 1차 오일쇼크와 IMF파동 때, 다른 가게들은 파리를 날리고 있어도 이 낙지 골목만은 단골손님들로 문전성시를 누리던 골목이었다. 도시 재개발로 본래의 좁은 낙지골목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몇몇 낙지 집은 대로 건너편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요즈음도 친구들을 만날 때면 으레 시간 약속만 한다. 시간에 맞춰 나가면 용케도 낙지집 한 곳에 모두들 나와 있었다. 박박 머리 친구들 간에 오랜 무언의 약속이 반세기가 흘러도 이렇게 잘 지켜지는 모습이 그저 흐뭇할 뿐이다.
세월이 흘러 반백이 다된 친구들은 무교동 낙지만 만나면 옛이야기 보따리를 줄줄이 풀어 놓는다. 첫 사랑 순애보에서부터 백주에 명동 한복판에서 장발단속에 걸려 머리카락을 잘리고 함께 울분을 토하던 일, 직장 진로 선택과 입사 후 직장 상사와의 갈등으로 방황하던 숨은 뒷이야기, 고교생 아들 녀석의 빗나간 행동에 몽둥이를 들었던 무용담에 이르기까지 추억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각기 다른 삶을 영위하면서도 우리를 이토록 하나로 묶고 오랫동안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 저변에는 분명 무교동 낙지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따라 괜시리 안치환의 노래 ‘오늘이 좋다’가 듣고 싶다. 노래 말에 ‘남은 인생 통 틀어서 우리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라는 대목 때문이다. 갑자기 녀석들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린다. 늦더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워도 좋다. 8월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야 되겠다. 비지땀을 함께 흘리며 찌그러진 낮 익은 주전자로 잔을 돌려야 마음이 풀릴 것 같다. 박박 머리에 만나 초로의 노객이 다 된 지금까지도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그 곳에는 반백년을 함께한 곱디고운 붉은 색의 매운 무교동 낙지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번 주말에는 모든 일을 잠시 미루고 전화부터 걸어야 되겠다.
‘첨지ⓐ다. 그 동안 잘 지내셨는가? 보고 싶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6시에 부부동반일세.’ (2015.09.14.)
ⓐ;학창시절 나의 별명
첫댓글 황휘님의 글 잘보았습니다♡
신문사에 직장을 두신것 같습니다♡♡잘읽었습니다♡♡ 저는 조선호텔 취직해서 근무할때 무교동 만두칼국수 먹든 생각납니다♡♡ 푸짐하고 맛도 좋아요 여적지 그런 만두 칼국수 볼수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