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3년 정미년(1727)
5월 - 월건(月建)은 병오 - 15일 - 경오
-
묘시(卯時)에 선생이 옛 회주(懷州)
- 장흥(長興)의 옛 이름 -
계춘동(桂春洞) 집에서 태어났다.
4년 무신년(1728) - 선생 2세 -
겨우 돌이 지났는데 말귀를 알아들었다. ○작은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
위세린(魏世璘))이
무척 사랑하여 늘 안아서 무릎에 올려놓고 육십갑자〔六甲〕를 가르쳤는데, 그해 겨울 남김없이 모두 외웠다.
5년 기유년(1729) - 선생 3세 -
춘담공이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쳤는데, 말해 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았고 몇 달 만에 죄다 외웠다. 책을 덮고 시험 삼아
묻기를, 상판에 있는 어떤 글자를 가리키며 그 자리 하판에는 무슨 글자가 있느냐는 식으로 물으니, 차례로 대답하는 데 한 권이 끝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 천(天) 아래 율(律), 율 아래 운(雲), 지(地) 아래 여(呂), 여 아래
등(騰) 같은 식이었다. -
6년 경술년(1730) - 선생 4세 -
혼자 집에 있을 적에 어린 동생이 기어 다니다가 난간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였다. 자신은 힘이 약해 구해 줄 수가 없자, 바로 짚단을
끌어 와서 묶어 다치지 않게 계단을 만들었다. 춘담공이 가만히 지켜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손님에게서 “학자는 하루 종일 반듯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바야흐로 여름날이었는데 몰래 아무도 못 보는 데 가서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꿇어앉는
연습을 하고, 그대로 상례로 삼았다.
7년 신해년(1731) - 선생 5세 -
여전히 춘담공이 나갈 때면 등에 업었고 앉아 있을 때는 무릎에 두었다. 사랑방 벽에 할아버지 삼족당(三足堂
위세보(魏世寶)) 공이 진초(眞草)로 쓴 《당음(唐音)》 소시(小詩)가 붙어 있었는데, 춘담공이 풀어서
가르쳤다. 〈가을 집에 홀로 묵다〔秋齋獨宿〕〉라는 시에 이르자, 문득 “그 구절을 왜,
산 위에 뜬 달 촛불처럼 밝은데 / 山月皎如燭
창문 안에 사람 혼자 묵고 있네 /
窓間人獨宿
밤중에 새가 둥지에서 놀라니 / 夜半鳥驚棲
서릿바람 때마침 대나무 흔드누나 / 霜風時動竹
라고 바꾸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8년 임자년(1732) - 선생 6세 -
《소학(小學)》을 처음 읽었는데, 그 언해(諺解)를 한 번 보더니 바로 이해하였다.
삼성(三聲 초성ㆍ중성ㆍ종성)ㆍ전주(轉注)ㆍ반절(反切)의 용법에 대한 관련
내용에 모두 통달하였다. ○겨울, 천연두가 돌았을 때 아버지 영이재(詠而齋公
위문덕(魏文德)) 공이 천연두를 앓고 있었는데 매우 위독하여 온 집안이 걱정하였다. 선생은 어린 동생과 단
둘이 다른 방에 몸져누워 있었는데, 어린 동생이 때때로 슬피 울면 선생이 반드시 그치라고 하며 “어머니께서 걱정하니 울지 마라.”라고 했고,
동생도 반드시 울음을 그쳤다.
9년 계축년(1733) - 선생 7세 -
이웃 사람 중에 모자(母子)나 형제가 싸우는 것을 보고 혼자 탄식하며, ‘선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효성스럽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다.〔不善非人 不孝非人子〕’라는 구절을 종이에 써서 지니고 다녔고 또 팔뚝에도 썼다.
10년 갑인년(1734) - 선생 8세 -
일찍이 집안 하인이 쌓아 둔 땔나무를 훔치는 모습을 보고는 어른이 볼까 걱정하여 급히 중문(中門)을 닫아 가렸다. ○일찍이 이웃
사람이 가운데 행랑에 소를 매어 두었는데, 춘담공이 밤에 지나가다가 소에게 가슴을 떠받혀 몹시 앓았다. 선생이 바로 춘담공에게 아뢰기를 “단지
조심하면서 약으로 치료하면 되니 소에게 받혔다고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가난하여 마구간이 없어 우리 집 빈 땅을 빌려 소를 매어 둔
것인데, 어른께서 소에게 받혔다면 죄송한 마음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하니, 춘담공이 무척 기뻐하였다. ○4, 5세부터 매년 향라(鄕儺
역귀를 쫓는 제사)와 상원(上元
대보름날)이면 펼치는
창우(倡優) 같은 온갖 놀이나 동네잔치의 기악(妓樂)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몰려들었는데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엿보지 않았다. ○겨울에
《주역총목(周易總目)》을 보고, 즉시 영이재(詠而齋) 공에게 배움을 청하여 그 큰 요지를 듣자마자 바로
기뻐하며 도서(圖書)와 괘획(卦畫), 선후천설(先後天說)을 더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대략 그 방법을 통달하고 자획으로 괘를 만들어
일촬금점(一撮金占)을 쳤는데, 동학(同學)이면서 8, 9세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모두 자기들끼리 서로
묻고 배웠지만 역시 끝내 배우지 못하였다. ○〈등잔불〔燈火〕〉이라는 시를 지었다.
사물 비추어 보이지 않는 곳 없으니 /
照物無欺暗
붉은 마음 본래 스스로 밝았구나 / 丹心本自明
홀로 방 안에다 대낮을 만드는데 / 獨作房中晝
창밖은 삼경을 지나누나
/ 窓外過三更
○두꺼운 종이로 작은 쪽지를 만들어 ‘공안증사맹(孔顔曾思孟)’ 5자를 죽 적고, 매번 독서할 때마다 반드시 책
오른쪽에 펴 놓았다. ○《대학(大學)》을 처음 배웠다. ○일찍이 임진란(壬辰亂) 때 관운장(關雲長
관우(關羽))을 성인으로 현양하여 전쟁에서 이겼다고 들었는데, 이때에 와서 시끄러운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라가 불안하면 배움이 내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나무패 두 개를 만들어, 하나에는 ‘국안(國安)’이라고 적고 다른 하나에는
‘관왕(關王)’이라고 적어 가묘(家廟) 동쪽 담에 묻어 두고 매번 묵묵히 기도하였다. ○이해 겨울부터 먼동이 틀 무렵이면 꼭 세수를 했는데,
마침내 습관이 되었다.
11년 을묘년(1735) - 선생 9세 -
봄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있는 공자 그림을 보고 그대로 베꼈다. 매번 혼자서 독서할 때면 앞 벽에 붙여 놓고 절을 하고는
무릎을 꿇고 책을 읽었다. ○다른 사람이 《상서(尙書)》를 배우는 것을 보고,
‘기삼백(朞三百)’에 대한 주(註)를 펼쳐 여러 번 탐구하고는 의미를 모두 꿰뚫었다. 이때부터 선배라고
하더라도 기삼백에 대한 설명을 알고 싶은 이들은 모두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
천관산에 놀러간 이야기〔遊天冠山記〕〉를 지었는데, 그때 쓴 시에,
관산사에서 걸음을 시작하여 / 發跡冠山寺
허공 사다리 삼아 봄 하늘로 올라 /
梯空上春昊
인간 세상 굽어보니 / 俯視人間世
티끌 덮인 삼만리라 / 塵埃三萬里
하였다.
-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선생을 ‘상춘호(上春昊)’라고 불렀다. - 일찍이 각자 품은 뜻을 시로
표현하는 언지시(言志詩)를 지었다. 동학 19명은 모두 16, 7세였는데, 부귀영화를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선생 홀로 “독서하여 성인을
배우고, 입신하여 부모님을 현양할 것이다. 풍진의 난세를 만나면 아름다운 놀 속에서 영지〔紫芝〕를 노래하리라.
상산사호(商山四皓)가 되어 태자를 안정시키기도 하고, 엄광(嚴光)이 되어 부춘산(富春山)으로 돌아가기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2년 병진년(1736) - 선생 10세 -
좌우명을 썼는데 “옛날 인(仁)은 사랑이었으나 지금 인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고, 옛날 의(義)는 마땅함이었으나 지금 의는 억세고
어긋남을 말한다. 옛날 예(禮)는 공경이었으나 지금 예는 거짓 꾸밈이며, 옛날 지(知)는 지혜였으나 지금 지는 속임수이다.”라고 하였다. ○글의
이치에 대해 그 깊은 의미를 오묘하게 풀어냈으며, 식견이 해박하고 활발하였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고, 선생이 일찍이 배웠던 사람도 도리어 모두
선생에게 와서 의논하고 물었다. ○늘 “이미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는 일도 남자다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옛사람들의 글귀나 모으는 학문으로는
내 마음을 다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천문과 지리, 복서(卜筮)와 율력(律曆), 의학ㆍ관상ㆍ도교ㆍ불교, 병법〔兵韜〕과 산수(算數) 등의
서적을 널리 읽었고, 한번 보면 언제나 대의를 파악하였다.
연보(衍步)나
가령(假令)은 외운 적이 없었으나 모두 추리하여 그 이치를 풀어내 스스로 구결을
만들었다.
예학(禮學)에 더욱 빠져들어
《가례(家禮)》ㆍ
《상례비요(喪禮備要)》ㆍ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늘 가지고 다니며 그 대의에 통달하였다. 또 정교한 기술에 관심이 많아
공장(工匠)들의 모든 기술을 다 직접 손으로 습득하고 마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끝내 과거 공부에만 마음을 전념할 수 없었다. ○수신(修身)에
긴요한 말을 적었는데 “몸을 닦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수신은 사친(事親)을 근본으로 하고, 사친은 수신을 첫째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 사친은 〈육아시(蓼莪詩)〉로 시작하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현양하는 일로 끝난다. 모두
12단(段)이다. 수신은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가 돌아갈 것을 생각해서 좋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하여, 말이
진실하고 행동이 독실하면 오랑캐 사이에서도 살 수 있다는 말로 끝난다. 사친과 수신, 두 항목은 모두 24단이다. -
13년 정사년(1737) - 선생 11세 -
분판(粉板)으로 작은 첩을 만들어 차고 다니면서 ‘어느 날 무슨 말을 잘못했고, 어느 날 무슨 일을 잘못했다.’라고 적고, 그
아래에 각각 ‘어리석다.’, ‘망녕되다.’, ‘경솔하다.’라고 주(註)를 붙였다. ○
“차지 않은 적이 없었다.〔無所不佩〕”라는 문장을 보고는 흔연히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송곳ㆍ숫돌ㆍ침ㆍ부싯돌ㆍ붓ㆍ벼루를 모두 갖추어 지니고 다녔다. ○
매일 ‘자네 고을에 안회(顔回)가 있다.’라는 말을 외우면서, 자리 오른쪽에 황헌(黃憲)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매일 새벽마다 가묘(家廟)에 참배하였다.
14년 무오년(1738) - 선생 12세 -
좌우명을 지었는데 “다른 사람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에게
들어라.〔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라고 하였다. ○봄에 《주역(周易)》을 처음 읽었는데, 장차 명경과(明經科)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보(講譜)나
독규(讀規)만을 공부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열심히 탐구하여 의식이 점차 깨우쳐져 시원해졌고, 끝내 자기 생각을
굽히고 과거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만물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중용도(中庸圖)〉를 지었다.
‘안택(安宅)’을 집으로 삼고, ‘고명(高明)’을 하늘로, ‘박후(博厚)’를 땅으로 삼았으며, 주위에 담을 둘렀는데 초목, 금수, 이적(夷狄)이
모두 담 안의 존재로 표현되었다. 앞에 입덕문(入德門)을 만들었다. 또 《논어》와 《맹자》의 중요한 구절을 택하여 자리 오른쪽에 죽 걸어
놓았다.
15년 기미년(1739) - 선생 13세 -
사서(四書)를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하니 글귀마다 글자마다 자연히 해석되었다. 매번 곡진하게 묘사한 주자(朱子)의
어록을 볼 때면 춤추고 싶을 정도여서 과거 시험을 위한 강경에는 더욱 뜻을 두지 않았다. ○왕 형공(王荊公
왕안석(王安石))의 〈맹상군 평론〔論孟嘗君〕〉 뒤에 쓰기를 “신종(神宗)이 국정을 위임한 상황을 맞아 한
인물을 얻어 자신의 보좌로 삼아 송나라를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었다면 오히려
제나라가 왕자(王者)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형공이 인물을 얻은 것은 과연 어떠했는가?
형공이 등용한 복건자(福建子)에게 언제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주인을 따르는 성의라도 있었던가? 형공은
다만 증포(曾布
북송 신법당)와 여혜경(呂惠卿)의 길을 열어 준 초조(初祖) 달마(達馬)였을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계명구도가 문하에서 나왔으니 훌륭한 인물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덕유(李德裕)의
〈음보설(陰報說)〉 뒤에 쓰기를 “
장탕(張湯)과
두주(杜周)에게 후손이 있는 것은 도리의 변괴이다. 그들이 형벌을 적용할 즈음에 비록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사형에 해당하는 경우는 만에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장탕과 두주는 실로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원망의 대상이었다. 장탕과 두주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그의 마을에까지 큰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장탕과 두주 같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없앴다는 이유로 좋은 보답을
받을 수 있는가.
이덕유의 견해는 매우 천하다.”라고 하였다.
또 유종원(柳宗元)의 〈해고(海賈)를 부르는
글〔招海賈文〕〉 뒤에 쓰기를 “두 왕씨의 문하야말로 세상에서는 바다와 마찬가지였다. 그 무너져 내리고 솟구치는 파도는
약수(弱水)나 양곡(暘谷)보다도 훨씬 심했는데, 유자후는 음험하고 사특한 배에 아첨하고 웃는 돛대를
달고서 거의 20년 동안 출몰하면서 돌아오는 것을 잊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를 해치는 격이 되었다. 그러니 바다 상인과 비교해서 나을 게
무엇인가. 이 글을 지었을 때 아마도 그는 후회했던 것이리라.”라고
하였다.
16년 경신년(1740) - 선생 14세 -
10월 영이재(詠而齋) 공이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부터 다시는 강경 공부를 하지 않았다.
17년 신유년(1741) - 선생 15세 -
처음으로 과거 문체의 부(賦)를 지었는데, 본 사람은 대부분 칭찬하였다. 그것은 벼에서 하찮은 줄기만 보고 뿌리는 보지 못한다는
내용의 부로,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는데, 그중에 “천지를 엮어 솜을 만들고, 만물을 안아 한몸이 된다.〔綸天地而作縕 胞萬物而同體〕”라는 대목이
있다. ○12월 12일에 춘담공이 세상을 떠나자, 천전(薦奠)을 돕고 살피며 제사와 조문할 때 심부름하였다.
18년 임술년(1742) - 선생 16세 -
강경 공부를 그만둔 뒤에 더욱 널리 학습하였다. 장흥은 가장 구석진 곳이어서 서적이 드물고, 빌려 본다 해도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에
오서(奧書)나 비전(秘傳)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지 칠서(七書
사서삼경) 및 약간의 역사서만으로도 이미 해박하다는 말을 들었다. ○말 많은 것을 경계하여 ‘다언(多言)’ 두
글자를 써서 헌방(軒房
마루방), 담장, 울타리 등에 두루 붙였다.
19년 계해년(1743) - 선생 17세 -
봄 3월에 관례를 치렀다. ○이해 겨울부터 항상
장천정사(長川精舍)에서 독서하였는데, 선생이 형으로 섬길 만한 연배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낮추고
선생을 따라오니 토론하며 도와주었다.
20년 갑자년(1744) - 선생 18세 -
여름 4월에 영암(靈巖) 구평촌(九坪村) 김공 시성(金公始聲)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겨울 12월 27일에 부인 김씨가 시댁으로
왔다.
21년 을축년(1745) - 선생 19세 -
부(賦)를 짓는데, 당시의 문체를 답습하지 않고 반드시 기발한 글을 짓고자 하였다. 항상
반고(班固)와 장형(張衡)으로부터 위로는 굴원(屈原)과
송옥(宋玉)까지의 문장만을 읽었고,
반악(潘岳) 이래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22년 병인년(1746) - 선생 20세 -
매번 부(賦)를 지을 때마다 끝까지 생각하고 다듬느라 한 편에 수십 일을 보냈다. 누군가 과거 문체가 아니라고 말하면, 항상 “과거
급제는 하늘에 달렸으니,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
화수종회규(花樹宗會規)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23년 정묘년(1747) - 선생 21세 -
여러 학파의 학문을 더욱 널리 섭렵하고자 했으며, 한 분야에만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렇지만
천문ㆍ지리ㆍ복서(卜筮)ㆍ의상(醫相) 등의 일은 신령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그 묘리에 통달할 수 없고, 설사 묘리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실용성이
없음을 깨달아 일체 끊어 버렸다. 율려(律呂)나 구수(九數
계산법) 같은 경우는 재주와 소질이
있었으므로 잊을 수가 없었지만, 역시 전적으로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 역(易)과 예(禮)에 가장 몰두했는데, 자못 관련 영역을 깊이 공부하다가
근원을 깨닫는 희열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좋은 일을 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부모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자제를 교육시키도록 권면했고, 자제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효제(孝悌)와 문학(文學)에 힘쓰도록 격려했다. 그렇지만 예학(禮學)이나
계수(計數), 의술(醫術)은 그 재능에 따라 각기 힘쓰도록 했다. 농사를 잘 짓고 재물을 절약함으로써 반드시 가업을 이루고자 하였고, 같은
집안의 경우에는 더욱 진심을 다하였다. 일가 사람이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가서 보았는데, 눈썹이나 눈이 조금이라도 특이하면
기뻐하며 잊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이런 이야기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면 반드시
양쪽의 잘잘못을 분별하여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꼭 화해하도록 하였다. 화해시키지 못했을 때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골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여 의심받는 사람이 있으면 온갖 방법으로 변론했고 세월이 오래 흘렀다고 해서 버려 두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24년 무진년(1748) - 선생 22세 -
장천재(長川齋)에 있으면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날마다 읽을 과제를 수업하였다. 어린이에게는 과제 외에 낮에 《소학》을
강의하고, 저녁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강의하였다. 관례를 치른 사람에게는 낮에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강의하였는데,
학규(學規)는 한결같이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를 따랐다. ○겨울 12월에 아들 도립(道立)이
태어났다.
25년 기사년(1749) - 선생 23세 -
장천재에 있으면서 처음처럼 한결같이 강독하더니 모이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26년 경오년(1750) - 선생 24세 -
장천재에 있었다.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진의(李鎭儀) 공이 향천(鄕薦)으로 천거했는데, 천목(薦目)에 “재능이 높고 행동이
아름다우며, 학문이 심오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계발해 주었다.”라고 하였다.
- 이후로 여러 차례 천거가
있었는데, 모두 적지 않는다. -
27년 신미년(1751) - 선생 25세 -
봄에 병계(屛溪) 윤 선생(尹先生
윤봉구(尹鳳九))을 뵙고
속수례(束脩禮)를 드렸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우고, 인사한 뒤 돌아왔다. 윤 선생이
시를 주었는데,
경서 뜻 알기 어렵고 말하기 또 어려우니 / 經意難知說亦難
말한들 말하자마자
이해하기 어렵네 / 雖言言下領之難
또 이해하여 분명 터득했더라도 / 又雖領會分明得
마음으로 체득해 행하기 가장 어렵지 /
心體行時覺最難
하고, 또,
천관산 빼어난 모습 꿈에서 그리워했는데 / 冠山秀色夢中回
그대가 관산에서 천리 길을
왔구나 / 君自冠山千里來
어느 날 그대와 함께 산 위에 올라가 / 何日携君山上去
남쪽 창해 바라보며 흉금 장대하게 하나 /
南臨滄海壯襟懷
하였다. ○가을 8월에 가서 윤 선생을 뵈었다. 《의례문답(疑禮問答)》 1권이 있다. 경문(經文)의 뜻이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부분을 질문했다.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왔다. ○9월에 딸이 태어났다.
28년 임신년(1752) - 선생 26세 -
장천재에 있었다. ○〈원문(原文)〉을 지었다.
- 선비의 경솔함과 부박함을 경계하였다.
-
29년 계유년(1753) - 선생 27세 -
가을에 덕산(德山)에 갔다. 《서경(書經)》과 《의례문답》이 있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였다.
30년 갑술년(1754) - 선생 28세 -
봄,
증광시(增廣試)의 동당(東堂)에서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병계 선생을 뵈었다.
《주역총목(周易總目)》에 대해 질문하고, 이어서
기형(璣衡)에 이야기가 미쳤다. 병계 선생이 대나무로 본떠 기형을 만들라고 말씀하셨는데, 완성한 뒤에
구암헌(久庵軒)에 두었다. ○7월에 둘째 아들 도급(道及)이 태어났다.
31년 을해년(1755) - 선생 29세 -
봄, 일가의 자제들이 배우지 못할까 걱정하여 부로(父老)를 모아 규정을 만들었다. 같은 마을 자제로 8세 이상인 아동을 모아
귤우헌(橘友軒)에 함께 살게 하고
- 집안 동생 위백침(魏伯琛)의 집 바깥채이다. - 밤낮으로
데리고 가르쳤다. 가난한 사람은 낮에 농사를 짓고 밤에 와서 배우게 했으며, 자질이 노둔한 사람은 구구단, 육갑(六甲), 세계(世系)를 가르치는
데 그쳤다. 그다음은 《사략(史略)》을 더 가르쳤고, 다음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더 가르쳤으며, 다음은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더
가르쳤고, 그다음으로 《맹자》나 《대학》을 더 가르쳤다. 《소학》의 경우는 모든 아동과 함께 돌려가며 낮에 강의했고, 풀어 가며 읽어 주어
사람들이 듣도록 하였다. 이렇게 반년을 실행했더니, 거의 체계가 잡히기에 이르렀다. 또 양정숙(養正塾)을 세웠는데, 학규(學規)가 이전에 비해
더욱 상세하였다.
- ‘양정(養正)’이라는 두 글자는 병계 선생이 써서 내려 준 것이다.
-
32년 병자년(1756) - 선생 30세 -
이때 이후로 글을 지을 때면 애당초 초안을 만들지 않고 뜻하는 대로 불러 썼다.
- 평소
마음속으로 문장은 중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
33년 정축년(1757) - 선생 31세 -
가을, 덕산(德山)으로 갔다. 《대학차의(大學箚義)》와 문답(問答)이 있다. 당시 정시(廷試)가 있었는데 병계 선생이 가서 시험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계상(溪上)으로 돌아가는데, 병계 선생은 존재 선생의 집안이 가난하여 오래 머물며 강습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식량을
주어 열흘 동안만이라도 더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이 없는 것을 아시고, 맏아들 윤심위(尹心緯)에게 “자화(子華
위백규의 자)가 《주자대전》을 공부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완영(完營
전라
감영)에 협의하여 한 질을 구할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하였다. ○시폐(時弊) 10조를 열거하여 병계 선생에게 드렸다. 병계 선생이
“이는 정치를 담당한 사람에게 글 한 통을 써서 의견을 말할 수도 있지만, 초야에서 하는 말은 무익하다. 다만 선비도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몰라서는 안 되므로,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조목별로 개진하는 것은 좋다.”라고 하였다.
34년 무인년(1758) - 선생 32세 -
이에 앞서 병계 선생께서 천관산까지 포함해서 남쪽 지방 여행을 하겠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이해 4월 금구(金溝) 관아로 오셨다.
- 당시 윤심위(尹心緯)가 읍재(邑宰)였다. - 감영 영저리가 보낸 편지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바로 노령(蘆嶺)으로 가서 병계 선생 일행과 만났다. 병계 선생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여행하려고 했으나, 무더위가 점차 심해졌기 때문에
입암(笠巖)에서 되돌아갔다.
선생을 그대로 수행해서 다음 날 정오에 태인(泰仁) 피향정(披香亭)에 올랐다. 병계 선생이 선생에게 천관산을 그리라고 말씀하시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형세가 빼어난 곳이 어딘지 물으면서 가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금구 관아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묵은 뒤 돌아갔다. ○가을,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환영지(寰瀛誌)》를 저술하였다.
- 훗날 증보했다. -
35년 기묘년(1759) - 선생 33세 -
봄에 회시(會試)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병계 선생을 뵈었다. 《정몽(正蒙)》과 《의례문답》이 있다. ○5월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합격했고, 윤6월 회시를 보러 갔으나 더위를 심하게 먹어 실려 오다시피 돌아왔다. ○《고금(古琴)》을 편찬했다. 경전(經傳)
가운데 심신에 가장 절실한 편 전체 또는 장 전체 중에서 선택하여 깨끗이 쓰고 소중하게 장정했다. 마음이 평안하지 못할 때마다 낭랑하게 소리
내어 읽었는데, 이름을 ‘고금’이라고 하였다. ○〈정현신보(政絃新譜)〉를 저술하였다.
- 시폐에 대해
언급하였다. -
36년 경진년(1760) - 선생 34세 -
장천재에 있었다. ○가을에 병계 선생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벗 안동제(安東濟)의 집을
-
포옹(圃翁) 휘 안이행(安以行)의 손자이다. - 방문한 뒤 돌아왔다.
37년 신사년(1761) - 선생 35세 -
겨울에 병계 선생을 뵈었다. 인물성(人物性)의 같고 다름에 대해 논의하고 절구(絶句) 한 수를 올렸다. 병계 선생이 화답하는 시를
내려 주었는데,
성선이 하늘에서 나온 것 자네는 알지니 / 君知性善出於天
기질이 치우침 여부는 따질
것 무엇인가 / 氣質何論偏不偏
학문은 원래 공부가 가장 중요하니 / 學問元來工最大
남들보다 백배 천배 더 노력하시게나 / 人能之十己能千
하였다.
- 선생의 원래 운(韻)은,
성은 이로 인해 품부되니 하늘에 근본하고 /
性因理賦本於天
사람은 온전함 얻고 동물은 치우치게 얻네 / 人得其全物得偏
한 근원으로 논하자면 같은 곳이지만 /
若論一原同處是
기의 측면에서 보자마자 천 가지로 달라지네 / 纔看氣上便殊千
하였다. - 병계 선생이 《고금》을 보고, 〈심경찬(心經贊)〉 끄트머리 16자를 써서 주셨다.
38년 임오년(1762) - 선생 36세 -
장천재에 있었다.
39년 계미년(1763) - 선생 37세 -
가을에 증광시 동당에서 일등을 차지하였다. 넷째 동생 위백순(魏伯純)
- 감시(監試 생진시)에 합격하였다. - 과 함께 회시(會試)를 보러 갔고, 돌아오는 길에 병계 선생을 뵈었다.
《경사차의(經史箚義)》와 《경사문답(經史問答)》이 있다. 병계 선생이 ‘존존재(存存齋)’라는 대자(大字) 세 글자를 써서 주었다.
40년 갑신년(1764) - 선생 38세 -
5월에 관청에 소송이 걸려 모함을 당했기 때문에 상경하여 반촌(泮村)에 머물면서 공부하였다. 가을에 한성시(漢城試) 종장(終塲)을
보아 합격했다. 겨울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는 옥정사(玉井寺)에 머물렀다.
41년 을유년(1765) - 선생 39세 -
봄에 반촌에 있으면서 《소학》을 공부했고, 2월 29일에 강경하여 생원(生員) 복시(覆試)에 합격했다. 윤월(閏月
윤2월)에 병계 선생을 뵙고, 여름에 남쪽으로는 도솔암(兜率庵)까지 유람하고, 동쪽으로는 옥룡사(玉龍寺)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42년 병술년(1766) - 선생 40세 -
가을에 병계 선생을 뵙고, 《근사록(近思錄)》 중 의심나는 부분을 질문하였다.
43년 정해년(1767) - 선생 41세 -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세웠다. ○여름에
사강(社講)을 시행하였다. ○12월 7일에 병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44년 무자년(1768) - 선생 42세 -
11월 12일에 맏아들 도립(道立)이 낙안(樂安) 백현(栢峴) 김옥(金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2월에 병계 선생의 영전에
달려가 곡을 하였다.
- 제문이 있다. - 노천정(魯天政)과 함께 걸어서 출발하여 돌아오는
길에 계룡산(雞龍山)에 올라 여기저기 둘러보고 돌아왔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가까운 데 뜻을 두지 않고 현인(賢人)이 되겠다고 기약하며,
과거 급제를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정도로도 보지 않았다. 또한 경박한 풍속이 날로 심해지고 사람들이 먼지 털 듯 헐뜯어, 가까이는 한
동네부터 멀리는 도내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돌아가신 병계 선생만이 있었는데, 한 시대 사람들이 우러러
따랐기 때문에 덩달아 배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병계 선생 가까이서 배우면서 마음이 기쁘고 뜻이 흡족하여 즐거워하면서 돌아가기를
잊었으나, 거리가 멀고 집이 가난하여 계속 찾아뵙고 배울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마음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것을 오히려 자신의 위안으로
삼았으므로 항상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였다.
멀리서 부음을 듣고, 비록 상제(喪制)는 5개월로 끝났지만 마음에 무언가 잃어버린 듯 허전하고
즐겁지가 않았다. 영연(靈筵
신위를 모신 곳)에 하직 인사를 하고 산문(山門)으로 걸어 나올 무렵,
망망한 이 세상에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구슬피 길게 탄식하며 옥계를 나오는데 /
悵然長嘯出玉溪
북풍 부는 빈산에 눈 내리는 시절일세 / 北風空山雨雪時
지금 같은 때는 삼태기를 멘 사람 적으니 / 如今亦小荷蕢者
내 유심과 무심을 알까 두렵지 않네 /
有心無心不怕知
- 이는 주자(朱子)의 〈홀로 요금을 품고 옥계를 지나다〔獨抱瑤琴過玉溪〕〉 시의
운(韻)인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ㆍ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및 병계(屛溪)로 전해지면서 차운한 시이다. -이해에 사강 규약에 따라
드디어 직접 농사지으며 독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호미를 들고 서책을 허리에 차고 직접 목화밭을 맸다. 정오에는 큰 나무
아래에서 쉬며 각자 과제를 공부하였다. 매달 보름에 도강(都講
선생 앞에서 보는 시험)을
실시했는데, 각기 절구와 율시를 짓는 데서 시작하여 서(序)나 기(記), 간찰(簡札)까지 지었고, 그 자질에 따라 차례를 매겼다. 향약과
《소학》 장초(章抄)를 풀어서 읽어 주었는데, 시행한 지 몇 년이 지나자 효과가 나타났다. 예학의 경우에는 특히 집안의 일상생활에서 쓰였기
때문에 비록 시기하는 자들이 온갖 수단을 통해 방해했음에도 오히려 끝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45년 기축년(1769) - 선생 43세 -
늘 벗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것을 가장 한스럽게 여겼다. 또한 언동(言動)에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모두 마음속에서 잊지 않고,
아침에 저지른 잘못은 낮에 후회하고 낮에 저지른 잘못은 밤에 한탄하였다. 스스로 평소의 삶을 돌아보고 일찍부터 먹은 마음을 전혀 이루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심중에 쌓아 두니 점차 울화병이 되었다. 마침내 정력과 혈기가 날로 소모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정신과 기운이 어둡고 멍해졌다.
○다산(茶山)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였다. ○가중사시회(家中四時會)를 만들어 매 사계(四季
3, 6,
9, 12월)마다 다섯 형제의 집안 식구들이 대청에 모였다. 양친은 북쪽 벽 쪽에 앉고, 남자는 차례로 그 동쪽에 앉고, 부녀자는
차례로 그 서쪽에 앉으며, 어린 사람은 그 남쪽에 앉았다. 무릇 남녀 중에 옷 무게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자란 아이 정도면 모두 자리에
참석하여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훈화 내용은 대략
유중도(柳仲塗 유개(柳開))의 삭망훈(朔望訓)을 따랐지만
그보다 더 상세하였다. 선생이 직접 양친에게 헌수(獻壽)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도 각각 나이에 따라 차례로 헌수했는데, 5세 이상에 이르러
그쳤다. 하인은 마당에 도열했는데, 그들에게도 헌수(獻酬)하도록 하였다. 그 모습이 매우 화기애애하였다. ○좌우명으로
〈팔명(八銘)〉을 지었다.
- 팔괘(八卦)를 연역하여 명(銘)으로 삼았다. -
46년 경인년(1770) - 선생 44세 -
47년 신묘년(1771) - 선생 45세 -
48년 임진년(1772) - 선생 46세 -
겨울에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증광시 동당에 응시하였다.
- 남평(南平) -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시관(試官)이 봉투에 넣은 대책권(對策卷)을 보내면서 치사(致辭)하기를 “장차 1등에 뽑힐 것인데, 방방(放榜
합격자 발표)할 때 우연히 시권(試卷
답안지)을 잃어버려 결국
낙방했으니, 아마 운수라고나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부귀를 부러워하거나 억지로 구차히 관직에 나가려는 뜻이 없어, 과거를 보러
한양을 다닌 지 20여 년인데도 일찍이 고관 집에 한 번도 명함을 들이민 적이 없었다. 과거장에서 칭찬을 들은 뒤에 권세가가 기필코 선생과 함께
공부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익으로 유혹하고 위세로 협박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이진의(李鎭儀)가 선생을 가장
알아주었는데, 일찍이 정시(廷試) 일소(一所)의 시관이 되어 선생을 일소로 오게 하려고 하자, 선생이 사양하면서 “본래대로 이소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 편합니다. 만일 성주(城主)를 따라 일소로 바꾼다면 이는 제 평소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계미년(1763, 영조39) 회시(會試)
때, 서너 명의 권문세가 자제가 만나자고 협박했으나 문을 닫아걸고 거절하자, 한양에 그 소문이 퍼지면서 선생을 괴이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12월 그믐에 딸을 영암(靈巖) 조광근(曺光根)에게 시집보냈다.
49년 계사년(1773) - 선생 47세 -
〈회포를 풀며〔遣懷辭〕〉라는 시를 지었다.
다른 사람 내 자식처럼 보는 건 / 視人猶己子
본시 내 천성이니 바꿀
수 없구나 / 吾固得之天而莫之革也
사람들 절로 천 길 구덩이로 빠지는데 / 人皆自入於千仞之坑兮
누가 나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가 /
孰使余而呼之
만물은 나에게 갖추어져 있나니 / 萬物之備於我兮
내 지향한 것 따르고 다시 무얼 의심하리 / 從吾所好復奚疑
50년 갑오년(1774) - 선생 48세 -
천성이 매화를 사랑해서 늘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마주하고 앉았다. 드디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의인화하여 글을 지었는데,
〈연어(然語)〉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본래 분노를 나타내는 우화가 많았던 까닭에 취지가 장자(莊子)나 열자(列子)의 기미를 많이 띠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12월 27일에 둘째 아들 도급(道及)이 나주(羅州) 발산(鉢山) 이경준(李慶俊)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였다.
51년 을미년(1775) - 선생 49세 -
한 가지라도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일을 보거나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들으면 기뻐하며 잊지 않았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시골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선행을 한 가지라도 들으면 늘 외우다시피 하여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야기하였다. 일가의 경우, 가난하면 넉넉해지기를
바라고, 배울 때는 근면하기를 바라며, 처신이나 마음가짐에서 그가 세속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배움의 길을 잃은 자제는 정성스럽게
타일렀는데, 중년에는 차츰 자주 충고하다가 사이가 멀어지는 일을 번번이 당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했다. 항상 “독서는 정밀하고 깊게
해서 오묘한 데까지 깨달아야 하고, 글 짓는 일은 조화롭고 온후하여 할 말을 다 갖추어야 실로 스스로 깨닫는 묘미가 있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 단, 재주가 둔한 자, 성격이 경솔한 자, 원대한 뜻이 없는 자, 빨리 이루려는 자, 시류를 즐겨 따르는 자, 그저 과거 문체만을
생각하는 자, 집안 재력이 빈궁한 자는 모두 배울 수도 없고, 또 끝내 전해질 것도 없을 뿐이니, 이것이 나의 가장 큰 한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성리학에 전혀 어두운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사고능력이 있더라도 문장의 묘리를 터득할 수 없다. 문장의 묘리를 깨달으면 또한 이를 가지고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고, 부귀나 빈천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월에 둘째 자부(子婦) 이씨(李氏)의 상을
당하였다. ○늘 다른 사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지은 시에,
어렸을 때부터 날마다 잘못을 알아 / 日日知非自少時
지금 사십구 년 동안 잘못
알았지 / 于今四十九年知
우연히
거백옥의 나이 되니 부끄럽구나 / 偶得伯玉年堪愧
이렇게 깨친 뒤 어리석은 한 사람 되었네 /
覺後眞成一呆癡
하였다. 회한이 쌓이다 못해 마침내 고질의 빌미가 되어 기(氣)가 늘 거꾸로 올라왔다. 또 마음을 다스린 공력이 있는
군자라면 분명 이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층 더 후회하였다. 정신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깨닫고는 언제나 “부자, 형제가 마음까지
알아주지 않았다면, 내 목숨도 위태로웠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늘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의 안빈낙도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하여, 마침내 매화와 주고받은 시 10편을 지어 자신의 뜻을 담아 표현하였다.
52년 병신년(1776) - 선생 50세 -
3월에 영종대왕(英宗大王)이 승하하였다.
정종(正宗) 1년 정유년(1777) - 선생 51세 -
12월 29일에 도급(道及)이 보성(寶城) 박곡(亳谷) 조명동(曺命東)의 딸에게 두 번째로 장가들었다.
2년 무술년(1778) - 선생 52세 -
7월에 덕산(德山)을 둘러보고, 돌아가신 병계 선생의 맏아들과
윤 고령(尹高靈)을 만났다. 남포(藍浦)를 거쳐 그곳 수령 위홍조(魏弘祖)를 만나고, 이어
한산(韓山)을 거쳐 대매진(大每津)을 건넜다. 임피(臨陂)와 만경(萬頃)을 거쳐 벽골제(碧骨堤)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사강(社講)으로 말미암아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였다.
3년 기해년(1779) - 선생 53세 -
강회(講會)로 인해 향사례를 시행하였다.
4년 경자년(1780) - 선생 54세 -
9월 9일에 둘째 아들 도급에게서 장손(長孫) 영간(榮幹)이 태어났다. ○10월 27일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였다.
영암(靈巖) 신사준(愼師浚)이 빈(賓)이 되었는데, 고을 인근에서 모인 노소(老少)가 거의 수백 명이었다.
5년 신축년(1781) - 선생 55세 -
5월 15일에 어머니 오씨(吳氏)의 상을 당하였다. ○9월 4일에 다산동(茶山洞)에 있는 할머니 백씨(白氏)의 산소 아래에 장사
지냈다. ○
《사성록(思誠錄)》 전편(前編)을 완성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온화함과 공손함, 검약한 절조, 자신의 힘을 다하고 천명을
편안히 받아들인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자손들의 감계(鑑戒)로 삼았다. ○이때 영이재(詠而齋) 공이 더욱 정신이 혼란해지고
기운이 약해져 소변을 가리지 못했으므로, 선생이 묘소를 다녀오거나 궤전(饋奠
상식을 올림)을 받들
때는 여러 동생이나 아들, 조카들이 번갈아 시중들고, 잠시도 영이재 공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6년 임인년(1782) - 선생 56세 -
5월에
어머니 상복을 벗고 심제(心制)를 했다. ○선생이 상중에 있을 때 속으로는 마음을 속이지 않고,
겉으로는
심정을 꾸미지 않았다. 나태하지도 않았으며, 그 천성에 맡겼던 까닭에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도
자연히 절도에 맞았으며, 슬퍼하면서도 상례를 치르는 것이 도리에 합당하여 사람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인정하였다.
7년 계묘년(1783) - 선생 57세 -
8월 2일에
막냇동생의 상을 당해 곡(哭)하였다.
8년 갑진년(1784) - 선생 58세 -
2월 10일에 아버지 영이재 공의 상을 당하였다. ○3월 6일에 어머니 오씨의 산소에 합장하였다. ○여름에 《사성록》을 다시
편찬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전편(前篇)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세히 기록하였다. ○겨울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옮겨 지었다.
○선생의 탯줄이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뒤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담아서 지니고 다녔는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종신토록 그리워하였다. 〈제낭명(臍囊銘)〉을 지었다.
9년 을사년(1785) - 선생 59세 -
봄에 정사(精舍)를 완성하였다.
10년 병오년(1786) - 선생 60세 -
5월 단오(端午)에 길제(吉祭
신주를 고쳐 쓰고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동네
사람들을 모아 향사례를 크게 설행하였다. ○
우재(尤齋 송시열)의 〈수미음(首尾吟)〉을 보고,
-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를 차운하였다.
-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모두 130수이다.
11년 정미년(1787) - 선생 61세 -
봄에 생원(生員) 하성도(河聖圖)와 함께 《환영지(寰瀛誌)》를 고쳤다. 판목에 10여 판을 새긴 뒤 갑자기 재정이 부족해서
그만두었다. ○5월에 조양 문씨(朝陽文氏)에게 시집간 누이의 상을 당하였다. ○겨울에 〈자회가(自悔歌)〉를 지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양친을
그리워하며 살아생전 모실 때 해야 할 방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100여 구의 노래를 지었는데,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방도를 모두
서술하였다.
12년 무신년(1788) - 선생 62세 -
2월 29일에 다산정사(茶山精舍)에서 향사례를 행하였다. 다산정사를 중수하고 낙성연(落成宴)이 있었는데 그와 겸해 시행한 것이다.
사우(士友)들이 많이들 와서 보았다. ○11월에 둘째 아들에게서 둘째 손자 영한(榮翰)이 태어났다. ○12월에 장손 영의(榮嶷)가
태어났다.
13년 기유년(1789) - 선생 63세 -
1월에 선생이 관사(冠寺) 선당(禪堂)에서 십일노회(十一老會)를 설치하자고 발의하였다. ○가을, 〈거병서(去病書)〉를 지었다.
거병(去病)은 이경(李㯳)이 어렸을 때의 자(字)로, 바로 선생
큰누이의 외손자이다. 겨우 생후 몇 달 만에 어미를 잃어 선생 집에서 키웠다. 선생이 거병으로 부르라고
했는데, 오래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성장하자 그 이름을 풀어 해석한 〈거병서〉를 지어 경계하였다.
14년 경술년(1790) - 선생 64세 -
15년 신해년(1791) - 선생 65세 -
4월에 셋째 동생 백신(伯紳)과 함께 만호(萬戶) 조충배(趙忠培)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영안진(永安鎭) 앞바다에서 배를 탔다.
산이도(山伊島)와 평이도(平伊島) 두 섬을 지나 금당도(金堂島)에 닿았다. 사방을 두루 둘러보니 붉은 절벽과 푸른 바위는 마치 귀신이 만들고
깎아 놓은 듯했으며, 조대(釣臺
낚시터)와 석첨(石簷
돌처마)은 더할 나위 없이 기괴하여 선생이 몹시 좋아하였다. 돌아와 〈금당도기(金堂島記)〉를 지었다. ○겨울에
〈정현신보(政絃新譜)〉를 저술하였다. ○이해 겨울부터 〈사서차의(四書箚義)〉와 〈격물설(格物說)〉을
저술하였다.
16년 임자년(1792) - 선생 66세 -
7월, 태풍에 남해안 연안이 휩쓸려 황폐해졌다. 수령 원영주(元永周)를 위해 분담하여 진휼하는 방략을 세웠는데, 선생의 권분(勸分
부자들이 나누어 부담함)과 진휼 규정 절목이 매우 상세하여 마치 손바닥에 놓고 가리키는 듯하자, 원
수령이 기뻐하며 실행했다. 그 뒤 병진년(1796, 정조20)에 문집과 함께 내각(內閣
규장각)에
제출하였다.
17년 계축년(1793) - 선생 67세 -
1월에 셋째 동생의 부인 임씨(任氏
임세원(任世元)의 딸)가 세상을 떠났다. ○11월에
장손녀가 영광(靈光) 이택규(李宅珪)에게 시집갔다.
18년 갑인년(1794) - 선생 68세 -
8월에 태풍으로 바다가 넘치는 재난이 발생했는데 호남 연해 여섯 고을이 더욱 심했다. 임금께서 검교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사신으로 삼아 위유하게 하였다. 위유사(慰諭使) 서영보가 이전에 이미 선생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장흥 고을에 도착한 뒤에 문집을 구해서 보고는
바로 조정에 계문하였다. ○가을에 〈난설(難說)〉을 지어 노인의 어려움 70여 조항을 설명하여 부모님을 추모하는 뜻을 담았다. 〈난설〉의 마지막
장에 “지금 어려운 것은 이전에도 어려웠으니,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밝도록 잠 못 들고
돌아가신 두 분 부모님을 생각하네.〔明發不寐 有懷二人〕’라고 하였다.”라고 나온다.
19년 을묘년(1795) - 선생 69세 -
4월에 맏아들 도립(道立)과 조카 도전(道佺)과 함께 불갑사(佛甲寺)와 용천사(龍泉寺)에 올라 노닐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두 절은 지난날 이미 노닐며 구경했던 곳으로, 일찍이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觀日落詩〕〉와 〈산을 넘으며〔遊陟詩〕〉라는 시를
지었다.
하늘가 바로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니 / 天邊猶是若木東
사람들 하늘 동쪽서 자욱한 안개 보네 /
人在天東望空濛
작음으로 큰 것 보는 건 늘 다하기 어려우니 / 自小視大恒難盡
태양이 이곳으로 진다고 다투어 얘기하네 /
爭言太陽落此中
비 오기 전에 별계에 도착하여 / 未雨到上界
흉금 풀어 놓고 신선의 참뜻 생각하네 / 開襟挹仙眞
서둘러
일찍 오지 않았더라면 / 若非催行早
종일토록 안개 속에서 헤맸을 텐데 / 終日霧裏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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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있었던 나들이가 어느 해였는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여기에 시를 기록해 둔다. - 11월 27일에 임금께서 먼 지방 사람을
등용하라는 뜻으로 특별히 하유하여 선생을 군직(軍職) 부사용(副司勇)에 임명하였다. 또 전라도 감사에게 왕명을 내려 선생을 올려보내고 선생이
편찬한 《환영지》를 궤짝에 담아 자물쇠를 채워 밤새워 올려보내라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7일에 곧장 《환영지》 몇 권을 가져다 장흥부에
제출하여 자물쇠를 채워 올려보냈으며, 병으로 임금의 부름에 응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장흥부에 글을 바쳐 감영을 통해 임금께 보고하도록 했다.
○12월 23일, 임금께서 다시 하교하기를 “위백규는 따뜻한 봄이 오고 병에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올려보내고, 《환영지》 외에 저술한 글을 모두
찾아서 올려보내라.”라고 하였다.
20년 - 가경(嘉慶 청나라 인종의 연호)
1년 - 병진년(1796) - 선생 70세 -
1월 6일에 선생의 여러 저술을 장흥부에서 궤짝에 담아 자물쇠를 채워 올려보냈다. ○1월 25일에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제수하고, 전라 감사에게 선생을 올려보내라고 하였다. ○2월 2일에 임금의 부름에 바로 올라오지 않았다고 하여 하교하기를 “만일 제때에 올라와
나를 만나지 않으면 마땅히 해조 판서와 당상관을 엄히 다스릴 것이며, 하리(下吏)는 금추(禁推)하되 선소(宣召)를 받은 지방의 관청 노비로
충정(充定)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월 9일에 또 하교하기를 “위백규를 불렀는데 여전히 반응이 없다. 봄추위가 아직 남아 있어 자기
힘으로는 길을 떠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가? 이렇게 지체하니 참으로 매우 미심쩍고 답답하다. 급히 올라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선생이 어쩔
수 없이 16일에 둘째 아들 도급 및 조카 도전과 함께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3월 3일에 한양에 들어가 7일에 숙배했고,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니, 임금께서 은혜가 넘치고 아끼는 비답을 내렸다. 대략 비답에 “첫째, 뜻을 세우고 배움을 밝히라고 올린 대목은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내 뜻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의 뜻이 하나가 되지 못했고, 정학(正學)이 바르지 않은 까닭에 사학(邪學)이 멈출 줄
몰랐으니, 내가 반성할 데가 아닌 곳이 없다. 깊이 생각하겠다. 둘째, 보필할 사람을 고르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라는 대목은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인재 등용을 통해 임금을 섬기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니, 덮인 풀을 베어 내듯 가려졌던 인재를 등용하는 일은 오늘의 암랑(巖廊
의정부)에 바라는 바이다.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조목도 하는 말마다 적절하여 시폐(時弊)에
들어맞는다. 요즘같이 사유(四維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가 펼쳐지지 못하고 나라의
기강을 떨치지 못한 적이 없었다. 매일 깊은 밤 생각에 잠겨 탑전을 맴도느라 잠 못 이루며 스스로 초심을 돌아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대는 사람의 발길이 드문 먼 시골에 살면서 이렇게까지 극진히 의논했으니, 과연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보탬이 되는 길이로다. 지금
바로 묘당(廟堂
비변사)에서 상세히 검토하고 보고하여 실제로 효과가 있게 하겠다. 그대는 일흔 살의
나이에 내 부름을 받고 올라왔으니, 만일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진실로 이른바 보고 들은 것 없이 오가기만 했다는 격이 될
것이다. 또한 벼슬자리가 날 때를 기다려서 그대에게 벼슬을 시키자니, 그것은
노년에 중랑(中郞)으로 있었던 한(漢)나라 풍당(馮唐)보다 더 늦은 감이 있다. 그대에게 한 고을을
맡길 것이니, 그동안 쌓아 둔 바를 베풀어 보도록 하라.”라고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내일 정사(政事
인사)에서 수령으로 차송하도록 이조에 분부하라.”라고 하였다. ○해당 조에서 기장 현감(機張縣監)에 의망하자,
이에 대해 전교하기를 “칠십 노인을 어찌 먼 곳에 부임하게 하는가. 호남에 명성과 공적이 있는 문음(文蔭) 수령 중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또 태인 현감(泰仁縣監) 조항진(趙恒鎭)과 서로 자리를 바꾸는 것으로 의망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인도 오히려 노령 위에
있어 고향 집과 좀 멀다.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옮겨 임명하라.” 하고는, 그날로 하직하게 하면서 말을 주어 내려보냈다. 그달 20일 임지에
도착하였다. ○4월에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선생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비난했다며 권당(捲堂
동맹휴업)하였다. 사학(四學)도 시험을 거부하고 통문(通文)을 돌렸으나, 상의 조율에 힘입어 중지되었다. 대개
〈만언소〉가 알려지자 조정이 놀라 떨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선생을 헐뜯고 배척했는데, 상께서 조정(調整)하였다. ○임지에 도착한 뒤 곧장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실행하였다. 화속지(火粟紙)를 없애고
삭지(朔紙)를 줄여 승려들이 당했던 폐해를 덜었다. 삭망에 공물로 내는 물고기〔朔望魚〕와 날짜별로 내는
물고기〔日次魚〕를 감해 주어 어촌을 살렸다. 생은어(生銀魚
날은어)의 진상은 오래된 고질적
폐단이었는데 상급 관청에 요청하여 돈으로 대신 납부하게 했다. 관청에 머물면서 물품을 만들던 유장(鍮匠)ㆍ철장(鐵匠)ㆍ석장(錫匠) 및
목공(木工)의 손실 금액과 삼품(三品) 요역의 5분의 4를 덜어 주었다. 관청의 네 가지 담당 업무〔官四色〕 및 각 청(廳)의
계방(契防)을 없애서 군정(軍丁)을 여유롭게 했다. 그 밖에 원두(園頭
채소나 과일 재배)ㆍ기비(妓婢
관기(官妓)), 시장의 세금에
관련된 자잘한 폐단도 제거하였다. 장교(將校)의 강무(講武
군사훈련)와 병기 수선, 관청 건물
수리, 권학(勸學) 규칙, 환곡법(還穀法) 등이 모두 조리에 맞게 그 체계가 훌륭하게 정비되었다. ○11월에 둘째 손녀가 창평(昌平)
나중빈(羅重贇)에게 시집갔다. ○12월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위백규는 ‘하필구비(何必求備)’라는 항목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중고(中考)를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감사가 구비(求備)라고 한 것이나 경들이 중고로 성적을 깎는 것이나 모두 잘못이다.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21년 정사년(1797) - 선생 71세 -
2월에 담양(潭陽)의 수령 이헌유(李憲儒)가 관례(冠禮)의 빈(賓)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여 선생이 셋째 동생 백신(伯紳)과 함께
가서 보았다. ○이달에 중풍으로 마비되어 오른쪽이 반신불수가 되었다. 먹고 마시는 일이나 기거(起居)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사직장을
올렸으나 감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4월에 영간(榮幹)이 인천(仁川) 이종백(李宗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기축년(1769, 영조45)에
일찍이 작은 첩(帖)을 만들었는데, 병계 선생이 그동안 보낸 편지를 배접하고, 첫 판에 계상(溪上) 가택을 모사하여 모셔 두었다. 이때에 와서
또 두 쪽 가리개를 만들어 돌아가신 병계 선생이 써서 내려 준 ‘경의(敬義)’ 두 자를 붙이고, 짧은 명(銘)을 지어 그 아래에 적기를
“경(敬)과 의(義)는 성학(聖學)의 핵심이니, 예전에 돌아가신 선생께서 내려 주신 가르침이다. 정사년 여름에 소자가 적다.”라고 하였다. 앉든
눕든 항상 자리 오른쪽에 두고 추모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 윤6월에 고과(告課
치적 평가)가
있었다. 오랜 병 때문에 최하(最下)를 받았다. 상께서 고제(考題
고과 성적표)를 보고 하교하기를
“위백규의
치적(治績)은 병과
상관없이 높이 평가할 일이다. 또한 도적을 안정시킨 정책은 상을 줄 일이지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이번에 그를 하고(下考)라고 평가한 것은
전적으로 무른 땅에 말뚝 박는 식으로 그의 세력이 없다 해서 성적을 낮게 준 것이다. 어찌 이렇게 흠만 찾는단 말인가. 감사라는 자가 극히
놀랍다. 엄하게 추고(推考)하라. 위백규의 하고(下考) 성적은 일단 없던 것으로 치고, 경직(京職
경관직)에 자리가 나면 복직시켜 등용하라.” 하였다. ○16일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하비(下批)하였다.
-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
○10월 6일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원서 별제 위백규는 기한이 지난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 숙배하지 않았으니, 관례에 따라 고쳐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위백규의 학문이나 식견은 일단 놓아두더라도, 그 사람의 집안 행실이 극히 온전하게 잘
갖추어져 있다. 만약 포부를 품고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위백규에 대해 진정을 다하는 것이 어찌 위백규에 대해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결코 이대로 벼슬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도의 묘(廟
조경묘)와 전(殿
경기전)의 영(令)과 자리를 바꾸도록 감사에게
분부하고, 위백규가 직임을 맡도록 엄하게 이르라. 그런 뒤에 장계를 통해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교한 뒤라면 그도 어찌 감히 곧바로
직임을 맡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임금의 전교가 이처럼 간곡하고 엄했으나, 선생의 병세는 길을 나설 수 있는 가망이 조금도 없었다. 여러
차례 감사에게 문서를 올려 장계로 보고하여 파직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감사가 전날 추고를 당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주저하면서 감히 장계를
올리지 못하였다. 12월 보름이 지난 뒤, 해당 조에서 아뢴 다음에야 비로소 교체되었다.
22년 무오년(1798) - 선생 72세 -
2월에 넷째 동생 백순(伯純)이 성균관에 들어갔다. ○선생의 병환이 오래되었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분묘 곁의 암자나 동생들의 집을
왕래할 때 늘 남여(藍輿)를 탔다. 남에게 답장하는 글을 보낼 때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지만, 몸을 뒤척일 때는 사람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고,
먹거나 마실 때도 사람의 도움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에 정신과 기운이 더욱 소모되어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숨을 들이쉬어야 하고 누웠을 때는 꼭
신음소리를 냈다. ○6월에 넷째 동생의 부인 백씨(白氏
백숭채(白崇采)의 딸)가 세상을 떠났다.
○11월 21일에 감기가 더해져 나흘이 지나자 병이 위독해졌다. 그저 몸을 떨기만 할 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겨우 작은 소리로 말하기를
“어떤 글의 어떤 글자는 반드시 어떤 글자로 바꾸어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날 유시(酉時)에 평소 머물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달 25일이었다. ○25일에 염습(殮襲)하고, 다음 날 소렴(小斂)을 하고, 28일에 대렴(大斂)을 하고, 29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했다.
23년 기미년(1799)
2월 6일에 다산동(茶山洞)에 있는 작은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의 묘소 한 단 아래 부임향병(負壬向丙
정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24년 경신년(1800)
6월 22일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였다.
금상(今上 순조(純祖)) 1년 신유년(1801)
2년 임술년(1802)
3년 계해년(1803)
4년 갑자년(1804)
5년 을축년(1805)
1월 25일에 선생의 아내 영인(令人) 김씨(金氏)가 세상을 떠났다. ○2월 그믐에 선생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이해 12월에 고을
선비들이 회의하여 선생을 죽천사우(竹川祠宇)에 추배(追配)하기로 하였다.
6년 병인년(1806)
4월에 선생을 추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