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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39. [역경의 열매] 김용현 (1-13) 초등생, 밤열차 타고 가출… 주님은 “돌아가라”
내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숱한 방황으로 얼룩져 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변화시키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신 수많은 기적을 통해 ‘세상에 가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운명을 탓하면서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이들, 인생의 목적지를 몰라 방황하는 이들에게 내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 나와 비슷한 고난과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발견하라”고 간절히 전하고 싶다.
1946년 전남 목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동네에서 못된 짓을 일삼는 ‘잡놈 중의 잡놈’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는커녕 어떻게 하면 맛있는 걸 훔쳐 먹을까만 고민했고, 약한 친구들을 두들겨 팼다. 집에선 아버지 구두 등 집안 기물을 몰래 들고나가 엿장수에게 팔아먹었다. 말썽꾸러기 골목대장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때부터 나를 조금씩 인도하셨다.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를 통해 교회 주일학교에 나가게 된 것이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유교 집안에서 신앙과 무관하게 자라온 나에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했다. 여차하면 몇 대 패줄 요량으로 그 아이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목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꼬마 깡패가 왔구나”라며 웃으면서 사탕을 쥐어주셨다. 목사님은 그때까지 내가 만난 어른들과 달랐다. 친구 같은 느낌이었고 무엇이든 솔직하게 고백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처음 맞는 성탄절 아침, 나는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잔뜩 들떠 있었다. 친구가 헌금을 꼭 내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를 졸랐다.
“엄마, 헌금 좀 줘. 오늘 성탄절이라 교회 가야 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두 말 없이 1000환을 꺼내 주셨다. 말썽쟁이 아들이 교회에 가서 철들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하지만 헌금은 교회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써버렸다. 팽이도 사고 오징어도 사 먹었다. 예배당에 와서는 내 몫의 과자와 사탕을 다 먹고도 친구들 것까지 뺏어 먹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배탈이 났다. 너무 아파 방바닥을 구르면서 난생 처음 기도를 했다.
“예수님 생일날 제가 더 많이 먹어서 죄송해요. 앞으로 안 그럴 테니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내가 7살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출산 후 5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어렸던 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하루하루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버지 역시 술에 절어 지내며 자주 호통을 쳤다. 상실감과 반항심이 가득했던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괴짜로 변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면 무조건 때렸다. ‘내가 이렇게 불행한데 왜 저놈들은 저토록 행복해 보이냐’는 불만에 예전보다 더 난폭하게 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 등굣길에 기차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가 질 때까지 역 주변을 배회하다 서울로 가는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지도만 들고 있었을 뿐 수중엔 동전 한 닢도 없었다. 역전파출소를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으니 “쪼그만 게 벌써부터 가출이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경사가 밥을 사주고 “다시는 가출하지 마라”며 목포행 기차에 태워줬다.
하루 만에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매를 들지 않았고 말없이 안고 울기만 하셨다. 그 뒤로 난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아마도 주님께서 내가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셨던 것 같다.
* [역경의 열매] 김용현 (1) 초등생, 밤열차 타고 가출… 주님은 "돌아가라"
* [역경의 열매] 김용현 (2) 가출·고철중개상·오징어배… 20세도 안돼 사장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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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6년 전남 목포 출생 △64년 강원 양구에서 고물상 시작 △83년 서울에서 창호 특판점 개업 △89년 광산산업 설립 △2002년 데이빗종합건설 설립 △2003년 남광산업 설립 △2005년 광산스틸 설립 △2011년 사단법인 남광선교회 설립
정리=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용현 (2) 가출·고철중개상·오징어배… 20세도 안돼 사장님이
13살 때 가출했다가 돌아온 뒤부터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최소한 중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하셨지만 난 장사를 배우고 싶었다. 15살 무렵 목포에서 가장 큰 철물점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사장님의 신뢰를 얻어 6개월 만에 배달을 나갔고 장부 정리 같은 중요한 업무도 맡았다.
나는 하루빨리 사장님처럼 유명한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계속 철물점에 있으면 나중에 가게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 30만원 남짓한 돈을 훔쳐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건 가출이 아니야. 언제까지 목포에서 배달이나 하고 있을 거야. 아버지는 이제 새엄마도 있으니 외롭진 않으실 거야.’
6년 전 가출했을 때와는 달리 마음속엔 고철 중개상으로 성공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성공하기 전엔 절대로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서울역 광장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 내 팔꿈치를 끌어당겼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정처 없이 떠도는 당신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딱 봐도 목사님처럼 보이는 남자가 전단지와 함께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넸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건달이었다가 20세 때 하나님을 만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그는 “학생을 보니 예전 내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목사님에게 “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럼요. 형제님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의 확신만 있다면”이라고 답했다. 목사님이 내 영혼의 구원과 미래를 위해 기도해주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 순간 목사님을 통해 나를 인도하고 계신 주님의 미세한 음성을 감지한 것이다.
서울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직 코흘리개인 나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없었다. “강원도에서 고철 중개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망설임 없이 강원도로 향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동해안 묵호에서 오징어 배를 탔다. 오징어잡이로 꽤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지만 일확천금을 꿈꾸던 나는 매일 밤 도박판에서 돈을 탕진했다. 그러다 풍랑이 거센 날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죽기 일보 직전 갑판장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나를 건져냈다. 주님이 갑판장의 마음을 움직여 방황하던 내게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오징어잡이 생활을 정리하고 양구로 가 그곳에서 꽤 잘나가는 고물상을 만났다. 그 밑에서 일한 지 6개월 만에 고물행상 면허를 따고 고물 중개업을 시작했다. 평생 떠돌이로 살 것 같던 내가 스무 살도 안 돼 ‘사장님’이 된 것이다.
나는 고물을 나름대로 개조해서 비싸게 팔아 돈을 제법 벌었다. 하지만 돈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묵호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내일은 없다는 듯 화투를 치는 방탕한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난 아버지 생전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예수를 전하지 못한 것도 지금 후회로 남는다.
당시 절망적인 마음에 혈서를 쓰려고 칼을 들었다가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내리쳐 검지 마디 하나가 잘려나갔다. 극심한 고통에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으로 도박에 찌든 내 마음까지 도려내지길 바랐다.
‘아버지, 어리석고 못난 아들을 용서하세요.’
지금도 마디 하나가 없는 검지를 볼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난다. 도박의 늪에 빠지면 삶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지난날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리라.
***[역경의 열매] 김용현 (3) 아내의 결혼 조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라”
스물다섯이나 먹을 때까지 나는 여자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사업하는 이들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게 마련이지만 난 여자 문제만큼은 깨끗했다.
고향 목포에서 옆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한복심이란 이름의 여자를 만났다. 어물전 집안 딸로 19세의 어린이집 교사였다. 차분한 눈과 단정한 입매, 다소곳한 몸짓이 천사 같았다. 난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저렇게 착하고 예쁜 여자가 나를 좋아할까.’ 겉으로는 당당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내 투박한 말투와 교양 없는 모습에 질색해 도망가면 어쩌나 걱정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줬다.
첫 데이트를 마치고 양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난 프러포즈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전까지 내 인생이 탄광에서 혼자 금을 캐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내 어두운 구석에 빛을 밝혀 금보다 귀한 보석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저도 오빠랑 결혼하고 싶지만 조건이 있어요. 꼭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나와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죠?”
그녀는 신앙생활을 했었다는 내 말에 몹시 기뻐했다. 그때만 해도 내게 신앙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은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는 목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양구에 신혼집을 차렸다. 월세로 들어온,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당시 내겐 돈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지만, 난 결혼 전 약속을 내팽개치고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사업 한답시고 집밖으로만 돌았다. 가난한 와중에 첫 아들을 낳았고 장모님이 쌈짓돈으로 병원비를 댔다. 둘째를 낳을 땐 내가 산파 역할을 했다. 갑자기 진통이 와서 이웃에게 도움을 청할 새도 없었다. 직접 아이를 받고서 태를 자르고 엉덩이를 때려 울게 했다. 아이가 나오는 모습을 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내는 품속에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의 큰딸이에요. 이 애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돼 주세요.”
사업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파상, 오토바이센터 등 돈이 될 만한 일들을 이것저것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아내는 나를 위로하며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매달려 보라고 했다. 난 곧장 기도원에 들어갔다.
“주님, 저는 이대로 망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선택받은 일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세요.”
일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병역소집 통지서였다. 전라도 병무청에선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강원도에 와서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금식기도를 하고 왔더니 응답이 고작 군대라니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방위병으로 차출된 뒤 아내를 통해 병무청에 민원을 넣었다. 다행히 병무청에서 내 사정을 알아줘서 입대 100일 만에 의병 제대할 수 있었다.
제대 후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친한 장로님에게 자금을 빌려 다시 오토바이센터를 차렸다. 가시밭 같던 신앙생활에도 조금씩 싹이 나기 시작했다. 양구제일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을 때 아내가 세례를 권했다. 목사님은 내 심령을 겨냥이라도 한 듯 열정적인 말씀을 부어주셨다.
“우리 인생이 부귀영화만 쫓다가 끝나는 거라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사업을 하더라도 연 단위로 경영계획을 세우는데 영혼을 위해선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없지요? 이대로 가면 망합니다. 무조건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아멘, 아멘”을 외치며 통렬하게 회개했다. 주저 없이 단상 앞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 시정잡배 같은 저를 존귀한 자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뜻을 위해서 남은 삶을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역경의 열매] 김용현 (4) 예수님 이름으로 2억 외상 ‘섀시사업’ 승승장구
세례를 받은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제단을 쌓았고 수요예배와 금요 철야예배는 물론, 각종 기도회와 여름수련회 등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하루하루 신앙이 자라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무너진 사업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성실함을 알아주는 고객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매출이 점점 늘었다. 평생 봐야 할 것만 같았던 빚쟁이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오토바이센터가 번창하면서 농기구대리점을 개업했고 양구에서 가장 큰 군납공장을 사들이기도 했다.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오묘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하나님은 물질을 부어주실 때 결코 인색하지 않으셨다. 입을 벌리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다윗의 말처럼, 나는 축복의 늦은 비를 맞는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그사이 자식을 넷째까지 낳았다. 하루는 넷째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데려갔더니 급성 모세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합병증으로 폐렴을 동반할 수 있는 위중한 상태여서 며칠이 고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아내와 교대로 병실을 지키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지난 죄가 너무나도 큽니다. 평생 달게 받을 테니 딸에게 그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를 계속한 지 열흘째 되던 날 꿈에서 주님을 봤다. 주님은 품에 안겨 있던 아이를 아내에게 되돌려주셨다. 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기도실에 나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아이가 열이 내리고 기침이 잦아들었다는 소식이었다. 신기하게도 아내 역시 아이 옆에서 잠들었다가 나와 비슷한 꿈을 꿨다고 했다.
다음날 의사는 이틀 후면 퇴원해도 된다고 말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나님에게는 병의 권세를 제어하는 능력이 있다. 질병의 고난 속에서 주님이 내게 기대하시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이란 걸 그때 난 배웠다.
신앙의 성장과 함께 사업도 나날이 번창해 내 나이 30대 후반일 때 양구에서 손꼽히는 부자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주님은 나를 크게 쓰임 받는 종으로 쓰시기 위해 더 큰 물가로 인도하셨다. 양구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1983년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당시는 집집마다 알루미늄 창틀(섀시)을 설치하는 게 유행하던 시기여서 섀시 대리점을 열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대표적인 섀시 브랜드 본사를 찾아가 특판점 담당자를 만났다.
“신설동에 특판점을 차리고 싶습니다. 물건 값으로 1억5000만원을 내고 보증금은 차후에 드리면 안 될까요?”
보증금 2억원을 면제해달라는 황당한 요구였다. 담당 상무는 “그럼 무엇으로 보증하겠냐”고 물었다.
“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 만물을 지으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상무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사장님과 의논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뒤 놀랍게도 특판점을 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무와 사장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무모해보였지만 나의 태도와 신앙에 대한 확신을 믿고 허락해준 것이다.
섀시 특판점을 하면서 건설업 열풍을 타고 많은 돈을 벌게 됐다. 몇몇 천주교 성당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교회 창호공사에도 손을 댔다. 당시 아는 집사님을 통해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을 소개받았다.
“명성교회처럼 유명한 교회의 공사를 저 같은 개인사업자가 맡을 수 있을까요”라고 조심스레 묻자 목사님은 “집사님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라고 들어서 믿고 맡기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거룩한 주의 전을 담당했던 레위인들과 같은 심정으로 보통 때보다 두세 배 신중을 기해 공사에 임했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5) 복은 불행과 함께… ‘巨富 욕심’에 회사 부도
사탄의 가시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사람은 언제 시험에 들지 모른다. 나 역시 건설업을 하며 수차례 사탄의 방해공작에 시달렸다. 섀시 공사로 승승장구하자 내 신앙생활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주일 성수는 했지만 하나님과의 거리는 이전보다 상당히 멀어졌다. 내가 누리는 물질적 축복이 당연한 것이라는 착각,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내게 이런 축복을 내릴 의무가 있다는 오만, 내 일을 계획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무지까지 ‘교만의 3종 세트’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나는 사업상 관례로 술 접대를 하고 다녔다. 매일 새벽이 돼서야 돌아오는 나를 아내는 뜬눈으로 기다렸다. 아내는 나를 앉히더니 간곡하게 사정했다.
“여보, 사업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서울에 온 목적을 생각해봐요. 주님의 일에 더 힘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요? 우리 양구에서 살 때처럼 소박하게 살 수 없나요?”
하지만 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나로 인한 스트레스로 신경쇠약을 앓았고 저혈압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주님은 아내의 기도를 듣고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를 원하셨다. 폭주기관차처럼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나를 가로막은 건 회사의 부도였다.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TV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었다. 빚쟁이들은 어찌나 지독한지 아내가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몰래 따라붙어 행패를 부렸다.
“하나님, 지난 10년 동안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째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무심하십니까.”
자격 없는 자의 투정이요, 공허한 외침이었다. 그때 난 공사를 따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관행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도를 당하기 직전에도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다. 하지만 베팅 한번으로 거부(巨富)가 되는 모습만 그렸던 나는 욕심을 멈추지 못했다.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집 한 채뿐이었다. 아내는 신앙을 지켰으나 나에 대한 신뢰는 잃었다. 우리는 법적으로만 부부였지 한집에서 대화도 없이 남처럼 지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팔이 쑤셔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뇌경색 진단을 내렸다. 중풍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난 절망했다. 당시는 IMF 외환위기 직후라 사업 실패로 자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도 자살할 마음을 품고 동해로 차를 몰았다.
강원도의 한 산길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낭떠러지 끝에 섰다. 구두를 벗고 한참동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아이들 생각이 났다. 어린시절 내가 꿈꾼 삶은 가난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다면 내가 겪은 불행이 아이들에게 이어질 것 같았다.
결국 자살을 포기했다. 육신의 생명마저 내 멋대로 하려 했던 스스로가 미웠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생명의 말씀과 함께 새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19)
아내와 딸들은 살던 집을 개조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어린이집’을 차렸다. 나도 운전으로 어린이집 일을 거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아내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고, 내 병도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의 어린이집 사업을 축복해주셨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아이들을 돌본다는 소문이 퍼져 옆 동네 학부모들까지 찾아왔다. 예전처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경매로 처분될 뻔한 집을 지키고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었다.
“하나님, 저는 지금이 참 감사합니다. 이제 욕심 부리지 않고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6)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과 독대 “사업이 곧 선교다”
나는 앞길을 놓고 금식기도를 했다. 주님께서 애초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하나님과 독대가 필요했다. 주님께서는 철물점을 처음 시작하던 때의 마음가짐을 일깨워주셨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지….’
그때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 ‘선교의 비전’이었다. 양구에서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올 무렵, 주님께 선교의 비전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었다. 하지만 이후 사업이 잘돼 욕심이 커지면서 애초 주님과 약속한 선교의 비전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남을 속이면서 돈을 버는 사업체가 아닌, 청렴하고 깨끗한 건설 회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작은 회사를 차리고 창호 공사를 재개했다. 예전 공사 경력을 내세워 정부의 공사 입찰을 따내기 시작했다. 관급 공사는 선급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굵직한 빚들을 줄여나갔다. 부도를 맞았을 때 처분한 땅이 시가로 50억원가량 됐었는데, 주님은 이를 3년 만에 되찾게 해주셨다.
그러다 또 한번 시련이 닥쳐왔다. 투자한 업체의 사장이 돈을 횡령하는 바람에 1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된 것이다. 부채 중에선 굳이 갚지 않아도 될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시험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맡은 청지기로서 끝까지 정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나는 떠맡은 빚을 깨끗하게 갚았다. 적지 않은 금액을 이유 없이 손해 본 것이지만, 주님의 일꾼으로 떳떳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다.
오래 섬기던 교회에 사정이 생겨 2002년 신앙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 새로운 교회를 찾던 중 목동제일교회의 고난주간 부흥성회에 우연히 들렀는데 목사님의 설교가 첫마디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세상의 방식을 선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선택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쏟아질 수 없었다. 난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교인으로 등록했다. 목동제일교회는 ‘땅끝 선교’ ‘북방 선교’를 추구하는 선교 지향적 교회다. 내가 선교를 이루는 사업가가 될 것을 다짐했던 터라 주님께서 그곳으로 이끌어주셨다고 믿는다.
이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의 깊이를 얻었다. 그전까지의 새벽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보다는 내가 간구하는 바를 얻는 통로로 여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새벽기도를 하면서 옛사람의 허물이 벗겨지고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법을 배우게 됐다.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을 거쳐 완성돼가는 비유가 나온다.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그릇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으로 만들더라.”(렘 18:4)
교회를 옮기고 난 뒤 데이빗종합건설을 설립했다. 금속창호전문 건설업을 해오다 다방면으로 뻗어나갈 생각에 세운 회사다. 손자의 이름인 ‘데이빗’을 따서 하나님 앞에 회사를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신기한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선교의 비전을 품은 뒤부터 사업 규모가 오히려 예전보다 커졌다는 점이다. 부도를 두 번이나 당한 뒤로 물질적인 부분은 하나님께 맡겼다. 현재 하고 있는 사업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공헌하고 선교의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다. 개인적인 탐욕을 부렸다면 주님께서 그만큼의 사업을 맡겨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7) 아내, 통금 어긴 아들에게 “잘못 키운 내게 회초리를”
아내는 내 사랑스러운 반려자이자 믿음의 선배다. 나는 오랜 시간 방황한 끝에 아내에게 믿음의 세계를 배웠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내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는 아내였다면 나를 끝까지 받아주고 인내해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내는 한때 혈압이 40까지 떨어져 숨쉬기조차 어려운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아내의 병든 육체를 붙들어주셨다. 아내가 아팠던 건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믿음의 길에 서길 바랐던 아내를 두고 나는 세상의 헛된 욕망에 빠져 허구한 날 돈만 바라보고 살았다.
하지만 아내는 진심으로 날 미워했을 때조차도 험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남편의 고집을 꺾어 달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툭하면 폭언을 내뱉기 일쑤였다. 일이 잘 안 풀린 날이면 집에 와서 괜히 트집을 잡았다. 신앙을 권면하는 아내에게 “당신은 지금껏 내가 벌어다준 돈 갖고 살았잖아. 그거 잊었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면 아내는 “돈 없어도 상관없어요. 우리 예전에 가난했을 때처럼 시장에 나가서 새우젓 팔아요”라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나는 화가 더욱 치솟았다.
“당신이 장사에 대해 알기나 해? 육신적인 욕심을 버려라. 늦게 들어오지도 마라. 도대체 나보고 일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돈보다 신앙생활이 우선이잖아요. 다짐한 거 잊었어요? 주님께서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까요?”
“그럼 당신이 나가서 돈 벌어와! 집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면 세상 편하지!”
나는 감정이 격해지면 집안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폭군도 그런 폭군이 없었다. 철없던 나는 남편을 잘 달래지 못하는 아내가 얄미웠고 아내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 하나만 바라봤다면 그 즉시 이혼 도장을 찍자고 했을 것이다.
이제는 아내가 더 큰 기도로 내 영혼을 어루만져왔음을 가슴 깊이 깨닫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 사이의 애정이 식는 경우가 많다지만 우리는 예전보다 더 좋은 관계로 서로를 힘껏 사랑해주고 있다.
아내는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남다른 철학을 가졌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자 밤 10시 이후를 통행금지 시간으로 정했다. 성인이 됐다고 자칫 방종하게 되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통금을 만든 것이다.
하루는 장남이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밤 11시가 돼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벨을 눌렀지만 10시부터 현관문 앞에 서서 기다리던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통금시간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라.”
부모를 1시간 기다리게 했으니 아들도 밖에서 1시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눈이 내리는 영하의 날씨였는데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아들은 1시간을 꼬박 기다리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내는 회초리를 꺼내오더니 아들에게 쥐어주면서 “자식을 잘못 키운 엄마를 60대 때리라”고 했다. 제 손으로 차마 어미를 때릴 수 없었던 아들은 무릎을 꿇고 빌면서 다시는 통금시간을 어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렇듯 엄격한 아내 때문에 아이들은 사춘기 시절은 물론 대학을 나와 결혼을 하기까지 단 한번도 말썽을 피운 적이 없다. 또한 아내는 신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신념을 아이들이 갖도록 만들었다. 어린이집 원장직을 내려놓고 현재 교회에서 ‘어머니 학교’ 봉사팀장을 맡고 있는 아내는 어머니들에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어야 가정이 산다”고 가르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8) 전반보다 후반이 더 중요한 인생 포인트는 ‘믿음’
예전에 나는 우리 가족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 신앙이 비틀거리는데 누군가를 전도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아들 친구네 가족을 데리고 여름 수련회를 떠난 적이 있다. 아내는 불신자인 아들 친구 어머니를 전도할 수 있는 기회라며 좋아했다. 나만 일 때문에 하루 늦게 출발하기로 했다. 선발대 20명은 승합차를 타고 강원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은 집사가 초보운전자여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한계령을 넘다 급커브 내리막길에서 차가 미끄러져 전복된 것이다. 하마터면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뻔했지만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셔서 차는 도로 한쪽에 나뒹굴었다.
12인승 차에 20명이 꽉 들어차서 그랬는지 팔다리 골절 외에 중상을 입은 승객은 다행히 없었다. 가장 많이 다친 사람은 아들 친구 어머니였다. 갈비뼈 12대가 부러져 3개월 동안 입원했다.
아내는 3개월 내내 병실을 드나들며 가족처럼 그를 간호했다. 처음엔 아내의 기도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퇴원하자마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됐다. 그전까지 “교회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아내의 신앙 덕분에 전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사건이다.
나는 그후로 나처럼 사업 실패로 좌절한 경험이 있는 기업가 여러 명을 전도했다. 인쇄 도매업을 하는 P씨도 그중 한명이다.
P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가출해 청소년기에 공사판을 전전했으며, 중동 건설현장에서 3년간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와 택시기사, 식당 종업원, 날품팔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30대 중반까지 어렵게 모은 7000만원으로 작은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기꾼을 만나 전부 잃고 말았다. 결국 P씨는 자살하려고 건물 옥상에서 약을 먹었는데, 그 건물에 입주한 업체 사장이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목숨을 건진 P씨는 눈을 뜨자마자 사장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뭔데 나를 살려! 여기 병원비와 앞으로 생계비, 당신이 다 책임질 거야?”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지만 그 사장은 P씨를 책임졌다. 병원비를 내줬고 종업원으로 고용했다. 10년이 지난 뒤에는 사업체마저 P씨에게 물려줬다.
나는 어느 상공인 단체 세미나에서 P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오십이 다 된 나이였는데 미혼이었다. 난 우리 회사 여직원 중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느라 40대 초반이 되도록 시집을 못간 H씨를 그에게 소개해 줬다. 두 사람은 서로 잘 통해서 3개월 만에 결혼 얘기가 오갔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나는 H씨에게 “하나님께서 배필을 보내주셨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전도해 교회에 함께 나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신실한 H씨는 내 말을 전적으로 수긍했다. P씨는 결혼 후 세례를 받았고 지금은 누구보다 예수를 잘 믿는 사업가로 교회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
인생은 전반전보다 후반전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어느덧 중년의 고개를 넘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자문하게 된다. 지금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건강도, 가족도, 물질도 내 손에 담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역경의 열매] 김용현 (9) 삶을 바꾼 성지순례… 2000년전의 주님 만난듯
내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바로 성지순례다. 선교의 꿈을 품게 된 이후부터 성경 속에 등장하는 고대 근동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성지순례를 관광 차원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지순례의 본질은 성경의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목사님과 교수님들을 모시고 여러 차례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2006년 처음 성지순례를 떠났을 때 이스라엘 땅을 밟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곳은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던 계시의 현장이었다. 성경 내용만으로는 온전히 알기 어려운 현지의 풍토와 문화를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터키 등 여러 지역을 돌면서 힘든 여건 속에서 선교에 헌신하는 분들도 여러 명 만날 수 있었다. 이슬람 국가로 기독교인의 비율이 0.3%에 불과한 터키에서 선교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이들 선교사를 보면서 ‘저들이 나를 대신해 힘들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이 된 선교사 K씨는 예전에 한국에서 꽤나 잘나가던 사업가였다가 아내의 병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뇌종양으로 죽을 고비에 이른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별 소용이 없었고, 길어야 5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란 선고만 받았다. 그는 아내의 부탁으로 난생 처음 기도원을 찾았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내 아내를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제 남은 인생을 당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는 두 달이 지나도록 기도원을 나오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아내 몸속의 종양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이후 K씨는 약속대로 사업을 접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교회를 통해 터키 이스탄불로 파송됐고 그곳에서 5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그는 “제가 주님의 일에 평생 헌신하려 했는데 그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인가요”라며 한동안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던 중 새벽기도 가운데 성령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생명이 내게 있다. 네 아내에게 생명을 돌려준 것도, 네 아들을 데려간 것도 내 은혜다.”
정신을 차린 그는 이스탄불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다. 아들을 데려간 대신 이스탄불의 수많은 자녀들을 품도록 명하신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성지순례에서 K씨와 같은 선교사들을 만나고 돌아와 선교사 후원회를 만들었다. 체계적인 선교 지원을 위해 매달 일정 금액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교회에는 엔게디 합창단이 있다. 합창단이라고 해서 잘 갖춰진 엄숙한 자리에만 가지 않았다. 무의탁 노인 공동체, 양로원, 병원 등 어렵고 소외된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찬양을 들려줬다.
엔게디 합창단은 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터키의 안디옥교회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터키에서 선교와 관련된 공연을 하려면 엄격한 허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당시 우리 합창단이 했던 공연은 터키 당국이 허가한 최초의 선교 관련 연주회였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에 있는 크리스천 50여명을 초청했고 터키 정부요원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독교 전도가 매우 힘든 이방 국가에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등을 찬양하면서 내 마음은 뜨거운 성령의 감동으로 끓어올랐다.
청중의 반응도 무척 뜨거웠다. 핍박 받는 소수자로서 어렵게 신앙을 지켜오던 그들은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찬양을 누구보다 갈망해왔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10) 순교자의 피 기억하신 하나님… 목사 꿈 이룬 자손
우리 선교회를 통해 목사의 꿈을 이룬 중국동포 J씨가 있다. 그와의 인연은 우리에게 중국 선교의 비전을 품게 했다.
그는 자신을 순교자의 직계자손이라고 소개했다. 1930년대 그의 증조부가 살던 중국 연해주의 마을에 어느 날 공산군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고 한다. 공산군은 다짜고짜 목사를 찾았다. 목사와 장로는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겼다. 이들을 못 찾은 공산군은 교인들을 닦달하다가 “목사와 장로를 데려오면 당신들 중 절반은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나무에서 내려와 자백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내가 목사요”라고 말했고 뒤이어 J씨의 증조부가 “내가 장로요”라며 앞으로 나왔다. 결국 두 사람은 총살당했다. 이들의 헌신으로 나머지 교인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당시 7세였던 J씨는 이 광경을 끝까지 지켜봤다.
J씨는 중국의 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복음전파를 향한 더 큰 열망이 있었던 그는 학문이 발전된 곳에서 신학공부를 더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나와 엔게디 합창단을 알게 됐다.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피를 기억하시고 보잘것없는 나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불러주셨다”는 J씨의 고백을 들은 우리는 그의 공부를 물질적으로 돕기로 했다. 결국 J씨는 서울의 한 신학대에 편입해 학부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척박한 중국 땅에 교회를 세우고 ‘조선족 복음화’라는 목표에 모든 삶을 바치고 있다. 그의 기도가 우리 선교회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J씨와 편지를 주고받던 중 “교회 버스를 마련하기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엔게디 합창단을 통해 그 일이 이뤄지리라는 확신을 품고 기도했다.
주님께서는 엔게디 합창단의 음악회를 통해 헌금을 모으도록 하셨다. 버스 구입에 필요한 2000만원을 채우려면 적어도 1000명의 관객은 모여야 될 듯싶었다.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공연을 준비했고, 공연 당일 1200명에 달하는 성도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놀라운 축복이었다. 이날 중국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악회 성공을 위해 통성기도를 했다고 한다. 공연을 통해 모금된 액수는 버스 구입비용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하나님의 섬세하신 인도는 사람이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난해 남광선교회를 통해 선교재단을 만들었다. 단순히 조직을 확장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선교단체로서 쓰임 받는 더 큰 목적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무도 가지 못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지난해 초 선교재단 설립에 앞서 아들 정필이와 인경수 선교사를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모잠비크 3개국에 선교여행을 보냈다. 재단 설립을 위한 구상과 선교 비전 구축을 위한 여정이었다.
정필 일행은 비자야와디라는 도시에서 첫 집회를 가졌다. 교회에 200여명이 모였다. 신앙 간증을 듣던 중 어떤 사람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고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예정된 집회시간을 1시간 이상 넘기면서까지 찬양과 기도가 이어졌다.
그런데 정필 일행이 방문한 시기는 힌두교 축제가 열리던 때였다. 거리 곳곳에 힌두교 관련 장식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춤을 추면서 저마다의 신을 칭송했다.
‘주여, 저들의 우상숭배가 하루빨리 무너져 이 땅에 주의 복음이 충만해질 수 있도록 역사하옵소서.’
정필은 이런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일행은 하나님의 축복된 성회로 기필코 이 같은 우상축제를 무너뜨리리라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11) 오토바이 타고 꼬박 3시간반… 험난한 집회길
지난해 1월 선교여행을 떠난 아들 정필이와 인경수 선교사 일행은 남인도 여정을 마치고 북인도로 향했다. 인도 아삼주와 국경을 접한 부탄의 지하 교인들을 만나는 게 첫 번째 일정이었다. 험난한 길을 뚫고 어렵사리 부탄 국경에 도착했지만 비자 문제로 허가를 못 얻어 안타깝게도 철수해야 했다.
벵골주의 고아르당아 마을에서도 특별 집회가 예정돼 있었지만 일부 부족의 도로 점거 시위로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곳 교회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목사님, 차로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겠습니다.”
“안 됩니다. 저희는 이 집회를 1년 전부터 준비해왔습니다. 오토바이를 보내드릴 테니 꼭 와주십시오.”
결국 오토바이를 나눠 타고 우여곡절 끝에 3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회 앞에 구름 떼처럼 모인 교인들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예배는 은혜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됐다. 노인과 다리를 저는 환자들이 유독 많았는데 기도를 하는 와중에 고침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할 것을 권했고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는 말씀으로 치유의 역사를 목도할 수 있었다.
질병이 나았음을 깨달은 성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성도들 앞에서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다. 작별의 시간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축복의 기도를 했다.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교통정체가 극심한 가운데 헬멧도 장갑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추위를 견뎌야 했다. 게다가 오토바이가 고장 나는 바람에 다른 곳에 예정됐던 집회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정필 일행은 선교여행 중 수차례 고난을 당한 사도바울을 생각했다.
‘주님, 사도바울처럼 환란과 고난 앞에서 저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약하고 피곤한 몸을 흑암 속에서 건져주시고 빛으로 인도하소서.’
교회를 순방할 때마다 크고 작은 하나님의 이적이 함께했다. 정필 일행은 땅 끝에 거하는 소수민족 한 사람까지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20여일간의 인도 사역을 마친 일행은 남아프리카로 향했다. 아직도 동성애와 일부다처제, 할례가 행해지는 곳에서 예수님을 알지만 성경의 본질을 오해하는 민족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등지에서 집회와 세미나를 연 뒤 모잠비크 국경을 넘었다. 수도 마푸투에서 250㎞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싸이싸이 교회에서 열린 지도자 교육에는 50여명이 참석했다. 김창길 목사의 강의에 이어 인경수 선교사가 느헤미야 말씀을 주제로 설교하자 청중은 “아멘”을 외치며 뜨겁게 반응했다. 설교를 마친 뒤 일부 참석자가 “매년 이런 세미나를 열어줄 수 없느냐”고 물어와 “그렇게 하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36일간의 선교여행을 마치던 날 정필 일행은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봤다. 믿지 않던 이들이 회개하는 등 하나님의 역사로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나날이었다. 성령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너를 변화시켰다. 선교여행을 통해 네 지경이 넓어졌으며, 이전엔 알지 못했던 은혜의 분량도 네가 깨닫게 됐다. 앞으로 너를 들어 더욱 큰일에 사용하리라.”
***[역경의 열매] 김용현 (12) 지역사회 봉사·장학사업… 소명으로 여기고 헌신
기독교인이라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헌신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은 선교지만, 믿지 않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또 하나의 목표는 지역사회에의 헌신이었다. 국제로터리 3640지구에 소속된 나는 남한성로터리클럽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사회 봉사를 시작했다. 국제로터리클럽은 1905년 미국 시카고의 변호사 폴 해리스가 창설한 친목·봉사단체다.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돕는 로터리운동이야말로 이기주의에 빠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여행길에서 자신과 무관한 유대인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왔던 선한 사마리아인이 하나의 모범이 되겠다.
내가 로터리클럽에서 가장 집중한 분야는 장학사업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제대로 못한 청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도움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성장하길 바랐다. 그들이 나중에 사회로 나갔을 때 더 큰일에 자신이 가진 물질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선 물질적 후원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혼자서 어렵게 생활하던 고등학생을 후원한 적이 있다. 나는 물질적 도움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인 멘토가 돼주고 싶었다. 그 아이가 방학을 맞아 피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몇 통의 편지를 보냈다.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너를 알고 돌봐주신 분이 계신단다. 예수 그리스도가 네 마음속에 찾아오면 네가 겪는 고난과 아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길거야.”
그 아이는 편지가 쌓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3년의 후원기간이 끝나고 그 학생은 서울의 명문대 법대에 진학했다.
몇 년이 지난 뒤 그 학생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편지에는 자신을 후원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앞으로의 꿈이 담겨져 있었다. 학생은 내 편지를 받을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내가 정성들여 쓴 편지를 한 통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기뻤던 사실은 그 학생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쯤 판검사가 돼 있을 그 학생을 생각하면 한 영혼이 내 작은 도움으로 사회에서 존귀한 존재로 쓰임 받게 됐다는 게 참으로 뿌듯하다.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줘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도 나의 꿈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이 꿈은 큰딸 정화의 서울신학대학교 입학을 계기로 처음 이뤄졌다. 정화는 종교음악과에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서 나한테서 학비를 받아간 적이 없다. 거저 공부했으니 학교에 빚을 진 셈이다.
나는 딸이 받은 혜택을 학교에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속해 있던 남광장학회를 통해 서울신대에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데 보태 달라”며 2억6000여만원을 전달했다.
지난해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장학금을 3차례에 걸쳐 지원했다. 앞으로도 목회자의 꿈을 품은 학생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계속 도울 생각이다. 이런 장학금 지원이 단순히 한 개인의 생색내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사역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역경의 열매] 김용현 (13·끝) 소금 같은 기업으로 광야에 길, 사막에 강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구약에 나오는 요나의 삶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크니 회개하라”고 전할 것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두려워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배를 타고 도망갔다.
나도 가출해 상경한 뒤 고물상으로 성공하겠다며 강원도 양구로 향했다가 엉뚱하게 묵호로 빠졌다. 고물상을 하겠다는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었음에도 묵호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탄 이유는 간단하다. 짧은 시간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지금도 내 주변에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외면하고 돈벌이에만 급급해 무작정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다. 시작은 그럴싸해 보일지라도 끝에는 패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 역시 오징어잡이 배를 타서 번 돈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바람에 빈털터리로 묵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께서 큰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욘 1:4∼6)
요나는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물고기 뱃속에 갇힌 요나를 건져주신 주님은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나님께서는 양구에서 고물상으로 성공한 내게 ‘선교를 돕는 사업가의 큰 꿈’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왔지만 또다시 물질의 향락에 빠져 주님께서 가리키신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요나처럼 또 한번 실패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해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다. 하지만 요나는 강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꾸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며 자기 목숨을 가져가 주실 것을 간구했다.
나도 사업을 하다 부도를 맛보고선 좌절하며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보여주셨다. 세상에 실패하지 않는 사업가는 없다.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자세와 함께 실패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사업을 하는 목적 자체가 이 땅의 소금과 같은 기업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 지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목마른 영혼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선교 일꾼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이를 기쁘게 받아주신 주님은 북방 선교와 땅끝 선교를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선교회라는 새로운 신앙의 터전을 마련해주셨다. 제한된 지역에 복음을 전하던 것에서 선교회를 통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도록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대한 선교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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