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문태고 3 박소원
가끔씩 모든 것을 잃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에게 권리와 기회가 있듯이 의무와 기대가 있고, 이는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것이다. 언제부턴가 부모에게, 학교에, 친구에게. 맞춰만 사는 내가 싫어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게 뭔지를 모르는 내가 싫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하릴없이, 정처 없이 구는 내가 싫어서, 나에게 주어진 것, 또 맡겨진 것도 모두 다 버리고, 그래, 모든 걸 다 잃고 떠나고 싶다.
요즘들어 정신이 없다. 학교엘 가야 하는데 9시에 일어나고, 교복을 입어야 하는데 저 까만 옷이 입고 싶다. 대입이라는 문제는 악몽처럼 쫓아 오는데, 앞으로 달리지 못해 옆으로 슬쩍 비키고 싶다. 대학들은 자기소개서로 나를 소개해 보라하고, 솔직한 마음이 결어된 자소설이 쓰여진다. 이렇게 내 마음과는 반대되는 거짓 인생에서 살고, 진짜 나를 찾고 싶은 내 마음도 거짓 같다. 또 거지 같다. 나는 왜 이렇게 살까?
똑 똑
"율곡아, 밥 먹어야지."
"네, 엄마. 곧 나가요."
주말이 되면 나는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밖이 싫은 건 아니다. 단지 안이 더 좋을 뿐, 내 타자 소리와 심장 소리가 엇박자로 들리며 쉴 새 없이 쿵쾅대는 것,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방에서 나와 식탁으로 갔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도 앉아 계셨다.
"율곡, 이제 고3이니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블로근지 불 너구린지 그만해라. 황이 좀 봐라, 혼자서도 얼마나 잘하냐, 형으로서 모범 좀 보여."
아버지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귀 담아듣지 않았다. 내 인생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나고 누가 뭐래도 이건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나는 누구보다도 소심했고 순종적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 노력하게 되고, 자신감을 찾게 된 건 아마 그날 이후일 것이다. 기대라는 울타리 속에 스스로 나를 가두고, 사랑받는다는 착각으로 나를 묶어 왔었던 내가 모든 것을 해치우고 방으로 나왔었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2014년 어느 겨울날,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를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전학을 가게 된 나, 공부도 잘했었고 친구도 많았었던 나는 전학 갈 학교가 확정되기 전 한 달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잘못이 없었기에 떳떳했고, 누명인 걸 알기에 당당했었던 내가 죄책감을 느끼게 된 건 부모님의 불신과 부모님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쥐 죽은 듯 방에만 갇혀 있었고, 나갈 수 있었음에도 나가지 않았다. 문을 열면 들어오는 건 엄마였고, 나에게 맨날 하는 말의 내용은 같았다. 너 같은 자식을 낳은 내가 병신이다. 동네 사람들 창피해서 밖을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죽고 싶다. 이런 말이 듣기 싫어 문을 잠갔고, 마음도 잠갔다. 말로만 나를 예뻐했던 엄마 같았기에, 그때는 너무도 싫었기에, 한 달이 지나고 학교에 다시 갈 수 있게 되었다. 즉, 부모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익숙함을 떠나 낯섦에 들어와 어색함을 익숙함으로 만들어야 했었던 나, 친구들이 혹시 나를 싫어하진 않을까 고민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사실은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지만.
미술 수업이었다. 나이 서른 먹어 보이는 여자가 교탁 앞에 서서 칠판에 크게 세 글자를 적었다.
자 화 상
그리고는 다음 시간까지 그려오랬다.
여자는 4절지 30장을 실장에게 주고 교탁에 앉아 묽게 탄 커피를 홀짝였다.
자화상이라,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다.
아니, 그 전에 전학 오게 된 후로 거울 한 번 본적 없다. 그리고 보기도 싫었다. 부모조차 싫어하는 나인데, 누군가 좋아나 할까?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도 없었고.
다음 수업이 되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을 닮은 것을 그려왔고, 앞으로 제출하며 닮았네 안 닮았네 말을 하였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백지로 제출했기 때문이다.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교실을 떠나는데 나는 떠나지 못했다. 여자는 내게로 다가왔다. 기분 나쁘게 좋은 냄새가 났다.
"자몽이야."
"네?"
"내 향수 자몽향이라고."
"안 물어봤는데요?"
여자는 내 마음속을 읽는 것 같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속으로 궁금해했잖아"
"아니라니까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소리를 친 후에도 여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안 그려왔어?"
"뭘요?"
"숙제 말이야, 자화상."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도저히 내가 싫어서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너도 네가 싫니?"
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눈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그랬었거든, 난 내가 싫었어, 못생겼고, 광대도 크고,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어.
내 별명은 홍어 코였고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나도 싫었어. 하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자화상을 그려봤고, 생각보다 내가 매력 있다는 것을 알았어. 너희도 그러길 바라서 한 번 그려보라고 한 거야!"
여자의 말이 끝났고, 눈에서만 느껴졌던 따스함이 흘러내려 나의 온 볼을 적셨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는 제가 너무 싫어요.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고, 맨날 미움만 받는 제가 싫어요.
저는 앞으로도 미움받을 운명이고 운명은 못 고쳐요. 어떡하죠? 저는 숙제를 해올 수 가"
여자 아니 선생님은 검지를 뻗어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쉿!"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너는 미움받지 않아, 그리고 그럴 운명은 없어. 물론, 운명은 정해져 있어.
하지만 알아? 그 운명을 정하는 사람은 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번 그려봐. 잘 생겼잖아!"
나는 울음을 그치고 까매진 교복 소매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 너 안 미워해! 나는 네가 좋은걸?"
나는 교실 밖으로 나와 다음 교실을 찾아 갔다.
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거울과 펜을 들고 종이 앞에 누웠다. 그리고 찬찬히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짙은 눈썹, 날렵한 눈매, 오뚝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코 까지 생각보다 난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너무 잘 그려졌다. 나는 아름다웠다. 나는 잘 생겼다.
나는 미움 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이율곡이다!
다음 수업 때, 나는 성공적으로 그림을 제출했고, 수행평가 100점을 받았다.
그 동안 나는 어쩌면 내가 나를, 그러니까 나 혼자서 나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제 내가 좋다. 나는 이율곡이라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사실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다시 자신감을 느끼며 살 수 있었고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가끔 힘이 들 때면 나는 나의 미술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운 명 은 정 해 져 있 다.
하지만, 그 운명을 정하는 사람은 나다.
나는 이 말을 좌우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고, 이제는 절대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간다.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나의 인생을.. 블로그? 블로그는 나의 소설 창고일 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