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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선생의 소리와 삶
-박호민 / 시인
2003년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우리의 판소리를 ‘인류 구전ㆍ무형 유산 걸작’에 선정했다.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 걸작이란, 소멸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독창적인 구전 · 무형 유산을 선정해 그 나라 정부와 각종 단체들이 이를 지원하도록 하는 제도다. 걸작에 선정된 나라는 유네스코에 보조금과 전문가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걸작에 뽑힌 데 이어 두 번째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은 셈이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소리를 돌아보면서 판소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고(故) 김연수 선생(1907∼1974)의 소리와 삶을 잠시만 따라가 보고자 한다.
한학 공부와 판소리 입문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명창은 1907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의 적대봉 기슭에서 태어났다.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하고 고흥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귀향하여 축음기 음반을 들으면서 판소리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지식인 출신의 소리꾼이라고 하겠는데, 하지만 「판소리 답사기행」(1994년, 민예원)을 쓴 이규섭에 의하면 중동중학교에는 그의 학적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한학을 공부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와 소리 공부를 같이 했던 노회상(1908~1955)의 부친 노연수(魯淵洙)에게서 9년 동안 한학을 배웠던 것이다. 노연수는 지방 과시(科試)를 거친 사람으로 고흥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한학자였다.
일반적으로 동초 선생이 지식인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1967년 발행한 「창본 춘향가」에서 스스로 밝힌 자필 이력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러나 우리나라 판소리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예술 세계를 살필 때 그런 공식적인 사실들만으로는 그의 예술적 바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그간의 여러 증언들과 이미 나와 있는 답사기 등을 참고하여 선생의 소리꾼으로서의 생애와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동초 선생은 대대로 내려온 당골네(무당) 집안 출신이었다. 이런 점은 다른 대부분의 소리꾼이나 국악 명인들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그는 ‘비개비’가 아니라 ‘개비’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국악계에서 개비가 아닌 지식인 출신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는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이 거의 유일하다. 동초 선생보다 3살 아래로 금산 면장을 지냈으며 동초 선생의 묘비를 쓴 김영우(金永禹)씨는 이러한 그의 가계를 정확히 증언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세습무(世襲巫) 집안 출신은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는데, 동초 선생의 일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 김순심은 이런 신분적인 조롱을 견디지 못하고 보통학교 3학년 때 중퇴를 했다고 한다. 동초 선생은 어려서 형제들이 조롱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면 강하게 이를 응징함으로써 ‘차돌마치’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질이 굳세고 고집이 센 그의 평생 기질이 된 것은 아닐까 한다.
선생이 한학공부에 몰두한 것도 이러한 출신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로써는 천대받고 푸대접받는 국악계에는 아예 발을 담그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서당에 나가 한학을 공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핏속에 흐르는 예술적 끼는 그도 끝내 거부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24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도 결국 판소리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다른 일반적인 가객들과는 달리, 한학 및 신학문을 습득한 후에 판소리에 입문한 그는 아주 드물고 개성적인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된다.
동초 선생이 여러 스승들을 통해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하기 이전에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였는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축음기 음반을 통해 소리를 익히고, 가끔 협률사 공연이 오면 그들을 찾아가 독공한 소리를 평가받았다는 정도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2003년)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어전리 평지마을의 선참봉(선낙훈) 댁에서 기거하며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선참봉은 금산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는데 동초 선생은 친구인 노회상과 함께 선참봉의 후원을 받으며 소리 공부에 매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명창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후원자와 소리꾼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선생의 연보를 보면,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 송만갑에게서 ‘흥보가’와 ‘심청가’, 그리고 정정렬에게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사사해 2년 만에 판소리 5바탕을 모두 수득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아무튼 정응민에게서 보성소리를 배웠던 사실이 누락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단순히 누구에게서 배웠다는 것만으로 그의 판소리 계보를 특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연보 등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악협회 전남지부장인 정홍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유성준에게서 배우기 전에 고흥의 유명한 당골네였던 오성삼(吳聖三)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오성삼은 도양읍 녹동에 ‘청루’라는 국악학습소를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동초 선생은 친구인 노회상과 함께 여기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오성삼(포두면 장수리)의 제자로는 송이종(두원면 성두리), 신일수(과역면), 김윤길 · 김원길(도양읍), 김광열(도화면 신호리)과 김연수(금산면) 등이 있었는데 이 중 김윤길 · 김원길 형제는 동초 선생의 처남들이기도 하다. 또 송이종은 북 솜씨가 뛰어나 동초 선생의 지정고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특히 오성삼은 김창환, 송만갑 등 5명창의 북 반주를 맡았던 고수로써 판소리 고법(鼓法)의 체계를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동초 선생은 이러한 세습무의 개비 출신들과의 교류와 연망을 통해 국악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오성삼의 영향 아래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오성삼은 진양을 24박으로 하는 고법을 수립하였는데, 나중에 동초 선생이 진양을 24박으로 고정시키면서 “진양을 24박으로 짜지 않는 것은 소리가 아니다”고 한 것만 보아도 그의 판소리 이론은 오성삼의 이론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초제의 창시
동초 선생은 1930년대 초 여러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점만 골라 새로운 판소리를 창시하고 자신의 호를 따서 이를 동초제(東超制)라 불렀다. 장단이 빠르며 발림이 적은 동편제의 우람함과 장단이 느리고 발림이 많은 서편제의 아련함을 적절하게 아우르는 동초제는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설, 정교한 너름새(동작), 다양한 부침새(장단), 확실한 가사 전달 등 맺고 끊음이 분명함을 특징으로 한다.
선생은 원래 유파의 구분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유파와 상관없이 좋은 대목들을 가져다가 새로운 판소리를 만든 것이 바로 동초제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수궁가의 전승계보는 송우룡-유성준-정광수ㆍ박초월로 이어지는 바디와 송우룡-송만갑-박봉래-박봉술로 이어지는 바디, 그리고 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ㆍ조상현으로 이어지는 바디가 있는데, 동초는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를 전수받은 다음 여기에 자신의 특징을 새롭게 더해 새로운 판을 짜서 오정숙-이주완ㆍ민소완을 통한 수궁가의 동초제 바디를 전승시켰던 것이다.
동초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춘향가’를 들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정정렬로부터 전수 받은 후 자신의 창작을 가미해 전판을 새로 짠 것이다. 이렇듯 동초제 판소리는 사설에 오자낙서가 없고, 정황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며 창곡의 구성 역시 치밀하게 계산되어 짜여진 바디로 유명하다.
동초제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제자인 오정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생님이 가장 강조하신 것은 발음을 정확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긴 음과 짧은 음의 구별을 엄격히 하라고 하셨고, 아니리와 발림을 이면(정황)에 맞게 하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연극인들이 감탄할 정도로 연기를 잘하셨다. 선생님의 소리는 언제 불러도 거의 어김이 없는 불변의 소리다. 오랫동안 연구하고 다듬은 소리를 상자 안에 딱 넣어서 뚜껑 덮어 가만히 넣어둔 형이다. 선생님은 흐트러진 것을 싫어하셨다. 연필 하나라도 늘 같은 위치에 놓여 있어야지 조금이라도 제 위치에 있지 않으면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러니 사설에 조금이라도 오자가 있으면 그냥 넘어 가실 리 없었다. 선생님의 소리제는 붙임새가 오묘하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선생이 새로 짠 동초제 판소리를 보석으로 비유하면서 할수록 묘미가 더하는 바디라는 것이다.
창극 활동을 통한 판소리의 연극성 강조
창극은 중국의 경극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공연 형태로, 연극처럼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각기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면서 판소리를 부르는 연극적 판소리이다. 우리나라의 창극은 1900년대에 원각사 등의 신식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기 시작했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대 시설이나 연출 면에서나 제대로 된 창극의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무대를 화려하게 꾸민 신파극 등이 이 땅에 들어와 유행하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국악계에서는 그에 맞서 창극 무대도 화려하게 꾸며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조선성악연구회’가 생겨나면서부터 참다운 창극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무대 시설을 세우고, 여러 명창들이 한데 모여 연습을 하기 위한 조직으로써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고 이를 통해 창극의 활성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동초 선생은 1937년 이 조선성악연구회 이사로 취임하고 이 연구회에서 직영하는 `조선창극좌' 대표로, 39년에는 `조선창극단' 대표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창극은 예술적,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거기에는 창극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정정렬의 공이 컸다. 정정렬은 창극에 필요한 소리를 직접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단원들에게 연기 지도를 하였고 직접 연출까지 했던 창극의 귀재였다고 한다. 정정렬이 타계한 후에는 정남희가 잠시 창극단을 이끌었으나, 해방 후 그가 월북하자 동초 선생이 그 뒤를 이어 창극 운동을 주도했다.
동초 선생은 1945년 <김연수 창극단>, 1950년엔 <우리 국악단>을 결성하여 그의 창극이론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선생은 흔히 말하는 ‘창극 판소리’의 새로운 창법을 세우기 시작하여 판소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반발이 뒤따랐고 특히 명창 ‘임방울’과는 그 견해 차이로 인하여 늘 불편한 관계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동초 선생은 새로운 시대에 판소리가 부응하자면 창극 판소리로 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 여류 명창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여성들로만 꾸며진 창극인 ‘여성국극’도 생겨났다. 이렇듯 당시의 국악 활동은 순수 판소리를 고집하던 임방울, 정응민, 박봉술, 신영채 등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창극과 국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창극과 신파극 등의 성행 속에서 전통 판소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에따라 창극이 크게 성행한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은 옛 소리제를 바탕소리로 익히려 하는 이가 드물었고, 창극을 위한 토막소리 몇 대목만 배우는 것으로 소리공부를 다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처럼 창극은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모태인 판소리를 쇠퇴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제 살을 깎아먹는 일이었다. 전통적 판소리의 저변이 점점 사라져가는 토양 위에서는 결국 창극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는 16개 단체가 난립하다가 해방 이후에는 점차 시류에서 밀려나면서 모든 단체들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다가 1962년 <국립창극단>이 생긴 이후에야 겨우 안정된 자리를 잡게 되는데, 국립창극단의 창립에 있어서도 동초 선생의 공이 가장 컸다. 동초 선생이 1930∼50년대에 창극 활동을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고 얻어낸 결실이 바로 국립창극단이었던 것이다. 90년대 이후 현대의 창극은 안숙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판소리 사설의 재정립과 현대화
동초 선생은 대한국악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는 등 60년대까지 국악계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판소리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판소리는 서양음악처럼 일정한 악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이 제자에게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예술이다. 달리 말하면 스승과 제자 자신이 악보나 다름없는 육보식(肉譜式) 교수법인 것이다. 이런 전승의 최대 단점은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설의 누락과 와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일찍이 이런 단점을 느낀 신재효가 사설을 정리한 바 있으나, 그 이후로는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학문적 소양이 없는 개비 출신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판소리 사설은 전승되는 계보에 따라 극심한 누락과 와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동초 선생이 춘향가 · 심청가 · 홍보가 · 수궁가 ·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의 사설을 재정립한 것은 신재효에 버금가는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사설에 일일이 장단을 붙이고 발성까지 지도한 것은 후학들의 판소리 입문을 크게 도운 것으로 평가되며, 일찍이 선생이 동초제를 창시한 것도 이러한 정확한 사설의 전승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즉 선생은 기존의 판소리 사설을 면밀히 연구하여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사설 대목들을 재정리함으로써 사설의 서사적 합리성을 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수궁가에서 짐승(별주부와 토끼)끼리는 사람의 말을 빌어 얘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겠으나, 짐승과 사람이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이런 대목들을 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문학이 상상력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개작은 너무 지나친 느낌이다. 아무튼 이런 예는 사설 재정립에 대한 선생의 태도와 방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동초 선생이 활동한 20세기 중 · 후반은 흔히 판소리의 부흥기라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전승력이 위축된 시기이기도 했다. 선생이 판소리의 사설과 연극성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전승력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바디의 판소리 생산이 전혀 없는 토양에서 동초제 판소리는 전승 자원을 풍부하게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음반활동
동초 선생은 1937년에 빅타 음반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어 이후 3년간 음반을 취입했고 1940년에 오케이 음반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였다. 선생은 1964년 인간문화재로 인정받고 나서 박록주, 김여란, 정광수, 박초월, 김소희와 함께 문화재관리국에 문화재 보존용으로 춘향가를 녹음하였다. 1966년에는 지구레코드사에서 판소리 다섯바탕 눈대목 음반을 취입하였고, 1967년에는 동아방송국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녹음하였다. 1968년에는 케네디레코드사에서 제작된 단가집 음반(지구레코드 재발매)에 <사철가>와 <백구가>를 녹음했고, 같은 해에 지구레코드사에서 박록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장영찬 등과 함께 창극 춘향전 음반을 녹음했다.
특히 동아방송에서 1967년부터 시작한 판소리 5바탕 전판을 녹음하여 140여회에 걸쳐 연속 방송한 것은 초인적이며 기록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면면히 이어지는 동초 소리
동초 선생은 매사에 철두철미했다고 한다. 그런 성품 탓에 그에게는 불분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확실한 사설, 확실한 발음을 추구했고 그가 생각했던 확실한 창본을 정리해 나갔다. 또한 선생은 자유분방했던 옛 판소리를 근대 청중의 취향에 맞게 개작하여 정형화시켰다. 그리하여 정형화된 소리(동초제)를 갈고 닦아 거의 실수 없이 사설의 감동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것은 판소리의 음악성만이 아니라 이야기적인 측면과 연극적 특성을 아울러 강조한 선생의 판소리관(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오늘날 동초제는 다른 소리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동초 선생은 동시대에 이름을 날린 임방울 명창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임방울은 판소리의 ‘음악성’을 강조한 반면 선생은 ‘문학성(사설)’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사설 재정립 과정에서 임방울 명창과 의견 대립이 팽팽하여 자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는 얘기는, 두 사람의 음악적 지향이 뚜렷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임방울의 소리는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반면에 동초의 소리는 식자층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대다수 대중들에게 한문투의 사설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고 임방울이 즉흥적으로 퍼부어대는 현란한 목청에 모두 넋을 잃었다. 그러나 식자층의 입장에서는 한문에 자신이 없는 임방울이 사설을 간혹 얼버무리는 것을 보고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초 선생은 너무 사설을 앞세워 소리의 생명력을 잃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즉흥성과 감성을 앞세운 임방울의 소리제는 정형화 되지 못한 탓에 전승이 끊어지고 말았고, 치밀한 계산과 사설을 앞세운 동초제는 정형화에 성공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가장 인기 있는 소리제로 자리 잡았다.
동초기념관 건립 추진
동초 선생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74년 3월 9일, 선생은 판소리 다섯 바탕 창본을 정리하는데 힘쓰다가 창본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간암으로 타계하였다. 그동안 선생의 문하에는 오정숙, 박봉선, 정권진, 김소희, 박동진, 김성수, 김동준, 성운선, 박송희, 강종철, 성순종, 홍정택, 성창순, 송순섭, 강정자, 남해성, 김수연, 박계향, 윤석기 등 수많은 소리꾼들이 거쳐갔는데, 이 가운데 오정숙 만이 선생의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전수받고 1982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김연수제 춘향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 받았다.
동초 선생은 타고난 목이 나빠 소리가 거칠었고, 고음을 잘 구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인 오정숙은 목이 좋아 맑은 소리에 고음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오늘날 동초제 판소리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오정숙이라는 뛰어난 소리꾼이 선생의 소리를 창조적으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1962년 14살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동초 선생의 문하에 들어간 오정숙. 그는 향리인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315번지에 스승의 아호를 따서 ‘동초각’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고 있으며 1997년 ‘사단법인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를 결성하여 동초제의 맥을 면면히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의 활동으로는 지난 2006년 3월 9일, 동초 선생의 서거 32주년을 맞아 고흥종합문화회관에서 '동초제판소리보존회 고흥지부' 주최로 ‘동초국악제’를 열었으며, 같은 날 선생의 고향인 금산에서 추모제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오정숙을 주축으로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여 선생의 고향인 고흥 땅에 ‘동초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선생이 와병 중일 때 한번은 그의 지정고수였던 이정업(李正業)이 찾아와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이에 선생은, ‘내 저승가면 자네를 빨리 불러옴세’ 하였다. ‘나는 저승가기 싫어’라고 대답하자 선생은 혼자말로 ‘저승가면 누가 반주허지?’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정업 역시 열흘 뒤에 선생을 뒤따라 타계하고 말았으니, 저승에서의 선생의 반주를 걱정했음인가. 아마 그들은 지금도 함께 소리하고 북을 치며 소리판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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