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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들목은 흐르고
오남희
은주나이 이십대 후반 굴곡의 세월은 은주에게 시련이었지만 험난한 고비고비를 잘 넘길 수있는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 하게 했다.
엄마와 아빠가 살아계실 때 은주네 생활은 평화로웠다. 아버지의 술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사이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두분의 자식들 사랑만은 남 부럽지 않았다. 마가 끼었는지 두분은 너무 일찍 은주 남매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유년시절을 부모와 사별하고 할머니와 큰아버지 밑에서 보내면서 즐거웠든 것은 큰댁 오빠와 언니들이 친동생처럼 격의
없이 사랑해준 덕분이 아닌가 한다. 은주형제들은 너무 어려서 큰댁으로 들어 갈 수 밨에 없었다. 대식구를 거느리고
사시면서도 큰어머니는 얼굴 한번 찡그리시질 않았다. 두 할머니 사촌 형제들 고종사촌 머슴들 까지 참으로 대 식구였
지만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과 가족들의 사랑은 모든것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은주형제는 동생들이며 앞날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언니가 어느날 언니가 먼저 서울으로 올라 가겠으니 연락하면 오라고 하면서
먼저 서울로 떠났다. 은주도 중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언니를 뒤따라 갔다.
이때서 부터 은주네는 세상에 던저지고 스스로 생활을 짊어져야 했다. 앞도 옆도 돌아 보지않고 은주 형제는 치열하게
이십대를 보냈다. 세월은 흐르고 은주 나이 이십대 후반, 희생적인 언니덕분에 오남매가 뭉처서 오늘의 안정을 맞이
할 수 있음을 새삼 감사했다. 언니도 결혼을 했고 세남동생도 다 올라와서 고등학교를 졸업 했고 한 가정을 그런대로
이루고 살아오면서 언니도 그랬지만 적령기가 차고 보니 엄마 생각 아빠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한분만 살아 계셨어도
이렇게 고아가 되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외롭지는 않았을 것 만 같았다. 보험회사 경력도 이골이 나서
어떤 때는 회사 자체 내에서 일등도 했다. 돈도 전세를 얻을 만큼 벌었고 이제 남은 것은 결혼을 해서 한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오손도손 남편의 사랑도 받고 정말 행복하게 사는게 꿈이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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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우연히 어떤 사람 소개로 그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다가 은주는 29살에 결혼을 했다. 집안도 괜찮았고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 했다.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않고 서둘러 결혼을 했다. 내 가정을 가진다는 게 꿈만 같았다. 떠돌이처럼 객지생활
몇 년이던가, 은주도 이제 한 가정의 주부로서 알뜰하고 살뜰하게 남편을 섬기며 따뜻한 가정을 꾸며 아빠사랑에 늘
목마른 허기를 채우고, 내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은주의 무지개 꿈이었다.
멋모르고 시작한 신혼살림은 즐겁고 행복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얄궂은 운명은 은주를 시샘하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시어머니께서 은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씩 싸늘해졌다. 제일 첫 번째가 부모 없는 것이 이유였다. 내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친정도 없는 고아인 네가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단 말이냐고 시간이 흐를수록 은주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은주는 참기로 했다. 시어머니말씀도 맞기 때문이다. 정말 나는 부모가 없는 고아다. 할머니 큰댁이 계시면 뭐해 천리가
떨어진 곳에 계시고 내 엄마아빠는 아니지 않는가. 은주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고 스스로의 모멸감으로 마음
부칠 곳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남매를 갖게 되었지만 은주는 마음이 산란해지면서 남편에게 점점 짜증을 내게 되었다. 우리 헤어지자고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고 서럽게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다 참을 수 가 있었지만 부모 없는 고아라는
말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의지할 데 없어 외롭고 보니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신앙에 더 기대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착하던 남편이 어느
날 부터 집엘 잘 안 들어 왔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서로 으르렁대면서 분위기가 살벌해지니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 남편은 그래도 자기의 투정을 다 받아 줄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한 남편인데 은주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 때 같은 교인과 결혼을 했었다면, 누구하나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고 언니 외에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들어줄 사람도
없는 막막한 고아, 주어진 운명과 엄마아빠 할머니 생각에 몇 밤을 울면서 생각했다.
그래 헤어지자, 고아로 자라 많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빈 마음을 채우고 싶었던 결혼, 그러나 현실은 무지개가 아니었다.
남편이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기가 막히고 서러웠다.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복도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남편은 이혼은 안 된다고 미안하다고 처음엔 완강했지만 서슬 퍼런 은주기에 눌렸는지 합의 이혼에 도장을 찍고 말았
다. 삼십대 중반 이리해서 은주는 다시 천지에 의지 할 곳 없는 혼자가 되었다.
은주는 외로움에 몇 날 며칠을 울었다.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외롭게 태여 났을까요’.
삼일동안 울면서 몸부림을 했다. “이혼은 좀 더 생각을 했어야 했어”
시간이 지나면서 은주는 후회가 왔다. 그러나 이제는 엎지러진 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만들다니, 은주는 유년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제법 먼 거리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운동회 하는 날이다.
6학년인 언니와 같이 그 초등학교로 구경을 가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뜻 밖에 아버지가 언니와 은주를 찾아 오셨다.
두 딸이 먼 거리를 걸어서 집에 가기는 무리라고 언니와 은주 형제를 버스를 태워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다고 아버지
학교 친구 이기도 한 이 학교 선생님과 인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은주형제는 너무 기뻤다. 정말 공주가 된 기분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언니와 셋이서 낯선 시골길을 걸으며 마냥 행복
했었던, 아빠와의 마지막이 된 추억이 떠올라 은주는 아빠가 너무 그리워 한없이 울었다.
은주 는 자기 곁에서 떠나는 사람들 아빠 엄마 남편, 그리고 남은 것은 두 아이들과 살아야 하는 생활과 마음 고생만
남아 있는 다시 고아가 된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막막한 생각들로 앞이 캄캄했다.
그래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다시 맞서서 이겨내야지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은주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저런 불행 속에서 떠오른 것은 사랑받고 살았던 어린 시절 할머니 생각에 은주는 가슴이
복바쳤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할머니 품에서 목놓아 울고 싶었다.
엄마 아빠대신 우리를 끔직이도 사랑해 주셨던 할머니 그 할머니만 옆에 계셨어도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것만
같았다. 중학교 시험 보러 가는 날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눈이 무릅을 덮을 만큼 쌓였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은주 부르셨다.
"은주야 이 아재 뒤만 졸졸 따라 가거라".
이리해서 십리길, 머슴이던 아재가 앞서서 길을 내주었기에 학교에 무난히 도착했고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다들 어렵다고 했는데 은주는 쉬었다. 수학을 백점 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시험을 치루고 나오니
큰집 고등학교 다닌 막내언니가 뜻 밖에 십리 길 은주를 마중 나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지만
은주는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쓸쓸했는데 그때의 그 기쁨을 은주는 잊을 수가 없다 .
언니는 은주를 빵집으로 데리고 가서 빵도 사주고 음료도 시켜주고 그리고 다정하게 언니랑 손잡고 행복하게 집엘
왔던 기억에 그 언니도 너무 보고 싶고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 눈물이 끝없이 나왔다.
기간교사를 하셨던 정이 많은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 생각은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부모님이 안계셨어도
그래도 할머니 언니들 오빠들의 사랑을 받으며 중학교를 졸업 할 수가 있었다. 외로운 은주는 정말 안락한 가정을
꾸미고 싶었다. 생각지도 않던 이혼으로 좌절된 꿈이 은주를 너무 슬프게 했다. 삼일 밤낮을 울다가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에겐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정말 뜨겁게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셨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가슴에 성경한 구절을 새겨주셨다. 은주는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해낼 수 있어
문제없어 용기가 솟았다. 은주는 다시 보험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의외로 보험이 잘 팔려 나갔다. 전적으로 하나님
께 기도했다 그러면 힘이솟았다, 어느새 은주는 사십을 넘어 오십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참으로 열심히
뛰었다. 은주는 두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면서 나름대로 뿌듯했다. ‘그래 너희들만은 아빠와는 비록 같이 살지 않지만
"언제든지 손짓하면 와주는 아빠가 있다"
"외롭다고 생각 하지 마라’ 그래도 늘 가슴이 짠하다".
- 은주의 유년시절
은주 집안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한 것은 은주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이다. 기간교사를 하셨던 아버지가 삼십대
후반에 병을 얻어 돌아 가셨고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졸지 고아가 되어버리고 만 어린 오남매, 은주 형제의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너의 형제는 꼭 사범학교를 가서 선생이 되어 동생들을 가르치고 장래에 너희가 편안하게
살려면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자식들을 선생 만드는게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러나 뜻 아니 한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은주의 모든 꿈도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지금쯤 치열하게 공부해 사범학교 학생이 되어 있을 우리자매 은주는 마음이 복 바쳤다.
두 형제는 낮선 서울로 오긴 왔지만 막막했다. 동생들을 가르치는 게 우선 급선무였다.
거리에서 여학생과 마주칠 때면 마음이 움짓 했지만 그것보다. 살아가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나오는 게 눈물뿐이었다. 코 베어 간다는 무서운 서울에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 세상은 너무나 무섭고 발 부칠
곳이 없었다. 먼저 서울에 올라온 언니 갑현이는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씩씩하고, 엄마처럼 동생들을 몹시 챙겼다.
어린 형제는 십대 후반을 생각지도 않은 공장 아가씨로 온갖 고생을 인내하며 인생을 익혀 가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사랑이 유난했던 은주네 오남매 위로 언니가 하나 아래로 남동생이 셋 부모 슬하에서 크게 어려움 없이
잘 지냈다. 큰댁 오빠 언니들의 사랑과 큰아빠 큰 엄마의 사랑도 남부럽지 않았으며 공부를 잘해 친구 사이에도
인기가 좋았다. 이렇게 십대를 마치게 되었고 20대로 접어들었다. ‘내 꿈은 이게 아니야’ 은주는 지금의 생활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서 초조했다. 은주의 야무진 꿈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어두웠다.
그러나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어느 날 우연히 아는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 언니 말에 의하면 지금보다는 너에게 비전이 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견문도
넓힐 수 있고 잘만하면 그야말로 집도 살 수가 있다는 말에 은주는 꿈에 부풀었다. 삼성회사에서 설계사 시험을
봤다. 시험은 당당히 합격하였고 은주는 보험 설계사로 첫발을 내 디뎠다. 처음엔 입도 떨어지지 않고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생겼다. 이 길이 본인의 천직인양 재미가 붙었고 사람 만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면서 은주는 어려서부터 가고 싶었던 교회를 스스로 찾아갔다. 교회를 다닐 수 있어 정말 좋았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든든한 빽이 되었다. 은주는 보험회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고 교회도
열심히 나가면서 믿음 생활과 여러 인연들과 교류 하는것이 좋았다.
쥐구멍이라고 뭐 해 뜰 날이 없겠는가! 이레 저레 좋은 분들을 만나면서 희망이 찾아왔고 생활엔 활력소가 되었다.
또한 우연히 교인이 아닌 일반 사람을 알게 되어 교제 끝에 결혼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중매한다고 해도, 남자들이
좋다고 따라 다니고 했지만 은주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나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돼 내가 어떤 집안의 자손
인데’ 함부로 행동 할 수가 없었다.
좋은 남자 만나서 큰댁 언니들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살리라고 그는 늘 몸을 사렸다.
시골에서 큰엄마 할머니는 수시로 안부를 보내왔다. 큰 아버지는 학교 장학사로 근무하셨다.
늘 염려하시는 할머니 큰어머니께서는 ‘여자는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느니라’ 밤늦도록 쏘다니지 말거라는 등등,
언니와 은주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과 가품 몸가짐 이런 것들에 늘 신경을 썼다.
- 멋쟁이 임해규 언니 만나다
이상하게도 은주 주변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은주와
가장 잘 통해 큰 힘이 되었던 덕성여대 출신 임 해규 라는 언니다. 두 사람은 교회서 만났다.
시간 나는 대로 같이 기도회도 가고 금식수련에도 참석을 했다. 은주에게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이 언니는 부잣집
딸로 서울대 미대교수 부인이다. 찬송가를 쏠로로 부를 때면 애절함에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토록 노래를 잘 부른 언니다. 은주는 이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 언니도 지혜로운 은주를 좋아했다.
어느 날이다 은주더러 오카리나를 불러보란다. 농담인 줄 알았다.
"오카리나는 고사하고 악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나에게 오카리나라니 농담하지 마세요'.
은주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야 해봐 내가 가르켜 줄게’ 은주는 어거지로 입에 댄 척만 하기를 며칠, 은주는 힘이 빠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주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악보가 싹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은주는 꿈인가 생시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그때부터 시간만 나면 오카리나를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언감생심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칠 기회도 주셨다. 은주는 사는 보람을 느꼈다.
못 배운 한으로 움츠렸던 인생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또 어느 날이다. 해규 언니가 돈을 벌면 집을 살 요량을 해야지 언제까지 셋방살이를 할 건데 하고 핀잔을 준다.
" 아 정말 그래’ 나는 바보야!
그 때서야 정신이 든 은주는 보험회사에서 번 돈을 모은 것 하고 대출을 받아 운 좋게도 잠실 번화가 한쪽에 있는
작은 지하 연립을 사게 되었다.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세상이 부럽지 않았다.
언니 고마워요 내가 언니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언니를 은주에게 부처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눈물로 감사했다.
- 김치장사가 된 해규언니
해규 언니는 정말 은주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난 언니다.
그런 언니에게도 운명이라는게 있는가 무슨 짓궂은 장난인지 서울대 미대교수인 잘난 남편을 사십대에 사별하고
혼자서 씩씩하고 외롭게 살고 있는 분이다. 미국을 사흘거리 드나드신 멋쟁이 친정어머니를 비롯해서 다 돈이 많고
쟁쟁하게 사는 혈육들이다. 그런데 남편 돌아가고 얼마 뒤의 일이다. 절망에 몸과 마음을 추수릴 수 도 없는 막내
딸네 집을 오신 친정어머니가 배추 삼십 포기를 사가지고 오셨단다. 이 배추를 김장감으로 담아 거리에 나가서 팔든
교회에 가서 팔든 팔라는 엄명을 받았다. 해규 언니는 기가 막혔다.
"저 노인 노망한 게 아니야’ 내 엄마 맞어"
상처로 절망에 빠져있는 딸에게 안위는 못해줄 망정 장사라니 평생 장사라는 장자도 모른 해규 언니는 장사가
뭔지도 모르는 딸을 제일 잘 알 엄마일 터인데, 울며울며 어머니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언니는 다시 추상같은 엄마의 명령을 꿈결처럼 또 들었다.
"네가 이 김치를 팔지 못할 경우엔 너와는 모든 인연을 끓겠다".
형제 누구도 널 돕지 않을 거야’ 기가 막힌 해규 언니는 팔자에도 없는 장사를 울면서 시작했다.
교회에선 찬송 잘 부르는 언니로 잘생긴 서울대미대교수 부인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룰루랄라 한없이 높았던
서슬 푸른 콧대였다, 언니는 콧대를 죽이고 머리를 숙이면서 운명을 받아들였다. 교인들에게 김치를 팔기 시작했다.
이런 시련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해규 언니는 전성기 사십대에 겸손을 몸에 익혔고,
살아온 지난날의 성찰을 되새기며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을 보물처럼 안게 되었다.
‘야! 사는 게 별거 아니드라‘
그 때 엄마가 내 어리광을 다 받아 주었으면 나는 남을 의지 하지 않고는 못 살았을 거야 독한 모성이 나를 똑 바로
세워놨어 그 언니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지금 한강다리가 일곱 개가 보이는 잠실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 신학대학원생이 된 은주
은주 아이들도 다 잘 커서 제 밥벌이들을 하고 있다. 오십대 중반에 들어선 은주에게 또 다른 소원과 꿈을 이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교회에서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반을 모집해서 교회에 계신 쟁쟁한 분들이 봉사로 수업을
해준다는 거였다. 은주는 너무 기뻤다. 사람들은 은주를 대학 출신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만이 은주의 걸림
돌이었다. 사람들이 놀래거나 말거나 은주는 검정고시 반에 등록을 했다.
‘언니 왜 거기가 있어 "거기는 고등학교 졸업장 따는 반이야" 한다.
은주는 시침이를 딱 떼고 "그래 알아 사실은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거든" 사람들은 놀래고 은주는 당당히 검정고시
반에서 공부를 했다. 그래서 당당히 합격을 하고 신학대에 입학을 했든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까지 오게 되었다고 은주는 늘 감사 기도를 잊지 않는다. 활발한 대학생활에 은주는 이 세상 부러운게 없었다.
대표를 엮임 하면서 돈을 모았고 교수님들에게도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으면서 등록금을 마련했다. 못다 한 좌절
되었던 꿈들을 펼쳐가는 것이다. 은주는 엄마의 꿈이면서 본인의 평생소원이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은주는 대학을
마치고 은주는 다시 대학원에 입학했다. 배움이 뭔지 그 기쁨을 알아 가면서 조금씩 소망을 향하여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선생 되기를 그렇게 소망하시던 엄마 끔직이도 사랑해 주셨든 할머니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셨던 큰아빠
큰 엄마 오빠 언니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은 해규 언니다.
해규 언니의 도움은 은주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사는 법 생각하는 법 지혜 등등, 지금 은주는 교회에서 소망하던
검정고시 중고등반을 가르치고 있으며 유치원 교사로 나가고 있다.
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안의셨어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
이혼한 남편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죽으려고 그랬는지 은주에게 와서 미안하다고 다시 합치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살고 있는 그 여자는 어떻게 하려고! 하니 헤어지겠다고 한다. 이제까지 혼자 살아 왔는데 쓸데
없는 소리 말라고 돌려 보내고 나면 뭔가 한줄기 쓸쓸한 마음이 일면서 붇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그러는 찰나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은주는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같이 안 살지라도 든든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든 남편이다. 혼자 살라는 타고난 운명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남편의 그녀는 남편 상청에도 못 왔다. 시아버님께서 발도 못 부치게 하셨다. 뒷 심부름과 손님맞이를 은주가 다 했다.
장성한 아들은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았다. 골골하신 할머니와 강건하신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은주가 들어와 살기를 바라신다. 네가 이혼만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하고 시아버님이 한탄하
신다. 제 운명인 걸요.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 시간이다 나를 조금만 안아 주셨어도 이혼까지는... 은주는 서글펐다
나는 이집 식구가 아니다 하는 생각에 공중에 홀로 뜬 기분이다. 그게 다 무슨 부질없는 생각인가,
은주는 괜히 눈물이 나왔다. 시어머니께서 오늘도 은주를 찾으신다. 좀 와줄 수 없겠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시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은주는 이제 한가한 몸이 아니다. 그래도 은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어머니께 달려간다.
남 봉사도 하는데 아이들의 할머니 아닌가. 이제 은주 오남매는 열심히 들 살아 간다. 일찍이 어린 동생들 엄마노릇
하느라 너무나 애를 쓴 빈틈없는 갑현이 언니, 그 언니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언니의 은혜는 정말 지대하다.
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 다섯 형제의 희생적인 언니가 아니었다면, 엄마 역할을 빈틈없이 해준 언니가 없었다면,
은주는 언니 생각에도 가슴이 아프다. 지금은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너는 엄마 아빠 사랑을 듬북 받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을 더 바라겠니!
은주가 아주 어릴 때 전주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언니가 방학 때 내려오면 책 한권씩을 들고 동네를 벗어나 외진 산 밑
큰 방죽이 있는 언덕에서 멋진 그 언니 손을 잡고 산책을 자주 나갔다. 방죽이라고는 하지만 제법 규모가 크고 운치가
있는 우리마을 젖줄이기도 한 이 방죽은 넓은 갓길엔 아름드리 나무들이 정교하게 자리를 잡고 방죽 한쪽은 연꽃나무
와 갈대가 욱어져 정감이 넘치는 곳이다 주변 인근 초등학교 소풍지기도 하고 많은 인근 사람들이 놀다가 가는 곳이
기도 하다. 그런 방죽에서. 언니와 은주는 물위 가로로 뻗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가져간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언니
와 손을 잡고 방죽 위 뚝 길을 걷곤 했다. 언니가 책을 읽어주면 은주는 너무 좋았다. 은주야 우리 구름 따러 갈까?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보며 들길을 뛰는 언니가 정말 멋있었다.
부모 정을 모르고 자란 은주는 사소한 것에서도 따뜻한 정을 느끼고 그러한 정들을 늘 그리워했다.
어린 날의 우상이던 그 언니를 추억하다가 은주는 문득 그 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언니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은주와는 나이차가 많은 큰집 언니는 시를 쓰시면서 문학 활동을 하고 계신다. 문학에도 목마른 나에게 큰언니는 정신
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다. 나이차가 많은 이 큰 언니와의 인연도 참 묘한데서 이어졌다. 큰댁 막내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만나게 되었다.하나님은 여러 인연들을 부쳐 주시면서 은주의 소원을 다 들어주고 계신다.
지금 은주는 행복 하다. 어려움이 가고 나니 다시 따스한 햇살을 이렇게 비추어주신 하나님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
를 생각하면서 은주는 눈물로 감사하고 있다.
이런 은주의 모습을 보고 놀랄 어린 시절 할머니 아빠 엄마 큰아빠 큰엄마 그리고 우상이던 오빠 언니들이 그립다.
은주도 어느새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 엄마 아빠 할머니, 어느새 저도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왔습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저에게 늘 힘을 주었던 부모님과 할머니 집안 어른들 그 중에서도 제일 그리운 할머니!
때가 되면 봄이 오듯이 이제 제게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저도 봄을 느끼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며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 갈 꺼에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은주는 육십을 바라보는 희끗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첫댓글 감명깊게 잘읽었어요. 고맙습니다.
남희 언니의 소설 이네요 그 동안 쓰윽 스쳐읽고 가느라 자세히 읽을 수 없었는데 남희 언니가 바라는 아름다운 삶을 소설로 쓰셨군요 세상은 이렇게 서로 돌보며 따스하게 살기를 바라는 남희언니의 염원이 담긴 글 소설까지의 재능이 보이시네요 늘 좋은 글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