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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연구
Ⅰ. 서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 부흥의 시대는 지났다고 말을 한다. 주일학교도 몇몇 교회만 부흥할 뿐 많은 교회에서 고전을 하고 있고 장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수평 이동만 있을 뿐 새 신자 양육은 극히 적은 수이며 개척교회는 10년이 가도 일어서기가 힘들다고 모두가 교회개척을 꺼리는 형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성도들은 유대교와 로마 황제로부터 모진 박해와 순교를 겪으면서도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부흥되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왜 목숨을 걸어가며 신앙을 지키려고 하였는가? 모진 고통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늘만 바라보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때의 그 고난이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 닥친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당시 그렇게 큰 무리가 아닌 소수집단의 종교였지만 왜 그렇게 많은 핍박을 당해야 했는지 그 박해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어떻게 담대하게 고통을 이길 수 있었는지 연대별로, 또 핍박을 자행한 황제별로 살펴보면서 그 시대의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고자 한다. 그리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라는 말씀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이제 기독교가 핍박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밀라노 칙령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담아보려고 노력하였다.
부족한 글이지만 먼저 이 논문을 준비하는 내가 이들의 신앙을 닮고 싶고, 혹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가 이들의 박해를 기억하며 새로운 믿음을 세워가기를 희망해 본다. 짧은 시간 많은 책을 참고하지 못하고 핵심만 정리를 하였지만 이후에 시간이 되면 좀더 많은 도서를 참고로 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하기로 다짐하며 먼저 박해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려고 두 권의 책을 참고로 하였다. 그리고 박해의 실태에서는 연대별로 그리고 박해를 가한 황제별로 좀 깊이 있게 다뤄 보고자 한다.
Ⅱ. 기독교의 전파 및 형성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으로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며 때로는 언약백성으로서 가까이에서, 때로는 징계를 받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유대 백성들에게 메시야는 참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3년 반의 복음사역을 무시하고 그를 로마 군병들에게 내어주어 십자가에 매어 달았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와 사망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살아 부활·승천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던 복음사역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부활신앙과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재림신앙을 바탕으로 그들은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켰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부활 · 승천했다는 것, 그리고 곧 재림한다는 것 등 몇 가지 그들만의 독특한 신앙을 근거로 유대교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종교 곧 그리스도교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결국 유대교의 핍박을 받으며 행1:8절 말씀처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들은 피난과 전도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때로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복음을 전할 때 3천명, 오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와 또 헬라지역의 각 도시들을 돌며 전도할 때에 전도하는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났다.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헬라지역과 로마제국의 심장부 로마에 까지 성령의 역사는 펼쳐져 갔다.
그러나 로마통치하의 그리스도인들도 로마 황제를 섬기는 로마인들과의 국가관의 차이 등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약 250년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와 순교를 당해야 했다.
Ⅲ. 박해 원인
유대교는 로마의 속지주의 정책에 따라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은 종교였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이 가득한 유대인들은 그들과 타협하지 못하고 지역적인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행18장 2절에는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하는 기록도 있으며 팔레스틴 지역과 유대인들은 요주의 경계대상이었다.
박해의 원인으로 대부분 종교적인 부분에서 유일신을 믿던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서 초래한 것이라고 대부분 이해를 하고 있지만 몇몇 박해는 황제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박해가 가해진 것도 있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박해를 초래한 것 등으로 보아 로마의 박해는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 등이 복합이 되어 일어 난 것이었다.
여기서 박해 원인을 두 사람의 주장을 들어 보고자 한다. 먼저는 1962년판 이 성호 편저 “기독교박해사”의 내용으로, 그리고 하나는 1984년판 김 성태 저 “세계교회사1”를 통해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원인을 적어 보고자 한다.
1. 박해의 원인 사례 1
1) 우연한 원인으로 시작된 박해
우연한 원인이란 말 그대로 아무런 이론적 근거도 없이 다만 오해로 일어난 박해를 말한다. 그 한 예로 로마화재당시의 방화범으로 몰려 박해를 받은 것을 들 수가 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는 시를 읊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황제는 자기가 방화범이라는 소문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범인으로 지목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고올(갈리아: 지금의 프랑스령)의 리옹 및 비엔나의 교회가 튜에테스의 향연과 오디푸스의 골육상간의 죄를 씌워 박해했다는 것이다.
2) 사상의 상위로 온 박해
두 번째 원인으로 즉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받게 된 박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두 가지로 또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사상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 사상에 관한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사회생활의 최고의 목표는 국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를 초월하여 한층 자유로운, 한층 뜻있는 생활을 하려 했다. 즉 인류애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렇듯 입장이 다르면 시회생활의 규칙과 도덕률도 다르게 된다. 이교도는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고 국가를 옹호하는데 지배계급과 다르기에 이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사상 또는 도덕사상이 이렇게 다르다 보니 양자 사이의 충돌과 투쟁이 생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비밀결사의 금지와 함께 온 박해
초대 기독교 시대의 로마황제는 넓은 영토 내에 혁명이나 또는 반 황제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 결사를 금지하고 억압했다. 니코메이나의 사람들이 소방대를 조직하려는 탄원에도 그것이 정치운동이 되지 않을까 겁을 내어 허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가 이러한 정책을 취하고 있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 또는 외부적 각양 필요에 따라 도처에 비밀결사 비슷한 기도처나 예배처를 조직하고 종교생활을 하였으니 황제의 뜻에 거슬려 박해의 구실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4) 종교의 상위에서 온 박해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박해의 원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이었다. 이것은 제 2의 사상의 상위를 가장 구체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종교는 국가신의 예배와 황제 예배 등이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산에서 생겨난 쥬피터를 최고로 하는 신신예배는 로마시대에는 크게 성행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종교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로마 황제는 이들 국가신의 예배를 영토 내의 모든 인종 및 민족에게 강요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배척하고 현세적인 향락을 물리치는 정신에서 국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물론 황제 예배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예배는 제국내의 모든 백성에게 절대적 복종과 충성을 나태내게 하기 위한 수단임에도 거부한다는 것은 박해를 자초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2. 박해의 원인 사례2
로마제국은 법치국가이기에 정부당국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조치를 취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에 대한 국가적 자료는 3세기 중엽까지 없었다.
오히려 박해에 대한 자료는 주로 ‘순교록’이나 ‘순교사’등 기독교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놀랍게도 로마 저술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박해에 대해 침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의 박해는 일반법이 아닌 특별법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 통치자(황제)들이 그리스도교를 부당한 종교로 보고 단속권한을 행사하였는가?
위에서 언급을 하였듯이 초기의 대부분 황제들은 법적 근거 없이 박해를 가하였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이 터툴리안의 국가를 향한 항의이다. 그는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하는 박해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는 부당한 조치였다”고 비난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트라얀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처벌하라는 훈령을 내렸지만 국가가 기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이라면 왜 기소를 하지 않았을까?
1) 유일신과 다신교의 차이
로마제국은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묵인 또는 관용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국가의 이교적 경신예식에 참여하고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 하였다.
그러나 예수만이 하나님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절대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 배척하게 되었고 따라서 로마인들로부터 무신론자로,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 그리스도인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신격화 하거나 그에게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국법을 성실히 준수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어떠한 반 그리스도교적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박해는 간헐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기간과 형태는 각 지방에 따라 달랐다.
특히 2세기의 박해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분화와 같은 것이었다. 로마제국은 자연재해와 패전 등을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국가와 군중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미움을 핍박으로 폭발시켰다.
3) 황제들의 국가적 위기의식
로마제국은 황제의 지위 계승에 관한 법이 없었기 때문에 반란과 궁중음모가 빈번하였고 피정복민족의 반란도 계속되었다. 이에 많은 황제들은 불안해하였고, 반체제적인 집단으로 여겨진 기독교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독교가 번성하면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박해를 가하였다. 특히 2-3세기의 유능한 황제들이 종교를 토대로 하여 국가를 내적으로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을 때 기독교는 그들의 장애가 되었고 국가 존립의 위협이 되었으므로 기독교는 박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요인 등이 상호 관련을 가지고 박해에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나 사회적 배경은 로마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와 상충되는 것이므로 어느 때를 막론하고 발동될 수 있는 기본적 배경이지만 정치적 원인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요인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박해가 특히 10여 명의 황제 때에만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볼 때 기독교 박해의 주된 원인은 ‘로마 제국의 국가적 안정의 실현’이라는 명분에 기초한 정치권력의 안정적 유지라는 측면에서도 하나의 박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Ⅳ. 박해의 실태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박해의 원인에 대해 두 가지 자료를 참고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아 왔는지에 대한 그 실태를 알아보자.
기독교의 박해 실태는 1차, 2차, 3차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리를 해 보았다.
1차 박해는 황제 개인의 감정으로 시작하여 로마와 그 변두리지역 또는 소아시아 일부지방에서 발생했으며, 2차는 지역에 따라 산발적으로 박해가 가해 졌으며 신앙을 부인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3차시기는 제국 전역에서 국가적으로 박해가 가해져 개종금지, 재산몰수, 또는 기독교인 권리정지 및 교회까지 무너뜨렸다.
1. 제 1 차 박해기간(A.D.64-96)
1) 네로 황제(54-68) 박해
로마의 5대 황제 네로는 초기에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으나 장성함에 따라 방종해지고 어머니와 권력 다툼을 하다 결국 어머니를 살해 하고 절친한 친구와 친척까지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 옥토비아도 죽인 후 오토대제의 아내를 정부로 취하였다.
64년 로마에 발생한 대화재 사건의 원인이 네로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자 네로는 소문을 무마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운 후 로마와 로마부근에서 기독교인에게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들에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수에토니우스(syetibius)가 기독교인들이 형벌을 받은 원인을 기술하면서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표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타키투스도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대화재 사건은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 때문에 그의 생모와 아내 ,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가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타기투스의 연대기 , 로마의 클레멘트 <고린도에 보낸 서신 >,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의 설교를 통해서 네로의 잔학성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은 군중들의 희롱과 오락의 대상으로 처형되었다. 이들은 짐승들의 가죽으로 둘러 싸여져서 개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지기도 하고,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하고, 혹은 밤에 빛을 밝히기 위해 횃불대신 불태워 지기도 하였다. 네로는 이러한 구경거리를 위해 자신의 정원을 개방했으며 또한 사유 극장 안에서 이러한 창극을 연출 하였고, 전차병으로 가장하거나 혹은 자기의 전차 안에 타고서 군중들 속으로 휩쓸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장 극형을 받기에 족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모든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야만성을 충족시키는 데에 희생되고 있다는 느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질투와 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가장 위대하고 의로웠던 기둥들이 박해를 받고 기꺼이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우리들의 눈앞에 그 위대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새겨 보자. 베드로는 불의한 질투를 받은 결과 한 들이 아닌 무수한 고난을 겪고, 그를 위해 예비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갔다. 바울 역시 시기와 분쟁에 대해 경건한 인내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일곱 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유배의 길을 떠나기도 했으며, 돌에 맞기도 하였다. 그는 동방과 서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 신앙의 결과 귀족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전 세계에 의를 가르쳤고 서방의 맨 끝에 이르기도 하였다.
...... 이들은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시기의 희생자가 되었음에도 우리들 가운데 용기 있는 본보기를 남겨 주었다. 질투의 결과 여성들도 박해를 받았으니, 각종 잔인하고 추악한 모욕을 견디고 더어체(Dirce)와 다나우스(Danaus)의 딸들과 같은 본보기를 남기고 믿음의 길을 다 달린 후, 영광에 이르러 이들의 육체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고상한 상을 얻게 되었다.”
클레멘트의 글로 보아 베드로와 바울은 같은 시기 즉 네로의 핍박으로 순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바울은 참수 당하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며 오늘날까지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이 로마시의 공동묘지에 남아 있다고 한다.
여기서 클레멘스의 <잡설>의 한 구절을 통해 베드로의 아내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베드로가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것을 볼 때, 아내가 천국으로 소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동시에, 위로하며 격려하기를 “오! 여보! 주님을 기억하여야 하우!”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포악정치를 일삼았던 네로는 결국 민심을 잃고 원로원 및 근위병에게까지 버림을 당하여 로마에서 탈출했으나 살길이 없어 자살하고 말았다.
2) 도미티안 황제 박해(90-96)
도미티안 황제(81-96)는 자기 권력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살아서 자신을 신격화 하였으며 특히 정치 후반(92년 이후)에는 정적들을 살해하며 포학을 더하여 공포정치를 하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네로의 전철을 밝았다. 유세비우스는 네로와 도미티안의 박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고, 또한 터툴리안도 도미티안이 네로와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도미티안은 자신의 아내였던 도미틸라를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집정관이었던 자신의 조카 플라비우스 클렌멘스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아내의 음모에 의해 살해 되었다.
그는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하기도 하였다.
2. 제2차 박해기간(A.D. 98-249)
2차 박해 기간동안에는 박해는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트라얀 황제(98-117)치하의 박해
트라얀 황제의 재위 기간 중에는 로마제국을 최대의 판도를 자랑할 만큼 커졌다. 그는 내정에도 힘쓰고 구빈제도도 확충했으나 그도 기독교 박해자로 가담했다.
트라얀 황제의 칙령에서는 네로와 같이 임의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칙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셋째는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는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지만 여러 지방에서 부분적인 박해가 있었다.
터툴리안의 변증을 인용하면
“실제로 우리를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 되었다. 이 지방의 총독으로서 과거 몇몇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고 그들의 직위를 박탈했던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그들의 수효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방침을 추구해야 하는지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인들에게서는 희생 제사를 드리려 하지 않는 것 외에는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트라얀 황제에게 보고했다. 또 기독교인들은 이침 해가 뜰 때 일어나 신께 하듯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하며 자신들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간음, 살인, 속임수, 사기, 및 그와 유사한 모든 죄를 금지한다고도 했다. 트라얀은 이 서신에 대한 답신에서 더 이상 기독교인들을 수색하지 말되 그들이 자진해서 출두했을 때에는 처형하라고 기록했다.”
이때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하였고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도 황제가 주님이라 고백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회유를 거부하고 영광스런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
4) 하드리안(117-138) 통치의 박해
하드리안은 125년경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하드라인의 칙령은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근거 없는 모함을 받는 것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합당한 법적 절차가 있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며, 그 재판도 분명한 증인과 증거들이 확보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1) 치하의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황제로서 “명상록‘의 저자이며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백성을 사랑하며 포기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하였으며 국가의 재해나 질병의 원인을 기독교인 때문이라고 하여 교인들을 잡아들이고 고문을 가하여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이 박해로 인해 게르마니투스라는 독실한 청년이 순교했다. 지방 총독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게르마니투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어 마침내 이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레릴우스 황제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그는 기도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대수롭지 않은 사람,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 그리고 전 세계의 보편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폴리갑을 나귀에 태워 서머나 시로 데려 갔으니 그날은 큰 안식일이었다. 폴리갑을 맞은 평화의 왕 헤롯과 그의 부친 니세테스는 폴리갑을 자기의 마차에 태운 뒤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황제를 신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제사를 지내서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해로운 일이냐’고 말했다. 폴리갑은 처음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끈질기게 권면하므로 그는 ‘나는 당신들의 충고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총독은 그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 풀어 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비난하십시오.’ 라고 졸라댔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임금님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장착되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어 주님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그가 아멘으로 기도를 마친 뒤 집행인들은 불을 붙였다.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을 때 우리는 기적을 보았다.“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이후 250년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느니, 근친상간을 한다느니, 성찬과 애찬을 통해 “거룩한 키스”로 인사하는 것을 ‘이성을 범한다’는 등으로 오해를 하였다.
6)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시대의 박해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 할 때는 도처에 있는 모든 교회내에서 신앙의 용사들은 훌륭한 증거를 나타내었다. 특히 그러한 용사들은 알렉산더에 많았다. 이집트와 테바이(더베) 출신의 영웅적인 용사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경기장인 알렉산드리아까지 호송되어와 갖은 고문과 여러 형태의 죽음을 큰 인내로서 감당하여 하늘의 면류관을 받았다. 이들 중의 한사람은 에레오니데스는 오리겐의 아버지였다.
당시 오리겐의 아버지의 순교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당시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오리겐은 영혼의 순교에 대한 사랑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 그의 아버지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완전히 순교자가 되고픈 갈망에 휩싸인 것을 본 어머니는 그를 집에 붙잡아 두기 위해 그의 옷을 감추었다. 그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알고 나서는 자신의 열정을 부친에게 순교에 관한 격려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나타냈다. 그는 편지에서 아버지를 격려하며 ‘우리 때문에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조심 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오리겐의 통찰력과 종교에 대한 순수한 헌신 정신의 첫 번째 본보기 이다“.
그리고 교부 이레니우스도 순교를 당하였으며 아프리카 칼타고에서 페루페투아와 펠리키타스라는 여인의 순교도 유명하다. 이 두 여인은 노예였는데 맹수들이 들꿇는 원형경기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기독교의 위대함을 온 천하에 증거 하였다.
7) 막시미누스 트락스(235-238) 치하의 박해
알렉산더 황제 13년 통치 후 후임으로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는 농민출신의 병졸 출신으로서 많은 신자로 구성된 알렉산더의 가문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으로 박해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복음의 진리를 교사하는 인물이며 행위자인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시기에 오리겐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했으며 박해로 위험에 직면해 있던 암브로스와 가이사랴의 장로 프로톡테투스에게 헌정했다.
막시미누스 통치 3년 후에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이후 평화가 잠시 도래하였다. 박해가 중단된 기간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 3세기 50년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공동체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면서 3차 박해가 시작되었다.
3. 제3차 박해기간(A.D.249-313)
제 3차 박해기간 동안에는 부분적으로 일어난 2차 박해와는 달리 제국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중에서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 내에 국가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 존재라는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로마 신들이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 벌이라는 견해를 들 수 있다.
8) 데시우스(249-251)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군대에 의해 황제에 추대된 데시우스는 로마제국의 회복을 위해 힘썼으나 기독교를 유해한 것으로 보고 조직적으로 제국전역에 처음으로 박해한 대표적인 황제라고 유세비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쇠퇴해졌다고 박해를 가했다.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 황제 아래서의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모든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 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를 발급하였다.
데시우스의 명령 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때 로마 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했다. 그러나 데시우스의 극심한 박해는 다행히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을 통치한 뒤 2년이 못되어 고트족과의 전투 중 아들들과 함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데시우스의 전사 후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지만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갈루스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2년이 채 못 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이 황제가 되었다. 이시기에 오리겐이 70세로 사망했다.
9) 발레리안(257-260) 황제의 박해와 갈리에누스 황제 시대의 번영
갈루스가 2년이 못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은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에 대한 발레리안의 태도는 이례적일 만큼 우호적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통치 말엽 257년부터 그도 역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인 모임을 갖는 것과 이들의 묘지(카타쿰)에의 출입을 금지하는 칙령이 발표 되었다. 258년에는 기독교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 하는 칙령이 발표 되었다. 성직자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사형에 처해 졌으며 원로원 의원들과 귀족들은 그들의 직위가 박탈당하고 귀족출신의 부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 되었으며 황실에서 일하던 사무원들과 종복들은 황실 직유지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안이 페르시야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죽고 갈리에누스 홀로 제국의 황위를 승계하였다. 그는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고 박해를 억제하여 말씀의 사역자들이 자유로이 직무를 수행해도 좋다는 칙령을 발표한 후 43년간 평화가 따랐다.
이 기간은 전에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기독교는 성장했으며, 아름다운 교회가 건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고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경제, 군사, 사회적 조직이 놀랍게 발전했다.
갈리에누스 황제의 칙령의 내용을 소개하면
“푸불르우스, 리시니우스, 갈리에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투스 황제는 디오니시우스와 핀나와 데메트리우스와 여러 감독들에게 명령한다. 나에게 주어진 특권에 따라 나는 온 세상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도록 명한다. 즉 모든 신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은신처를 떠나도 좋다. 그리고 당신들도 괴롭히지 못하게 하라. 지금 당신들에게 허용된 이 자유는 이미 오래전에 내가 허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의 최고 경영을 맡고 있는 아우렐리우스 시레니우스는 내가 보낸 칙령을 준수할 것이다.”
10) 디오클레티안(284-305) 황제 박해
데시우스와 발레리안의 시대가 지난 뒤 이미 권력을 획득하고 있었던 디오클레티안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는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초기 19년 동안은 박해를 하지 않아 교회는 매우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동방의 부제였던 갈레이우스의 말을 받아들여 박해를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안은 4회에 걸쳐 칙령을 발하며 ‘가장 길고 무시한 박해’를 하였다.
이것이 재위 19년 AD303년 에 시작된 최후의 박해이다.
이 칙령들은 연차적으로 내려 졌다. 이 칙령들을 살펴보면
1. 예배당을 파괴하고 성경을 불태워 버리며 공직이 주어져 있는 크리스챤이 있으면, 국가 신에게 공물을 드리게 하여, 만일 그 일을 거절하면 그 공직을 박탈하고 그보다 하급인으로부터는 그 자유권을 빼앗을 것
2. 교회의 감독 및 사제 그리고 장로 또는 집사를 투옥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강제적으로 신신에게 공물을 드리게 할 것.
3. 제일에 감옥의 문을 열어, 신신에게 공물을 드리는 크리스챤은 석방하고, 이것을 거부하는 자는 고문에 붙일 것.
4. 제국의 모든 인민에게 국가 신을 예배케 하고, 또 공물을 드리게 할 것.
위와 같은 칙령은 26,7년간 평화로운 동안 성장하던 교회에게 미친 영향은 너무나 컸다.
한편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박해의 책임을 일부는 그리스도의 타락 및 교권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다. 평화가 계속되면 종교적 신념이 둔해지고 신앙의 불이 쇠약해져 불미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 것 같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다.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 훌륭한 가문 출신이며 직위도 존경을 받던 사람이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하여’ 나붙은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내 버렸다. 그 일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며 ‘대담한 행동’을 한 그 사람은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박해의 실상을 적어 보고자 한다.
“박해가 시작되자 막대한 수의 감독들은 정신이 빠진 사람 모양으로 허둥거리다가 비겁하게도 최초의 일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막대한 수의 신자는 굳은 결심으로서 가장 두려운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견디어 냈다. 채찍에 맞은 자, 고문당하는 자, 가장 두려운 죽음을 참는 자, 반죽음의 악형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는 자 등등, 용감한 신자도 무수히 많았다. .......
베드로라는 조신은 황제의 신신 앞에 공물 드리기를 거부하자 의복을 벗기고 높은 곳에 달아 올린 후 전신에 무수한 매를 맞았다. 그의 뼈는 살 속에서 노출이 되었다.
고문하는 사람은 이번에는 초에 소금을 혼합하여 몸의 찢어진 부분에 부어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문에도 견디었다. 이번에는 화로와 불을 가지고 와서 그의 살점을 마치 구어 먹기 위하여 오려 내는 듯 조금씩 베어 불에 던졌다. .......“
위의 2차 포고가 각처의 감독 및 직분자들을 투옥하라는 포고가 내려지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도처에 투옥되었다. 이전에 살인자나 최악의 조인들을 가두던 토굴 옥은 감독과 장로와 집사, 및 성경 낭독인, 또는 사귀 쫓는 자 등으로 채워졌다. 그 때문에 뒤이어 오는 사람들은 둘 곳이 없어졌다. 제2, 제3의 포고가 내려지자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도시인 모리타니아 및 이집트 또는 더베등에서 무수한 순교자들이 속출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 및 지방으로 찾아가 훌륭하게 순교하여 우명하게 되었다. 포에니키아에서 순교한 이집트인들은 세차게 채찍을 맞은 후 뜨겁게 단 무쇠로 낙인이 찍하고 드디어는 성난 표범, 곰, 산돼지, 황소 등의 밥으로 던진바 되었다.
경건한 전사들은 야수들을 격노케 하여 자기들에게 덤벼들게 하려고 명함 받은 대로 벌거숭이가 된 몸으로 서서 야수들을 손바닥으로 치며 덤벼들었으나 야수들은 그들의 몸에 손대려 하지 않으려니와 가까이 하려 하지도 않고 어떤 거룩한 힘에 의해 격퇴나 된 듯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참형되고 바다에 던진바 되었다. .......
조국에서 순교한 이집트인들도 숭고한 최후를 맞았다. 수천이라는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들이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나머지...... 그들 중에는 사형집행인에게 자진하여 나아가 목을 내민 자도 있고 머리를 아래로 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으며 아사하기까지 그 위에 버려둔바 된 사람도 있었다.
더베의 순교자들이 받은 고난과 형벌은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다 할 수 없는 정도이다. 그들은 갈구리로가 아니라 조개껍질로 살을 도려냄으로서 살해 되었다. 여인들은 한 다리를 꺽이고 옷을 벗기운 후 벗은 몸 그대로 높은 곳에 달리워 구경거리가 되었다. .........법정에서는 선고가 신자들에게 내려지기가 무섭게 다른 신자들이 재판관 앞으로 달려 나와 자기도 그리스도인임을 용감한 태도로 고백했다. 그리고 기쁨으로서 최후의 죽음의 선고를 받아 드렸다. ......
몇 가지 고문을 요약하면 온몸을 못 판에 굴리운 바 되기도 하고, 높은 곳에 매어 달렸으며, 아라비아에서는 손도끼로 타살되었으며, 수족을 잘린 자도 있으며, 세차게 불타지 않는 화로 위에서 불고기처럼 되어 괴롭게 살해 되는 신자도 있었으며, 폰투스에서는 손톱 밑에 갈대를 박힌 자도 있었으며, 불에 용해된 납으로 등에 부은바 되는 신자도 있었으며, 눈을 뽑힌 자, 다리 하나를 꺽어 버린 자,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된 교인 등 실로 말로 담을 수 없는 방법으로 많은 사람이 고문과 학대와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는 305년 황제 직을 사임한 후 잠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1) 갈레리우스(305-311) 황제 박해
디오클레티안의 사위 갈레리우스는 로마제국 동부의 부황제(305-311)가 되고 뒤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어 박해를 가하였다. 사정없이 교회를 핍박하던 갈레리우스는 황제 즉위 후 중병(309)을 얻으면서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는 종양이 생기며, 창자 속이 곪게 되었으며 그의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나게 되었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다. 드디어 갈레리우스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311년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관용의 칙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관용의 칙령가운데에는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미신행위가 아니며 불법종교가 아님을 밝혔으며 기독교인들은 서둘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갈레리우스의 황제를 기점으로 박해는 약간 완화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와서이다.
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공인
1)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280년대에 로마군대 장교인 콘스탄시우스 클로루스와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헬레나는 여인숙 주인으로서 콘스탄시우스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 아내는 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속주의 주민들과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법 때문이었다. 306년 콘스탄시우스가 요크에서 사망하자 군대 지도자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지방과 브리탄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서 310년 에스파니아를 정복하여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을 대부분 지배하였다.
당시 로마 서부지역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시우스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를 하였고 동부지역은 리치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서부지역의 막센시우스를 제거하고 유일한 서부의 통치자가 되기 위하여 동부의 리치니우스와 동맹을 맺었고 막센시우스도 같은 목적으로 막시미누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동맹은 지리적 환경과 기독교에 대한 정책에 의해 결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부친의 정책을 따라 관용정책을 시행하였고 예배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2)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동부의 동맹자 리치니우스에게 자기의 동생을 아내로 주어 지지를 얻은 후 서부의 경쟁자 막센시우스를 ‘서부의 폭군’으로 규정하고 주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출정하였다. 그는 알프스산을 넘어 저항군대를 격퇴시키며 로마로 진격하여 갔지만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오 다리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 쳤을 때 그는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전투전에 꿈을 통하여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군대는 기독교 신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이에 그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승전을 기독교의 위력과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을 증거로 보았다. 밀비오 다리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서부 유럽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312년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를 최고통치자로 영접하였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하였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의 신을 보호 신으로 공경하기 시작했으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었다. 밀비오 다리의 승리를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친구였던 유세비우스에게 들려주자 유세비우스는 황제 사망 후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책을 내어 놓았다.
3) 국교의 성립
밀비오 전투 승리 후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자기의 누이동생 콘스탄시아와 동부지역의 황제 중 한사람인 리치니우스와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황제는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동부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내의 여러 종교들에게 부여된 기존권을 기독교에게도 승인하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동부지역의 또 다른 황제인 막시미누스는 기독교 박해자로서 이 포고령을 수행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리치니우스는 313년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막시미누스와 싸워 승리한 결과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6월 니코메니아에서 밀라노 칙령을 시행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여기에 황제의 포고령을 부분 부분 옮겨 보고자 한다.
“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종교의 자유를 부인해서 안 되며 각 사람에게 자신의 결정에 따라 거룩한 의무를 수행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일에 대한 것을 먼저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인과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원하는 신앙 양식을 좇을 것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올바른 의도를 갖고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뜻을 명령하는 바이다. ........ 또한 우리는 기독교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모이던 장소들을 다른 사람이나 국가로부터 사 들였다면 아무런 대가나 돈을 받지 말고 조금도 지체 하지 말고 돌려주어야 한다. ......이미 우리가 많은 일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같은 우리의 관용과 명령을 문서로 기록하여 공포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리며, 그리하여 이같은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알지 못하는 한 사람도 없게 하라.“
서부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와 신자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자기군대의 군기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뜻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는 재위기간 기독교에 물질적, 법적 특혜를 베풀었는데 313년 그는 로마주교 즉 로마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부하여 후에 이곳에 콘스탄티누스 대성전이 건립되게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시대에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 무덤성당, 베들레헴 예수탄생성당등이 건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게는 호의적인 법적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교도에게는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서 기독교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324년 동부지역의 황제인 리치니우스가 반기독교정책을 실시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소폴리스에서 리치니우스를 격퇴시키고 전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에 따라 기독교 역시 로마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사생활에서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공언하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임종직전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입기를 거부하고 영세복인 흰옷을 입은 채 세상을 떠났다.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제13의 사도”와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도 부친을 따라 기독교 우호정책을 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이복형제의 아들 율리아누스시대에는 기독교 신앙의 거부로 주춤했으나 그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때 ‘니케아 공의회 신조가 담긴 정통교리’가 확인되었고 정교일치 정책으로 명실 공히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Ⅵ. 결론
1907년의 부흥을 2007년에도 다시 일으켜 보자는 신념 아래 많은 성도들과 교계지도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왜 우리는 로마의 핍박 속에서 성장한 초대 교회와 같이, 1907년의 평양 대 부흥과 같은 ‘부흥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 왜 그런 부흥은 다시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지을까?
물론 여기서 답을 제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초대 교회와 같이, 평양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 있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순교의 열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에 핍박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먼저 순교하려고 재판장 앞으로 달려 갈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서, 참고 서적을 읽으면서 ‘사람이 이렇게도 할 수 있는가?’ 싶은 마음도 들었으며 또한 이러한 고문과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분을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 순교의 면류관에 대한 소망”으로 굳건히 이겨낸 선진들의 신앙에 대해 단순한 박수나 찬사로는 도저히 용납될 것 같지가 않다.
다만 이러한 믿음에 보답하는 길은 그들의 믿음과 순교, 희생정신을 본받아서 나 또한 이러한 믿음을 가지며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아니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도들과 후배들에게 전하며 보여주는 것이 그분들의 희생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이성호 편저, 『기독교 박해사』, 혜문사, 1962.
김성태 저,『세계교회사Ⅰ』,성바오로출판사, 1990.
F.F. 브루스 저, 서영일역, 『초대교회역사』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엄성옥 역,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도서출판 은성, 1995.
심창섭,『기독교 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8.
김영재 저, 『기독교 교회사』이레서원, 2000.
-대신대학교신학대학원 1학년 초대교회사 소논문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