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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방비엥/루앙프라방 여행기.
버스는 라오스 국경 농카이(Nong Khiaw) 인근의 어느 휴게소에 정차를 하였다. 휴게소 뒤편으로는 메콩강이 있었다. 새벽, 어슴푸레한 빛이 강물을 비추는 풍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각각의 탑승객들의 라오스 행선지에 맞는 버스 티켓을 나누어 주고, 출입국 카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동이 터올 무렵 드디어 농카이에 있는 태국과 라오스 국경에 도착하였다. 이전까지는 농카이를 그냥 치앙콩(훼이싸이와 마주보고 있는 북부국경)처럼 국경의 이름처럼 떠올리던 이름이다. 국경 도시 농카이를 지나고 출입국 수속 절차를 밟느라 잠시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쐬기도 하였다. 인구 3만 정도의 작은 도시 농카이는 메콩 강변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이면서 방콕에서 출발하는 철도 종착지이며 방콕과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작은 시골 같은 농카이를 출발한 버스는 20분만에 태국 국경에 도착해서 여권 검사소에 여권을 제출하니까 여권에 붙어있던 출국카드를 떼고는 여권에 출국 도장 하나를 쾅 찍고 다시 돌려준다. 얼굴은 보지도 않는다. 태국측 국경 검사소를 넘어가면 셔틀버스 표 판매대와 대기석이 있다.
모든 행정 수속이 마무리 되자 버스는 다시 출발을 하였고, 2~3분 더 가서 라오스 국경에 도착했다. 그렇게 셔틀버스를 타고(20밧) 5분 여 동안 우정의 다리(Thai - Lao Friendship Bridge)] 2km를 지나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라오스 출입국 관리소가 있다. 셔틀버스는 그것으로 운행이 끝이기 때문에 짐을 다 가지고 내려야 한다. 많은 서양인들이 긴 줄을 서서 Tai-Laos 우정의 다리를 넘는 동안 입출국 심사를 하였다. 우리는 한국인이라 무비자 15일이 가능하여 무사통과란다. 얼굴 한번 쓰윽 쳐다보고 여권사진과 대조해 본 후, 여권을 전산 조회한 후에 도장 꽝 찍으니까 끝나버렸다. 대신 입출국비용(1인당 9000kip)만 내면 된다.
입출국서류는 여행 끝날 때까지 잘 간직해야 한다. 입국장에 환전소가 있어 라오스 kip(1$≒8040kip, 약1200원)으로 환전하였다.(환전율은 나쁘지 않다. 방비엥에서 환전하는 것보다 좋으며 라오스는 US $를 잘 쳐준다. 자국의 화폐가 가치가 없어서인지 이웃나라의 밧트화도 거리낌없이 받으므로 남은 바트를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밧트화는 환전율 손해가 크다) 바트 환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라오스돈 낍으로 100$을 환전하였다. 태국 출국, 라오스 입국심사를 모두 마치면 뚝뚝기사들이 외국인들에게 정신없이 달려든다.
같은 버스에 탔던 탑승객들 중 라오스와의 비자 협정이 맺어져 있지 않은 나라에서 온 탑승객들이 꽤 많았는지 이곳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 툭툭이와 택시 등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엔까지 가는 교통편이 많이 있는데, 어떤 편을 이용하더라도 30여분 정도면 비엔티엔에 도착할 수 있다. 버스 정류장은 국경 검사소를 등지고 100미터 건너 도로로 이동하면 14번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 시설이 최악이지만 저렴한 요금으로 이돌할 수 있으니 감수하면 30~40분이면 위앙짠 버스 스테션에 도착할 수 있다.
출입국 심사가 끝나고 우정의 다리 인근에 있는 불상을 전시해 놓은 씨앙 쿠안(Xieng Khuan, 일명 부다 파크)을 볼 수도 있다. 부다파크(buddha park)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다양한 불상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도로변에 있다. 입장료(5000K)와 사진 촬영비를 포함하여 8000Kip이다. 공원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불상만이 아니라 온갖 형태의 힌두상이 가득하다. 부처와 관음보살상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기이한 모습이고, 시바와 비슈누상이 혼재된 공원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이런 모양의 조각을 본적이 없기에 사뭇 신기하게 다가온다. 힌두와 불교에 관한 여러 불상들이 모여 있는 공원이다.
기괴한 조각의 부처공원 비엔티안에서 남동쪽으로 메콩 강 줄기를 따라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씨앙 쿠안 부처 공원(Xieng Khouane Budda Park)'이다. 1958년에 세워진 이 공원은 역사적인 중요성과는 별개로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기괴한 모양의 조각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이곳 조각들은 자신을 신성한 사람으로 자칭하는 루앙 분르아(Bounlua) 쑤리앗이라는 조각가가 불교와 힌두교의 원리를 시멘트 철근을 소재로 형상화한 공원이다. 그는 불교와 힌두교를 접목시킨 자신의 독창적인 우주관과 삶의 철학을 설파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위앙짠 시내에서 오토바이 택시 대절해서 30분 거리]
왓 씨엥쿠완 안으로 들어서면 시멘트로 만든 검은 형체의 조각들이 비좁다 싶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4개의 얼굴과 8개의 팔, 머리 위에는 해골을 올려놓은 문어모양의 조각, 여인을 집어 삼키는 험상궂은 물고기와 뱀, 커다란 고양이를 타고 팔을 10개 가진 힌두의 여신 등 조각들은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려운 모습들이다. 힌두신 시바, 비쉬누, 안주나를 비롯하여 뱀, 악어, 머리가 네 개인 코끼리 등 전설과 신화에 나오는 모든 동물들과 신들과 주요상황들이 상상을 초월하여 형상화 되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검은 이끼로 싸인 돔 모양의 3층 구조물인데 부릅뜬 커다란 눈에 이빨을 드러낸 쩍 벌린 입으로 들어가 맨 위로 올라가면 공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턱밑에 서면 콧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대형 와불은 카메라의 한 컷으로 담기조차 어렵다. 똬리를 튼 뱀 위에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처와 시바를 조합한 것에 코브라 아래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상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이 어우러진 독특한 조형물이다. 탑 안쪽 입을 통해 2층으로 되어있는 실내를 통하여 상부에 올라가 전체를 조망 할 수 있다. 공원 전체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호박 모양의 이 형상은 천상계, 지상계, 지옥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천상에서 내려다 본 힌두와 부처의 세계! 장엄하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공원을 돌아볼 만하지만 다양하고 기이한 수많은 불상들을 보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Buddha Park(씨엥쿠안이라 불림) 내에서 단연 돋보이는 와불상, 눈을 감은 듯 하지만 모든 신들을 관장하는 위엄을 풍긴다. 10m는 족히 넘을 듯하다.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와불(臥佛)이나 좌불, 입불은 오히려 조각들의 기괴함에 파묻혀 제대로 눈길 한 번 끌지 못했다. 도대체 예전의 그 성인은 뭘 가르치려 했던 것일까? 타락한 세상에서 느낀 어지러움과 번뇌였을까? 혼돈의 세상에서도 눈을 감고 평화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부처가 되라고 하는 것일까? 그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형상들을 한 불상들이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며 머물고 싶은 곳이다.
내부 관람이 가능한 원통형의 건물. 구조물 상단에는 나무 모양의 조각품이 보이는데, 마치 송신탑처럼 생겼다. 이런 모습을 보고 외계인과 교신을 위한 건물이었다고 말하는 현지인도 있었다. 원통형의 건물 내부는 입장이 가능하다. 지옥, 지상, 천국을 형상화한 3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일 꼭대기 층은 주변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 층별로 조각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불이 안켜져 있어 이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공원에서 만난 한 승려는 "이곳에는 지옥과 현세와 극락이 공존하고 있다.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동물로도, 사람으로도, 미물로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비록 콘크리트 조각상에 불과하지만 기기묘묘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살피다보니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력이 춤을 춘다.
부다파크 정문 앞에서 라오스의 수도, 달의 도시인 비엔티엔(Vientiane)으로 갈 수 있다. 라오스 버스는 출발해야 가는 거란다. 손님이 적당히 차야만 기사가 출발한단다. 라오스 돈 환전을 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해도 되지만, 비엔티안 터미널에 도착하면 건너편 쇼핑몰 안에 은행 환전소가 있다. 라오스 돈 단위는 무척 크지만 가치는 높지 않다. 로컬버스를 타면 4,000kip에 비엔티엔 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태국 농카이에서 비엔티엔까지는 30킬로 정도 밖에 안된다. 라오스 땅으로 들어서면서 길은 좁아지고 차는 오른쪽 차선으로 바꾸어 달리기 시작한다. 역시 비엔티엔은 메콩강을 끼고 발달된 도시라 그런지 비엔티엔까지는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었고, 탁 트인 초록의 들판 위로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까지 도심 속 시야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원적인 풍경들로 이어지고 있어 시선 닿는 곳마다 신선하기만 했다.
인도차이나 중심에 위치한 라오스(Laos)는 신비한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천혜의 자연과 느림의 미학이 있는 곳이다. 과거에 프랑스 보호령에 있었던 만큼 힌두교와 불교, 프랑스의 문화가 적절히 조화를 있어 평화로운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분주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나라가 있다.
느림의 미학이 있는 곳 라오스(Laos), 즐기는 여행만이 아닌 배움이 있고 문화가 있는 그곳, 아직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천연의 자연들. 주변 나라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며 느리게, 그러나 충실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라오스는 평범한 여행자마저도 현자(賢者)로 만든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생태환경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국토 대부분이 푸른 숲으로 덮여 있고, 북부의 산과 남부의 평원을 넉넉히 적시며 메콩강이 흐른다. 특히 라오스 북부지역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다양한 소수부족들의 삶이 매력적인 곳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를 심고, 베트남 사람들은 벼를 수확하며, 라오스 사람들은 그 벼가 자라나는 소리를 듣고 산다."는 말이 있다. 느리고 천천히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살아가는 그들만의 행복! 우리가 바쁜 일상을 살면서 놓친 소소한 행복과 시간의 의미는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세상의 흐름을 자연에 맡긴 채 고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라오스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오스는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생활에 익숙한 이들에게 다소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라오스 사람들은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낙천적이고 느긋하다. 남방불교의 영향으로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현재를 살기보다 카르마(업)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항상 여유가 가득하다.
라오스가 아름답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바로 도시와 자연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라오스 국토의 70% 이상이 산, 그나마 그 산들을 개발하지 않고 있는 그런 상태이니 하늘에서 보는 라오스는 꼭 스위스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원시 상태의 자연이 있다. 아직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천연의 자연들. 도시라 해도 집집마다 나무를 심고 화단을 정성스레 가꾸는 이유도 라오스가 아름답다는 말에 그 이유를 더하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더운 나라인 탓도 있겠지만 집집마다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고 화단을 꾸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러한 라오스사람들의 관습으로 인한 사업 중 하나가 조경사업이다. 새로 짓는 집집마다 또는 기존의 집들도 제각기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식목을 하기도 하지만 조경 회사에서 나무나 꽃을 사다가 식재를 한다.
아시아의 최빈국 라오스는 항상 평화롭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모습은 매년 실시하는 행복지수 조사에서 방글라데시, 부탄 등과 함께 항상 선두를 지키고 있단다. 그래서 라오스 오지마을 여행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서두르지 않는 사람들의 미소다. 이곳의 기후는 5∼10월까지는 우기, 11∼4월까지는 건기를 이루는 아적도성 몬순 기후이다. 기온은 12∼2월의 시원한 달에는 평균 16∼21℃이고, 연 평균 기온은 섭씨 28도를 맴돌며 4월과 5월에는 최고 38도까지 올라간다. 연강수량은 저지대에서는 1,500∼1,700㎜이고 볼로방 고원의 산악지대에서는 3,000㎜ 정도이다. 우기철이 되면 밤에 비가 오는 때가 많다. 밤이 되면 억수로 비가 내리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인하늘이다. 그렇기에 더위는 다소 누그러드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낮에도 본격적이 우기철이 되면 7,8월 스콜성 소나기가 내린다.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바다와 접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다. 메콩강을 따라 태국과 많은 부분이 접해있는데, 현재는 다리가 2개뿐이 없다. 수도 위양짠과 남부 사반나켓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2009년에 캄무앙주 타켓이라는 도시에 착공이 들어갔고, 2010년 3월에는 보케오 지방에 착공을 했다고 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남북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메콩강엔 '제1 우정의 다리'가 놓여 있다. 태국 농카이와 라오스 비엔티안을 잇는 길이 1174m의 이 다리엔 영어로 '호주 국민이 태국인과 라오스인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적힌 기념판이 걸려 있다. 호주는 1994년 7억5000바트(약 200억원)를 들여 다리를 놓아줬다. 물론 무상지원이었다. 호주의 선물은 '다리 이상'이었다. 이 다리는 사면이 육지로 막힌 내륙국인 라오스에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매년 수십만 명의 라오스인과 태국인이 이 다리를 건너 왕래한다.
일본은 호주의 원조 방식을 재빠르게 답습해 2006년 태국 묵다한과 라오스 사반나켓을 잇는 1600m 길이의 '제2 우정의 다리'를 지었다. 호주와 마찬가지로 총 건설비의 절반인 13억바트(약 300억원)를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조건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호주와 일본 등 선진국은 원조를 통해 나라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특히 호주의 경우 푸비앙, 란쌍마인(09년 중국에서 인수) 등 광산업에 투자,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오스 경제 발전의 두 축은 지하자원과 수력발전이다. 특히 수력발전은 빼놓을 수 없는 라오스의 국가 수입원이다. 수력발전소에서 얻는 전기를 인근 국가에 판매하고 얻는 수입이 크다. 동남아 지역의 에너지 수요는 점차 커져 2015년까지 6-7%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라오스는 현재 1260MW의 사야부리 댐 수력발전소를 건설해 '동남아의 배터리'로 만들 계획이고, 2015년까지 11개의 댐을 추가 건설할 계획도 갖고 있다. 댐 건설은 악영향을 우려한 주변국들의 반대로 한 때 유보되기도 했다. 또 하나 라오스가 지리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경유지로서의 역할이다. 현재 중국이 운남성 곤명에서 싱가포르까지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데다 2015년 아세안 공동체가 완성되면 무엇보다 교통 요충지로써 메콩 유역에서 가장 수혜를 입는 나라는 라오스가 될 것이라고 한다.
라오스 주변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중국이 둘러싸고 있어 과거로부터 온갖 수난을 겪게 된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다. 과거 1353년에 성립한 백만마리 코끼리의 땅이라는 뜻의 '란쌍왕조'를 탄생시킨 이후 크메르, 타이, 베트남 틈바구니에서 번갈아가며 식민지배를 받아오다가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서 프랑스가 타이왕국으로부터 메콩강 동쪽 땅을 챙겨 현재의 국경을 만들고, 라오스를 지배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크메르 제국(캄보디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베트남과 미얀마로부터도 일시적으로 지배를 당했었다. 18세기 초에는 3왕조 분열로 태국이 지배를 했다.(태국 동북부 지역 17개 도를 빼앗김)
20세기 초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나 일본군의 동남아 침략으로 프랑스로부터 1953년 이후 라오스 왕국으로 독립했으며, 잠시 미국의 군정을 받았으나 내전 격화 및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1975년 공산화되어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많은 외세의 침입 속에서 태국, 중국, 그리고 근대의 프랑스까지 다양한 국가의 영향으로 인하여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아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시기에 일본에 지배당하였고, 일본이 패망하자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 내전이 계속되다가 베트남 전쟁시에는 베트콩과 미국이 일전을 치루면서 엉뚱한 라오스가 피해를 당했다. 아직까지 라오스 오지마을 깊은 땅 속에는 엄청난 불발탄이 묻혀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라오스왕국은 폐지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에 비해 관광지로서의 개발 또한 더디다. 그동안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탓인지 여행지로서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라오스의 때 묻지 않은 풍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진정한 치유를 받고 돌아간다. 겹겹이 겹쳐진 산과 그 속을 흐르는 물줄기. 막을 걷어 올리듯 그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잔잔한 강물소리는 어느덧 위로의 말처럼,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흐른다. 그제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고 또 다른 채움을 얻는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소중한 깨달음도 그 하나다.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넷 판에서 `2008년 꼭 가봐야 할 53곳` 중 첫 번째로 꼽히면서 라오스의 매력이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라오스 땅에서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라오스 남쪽지역에서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고, 북쪽에서는 유사이전에 사용하던 돌도끼, 항아리, 매장지 등을 포함한 증거물이 새로이 발견되었다. 북쪽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라오스 부족들은 대부분 기원후에 중국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소작인으로 특정 농산물을 재배하며 바깥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살아오다 AD 757년 쿰러왕이 지금의 루앙프라방을 정복하고 그 도시의 이름을 '므앙쑤아'에서 '시양텅'으로 바꾸었던 일도 있었다.
라오인들은 원래 중국 윈난성 지방에 거주했던 타이족의 일파라고 하는데 7세기 <난 짜오> 왕국을 건설 점차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며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가다가 1253년 몽골 쿠빌라이칸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라오스 지역에는 여러 개의 소국들이 세워졌다가 14세기 초 라오스 최초의 통일 왕국인 <란쌍 왕국>이 건립되었다. 그렇게 최초 라오스 왕국은 팡움왕에 의해 1353년에 세워졌다. 그는 크메르(캄보디아)왕국의 원조를 받아 작고 많은 왕조 세력들을 통합하므로 루앙프라방에서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이 왕국이 바로 랑쌍 왕국으로 그 의미는 "백만 마리의 코끼리"를 상징한다. 이 시대의 왕 중에서 셑타티랃왕은 지금의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으로 옮겼고 영토 확장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라오스의 정신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탈루왕을 만들기도 하였다.
란쌍왕국은 약 200년 동안 존속하다가 1603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란쌍 왕국은 1637년에 술리나옹싸왕에 의해 다시 재건되면서 약 반세기 동안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다가 1713년 다시 3국으로 분리됨으로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엔과 짬파삭에 각각 다른 왕국이 세워졌다. 이 삼국시대로 말미암아 나라의 세력은 약해지고, 통합과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등 지역간의 왕래와 행정력 결핍으로 나타나면서 인구 성장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1713년부터 1893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라오스 왕국은 이웃나라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는 있었으나 때로는 태국, 버마, 베트남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27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아누왕이 태국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태국의 보복으로 라오스 서북쪽의 국토와 약 170만 라오계 타이족인 ISAN족(이산)을 상실, 태국은 북쪽 경계선 넓은 지역과 북동쪽에 많은 사람들을 지금의 치앙마이와 우돈타니로 이주시켜 국토의 확장을 자리 메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정복하고 이어서 라오스 정복에도 성공, 라오스 국왕은 태국군 공격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하여 오히려 프랑스의 식민지를 택하고. 마침내 프랑스군이 메콩강까지 진출, 태국으로부터 메콩강 동편 모두를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의 경제적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판단하고 많은 관료들을 라오스에 파견시키지도 않았고, 단지 베트남에 상주하는 관리 몇 명이 라오스를 함께 통치하면서 프랑스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는 철도공사나 대학 등을 세웠으나 라오스에는 별다른 관심이나 투자를 하지 않았다.
독일과 일본에 의한 세계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의 지배는 뒷전으로 물리면서 태평양 전쟁권에 놓인 라오스는 자연 일본군의 승리에 따른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다시 독일군에 대한 연합군의 잇따른 승리로 프랑스가 영향력을 회복은 하였지만 라오스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은 예전 같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라오스에서도 라오이사라(the Lao Issara)라 불리는 자체 민족운동이 조직되면서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1945년 10월 12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라오스 새 정부를 주도해왔던 Phethsarath 왕자가 사실상 독립을 선언, 1946년 초에는 프랑스군이 자신의 세력을 재 확장하기 위해 라오스로 향해 라오스-베트남 군대와 메콩강에서 충돌하게 되었고, 3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라오스 저항군의 패전에 따라 주요 인물들이 태국으로 피난, 수파누옹 왕자와 함께 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태국 정부로부터 지지를 얻어 내는데 성공.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 왕가와의 협의에서 1949년 이후에 라오스에 더 많은 자치권을 허용한다는 정도의 합의에 이르게 됐다.
라오스는 각 마을마다 마을 자치군이 있다. 이를 '껑런반'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규모에 따라서 분대규모나 분대 그 이상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평상시는 자신의 일을 하고 유사시 군인의 역할을 하며, 밤에는 조를 편성하여 마을 치안유지도 한다. 비엔티안에도 그런 군인들이 있다. 관광객들이 다 잠든 사이에 볼 수 있다. 혹은 축제기간 중에 치안담당을 하기도 한다. 군복을 입기도 하고 그냥 일상복을 입기도 한다. 보통은 소련제 AK소총이나 카빈소총을 휴대하나 지역에 따라 미국산의 M16도 휴대한다.
라오스인의 일반적인 생활 문화를 보면 한국인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나 어른에 대한 예의, 이웃 친척간의 깊은 연대감 등이 그렇다. 이웃에 잔치가 있으면 온 동네가 떠들썩하고, 모두 가서 도와주기를 즐거워한다. 이렇게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이 이들의 삶에 전통으로 스며져 있음을 보게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우리와 흡사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음식으로 면 종류나 막걸리, 놀이로는 사자 탈춤놀이, 자치기, 연날리기 그리고 악기로는 징과 피리, 북, 비파 등 우리나라 국악이나 농악에서 사용되는 악기들이 이곳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라오스 북쪽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보기 힘든 물레방아나 디딜방아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도시에 사는 남자들은 서양식의 티셔츠나 바지를 입는다. 그리고 여성들은 아직 서양의 의류보다는 라오스 전통옷들을 많이 입는 편이다. 여성들은 주로 라오스식 블라우스와 치마로는 전통 실크 스커트를 입는다. 치마는 큰 보자기 같은 것인데 허리를 감아 돌려서 묶기도 하고 벨트로 고정시키기도 한다. 라오스 치마에는 많은 무늬가 있으며, 장식으로 은을 달기도 한다. 신발은 흔히 샌들을 신고, 사원이나 집 등 실내로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는다. 요즈음 비옌티엔 관공서 출입시에는 라오스 여인들은 꼭 정장치마를 입어야 하고, 남자는 긴바지를 입어야 출입이 가능하지만 외국인은 반바지를 허용하지만 예의를 지키는 게 좋을 듯하다.
라오스인들의 집은 매우 간편하다. 지방 또는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나 대나무 등으로 작은 집을 짓는다. 집은 땅에서 떨어져 높이 짓는데 지면에서 5내지 8피트 높이의 나무기둥 위에 세워진 순수한 목재 가옥이다. 이는 우기철에 침수를 대비하고, 건기에는 바람의 통풍을 원활하게 하며 또한 온갖 벌레와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간혹 도시에서는 I층은 시멘트로 2층은 나무로 짓기도 한다. 대개 한 집에는 2-3개의 방이 있는데 방이 부족할 때는 커튼을 쳐서 방을 더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방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고, 벽은 대나무를 엮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높이 지어진 이런 집들의 아래층은 흔히 창고나 가축들의 집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직물을 짜는 창고로도 이용된다.
라오스는 모계사회로 지금은 가정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크고 생계의 주는 여성이 맡고 남성은 부수적인 생계에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라오스에는 땡안(결혼)을 하면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들어가서 사는 데릴사위제가 보편화 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로 모계사회는 어머니 쪽을 중심으로 혈통이나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면 라오스는 모계사회인가? 실상은 그렇지를 않단다. 여자는 결혼하면 남자의 가족 성씨를 따른다. 그런 생활로 남편과 별거중인 여자들은 꼴보기 싫은 남편의 성을 말하지 않고 없다고 또는 말하기를 불편해 하기도 한다. 그러면 왜 모계사회라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여자도 농사일이나 바깥일에 남자하고 구분없이 일을 하며 오히려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다.
라오스 남자와 여자를 단순비교 할 때 여자가 남자보다 더 책임감이 강하다. 부부가 이혼을 하거나 별거를 하면 대부분 아이의 양육을 여자가 맡는다. 그만큼 남자들은 일거리를 찾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여자들은 미장원이나 맛사지샵, 조그만 가게(옷가게, 맥주가게, 국수집 등)등을 운영한다. 라오스 시골 마을 동네 집주변 공터에 많은 남자들이 맥주나 마시고 '패땅'이라고 부르는 구슬놀이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시간에 여자들은 논밭에 일하러 가있던지, 가게를 열고 물건을 팔던지, 직장일을 한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여자들이 가지는 직업은(물론 많이 배우지 못한 여자) 매반이나 집 앞에 조그만 진열장을 만들어놓고 장사를 한다. 음식을 만들 줄 아니까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을 한다.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여자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아이들에 대한 모성이 강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모계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라오스인은 아직 대가족제도이다. 그리고 가계는 남성을 따라 이루어진다. 모든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된다. 어른이 되거나 결혼을 하여도 가족의 일원으로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한 가족으로 긴밀한 관계가 유지된다. 흔히 친척들은 서로 가까이서 거주하면서 할머니가 손자들을 돌보아 주며 모두가 가족처럼 지낸다. 가족 생계의 책임자로서 남자는 일반적으로 가정의 가장이고 모든 가족의 권위를 가지며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게 된다.
농촌의 남자들은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고 도시의 남자들은 각종 직업에 종사하며 주로 외부일을 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이 결혼을 하면 신부 집에서 신부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관계로 여자들의 발언권이 더 강한 가정도 많이 있다. 그리고 집안 가사의 책임자로서 여자는 가사일의 총 책임자이다. 아이의 양육에서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가족 일원들의 건강을 위해서 매일 음식을 준비한다. 일반적으로 연간예산이나 지출되는 모든 경제권도 여성의 손에서 관리된다. 그리고 여성은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의 도덕적 모범자로서 그리고 라오스 문화의 전수자로서 큰 역할을 감당한다.
라오인들은 수줍음을 많이 타고, 쉽게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라오의 참맛은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네고 친해져서 라오사람들의 순수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어린이들 또한 아주 순박하고 얌전하다. 그들 가운데 요란스럽고 소란스런 면은 별로 없다.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다투거나 싸우는 일도 거의 없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가 무엇을 하자고 하면 같이하고, 또 다른 아이가 다른 것을 하자고 제의하면 순순히 순응하는 아주 순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순박한 아이들이지만 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관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스스로 배우며 자라야 한다. 여자아이들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돈을 벌기 위해 거리나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도 한다. 남자 아이들은 보다 힘든 일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를 따라 산이나 들에 나가 농사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라오스의 결혼은 우리와 다른 것이 많이 있다. 결혼 연령도 다양하여 시골이나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13~15살이면 결혼을 하는데 부모들은 가사의 일손을 위해 조기 결혼시킨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보통 20살 이상이 넘어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할 때 청첩장을 보내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아는 사람 모두에게 보낸다. 이때 축의금도 당연히 가지고 참석해야 한다. 축의금은 반드시 청첩장을 받은 그 봉투에 다시 넣어서 전달해야 함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봉투가 없어서 곤란함을 겪는 경우는 없다. 결혼식은 보통 2부로 나뉘어져 행해진다. 1부는 오전에 하고 2부는 보통 저녁에 한다. 오전에는 주로 가족들과 함께 '맛캔'이라고 하는 행사를 한다. 이때는 음식과 각종 꽃 장식을 마련하고서 무당이나 쿠바(스님)을 초청하여 굿 같은 행사를 함으로 결혼을 먼저 신에게 신고하는 것이다.
행사 진행은 무당이나 쿠바가 집전한다. 그는 주문을 외워 신을 부르고 신에게 부부의 결혼을 축복해 준다. 그리고 손에다 실을 매어줌으로 신의 기운과 보호가 항상 있기를 기원한다. 2부 저녁 행사는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여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즐기는 행사이다. 이 행사는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는데 신랑, 신부는 행사가 마쳐질 때까지 손님들에게 숱을 따라주며 노래와 춤을 추어야 한다. 이런 행사로 말미암아 라오스에서 신혼여행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이날 신랑 신부는 손님 시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흔히 신혼방은 신부집에 마련되어 있다. 라오스는 한국과 달리 결혼을 하면 여자가 신랑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집을 떠나 신부의 집으로 들어가 신부의 가족과 하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라오스 축제일은 주로 라오스 달력에 의해서 행해진다. 라오스 달력은 15일이 한 달로 24절기 천체 운행을 기초로 만들어 진 것이다. 흔히 불교식 달력이라고도 한다. 연중 주요 축제는
①삐마이라오(Lao New Year) : 해마다 다양한 행사가 있는 라오스 신년 축제는 4월 중순에 있다. 라오스인들은 달이 가장 커지고 작아질 때의 사이인 4월 중순에 신년축제를 가진다. 신년축제가 되면 사람들은 도로마다 행진을 하면서 신께 복을 기원하는 행사와 집안을 정결하게 하는 정결의식 등도 가진다. 라오스인들은 이와 같이 함으로 집안에 모든 악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을마다 있는 절에 가서 부처상을 깨끗이 닦고 그 위에 향유를 바르기도 한다. 또한 정결의식 중에 하나로 친구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을 끼얹어 주는데 이것은 악신을 쫓아내고, 더위를 이겨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②분 방화이(Rocket Festiual) : 로켓축제라고 불리는 이 행사는 5월 보름에 있다. 라오스 인은 이 진통을 브라만교에서 도입했는데 대나무 통을 이용하여 로켓을 하늘을 향해 발사함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의식이다. 비록 모든 라오스 인들은 5월 이후에는 우기가 시작되는 줄을 알면서도 우기철 바로 전에 이 행사를 가지므로 이 의식으로 비가 내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③분 수앙흐아(The Boat Racing Festival) : 라오스 인들은 우기철이 끝나는 10월과 II월 사이에 메콩강에서 보트경기축제를 가진다. 이 행사는 농부들의 농사에 대한 감사의 보답을 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또한 사람들은 집집마다 보트 모형의 배를 만들어서 꽃이 핀 것 같은 촛불을 아름답게 장식해 저녁 동안 대문에 달아 놓거나 그 배를 강물에 띄워 보내므로 악신을 막고 쫓아낸다고 믿고 있다
④분 탈루왕(ThatLuwang Festival) : 탈루앙 축제는 일년에 한 번 11월 초순에 있는 것으로 라오스 전역에 걸쳐 이루어지는 국가적 행사이다. 이때는 라오스에서 생산되는 모든 귀중품들과 많은 외국 상품들이 탈루앙 앞 넓은 광장에 진열된다.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장 많이 제공되는 이 행사는 약 2주간 계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에 전국에서 마을마다 차를 전세 내어 비엔티엔까지 몰려든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일 년에 한번 아니 평생에 한번이라도 이 축제에 참석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이 비엔티엔에 위치한 탓루앙은 라오스에서 가장 큰 탑으로 사람들은 이곳을 거룩한 성지처럼 여긴다. 이 탑은 약 5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그 탑 안에 부처의 진신사리 가슴뼈가 모셔져 있어 모든 라오스 인은 이 탑을 경배, 현재에도 축제일까지 정하여 이 기간 동안에 모두가 이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기뻐하며 탐을 돌고 부처에게 절을 하며 소망을 기원하는 등 온갖 행사를 가진다.
라오스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약 일주일 동안 아기의 출생에 대하여 아기와 엄마를 축하하는 행사를 가진다. 이 기간 동안 매일 친척과 친구와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먹고 노래하며 즐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축제는 초상날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기쁜 일이다. 사람이 죽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다. 그래서 초상집을 "좋은 집"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초상집이 좋은 집이 된 것은 불교에서 죽음은 윤회에 근본을 두고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오스인에게 제삿날도 특이하다. 이들은 일 년에 모두 같은 날, 모든 죽은 조상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헌법에는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다. 가르침이나 전파하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는 전제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무슨 종교든 가질 수 있으나 모여서 교리를 가르치거나 전도를 헤서는 안 된다. 오직 집회가 가능한 곳은 정부가 허락한 일정한 장소 또는 사원에 국한한다. 외국인에 대한 종교적 감시는 라오스인보다 더 강화하고 있다. 종교적 목적으로 입국하는 외국인 방문객은 모두 불허하고 있다. 외국인은 어떤 형태의 집회나 가르침이나 문서 배포를 할 수 없다. 만일 외국인이 어떤 종교적 활동을 하다가 적발되면 체포되거나 24시간 내에 추방당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외국인들이 매년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라오스는 여러 지역에서 여러 부족들에 의해 형성된 나라이기에 많은 종류의 토속신앙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서 또는 마을과 마을에 따라서 종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넓게 퍼져 있는 종교는 역시 테라바다 불교(소승불교)이다. 통계적으로 절실한 불교인이 약 75%이고 토속 정령숭배가 25%를 차지한다. 그렇게 토속적인 종교 요소는 모든 라오스 인의 생활 속 어디에나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씨(Baasii=bacy)'라는 것이 있다.(손에 실을 감는 형태) 바씨는 모든 라오스인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행하는 것으로 토속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아플 때, 여행할 때, 아이가 출생할 때, 죽을 때 등 모든 일에 귀신이 나타나 이들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귀신을 달래는 행사를 가지는데 이것이 바로 '바씨'이다. 불교적 차원에서도 승려 또한 이런 의식을 치르기도 하고 직접 그 의식을 인도하기도 한다. 이 '바씨'야 말로 라오인들이 불교와 토속신앙이 얼마나 서로 혼합되어 있는지 알려주는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라오스'를 여행하다 보면 약혼식, 결혼식, 돌잔치 등 종종 라오스 '전통의식(행사)'을 경험하곤 한다. 라오스 전통의식 중 서로에게 복을 비는 '바씨(Baasii=bacy)' 라는 의식은 외국인들에게는 '바씨'로 익숙하지만 라오인들에게는 '스콴', '막켄'이라고 불리곤 한다. '바씨' 의식의 정신은 라오인들은 사람의 몸속에 32가지의 콴(혼)이 존재하고, 각각의 혼이 인간의 육체를 지탱하고 영혼을 지켜준다고 생각한다. 의식은 면실*바나나잎*각종 과일과 꽃으로 큼직한 꽃봉오리처럼 꾸며진 '파콴'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마을의 원로가 불교경전을 외우며, 육체와 정신의 콴(혼)을 이롭게 하고, 육체에서 빠져 나간 콴(혼)은 다시 재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한다. 그 기도가 끝나면 '파콴'에 올려진 '면실'을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손님들의 손목에 묶어주며 다시금 복과 건강과 행운을 기원해 준다. 바씨를 통해 묶여진 '면실'은 3일이 지난 후 가위로 자르지 않고 정성껏 푸는 것으로 복을 비는 라오스 전통의식 '바씨'는 비로소 끝이 난다.
토속적인 요소는 라오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넓게 퍼져 있는 현상이다. 소위 귀신집(spirit house)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가정집, 음식점, 사업체, 학교, 농장, 큰 나무 및, 산꼭대기 등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이 귀신집을 정성을 다하여 돌봐야 삶의 축복과 육체의 건강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 닥치는 여러 어려움들 속에서 보호와 행운이 있기 위해서는 신과 사람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귀신집에 있는 신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신과 사람 사이에 조화가 깨지면 귀신은 욕구충족을 위해 다른 곳을 찾아 그 사람을 떠난다고 한다. 이럴 때 그 사람에게는 질병이나 죽음이나 그 밖에 여러 불행이 닥친다고 믿는다. 샤만(shaman), 일명 무당은 이렇게 해서 나간 영혼을 다시 부르거나 회복시키는 방법을 알려준다. 샤만의 이러한 중개 역할은 삶의 사이클을 유지시키기도 하고 또 보수하기도 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서로 연합하고 혼합된 종교적 형태는 어느 한가지 엄격한 종교적 원리에 집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삶의 형태는 무엇이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고 무엇이 절대적인 것도 하찮은 것도 없는 모든 것이 비슷하다고 하는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내가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미래일 것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좋은 일은 삶의 의욕으로 불행한 일은 불행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라오인뿐만은 아니겠지만 여기도 사람이 사는 사회이므로 자신의 미래에 궁금해 하고 그 궁금함을 알아보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면에서 라오스에서의 불교는 가장 확실한 종교 중에 하나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라오스인들은 불교도라고 대답한다. 라오불교협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라오스 내에 2823개의 왓(사찰)이 있으며 42개의 불교계 학교가 있고 19,779명의 수도승 및 쿠바(스님)들이 있다 한다.
라오스는 불교국가이다. 모든 삶이 불교와 연결되어 있다. 이 곳 종교는 기독교가 1.3% 정도라는데 그것은 남부와 북부 오지마을에 사는 일부 몽족 등 소수민족이 차지하며, 대다수가 소승불교를 믿는다. 소승불교는 대승불교와는 달리 깨달음의 과정이 고행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라오스 사람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괜찮다'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각 마을마다 왓(불교사원)이 있어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다. 크고 넓은 절에서 그들은 놀고, 먹고,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모두 자연스럽게 불교인이 되는 것이다. 이곳 남자들은 10살 정도가 되면 삭발을 하고 수도승으로 불교에 입교하여 불교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절에서 일정 기간 거주해야 하는 전통이 있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미 어릴 때부터 불교적 생활을 배운다.
이곳 불교는 소승불교로 한국불교와는 전혀 달라서 산에서 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불교이다. 음식에 대한 절제도 없어서 고기나 담배 등 일반 사람들이 먹는 대부분을 승려들도 먹는다. 뿐만 아니라 라오스 불교는 온갖 토속신앙을 근거로 혼합된 불교로 온 국민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교는 팡움왕에 의해서 1353년에 라오스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부터 불교는 라오스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심지어 이 땅에 공산주의가 시작 된지 20년이 넘도록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조차 불교를 약화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당국은 결코 불교도들을 계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통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라오스식 공산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라오스에서 주요 교사는 승려이다. 승려들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그들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수학 및 역사, 지리 등을 그들이 알고 있는 불교적 도덕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마을마다 있는 절에는 초등교육을 위한 학교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라오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매우 중요한 초등교육을 절 안에서 불교문화를 접하며 자라게 된다.
라오스 교육은 대도시 이외의 학교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킬 수도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주5일제, 1일 9시간의 수업을 받는데 그것도 점심시간 2시간은 모두 집에서 식사를 하고 온단다. 선생님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고, 교과서는 선생님에게만 지급되는 것이 유일하다. 그러니 그 내용을 일일이 칠판에 적고나면 사실 집중적인 공부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성교육과 예절교육 등 지식을 습득하는 교육이 아닌 전인교육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형편, 어떤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교육이 장점이라고들 한다.
라오스 정부는 승려 조직을 이용한 도움이 그들의 권력 유지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승려들에게 공산주의와 라오스 정부의 정책을 재교육시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정부는 '불교적 사상을 믿는 불교 교리와 일은 하지 않고 음식만을 요구하는 불교도들과 승려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라오스 불교연합회의 조직과 힘은 대단하다. 심지어 시골 절에 수도승을 선출하는 일에도 연합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라오스 불교연합회의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승려가 9,897명이고 수도승이 15,415명이며 사원은 2,515개가 있다고 한다.
9시가 조금 넘어 드디어 비엔티엔(위앙짠) 딸랏사오 버스 터미널(라오스어: 벗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30분 만에 도착한 라오스 수도 위앙짠의 버스터미널은 여느 시골에서보다 더 시골스러운 터미널이다. 위양짠에 도착한 여행객을 반기는 것은 풀내음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가장 메마른 지역에 속한 곳이지만 메콩강을 끼고 우거진 수풀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온 위앙짠에 들어섰을 때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은 메콩 강가에 만들어진 라오스 최대의 도시로서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며 라오스 출입국의 메인 게이트가 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위앙짠시는 나가 수반낙(Naga Souvannanak)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위앙짠은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양 기슭에 자리한 고대도시로, 원래 명칭은 '반 농 칸테 피세우아남(Ban Nong Khanthae Phiseuanam)'이었는데, 기원전 430~120년의 첫 지도자였던 바우리찬(Bourichan) 혹은 프라야 찬타불리 파싯티삭(Phraya Chanthabouly Pasitthisak)이 현재의 이름인 위앙짠으로 변경했다. 1357년 파 응움(Fa Ngoum)왕은 라오스 전체를 통일하여 란 쌍(Lane Xang) 왕국과 이웃 왕국을 아우르는 힘과 권력을 갖게 된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거창한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오늘날의 위앙짠 지역인 팍 빠삭(Pak Pasak)에서 열렸다. 1560년 싸이세타(Saysettha) 왕은 란쌍 왕국의 수도를 루앙쁘라방에서 위앙짠으로 옮기며 위앙짠을 '나코른 찬타불리 시타 타낙하나후드 우따마 라자타니'라 불렀다.
17세기 솔리야봉사 타미카랏(Souliyavongsa Thamikarat) 왕 시절, 위앙짠은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정치 행정, 사회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왕은 용맹하고 명석하며 자애로웠고, 백성들은 행복했다. 메콩강 기슭을 따라 늘어선 황금빛 집들을 내려다보는 궁전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1828년 위앙짠은 샴 군대(현재의 태국)에 의해 불에 타고 두 개의 도시로 분열되었다. 메콩강 우측의 도시는 샴의 영토가 되었고, 좌측의 도시만이 라오스의 영토로 남았다. 오늘날의 위앙짠은 본래의 크기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규모로 남았다.
비엔티안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유럽풍으로 부른 것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굳어지게 되었다. 메콩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은 유럽과 아시아를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곳은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된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비엔티안은 국제적인 아름다움과 전원풍의 매력을 동시에 발산하며 성장하고 있는 도시다. 시내 대부분의 구역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관광을 하든, 마음껏 쇼핑을 즐기든, 라오스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든 간에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고풍스러운 독특함에 반하게 될 것이다.
'위앙'이란 라오스 어로 '도시'를 뜻한다. 그리고 '짠'이란 향기가 강한 나무의 한 종류인 '백단향'을 일컫는 뜻으로 즉 '백단향의 도시'가 된다. 이외에 '짠'은 달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말에 따른다면 '위앙 짠'은 '달의 도시'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즉, 쓰리 쌋타낙(Sri Sattanak), 또는 씨타낙(Sisattanak)이란 옛 이름을 가진 이 도시의 본래 의미는 '백단향(白檀香)의 도시'다. '백단향'과 '달(月)'이란 단어의 철자와 발음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달의 도시'로 오해되고 있기도 하다. 17세기말, 이탈리아 선교사 레리아(Leria de Marini)에 의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로 평가 받은 위앙짠은 그렇게 라오스의 수도로 메콩 강변에 자리 잡았다. 도시인구는 약 200만 명에 이른다.
도시의 역사는 초기 크메르인들이 힌두교 사원을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 윈난(雲南)에서 난짜오(南詔) 왕국을 대신하던 따리(大理) 왕국이 1253년에 몽고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그 유민인 타이족 계열의 종족이 남하(南下)하여, 이 지역에 있던 소수의 크메르인을 대신하여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지금의 라오인이며, 이때부터 라오스의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 1560년에 이르러 위앙짠은 쎗타티랏(Setthathirath)왕에 의해 란쌍(Lan Xang)왕국의 수도로 정해졌다고 한다.
비엔티안에서는 비엔티안이라는 지명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게 옳다. 비엔티안이 아니라 '위앙짠(웽짠)'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한발짝 더 다가선다. '달의 도시'란 뜻의 웽짠에는 라오스 사람들의 자존감이 걸려 있다. 프랑스 식민 시절의 프랑스식 발음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원래 발음을 되찾겠다는 소리없는 몸짓을 읽을 수 있는 것. 이름을 되찾는 일은 곧 정신을 바로 세운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 침략과 식민지배로 훼손된 옛 왕국의 영화를 꿈꾼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오스는 높이 솟은 큰 건물이 거의 없다. 5층 이상 되는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 3층 이하의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마치 고즈넉한 전원도시를 연상케 한다. 일국의 수도라고는 하지만 한국으로 보면 경주시 정도를 생각하면 될 듯, 물론 시설적인 면에서는 훨씬 못 미치지만 그만큼 고적들이 많다. 비엔티엔에서 가볼만한 곳으로는 불상박물관 '왓 씨싸켓', 에머랄드 부다의 근원지 '왓 호파께우', 독립기념문 '빠뚜싸이', 부처님 가슴뼈 사리가 모셔진 라오스의 상징 '왓 탓루앙', 라오스 전통댄스쇼 '옌사바이쇼' 등이다. 그리고 시원한 메콩강변이 있다.
터미널에서 여행자 거리 메콩 강변까지 배낭을 메고 걷기엔 거리가 조금 먼 2km 남짓 된다. B&P Hotel 숙소로 향하여 짐을 풀었다. 비엔티안의 여행자 숙소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남푸(Nam Phu)'라고 하는 조그만 공원 있는 곳에서 메콩강변 쪽으로 골목길에 많이 위치해 있다. 비엔티엔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20m) 사거리가 나오고 사거리 지나 조금 가다(10m) 우측으로 가면 여행자거리인 남푸거리가 나온다.
땀과 먼지로 절은 몸을 샤워로 재충전하고 여행자 Place에서 나름 번화가인 듯한 큰 마켓과 쇼핑점이 있는 같은 라인 좌측에 위치한 한국식당 '대장금'을 찾아 허전한 배를 채우기로 하였다. '대장금' 한국식당 가게 하나 건너 '한국식당' 한국음식점이 나란히 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한국적인 장식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라오인이 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한식의 장점 중 하나로 다양한 반찬들, 반찬만으로도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다. 해외에서 맛보는 한식 대체적으로 가격(김치/된장찌게 30000Kip, 솥뚜껑/묵은지삼겹살 100,000Kip, 라면/김밥 30000Kip, 공기밥 10000Kip, 소주 30000Kip=4200원)이 싸다. 김치찌개로 정말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다양한 찬을 정겹게 내어오는 한 끼는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 푸짐하고 배부름이 오래 가는 엄마의 밥상인 듯 하였다. 디저트로 망고를 주기에 비어라오를 한 잔 주문하였다. 이곳에서는 소주도 막걸리도 먹을 수 있다. 물론 여행 정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라오스인들도 우리처럼 밥이 주식이다. 쌀은 일반 쌀(안남미)과 찹쌀이 있다. 라오스의 전통 밥은 찰진 쌀로 지은 '카오니야오'다. 입맛은 우리와 거의 같지만 밥을 짓는 방법은 사뭇 다르다. 먼저 화덕에 숯을 피우고, 그 위에 물을 담은 들통을 올린 다음 또 그 위에 고깔 모양의 대나무 소쿠리를 올려놓는데, 그 안에다 깨끗이 씻은 쌀을 담아 푹 쪄내는 방식이다. 다 된 밥은 '팁카오'라는 대나무 통에 담겨 나오는데 가족들이 함께 사용하는 큰 통도 있고 들고다닐 수 있는 개인용 작은 통도 있다. 길거리에서 들고다니는 팁카오는 도시락이다. 이들은 식사할 때 맨손으로 먹는다. 식단은 아주 간단하나 찹쌀밥 같은 카오니아오와 파파야 샐러드 땀막홍, 그리고 꼬치구이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만약 거기에 메콩강에서 잡은 민물 생선구이 한 마리 곁들인다면 그 밥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야채에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는데 주요 품목으로는 상추, 무, 배추, 케일, 토란, 죽순, 호박, 버섯, 콩, 오이, 가지, 파 등이 있고, 과일은 망고, 바나나, 파파야, 수박, 둘리안 등이 있으며, 육류로는 소, 돼지, 사슴, 오리, 닭, 뱀, 도마뱀 등을 먹는다.
라오스 traval중 대부분 여행자들이 맛보는 3만 ~ 50,000(이상)kip의 한 끼는 현지인들이 맛보는 한 끼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여행자들이 맛보는 한 끼는(3만~5만kip 이상) 평범한 현지인들에겐 특별한날 맛보는 가격대이다. 라오스 서민들로 붐비는 맛집 5000kip(700원)의 'red pork rice noodle'로 찾아간다. 라오스 비엔티안 '한국식당' '대장금' 라인으로 한인식당을 등지고 우측으로 50m쯤에 있다. '돼지고기 쌀국수' Big Bowl 10,000kip, Small Bowl 5,000kip으로 모든 재료는 매일매일 신선한 것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맛나고 저렴한 가격 덕분에 붐비는 손님으로 앉을 자리가 없는 라오스 서민들의 맛집, 자리가 없어 현지인들 틈에서 쌀국수 맛본다. 금방 삶아낸 생생한 쌀국수 그리고 고기로 우려낸 얼큰한 육수, 패션숍 'Melka' 맞은편 라인(대사관 지역 방향) 끝쯤 위치한 '700원의 쌀국수'집이다.
※그외 간식으로나 식사로도 충분한 깔라파오(3000낍)라고 하는 한국의찐빵+왕만두 같은 음식이 있는데, 고기류가 들어간 것과 망고가 들어간 것이 있다. 라오스식 바게트 샌드위치 '카우찌(10000낍)'는 양도 많고 엄청 맛있단다. 반으로 잘라서도 판다. 라오스 커피 쉐이크(8000킵), 길거리 음식 중 하나인 도냐츠, 생과일 쥬스(5000깝) 루앙프라방 야시장 입구 쥬스는 정말 맛있단다. 방비엥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꼬치구이 '쿠에이(1개 1000킵)', 라오스 쌀국수 까오삐약&까오소이(10000낍부터)-까오삐약은 튀김우동과 흡사한 맛으로 우리 입맛에 딱 맞고, 까오소이는 매콤한 맛을 가미한 쌀국수이다. 향이 부담스러우면 야채를 빠달라는 뜻으로 '혼뽀~옴'이라고 하면 된단다. '목빠(8000낍)'는 생선을 갈아 바나나잎에 말아서 오랜 시간 동안 찐 고급음식으로 1시간 이상 요리시간이 소요된다. 어묵과 비슷한 맛이 난다.
루왕프라방에서 내려온 아주머니가 만드는 반꾸완, 보통은 쌀국물에 녹말가루를 섞는데 그렇게 하면 부드러운 맛이 없어지고 질긴 맛이 난다. 반꾸완은 라오스식 햄과 마늘 튀긴 것이 함께 나오고 달착지근한 간장소스에 찍어먹는다. 포장해서 가져갈 수도 있다. 반꾸완 속재료로 돼지고기를 갈아서 야채와 허브와 섞어 놓았다. 계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란을 풀어서 만들어주기도 한단다.
우리에게는 꼬치(꼬지)구이가 있지만 라오스에는 '삥'이라는 음식이 있다. 라오스 비엔티안 폰탄 군인병원 맞은편 '삥'가게가 쪼로롬이 몇 군데 있다. 다양한 재료로 5000K~20000K 내외 저렴한 먹거리(750원~3천원)들이다. 쇠고기․돼지고기 삼겹살․닭고기․닭다리․닭머리․소세지․어묵․생선․간(liver)․메추리 등 다양한 재료와 가격으로 한입에 들어가는 것에서 잘라서 먹어야 되는 큼직한 것까지 입맛대로 고르면 된다. 50%이상 초벌된 꼬치와 나머지 50%는 손님에게 선택이 되면 재벌로 완전히 익혀낸다. 땀막훙(쏨땀), 카오니아우(찹쌀밥), 물김치 등도 맛볼 수 있는. 뒤편 식당에서 맛볼 수 있고 싸이꽁(포장)으로도 가능하다. 대부분 라오인들은 싸이꽁으로 집에서 맛보는 별미인 듯하다. '텐밧'이 맥주(비어라오) 안주로 즐겨먹는 라오스식 육포로 한다발에 만킵(=약1400원). 천원짜리 먹거리를 우리네에서는 나름 귀한 참숯으로 구워내는 이곳은 바로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대중교통 이용하기란 아주 어렵다. '지하철'은 당연히 없고 버스는 노선에 대한 정보도 없거니와 운행-횟수도 아주 적어 버스가 오면 '오는갑다'하고 타는 식. 그리고 '뚝뚝이'는 많으나 바가지 씌우려고 혈안이 되어 20,000k이하로 가까운 거리라도 종종 운행도 하지 않으려는 배부른 영업을 한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의 몫돈에 중독된 듯. '택시'도 우리네 개념으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아닌 택시가 모여 있는 곳을 찾아서 아니면 콜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아무래도 라오스 비엔티안이 인프라가 작은 small-place이다 보니 기름을 아끼는 택시운전기사 중심의 영업인 듯하다. 비엔티안 택시-집합소('빠뚜싸이'에서 메콩쪽 쇼핑몰 맞은편)에서 택시 이용(금액)은 협상도 가능하고 미터(기)로도 가능한 듯하다. 가능하면 미터기를 이용하는 게 좋다.
'대장금' 사장의 소개로 오토바이 렌탈 가게로 가서 신형인 듯 깔끔한 오토바이를 하루 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빌리거나 숙소를 나와 숙소 부근 자전거대여소에서 하루 대여로 3만 킵으로 빌릴 수도 있지만 일행들은 성태우를 빌리기로 하였다. 라오스는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가용을 이용하는 부유층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장거리나 인접국가로 가는 버스는 VIP버스라 해서 누워서 갈 수 있는 그런 우리네 우등 고속버스 같은 버스이며. 장거리는 우리네 시내버스 중고차가 이용된다. 근거리는 썽태우라고 하는 우리 1톤 트럭을 개조한 차량이 이용되고, 시내에서는 뚝뚝과 점보, 그리고 지금은 밧데리를 이용한 미니버스도 있다. 지방에 가면 삼로라고해서 오토바이 옆에 사이드카라고 하던 형태의 것들도 있다.
성태우를 빌렸다. 차량은 적지 않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 별 문제가 없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위앙짠 숙소에 도착한 후 성태우가 안내하는 메콩강변의 한 나라의 수도답지 않은 수도를 둘러봤다. 도시는 정말 깔끔한 질서를 보여준다. 물론 차는 별로 없다. 하늘을 보니 별천지가 따로 없다.
깨끗한 공기, 따스한 햇살, 깔끔한 건물과 조용한 거리,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니라 마치 시골마을에 온 것 같다. 주위가 비엔티엔의 다운타운인데 그리 넓지가 않아 웬만하면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주요 건물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어 생활하는 데도 큰 불편이 없었다. 시티투어도 할 수 있는데 탓루앙, 빠뚜사이, 왓 호파깨우, 시사껫을 2시간 동안 돌아본다.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거리를 나섰다. 위앙짠은 라오스의 수도, 시원하고 잘 정비된 도로가 있다. 고급차들도 많이 다닌다. 이 가난한 나라 어디서 도대체 돈을 벌수 있었을까. 라오스의 모든 돈이 몰리는 위앙짠, 태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고, 위앙짠은 '라오스'에서 점차 '도시'가 되어 간다. 위앙짠에는 하루가 다르게 집이 지어지고 허물어진다. 그 신축건물의 상당수가 호텔인데, 아직은 돈이 나올 곳은 여전히 외국인뿐이다. 위앙짠에 하나둘씩 호텔과 식당이 들어설수록 도시는 세련되어 지겠지만, 반면 어지럽혀지겠지. 점점 뉴스에서는 범죄나 사고 소식도 늘어나게 되고. 라오스 비엔티엔(위양짠) 소형엔진을 장착한 3륜차로 오토바이를 개조한 툭툭 기사들은 방콕과 달리 말을 걸며 달라붙지 않는다. 한결 여유롭다. 대도시 방콕을 거쳐 비옌티엔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마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하다. 강변엔 각종 가게와 환전소, ATM은행, 바이크 대여샵,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하다.
라오스를 여행하다 보면 불교국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도시마다 화려했던 불교의 유적들이 불국토의 모습을 증언한다. 라오스 도시들이 그러하듯 위앙짠에도 도시 곳곳에 사원들이 가득하다. 대부분 재건축된 사원들이지만 거리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한 번쯤 들르면 좋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라오스 사람들의 얼굴엔 항상 미소가 잔잔하다. 중국 티베트 지역에서 시작한 메콩강이 남으로 흐르다가 라오스의 땅을 적시며 온갖 혜택을 잉태했다.
농산물이 풍부하게 나고 흐르는 강물에 그물을 던지면 언제라도 신선한 민물고기가 잡혀 올라온다. 바나나나 코코넛 등 열대과일도 풍부하다. 이 생명의 젖줄이 있기에 세계적인 빈국으로 꼽히는 라오스에서 국민들이 굶주리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순박한 데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서로 부딪치는 것을 싫어하고 남 험담할 줄도 모르며 어른을 공경하는 등 예절도 밝다. 이곳의 사람들이 순박하고 좋았다. 아무나 만나도 손을 곱게 모으고 인사를 했다. 처음엔 모르는 사람이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해서 놀랐지만 점차 나도 그렇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동남아 3국을 여행하는데, "관광을 하려면 태국으로, 유적을 보려면 캄보디아로, 사람을 보려면 라오스로 가라고 했다" 이 3개국을 돌아다녀 본 나로서도 아주 공감이 가는 말이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이다. 현지 발음으로는 비엔찬 또는 위엥짠 정도로 들리는데 프랑스식 발음으로는 비앵티앵이다. 그 뜻이 `백단 숲의 도시`라니 낭만적이다. 비엔티안은 주변 지역에 벼농사가 활발해서 라오스에서는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한다. 메콩강을 뒤에 두고 대통령궁이 있고 이 대통령궁 앞으로는 란쌍대로가 메콩강과 수직을 이루며 뻗어 있다. 란쌍대로 끝에는 이 나라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기념으로 세운 독립문이 당당하다. 황금빛 사원 탓루앙 스투파도 있다.
중앙에 3층으로 된 스투파를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배치된 사원은 사면에 담장을 두르고 입장료를 받는데 이곳에 신자들이 불상을 찾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담장 안 회랑에는 깨어진 불상 등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라기보다는 쌓아 두고 보관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만큼 열악하다. 비엔티안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찾는다면 왓옹트라 불리는 승려 학교다. 총 4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은 모두 남자들로 승려 옷을 입고 있다. 라오스 전통 사원 양식의 불당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불경을 강독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저곳에서 삼성과 LG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자동차는 현대차가 압도적이다. 란쌍대로를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 승리의 문 빠뚜싸이(Patouxai)가 보인다. 굉장히 커서 탓루앙 사원과 더불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시원한 메콩강을 우측에 끼고 라오스에서 가장 큰 건물인 동참 팔레스호텔 쪽으로 쭉 달리다 왼쪽으로 꺾어 대통령궁을 뒤로하고 넓고 길게 뻗은 도로를 달리다 보니 금방 빠두사이에 도착했다. 프랑스 개선문 본떠 만든 빠뚜싸이(Patouxai), 빠두사이는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 기념으로 지은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만든 꽤 큰 건물로 도로 한가운데 있으며, 위에 전망대도 있어 비엔티엔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상징물이 개선문의 이미테이션이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라오스 비엔티안을 방문한다면 꼭 둘러봐야할 사원은 왓 씨싸켓 사원, 왓 호 파깨우 사원, 탓루앙 사원이다. 위앙짠은 메콩강의 북동안(北東岸)에 펼쳐져있으며, 주요도로는 강과 병행을 이룬다. 위앙짠의 대로(大路)인 란쌍대로(Thanon Lane Xang)는 이들 도로와 직각(直角)을 이루며, 대통령궁에서 북동쪽으로 독립문인 빠뚜 사이(Patu Xay)를 지나,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기념물인 파 탓 루앙(Pha That Luang)을 향해 나있다. 탓루앙은 라오스말로 원조탑이란 의미이며 부처님 진신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숙소를 나서 얼마 달리지 않아 '탓 담(That Dam)'에 다다랐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시내에는 '탓 담(That Dam)'이라 부르는 벽돌탑 하나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위치가 도심인 데다 주변 다른 건물 풍경과는 달리 외양이 검은색인 까닭에 총리 집무실 앞 대로를 차지한 개선문과 더불어 비엔티안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탓 담은 'Black Stupa' 즉, 검은 탑이라는 뜻으로 실제 이 탑은 언뜻 보면 온통 검은빛을 띤다. 이 검은빛이 원래 탑 색깔인지는 분명치 않다. 원래는 금을 씌웠지만 태국 시암 왕조가 1827년에 침입해 그것을 긁어가는 바람에 검은 탑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직접 찾아 본 이 탑의 검은빛은 원래 탑 색깔이라기보다는 매연 같은 때가 앉아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한 변 대략 15m일 정방형 기단을 마련한 다음 그 위에 2개의 5층짜리 8각 탑신을 얹었으며, 그 위로 상륜부를 올렸다.
현지답사에서는 이 탑에 대한 어떠한 궁금증도 풀길이 없었단다. 어느 때 어떤 과정으로 누가 건립했으며, 언제 보수나 수리를 했으며, 규모는 어떠한지는 고사하고 탑 이름이 '탓 담'임을 알려주는 문화재 안내판조차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탑을 보면 (창건 이래) 최근까지 여러 번 손을 댄 것은 분명한데, 곳곳에 박락(剝落. 벗겨지고 떨어져나감) 현상이 심해 보수가 시급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라오스 문화유산 현장이 대체로 이와 같다고 보면 틀림없다. 수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에도 문화재 안내판이 없고 훼손이 이렇게 심각한데, 지방으로 내려가면 사정이 더 어려울 것이다.
라오스는 미얀마와 더불어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불교국가이다. 그래서인지 작은 마을에도 사원만큼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크고 화려한 모습으로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수많은 사원들만 둘러봐도 한나절은 족히 걸릴 정도로 라오스는 이미 사원이 하나의 도시 풍경이 되어 있다. 불교국가답게 비엔티안에는 유서깊고 관광지로도 이름 높은 사찰이 많다. 그중에서도 대통령궁 인근에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씨싸켓 사원과 왓 파케오 사원, 그리고 탓루앙 사원이 특히 유명하다. 이들 사원은 우선 외양만 보면 대단히 잘 정비되고 보존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훼손과 파괴의 신음을 내고 있다.
이번에 갈 곳은 왓 씨싸켓과 왓 파께우. 왓 씨싸켓은 외세의 비엔티안을 침략에도 꿋꿋이 살아남았다는 사원이었다. '탓 담(That Dam)'을 지나서 향한 곳은 왓 씨싸켓(Wat Si Saket), 아침 6시부터 12시, 1시간을 쉬고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문을 연다. 왓 씨싸켓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이 왓 씨싸켓을 보호했을까? 궁금했다. 빨리 달려가서 보고 싶었다. 왓 씨싸켓 사원은 비엔티안시 중심부, 대통령궁 건너편에 왓 호파깨우(호파깨우 사원)과 마주하고 있어서 대체적으로 걸어서 두 곳을 한 번에 관람하게 된다. 1818년 아누봉(Anouvong) 왕이 건설했다. 이 오래된 수도원은 본래 형태의 손상이 없어, 라오스에서도 가장 주목받을 만한 유적이다. 중앙 홀 안과 뜰 벽에는 총 6,840개의 부처상이 놓인 10여 센티미터 정도의 선반 수 백 개가 있다. 입장료는 5,000낍. 우리 돈으로는 약 700원 정도이다.
빠뚜사이에서 란쌍대로를 따라 메콩강변으로 향하면 대통령궁이 있다. 왓 씨싸켓(Wat Si Saket)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란쌍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어서 찾기도 쉬웠다. 라오스 국민의 삶과 예술과 건축은 지극히 불교적이다. 중국과 베트남, 미얀마와 프랑스에 정복되어 많은 유물들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것과는 다르게 번듯한 건물이나 사원입구에는 태극기나 오성홍기, 일장기를 라오스 국기와 나란히 팻말에 새겨 넣었다.
이렇게 라오스의 경제는 여전히 원조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발전 속도는 빠르게 느껴진다. 한 때는 마리화나가 담배보다 싸고 매춘소굴이 호텔보다 깨끗하고 편하다던 비엔티안도 미국 달러가 자국화폐보다 훨씬 대접받고 속속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덩치 큰 중년의 양키들이 자그마한 현지 아가씨들과 손을 잡고 식사를 하거나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된다. 이렇게 굴곡진 역사에서도 굳건히 지켜진 유일한 사원이 왓 씨싸켓이라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목이 잘린 많은 불상들은 핍박과 굴욕의 과거사를 말해준다.
남푸 분수를 지나 동쪽으로 걸어간 지 10여 분만에 도착! 대통령궁 바로 앞에 왓 씨사켓 사원이 있다. 시암(태국)이 침략했을 때 상하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사원이다. 자연히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랜 건축물이 되었다. 사원 회랑을 따라 가득한 불상들이 볼 만하다. 전체 불상의 수가 1만개를 넘는다.
비엔티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왓 씨싸켓(Wat Sisaketh Temple)에 도착하니 승려 몇 분이 뜰을 거닐고 있었다. 왓씨싸켓 사원은 비엔티엔에 남아있는 사원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사원 내부 담장에 6천890개에 이르는 은제, 혹은 토기 불상들을 모셔 놓고 있다. 1818년에서 1924년 사이에 아노봉(Anouvong)왕에 의해 건설된 왓 씨싸켓(Wat Sisaket)은 1828년 시암(Siam)과 전쟁에서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사원이다.
태국의 사원과 비슷한 스타일 덕분인지 1828년 태국의 침략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다. 태국 사람들은 다른 사원들은 파괴했지만, 희한하게도 왓 씨싸켓만큼은 멀쩡했다. 왓 씨싸켓이 비엔티안에서 특별한 것은 시암(태국의 옛 국가 명)과의 전쟁에서 파괴되지 않은 고찰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비엔티안의 다른 사원처럼 왓 씨싸켓에도 '행홋(Hang hod)'이 있지만 다른 사원과 달리 라오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처럼 만들어지지 않고 “나가(Naga)”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라오스를 식민지배했던 프랑스가 1924년 이 사원을 보수했고, 1930년에는 재건까지 했다. 보수, 재건이 이어졌지만, 외세의 침략에도 사라지지 않고 190여 년을 버텨온 건 대단한 일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하얀색의 불탑들이 눈에 띈다. 하얀색 담백의 입구에 들어서면 잘 꾸며진 조경과 함께 사원 입구가 다시 나온다. 왓 씨싸켓의 첫 인상은 차분했다. 파탓루앙의 화려한 황금빛 회랑과 비교되는 짙은 갈색 회랑 때문인가 보다. 파탓루앙처럼 사원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채, 20개가 넘는 원형 기둥이 세모 모양의 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원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눈앞에 신기한 광경이 보인다.
이곳은 사원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본당 입구에서 5000Kip을 받는다. 언뜻 보기에도 왓 씨싸켓 회랑의 모습은 파탓루앙의 회랑과 달랐다. 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원으로 가던 발걸음을 회랑 쪽으로 돌렸다. 회랑은 거대한 장식장이었다. 종 모양의 불감, 즉 불상을 담아두는 공간이 줄을 맞춰 촘촘히 마련되어 있었고, 조그마한 불상 두 개가 불감마다 놓여 있었다. 사원을 둘러싼 회랑의 불감에 놓인 불상은 수천 개를 넘어 2006년 기준으로 총 10,136개의 불상이 있단다. 작은 불상이 8,892개, 중간 크기가 120개 있다고 한다.
이 사찰은 우리의 사찰로 보면 금당 정도에 해당하는 중심 건물을 중심으로 그 사방을 빙 둘러 가며 회랑이 있고 그 회랑 안에는 도대체 전체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불상이 안치된 데다 그보다 숫자가 몇십 곱절 많을 벽감(壁龕) 속에도 무수한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아래로 세월에 빛바랜 불화가 장식되어 있다. 왓 씨싸켓은 대통령 궁과 함께 있는 왓 허파깨우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왓씨싸켓 사원 담장엔 6,890개 불상이 있단다. 재료로 보면 크게 청동, 석재, 목재, 소조의 네 가지로 나뉜다는 이들 불상은 회랑 안이라고 하지만 외부로 그대로 노출된 까닭에 먼지를 수북이 쓴 데다 대부분에서 심각한 박락 현상이 관찰됐다. 주존불인 석가모니상을 안치한 금당 내부 벽면 곳곳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가득했지만, 이 또한 벽면 곳곳이 떨어져 나간 데다, 물감 또한 벗겨짐이 극심했다.
왓 씨싸켓이 비엔티안에서 특별한 것은 시암(태국의 옛 국가 명)과의 전쟁에서 파괴되지 않은 고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엔티안의 다른 사원처럼 왓 씨싸켓에도 '행홋(Hang hod)'이 있지만 다른 사원과 달리 라오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처럼 만들어지지 않고 “나가(Naga)”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본당 내부에 모셔진 불상 뒤와 좌·우에는 작은 불상이 벽 속에 모셔져 있으며, 그 아래로 세월에 빛바랜 불화가 장식되어 있다.
맑은 햇살 아래의 단아한 사원 앞에는 금방이라도 승천할 기세인 용이 버티고 있으며 계단을 오르면 세밀하고 화려한 부조의 미륵불과 청동불상들이 사원을 두르고 있다. 산을 벗고 내부로 들어서니 향을 들고 허리를 숙이는 현지인들의 깊은 불심이 실감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크고 엄숙한 불상과는 달리 우화적이고 친근한 표정의 불상들이 대부분이다. 벽에 반원모양으로 홈을 낸 곳에는 아기자기한 불상들이 놓였고 어깨에 금빛가사를 두른 불상 하나하나에 화려한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신랑신부가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이는 간절한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부처상은 소승불교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불상에다 금박을 붙였는데 지금도 신자들이 금박을 붙인다. 불상 앞에도 불상이 두 줄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똑같은 불상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표정과 자세가 조금씩 다르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불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장인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들여 만들었겠지. 불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불상의 얼굴마다 서로 다른 희로애락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두 눈으로 사원의 경건한 유물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안과 밖은 겨우 벽 하나 차이일 뿐인데 사원 바깥은 다른 세상처럼 다가왔다. 라오스의 거리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다. 우리의 80년대 거리 같기도 하고, 그 사이사이 요소요소가 다채로운 동서양의 조화를 이룬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역사 때문에 비엔티엔(Vientiane) 곳곳에는 유럽문화와 아시아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까보다 사람이 늘었는지, 아니면 조용한 곳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크게 들렸다.
왓 씨사켓(Wat Sisaketh) 바로 앞 도로 건너에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왓 파 깨우(Wat Pha Kaew)가 있다. 씨사껫(Wat Si Saket)사원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원이다.
예전에는 라오스 왕실 사원이었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승려도 없고 예불을 올리는 의식도 사라졌다. 1565년 란쌍 왕국 시대에 세타티릿왕이 지은 절로 파케오(에메랄드 불상)를 모시기 위해 건축되었는데, 1779년 태국의 침입으로 이 파케오를 빼앗겼다. 왕은 수도를 란나(현재의 치앙마이)에서 위엥짠(비엔티엔)으로 옮겼다. 오른편에 계단이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면 각종 전시물이 있고, 내부에 볼거리가 많은데 사진 촬영 금지란다.
특이한 것은 라오스 보물과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에다 일련번호 비슷한 것을 흰 페인트로 막 적어 놓아, 보관해 놓은 건인지 방치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보존돼 분류에 문제가 많은 듯하다.
100여 년 전 비엔티안은 태국의 지배지였다. 라오스는 독립을 잃어버린 상황 하에 많은 사람들이 징병으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죽었고, 매년 금은보화를 싸얌에 조공해야 했고, 많은 국가의 보물과 유물들 또한 강탈당했다. 대표적으로 파 깨오 모라콧(에메랄드 불상), 파 쎄 캄(루앙 프라방 불상), 수정으로 장식한 흰 코끼리, 캄 피디까 같은 귀중한 고대 경전을 빼앗겼고 심지어는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던 대 철학자들까지 끌려갔다. 비엔티안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고 식민지의 초라한 백성으로 전락했다. 1779년부터 1829년 사이, 50여 년 간의 일들이다.
입구쪽 사원 정면에는 팔꿈치를 꺾어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불상이 서 있고 정원이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수도와 떨어진 방비엥이나 폰사반의 사원들은 그냥 자연그대로 방치되어 관리가 잘 안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역시 수도인 비엔티엔에 위치한 사원들은 이렇게 잘 정비되고 관리되고 있다.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사원은 박물관처럼 많은 불상과 역사적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 하며 사진촬영은 금지다.
파께우 사원은 그 뒤 1828년 태국과 라오스 간의 전쟁 속에서 다시 한번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지금의 건축물은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재건된 것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사용되어 라오스 최고의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6~9세기에 만들어진 드바라바티(Dvaravati) 양식의 불상과 라오스 스타일의 좌상이나 입상의 동불상 몇 개, 라오스어나 몬(Mon)어로 새겨진 비석들이 유명하다. 또한 내부 전시실에는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각종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 앞 열에는 손바닥을 내민 불상, 입구 양쪽 끝에는 손바닥을 펴고 땅을 가리키는 불상 등 두 종류의 청동 입불상이 있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은 "싸움을 멈추라." 즉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고, 차렷 자세로 손바닥을 펴고 끝을 땅으로 가리키는 뜻은 "비를 내려 달라." 즉 풍요를 기원하는 뜻이라 한다. 이들 입불상들이 힌두 양식의 영향을 받은 드바라바티 양식일까 싶은데, 드바라바티는 지금의 타이 메남강 하류에 몽족이 처음 세웠던 왕국이다. 6세기말 독립왕국이 되어 11세기말까지 독립을 유지하며 일찍부터 인도와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가진 몽족의 드바라바티(Dvaravat)는나중 그들을 정복한 크메르·미얀마·타이에 인도 문화를 전달하고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뒷쪽으로 보이는 돌들은 라오스어나 몬(Mon)어로 새겨진 비석들이다. 출입문 옆에 새겨진 천상의 무희 압사라(apsara)상 역시 힌두 사원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위대한 인드라 등 남신들이 출현할 때 동반하여 춤을 추며 위대한 신을 즐겁게 하고 유혹하는 압사라, 그런데 이 압사라는 힌두의 압사라와는 달리 요염함은 사라지고 불상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근엄하게 표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엔티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왓 파 깨우(Wat Pha Kaew) 사원은 우리나라 경복궁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사원은 사원 자체의 역사성보다도 태국과의 역사관계에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1779년 씨암(태국)이 이곳을 침략하여 이곳에 안치되어 있던 "에메랄드 부처"를 방콕으로 가져가 버린 것이다. 이 불상은 현재 "왓 프라께우"에 잘 모셔져 있으며, 당시에 함께 약탈당했던 "파방(프라방)"은 1839년 반환되어 루앙프라방 왕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에메랄드 사원에 에메랄드 부처상은 없지만 18세기 양식의 라오스에서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청동 불상들이 많다.
녹색 옥으로 조각한 높이 66cm의 이 에메랄드 불상은 1432년 치앙마이의 쩨디 루앙의 무너진 폐허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치앙마이 지역 란나(Lanna) 왕국의 왕으로 추대된 라오스 왕자 가 선왕의 서거로 1565년에 라오스왕(셋타티랏)으로 복귀하면서 가져온 것이었다. 라오스에서 무수히 많은 사원 중에서도 소박한 듯 하면서도 인상적인 불상이, 참으로 아름다웠던 사찰이다. 다양한 자세의 청동 불상이 사원을 빙 둘러 호위하고 있으며 아직 해독되지 않은 고문자가 새겨진 비석도 여럿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서산 마애삼존불을 떠올리게 하는 마애삼존불 돌조각도 찾을 수 있다. 그 은은한 미소가 복사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왓 씨싸켓과 왓 파께우를 둘러보고 왓 시무앙으로 향하였다. 도로로 나와 툭툭 요금을 물어봤다. 아저씨는 아무런 대답없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코팅된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인원수별, 목적지별 요금이 인쇄되어 있었다. 마치 식당에서 요리를 주문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 일행을 하루를 썽태우로 대절하였기에 다시 썽태우에 올라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바람과 굉음이 얼굴을 때리고 진동은 온 몸을 쑤셔댔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서 지나왔던 노점들과 란쌍 도로가 뒤로 달아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툭툭은 10여 분만에 우리를 왓 시무앙 안에 내려줬다.
왓 시무앙 사원(Wat Simuang Temple), 비안찬시 최초의 상징 기둥은 셋타티랏 길(Setthathirath Road)을 따라 세워진 반 시무앙(Ban Simuang) 마을의 왓 시무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늘 태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태국 라오스권에서 유명한 이 절은 '락므앙'이 있는 곳이다. 이 사원은 1956년에 세워졌고, '시(Si)'라는 토착민 소녀의 정령이 보호한다고 믿어진다. 전설에 따르면, 임신 중이던 '낭 시'라는 여인이 번제의 제물로 바쳐지자 절의 기둥이 구멍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한 이유로 소원을 빌고싶을 때 라오인들은 왓 시무앙으로 온다. 11월의 탓 루앙 축제 바로 이틀 전에 거행되는 다채로운 밀랍 성 행렬(Phasat Pheung)이 수많은 인파를 왓 시무앙 사원으로 이끈다. 이 행렬들이 탓루앙축제로 이어져 탓루앙축제의 서막을 연다.
이곳에 공양은 과일(코코넛, 바나나를 주로함)로 하고 향, 초, 꽃 등은 입구에서 얼마간의 돈을 넣고 가져오면 된다. 부처님상과 제단이 있는 방과 스님이 앉아 있는 방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부처님상이 있는 방에서 향, 초, 꽃을 놓고 절을 하고 향을 피워 제단에 꽂아놓고 나온다. 스님이 앉아 있는 방에서는 스님에게 물세례를 맞으며 푹켄을 받을 수 있다. 뭔가 향기가 나는 물을 자꾸 뿌리는데, 꽃을 섞은 물이라고 한다.
사원 마당에는 꽃 파는 사람, 실파는 사람 등이 있는데, 새를 파는 사람도 있다. 건물 뒤쪽에 그 '락므앙'의 주인공 '신'을 모신 제단이 있다. 돌들을 여러 층으로 무더기로 쌓아놓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단,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소원은 안된다고 한다. 그 제단 주변으로 7개의 불상들이 나란히 서있는데 불상마다 월화수목금토일이 각각 적혀있다. 라오스 사람들은 태어난 요일에 따라 모시는 부처가 다르고 각 부처마다 의미가 있단다.
그리고 찾은 곳이 탓 루앙이다. 빠두사이에서 우측으로 큰 도로를 잠시 가면 넓게 펼쳐진 광장이 시야에 들어오고 멀리 황금색 탑, 탓 루앙(That Luang)이 나타난다. '황금 사원'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광장을 건너 들어서는 문도 황금빛이요, 솟아 있는 탑도 황금색, 푸른 하늘 아래 사원은 황금빛으로 찬란하다. 라오스사람들에게 탓루앙의 의미는 특별하다. 국가의 화폐에 들어가 있을 정도이지 않은가. 탓루앙은 약 444년 전에 건축되었으며, 탓루앙의 위치는 인도의 아속마하랏의 부처님이 돌기둥을 심었던 곳으로, 당시 돌기둥 아래 부분에는 부처님의 뼈와 유물들을 묻은 것으로 알려진다. 원래는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갈비뼈와 머리카락 사리를 가져온 세 명의 스님이 조성한 작은 사리탑이었다고 한다.
이어 500년이나 된 오래된 사원에 발길이 닿았다. 사원 앞에는 수많은 노점상들이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파는 노점과 장신구를 파는 노점, 수공예품을 파는 노점, 옷가지를 파는 노점 등이 탓루앙을 보러온 사람들을 유혹했다. 사원 앞 커다란 나무그늘에는 현지인들과 많은 여행객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비엔티안은 관광지라기보다는 그냥 도시에 가까운 곳이기에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 입구에서 한국 글씨가 선명한 '자연보호'라고 새겨진 조끼를 입고 큰 통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돌아다닌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하나를 주문하니 큰 통 안에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는데 칼 비슷한 걸로 네모나게 잘라 조그마한 나무막대기에 꽂아 준다. 무척 맛있었다. 어린시절 먹어본 바로 그 맛이었다.
불교는 오래 전부터 이 나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문화재로 라오스에서 가장 크고 신성한 국립기념물로 여겨지는 탓루앙이 있다. 중앙공원인 빠뚜사이를 지나 라오스의 상징 탓 루앙(That luang = 왓 루앙(Wat Luang)에 다다랐다. 탓 루앙은 비엔티안과 라오스의 랜드마크 격인 사원(입장료 5,000Kip)이다. 탓루앙은 라오스말로 원조탑이란 의미이며 부처님 진신 사리가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루앙'이라는 말은 '크다, 공동적이다'라는 뜻이고 '탓'은 '탑'이라는 의미로 즉 '큰 탑' 또는 '공동적인 탑'이라는 개념이 된다. 탓루앙 사리탑(World Precious Sacred Stupa)은 불교력 236년(기원전 307년경)에 비안찬의 첫 지방 지도자였던 바우리찬(Bourichan) 혹은 파라야 찬타불리 빠싯티삭(Phraya Chanthabouly Pasitthisak)이 세웠다. 9 m 높이에 10 m 너비의 가마 모양을 하고 있다.
탑 앞쪽에는 탓 루앙을 세운 세타티랏왕의 동상을 만난다. 첫인상은 위엄으로 가득 찬 왕이라기보다는 카우보이 같기도 하고 목동 같기도 하고 그도 아니라면 코끼리 머리에 앉은 조련사일까 싶게 낭만적인 포즈. 국가의 권능과 신성을 상징하는 저 뒷편의 황금탑과는 안 어울린다 싶으면서도 라오스 불교의 정신에 어쩌면 더 잘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되기도 한다. 위앙짠과 루앙프라방의 주요 불교 유적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세타티랏왕은 라오스 역사에서 위대한 군주인 듯하다. 16세기 중엽 치앙마이의 란나왕조의 왕으로 추대되어 갔다가 다시 루앙프라방으로 돌아와 라오스의 왕이 되었고 이 때 가져온 에메랄드 불상(프라께우, 파께우)을 안치하기 위해 호 파께우 사원을 지었던 이가 바로 세타티랏왕이다.
16세기 중반 탓 루앙을 세웠다는 쎄타티랏 왕이 아직도 위엄을 간직한 채 앉아있는 곳을 지나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라오스인들의 해맑은 미소를 닮은 금부처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부처상 앞으로는 꽃병에 담긴 울긋불긋 화려한 꽃들과 시야를 가릴 정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향 연기가 라오스인들의 부처에 대한 존경심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연꽃 받침대 위에 왕국의 옥새를 엎어놓은 듯한 중앙탑(높이 45m) 주변의 사각형 하단부에는 같은 모양의 작은 탑들이 부처의 뼈를 지키는 호위병이라도 되는 듯 빙 둘러 위용을 뽐낸다. '위대한 불탑'이라는 뜻을 가진 45m 높이의 파탓루앙(Pha That Luang)은 신하들의 호위를 받는 여왕처럼 조그마한 창문이 있는 사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라오스의 국가 표장과 지폐에 등장할 만큼 라오스를 상징하고 있는 '왕국의 성스러운 탑'은 뾰족한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있다. 라오스의 가장 신성하고 유명한 사원인 탓루앙은 불교의 성지이자 국가의 상징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머리카락과 사리 등을 보관하고 있는 탓루앙에는 성지순례를 하는 이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성지이자 라오인들의 자존심이라 평가되는 곳으로 탑 주변을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웅장하지만 단순하고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는 라오스 양식의 이 탑은 태국이나 캄보디아의 사원에서 보는 탑의 형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탓 루앙의 중앙 사리탑은 연꽃 봉오리를, 이를 둘러싼 30개의 작은 탑(스투파)은 부처의 완성된 모습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탑은 석가모니의 갈비뼈와 머리카락 사리를 가져온 세 스님이 조성한 작은 사리탑으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1566년에 건설되었지만 태국과 중국의 침입으로 약탈을 당한 힘없는 라오스의 역사 유적지이기도 하다. 13세기에 만들어진 국가 상징으로서 수백 킬로그램의 금박이 입혀져 있었으나 1800년대에 극심한 약탈로 인해 파괴되었다. 1900년대가 되어서야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탓루앙이라는 공식 명칭은 셋타티랏 왕이 지난 1560년대에 수도를 시엥통(현재의 루앙파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긴 때부터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6년이 지난 1566년에 '탓루앙'이 요즘의 모양으로 완공됐다고 한다. 라오스의 탓루앙은 이러한 역사를 가짐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신선한 사리탑(World Precious Sacred Stupa)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탑의 맨 아래 기단 동서남북 각 면에는 공양을 할 수 있는 작은 전각, '호 와이(Ho Vay)'를 만들어 놓았다. ('호(Ho)'는 '사당'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정면의 '호 와이'에는 향을 피우고 공양하며 배례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탑 주변을 둘러싼 회랑으로는 라오스의 자연과 풍습, 소수민족 등을 담은 라오스 현대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벽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라오스의 문화와 정신적인 바탕을 더 이해할 수 있었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미술관이 따로 없는 때문인지 관광객들을 상대로 판매하기 위한 목적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지럽게 내걸린 모양새가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듯해 보였다.
원래 탓루앙은 3세기경 인도풍으로 지워진 사원으로 아쇼카왕으로부터 받은 부처의 유물을 모시던 사원이었다고 한다. 이후 크메르제국에 의해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크메르양식으로 재건되었고 16세기 중반 세타티랏왕에 의해 재건되었었고 195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세타티랏왕은 라오스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도자중 하나로 버마의 침공으로부터 라오스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자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으로 수도를 천도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 30개의 작은 탑들은 부처의 30가지의 완성된 모습을 상징하고 이들 탑 사이로 중앙에 솟은 중앙탑은 45M 의 높이로 연꽃 봉우리를 형상화 하고 있다. 라오스 특유의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라오스에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탓 루앙이 있는데 비엔티안의 그것이 가장 크고 또 아름다운 탓 루앙으로 손꼽힌다.
란쌍왕국의 성스러운 황금불탑 매년 11월이면 화려한 촛불을 든 승려와 라오스인들이 행렬을 하며 부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는 '분 탓 루앙' 축제를 여는 여의도 공원 크기의 광장을 지나자 탑은 한층 위엄과 육중함을 더한다. 매년 11월의 탓 루앙 축제 때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일주일 간의 준비 끝에 축제 행렬이 왓 시무앙(Wat Si Muang)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공연을 펼치며 탓 루앙에 도착하면서 절정을 이루는데,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탑돌이를 하며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고 한다. 라오스인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꼭 참가해야 한다는 탓 루앙 축제, 이제는 축제 기간이면 위앙짠 거리는 외국인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처음 탓 루앙을 지었을 때는 동서남북에 별도의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으로 동서의 사원 둘은 불타서 사라지고 현재는 남북의 두 사원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북쪽의 사원을 '왓 루앙느아(Wat Luang Nua)' 남쪽의 사원을 '왓 루앙따이(Wat Luang Tai)'라 부른다고 한다. 사원의 앞뜰 동쪽의 시원한 보리수나무 그늘에는 황금색 부처상들이 고요히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 있고, 정면 양쪽에는 입불상이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내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섰다. 중생들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베풀어 주겠다는 뜻을 가진 수인이다.
사원 건물의 옆과 뒤의 뜰에는 우리의 부도탑과 비슷한 모양을 한 크고 작은 묘탑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묘탑에는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항아리도 보이고 사진도 붙여 놓았다.
불교의 나라답게 사원은 죽은이들의 안식처, 묘지로서의 구실도 한다. 죽음 이후 아미타불이 기다리는 서방정토, 극락을 믿는 이곳 사람들은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맞이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사원 한쪽 너른 뜰에서 여학생 몇몇이 배드민턴을 치고 노는 풍경도 보인다. 죽은자들의 세상인 사원, 그 뜰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소녀들. 라오스 사람들에게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원을 둘러보며 아쉬운 점은 라오스 여느 사원도 마찬가지지만 탓루앙 사원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탓루앙 사원 중 회랑에 안치한 불상. 곳곳에 박락현상이 감지돼 보수가 시급하다. 이곳은 금당이 아니라 탑이 구역 중심을 차지했지만 그 주변 사방에는 회랑을 마련하고, 그 안에 어느 시대 불상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수많은 불상과 다른 조각품, 그리고 비석 등을 안치했다. 이들 미술품 또한 두터운 먼지가 낀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훼손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렇다 할만한 보존 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있었다.
현장을 둘러본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만약 우리가 손을 쓴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곳곳에서 보존의 손길이 필요하다"면서 "정부가 나서든지, 아니면 민간 차원에서든지 단순히 라오스의 유산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유산 차원에서 한국이 라오스 문화유산 보존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탑 근처를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탓루앙 사원 관람을 끝내고 나온 우리는 광장 앞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툭툭이를 타고 숙소로 향하려다 맞은편 도로에서 열대과일을 팔고 있는 장사꾼을 발견하였다. 라오인들은 어느 것 하나 인상 쓰거나 큰 소리 내는 법이 없다.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눈앞 현지인들의 순박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된다. 조금 불편해도, 조금 느려도, 조금 가난해도 이들은 행복하다. 욕심을 비우고 오늘의 행복을 사는 이들이 삶을 꾸려가는 곳.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택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예전에는 지나치기만 하고 맛보지 못했던 과일들을 산다. 길쭉한 콩모양의 과일 막 카암, 포도송이처럼 달린 막 렁꾸엉, 감자 모양으로 생긴 라뭇, 그리고 붉은색의 용과와 가지색 과일 망고스틴. 툭툭이를 타고 달리면서 우리는 열대과일이 주는 미각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동남아나라들이 우리나라보다 권위의식나 위계질서가 없는 것 같다.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 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나라처럼 권위적이지 않다. 그래서 젊은이랑 아저씨랑 서로 막대하면서 잘 놀고, 엄마아빠들도 짜증 한번 안내고 애들의 말을 존중해준다. 괜히 후진국이라고 하면 그런 권위의식이나 위계질서가 더 있을 것 같지만, 유교문화권이 아니어서 그런지 별로 그런 게 없다. 새로운 사실이다.
탓루앙 주변에는 지어진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원들이 있다. 점심을 먹으로 나갔는지 기도하던 승려도 사진을 찍던 사람들도 안 보인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뭔가 좀 먹어야 할 때가 됐다. 아침부터 걸어다닌 탓에 몸은 지쳤고 배는 고팠다. 막상 돌아가려니까 너무나 막막했다. 다음에 갈 곳은 왓 씨싸켓이라는 사원으로 파탓루앙과 완전히 반대방향. 솟을 대로 솟은 태양 아래 왔던 길을 걸어서 되돌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라오스사람들은 집에서 음식을 해먹기도 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음식을 사다가 먹는다. 조금씩 먹을 거면 실제로 사다가 먹는 것이 더 편하기도 하다. 비엔티안에는 몇 군데 야시장이 저녁에 형성이 되는데 탓루앙 앞에 형성되는 곳이 가장 큰 것 같다. 보통 오후 5시경부터 10시 정도까지 매일 형성이 된다. 음식에 따라 한국인의 입맛에 좀 맞지 않는 음식도 있지만(특유의 향 때문에) 많은 음식이 우리의 입맛에 맞다. 음식 시장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간이식당도 있다. 일반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어보는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라오스 여행은 이런 것도 재미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씬럿무(훈제 돼지고기)는 우리 입맛에 맞는다. 이거 하나면 찹쌀밥하고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뺏 옵, 까이 옵(훈제 오리고기, 훈제 닭고기), 물고기 소금구이(삥빠닌), 껍질을 벗기고 속살만 먹는다. 깽햇(버섯 국), 깽 노마이(죽순국), 야채볶음[버섯볶음, 돼지고기 야채볶음, 얌쿠아노마이(죽순볶음)], …. 수많은 먹거리들로 가득하다.
탓루앙을 돌아본 다음 우리는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빠투싸이(독립기념탑)로 향한다. 1km 남짓 걸어가는 도중에 우체국도 지나고 몽족시장, 아침시장도 지나게 된다. 거리에는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로 넘실거리며 라오스의 풍물들을 즐긴다. 한국인들을 포함하여 동양인들이 적지 않지만 백인들은 정말 많다. 동남아풍 '헐랭이' 바지를 패션처럼 입고 활보하는 백인 여성들이 특히 눈에 띈다.
탓루앙을 나와 시원한 매콩강을 우측에 끼고 라오스에서 가장 큰 건물인 동참 팔레스호텔 쪽으로 쭉 달리다 왼쪽으로 꺾어 대통령궁을 뒤로하고 넓고 길게 뻗은 도로를 달리다 보니 금방 빠두사이에 도착했다. 프랑스지배를 받았던 라오스, 베트남과 달리 직접 통치를 받지않고 간접 통치를 받았기에 그리고 일본인들처럼 잔혹하지 않은 프랑스인들이었기에 라오스 인들은 외국인에 대한 통칭을 '콘 플랑'이라고 한다. 프랑스 사람이란 말이다.
우리네가 예전 외국인을 보면 양키 또는 미국사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미국 사람도 콘 프랑, 영국 사람도 콘 프랑. 물론 현재에 와서는 콘 아메리카 콘 앙낏 등으로 확인된 사람에 대해서는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콘 플랑'이라 지칭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라오스가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축하하기위해서 지어진 상징탑이다. '빠뚜 싸이'란 말은 빠뚜는 문이란 의미이고 싸이는 빅토리 승리라는 의미이니 개선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말일게다.
빠뚜싸이(Patu xai)에 도착하니 곧게 쭉 뻗은 대로 끝에는 대통령궁이 보인다. 일행들은 빠뚜싸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빠뚜싸이로 향하였다. 음악분수대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걷거나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빠뚜싸이 내부는 외부와 180도 달랐다.
사람들이 간이 테이블에 앉아 쉬고 있거나 둥근 원을 만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도 돋보였다. 빠뚜싸이 입구 아치 윗부분은 부처님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었고, 천장은 금빛 테두리 안에 화려한 조형물이 박혀 있었다. 어느 미술관에서 불교 예술을 감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예사롭지 않았다. 입구가 이 정도라면 저 위에는 더 멋진 게 있겠지?
빠뚜싸이 꼭대기로 올라가보기 위해 우리는 각각 입장료 3천킵(0.4달러)씩을 내고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빛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어두컴컴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새로운 생명체가 튀어 나오는 건 아닐까. 묘한 기분이었다. 어두운 계단에서 밖을 바라보니 우리가 미로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계단은 상점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를 밖으로 데려다 놓았다. 미로의 끝은 너무나 눈부셨다.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빠뚜싸이에 사정없이 꽂히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옥상에는 승려 4명만이 조용히 벽에 붙어서 빠뚜싸이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선형 계단은 조그마한 전망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역시 옥상에서 볼 때보다 더 비엔티안의 전경이 잘 보였다. 우리가 걸어 온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쭉 뻗은 길에 차량통행도 많지 않아 더 시원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옥상 뒤 입구로 들어가니 나선형 계단이 위로 뻗어 있었다. 더 높은 곳에서 비엔티안을 내려다 볼 수 있나 보다. 얼른 계단을 빙글 빙글 돌아 올라갔다. 장난감도시처럼 보이는 예쁜 비엔티엔, 아기자기한 집과 그 사이 사이에 서 있는 푸른 나무 그리고 거침없이 뻗은 도로 위를 신나게 달리는 오토바이와 차량이 보기 좋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높은 건물은 어디를 봐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의 높이 제한이라도 있나? 빠뚜싸이가 비엔티안의 63빌딩인지도 몰랐다. 전경도 전경이지만, 부처님과 연꽃으로 만들어진 창틀도 하나의 작품이었다. 부처님의 실루엣이 아름다운 비텐티안의 전경과 겹쳐서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빠뚜싸이 뒤편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보였다. 빠뚜싸이 공원이 미니어처처럼 아담한 공원이었다. 큰 원 모양의 분수대와 그 주변을 둘러싼 푸른 잔디밭의 완벽한 조화. 그냥 도로가 쭉 뻗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림 같은 공원이 펼쳐져 있을 줄이야. 비엔티엔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빠뚜싸이(Patuxai)에서 남쪽 메콩을 바라보면 대통령 궁이 보이는데, 대통령 궁(Presidential palace) 왼쪽이 왓 호파깨우(Wat Ho Pakeo)고 그 맞은편이 왓 씨싸켓이라고 한다.
도로로 나와 툭툭을 타기로 하고 요금을 물어봤다. 아저씨는 아무런 대답없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코팅된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인원수별, 목적지별 요금이 인쇄되어 있었다. 마치 식당에서 요리를 주문하는 느낌이 들었다. 4만 낍이 정가였지만, 비싼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3만 낍에 남푸 분수까지 가자고 했더니 바로 'OK'한다. 요금이 깎일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사실 요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바람과 굉음이 얼굴을 때리고 진동은 온 몸을 쑤셔댔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서 지나왔던 노점들과 빠뚜싸이 그리고 란쌍 도로가 뒤로 달아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툭툭은 10여 분만에 우리를 남푸 분수 부근에 내려줬다.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좀더 분위기 있는 집을 찾기 위해 시내 중심가인 남푸 분수대 바로 옆에 있는 유명한 뷔페집인 컵자이 더 레스토랑을 찾았다. 조마 베이커리 건너편에 있는 여행객들에게 아주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우리가 찾는 레스토랑은 찾지 못하고 부근 식당에 들어갔다. 여전히 손님들 중 외국인이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이곳은 여행객들에게는 꽤나 유명하며, 가격은 3~4천 원 정도로 저렴하지만 음식의 질과 맛은 훌륭하다. 라오 맥주를 곁들여 먹는 점심은 어느 만찬보다 부럽지가 않다. 라오스 사람들을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다시 되새기게 한다.
비엔티엔은 동남아 여행의 단순한 라오스나 태국 캄보디아로 이동하는 경유지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면 관광지 이상이 매력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방콕과 달리 여행객이 지나다녀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그리고 비옌티엔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메콩강과 남푸 분수가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분수는 행사가 있을 때만 물을 뿜는다고 한다. 분수에서 4블럭 정도 가면 한국인 주인인 폰트레블 여행사가 있다. 빠뚜사이는 이곳에서 자전거로는 5~10분 정도 거리이다.
비엔티엔 맛집 남푸 커피, 남푸 분수대에서 가까운 현지 식당으로 다양한 국수전문점이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하면 모든 여행자는 남푸분수를 중심으로 모든 길을 말한다. 점심 때가 가까워오니 현지 직장인들이 쉬임없이 드나든다. 남푸커피 대표 국수는 메뉴판 맨 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이즈별로 금액이 약간 다르다. 후식으로 아이스커피(한잔에 6000k)도 맛이 매우 좋다.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 북동부의 접경도시 농카이와 마주하고 있는 비엔티안은 유장한 물길의 메콩강이나 달의 곡선처럼 유순한 모습이다.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도시는 그래서 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북쪽의 방비엥이나 루앙프라방 또는 남쪽의 팍세 등지로 향하기 위해 거치는 도시쯤으로 여기지만 하루쯤 시간을 보내기에 비엔티안만한 곳도 없다.
라오스 음식이름을 알아보면 삥빠(구운 물고기) 또는 텃빠(튀긴 물고기), 카오니야우(참쌀밥) 또는 일반밥, 텃 꿍뗀(잔 새우튀김), 똠양꿍(새콤달콤한 태국식 국), 삥꿍(꿍파오), 땀막훙(파파야 셀러드), 팍봉 파이댕(우리 미나리 볶음같은 맛), 비어라오, 물(후아쓰아. 호랑이머리마크;비어라오 공장에서 나오는 물), 살랏 옌(야채샐러드), 꿍뗀(이건 생새우를 양념해서 무친 건데 살아있어 춤춘다하여 뗀(Dance) 향이 있어서 한국인들은 50%만 먹을 수 있다) 기타 등등 손님 취향에 맞게 다양한 요리들이 있다.
※라오스인들이 즐겨먹는 1400원의 저렴한 한 끼 '칼국수 비빔면(10,000kip)' 맛집(여행자-place에서 나름 번화가 인 듯한 한국음식점(대장금, 한국식당), 큰 마켓, 쇼핑점 라인 맞은편)으로 갔다. 현지인과 외국인 손님으로 붐비는 로컬식당이다. 몇 가지 종류의 면이 있는 듯, 입구에서 (우리나라 칼국수 면처럼)밀가루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면을 가리키며 'no soup noodle' 하니 알아서 내어온다. 아니면, 주위 현지인들 맛보고 있는 걸 가리켜 'this same'하면 가져다준다. 다소 빡치(상차이)맛이 나지만 국물이 맛있다. 사골의 맛이 나난 듯하다.
라오스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재래시장 탈랏사오(Morning Market)를 찾아가는 길에 거대한 건물 탈랏사오 쇼핑몰이 보였다. 메콩강으로부터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리는 주도로와 거리는 우리나라의 소도시 정도의 규모로 아담하다. 툭툭이와 열대식물, 라오문자가 있어 이국 풍경임을 느끼게 할 뿐 거리는 잘 정돈되어 있다. 탈랏사오는 아침시장이란 뜻이라는데 지금은 하루 종일 시장이 열린다.
위앙짠은 인구 60여만인 라오스 최대 도시이지만 아직 철도가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태국 농카이에서 철도가 이어질 계획이라고 하지만 물자 수송이 주로 도로나 메콩강 수상 교통에 의존하는 편이라 경제 발전에는 지장이 많다. 2008년에 짓기 시작해 2009년에 완공한 저 건물은 말레이시아 갑부의 것이란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인 것은 새로 들어온 쇼핑몰과 새로 짓고 있는 공사장 건물 사이로 아직 탈랏사오(Talat Sao, 새벽시장)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만 여는 재래시장이 아니라 오후까지 문을 여는 상설시장이다. 라오스 자영업자들의 삶터가 거기 있다. 식료품과 생필품은 물론이고 의류, 모직, 보석을 포함한 다양한 물건을 판매한다.
대부분 시장이 그러하듯이 인파가 북적이는 비엔티안의 아침시장도 활기가 넘친다. 밤새 밀가루를 반죽하고 정성스럽게 구웠을 거리의 빵과 돼지고기 덩어리를 싣고 비키라며 소리를 지르며 바삐 지나가는 손수레, 잔인해 보이지만 군침 넘어가는 노릇하게 구운 새끼돼지 통구이를 구경하다 시장으로 들어선다. 먹거리 위주의 아침시장을 돌아보니 현지인들이 즐겨먹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주로 채소와 과일이지만 젓갈류에 코를 댔다가 그 독하고 역겨운 냄새에 혼이 나기도 하고, 고추하나를 입에 넣었더니 우리의 청양고추보다 훨씬 아리고 맵다. 가장 느긋한 국민성을 지녔다는 상식과는 달리 비엔티안의 시장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이름은 아침시장이지만 이름과 달리 관광객이 서서히 늘어나면서 종일 장이 서는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한다. 대개 노천시장 형태로 우리의 시골장터 비슷해 보인다. 사람들이 직접 재배하고 생산한 야채와 약초 등 농산물, 옷이나 직물, 각종 생활필수품, 먹거리 등을 사고판다.
입구 부근에 있는 옷파는 가게에서 여행중에 입을 면티 2벌을 샀다. 물론 안으로 들어가면 더 싸게 살 수도 있지만 2벌에 45000Kip이라고 하여 별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아 구입하였다. 라오스를 상징하는 그림이나 문구가 있는 걸로 골랐다. 그 외에도 실크 스카프, 골동품, 기념품 매장도 들어서 있어 가벼운 기념품을 사기에도 적당하다. 코브라, 전갈, 인삼이 들어있는 보약술도 있다. 이곳에서는 라오-아이스커피를 6000K(800원)으로 맛볼 수 있다. 비록 800원의 저렴한 커피이지만 몇 가지 정성어린 과정을 거친 후에 마무리는 원유로 달콤하게 해준다. 커피 판매대 간이의자에 앉아 800원의 여유를 즐겨본다.
이곳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순박하여 참 좋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낯선 여행자에게 손을 모으고 '사바이디' 하고 인사를 해서 나그네의 마음을 먼저 편안하게 해주었고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 아가씨들이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면 손에 들고 있는 먹을 것을 내주며 먹어보라고 말을 하는데 정말 예전 어린시절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미소가 얼마나 예쁜지 나그네에게도 마구 감염되는 듯하다. 비엔티엔이 라오스의 수도라지만 우리나라 작은 읍내만큼 작아서 너무나 소박하고 좋다. 언제든 이 미소를 보기위해서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미소였다.
비엔티얀은 라오스에서 가장 화려하고 오래된 도시로 라오스의 수도이다. 메콩강의 상류에 위치하며, 비엔챤에서는 메콩강 주변의 오래된 마을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고사원과 나무들이 외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벽을 쌓아 만들어 놓은 성 주위에 있고 성을 따라 늘어서 있다. 비엔티안은 프랑스에 의해 세워진 다른 아시아 도시처럼 거대한 규모의 대로는 없고 현대적인 도시이지만 진흙 투성이의 메콩강의 둑에 펼쳐 있는 이곳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어느덧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태국 국경과 맞닿아 있는 메콩 강변으로 산책을 간다. 비엔티안 여행자들이 주로 가는 곳은 메콩강 한쪽으로 형성된 다양한 호텔, 게스트하우스, 레스토랑이다. 골목길은 메콩강변의 뚝방길로 이어진다.
야시장은 메콩강변을 따라 형성이 되어 있는데, 라오스의 야시장은 호객행위가 없다. 강변에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외국인들도 많지만 현지 라오인들도 많다. 자전거를 세우고 카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시켰다.
대낮에는 덥고 볼품없는 곳이지만 해가 기우는 시각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메콩강 위에 뿌려진 햇살과 그 위에 배를 띄운 마을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고기잡이 어선 한 척이 유유히 떠다닌다. 메콩강 위로 떨어지는 해와 그 직후 주변 모든 것을 다른 세상의 것으로 만드는 그 매직아워의 오묘함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졌다. 강 건너가 타이이다.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타이와 라오스가 붙어 있다.
메콩! 동남아시아를 가르는 그 특별한 강의 이름인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메콩강을 '남 콩(Nam Khong)'이라 부른다. '남'은 '강'이나 '물'을 뜻하니 그냥 '콩강'이 된다. 콩강 건너편은 태국이다. 위앙짠 상류에서부터 라오스 남부지방에 이를 때까지 메콩강은 태국과 라오스를 가르는 국경선이 되어 흘러내린다. 중국 칭하이(靑海)성 남쪽에서 발원, 티벳고원을 거쳐 윈난(雲南)성으로 내려오는 이 江은 중국에서는 란창(瀾滄)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다가 라오스와 미얀마 국경을 이루면서 동남아시아로 접어들면서 메콩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다시 태국과의 국경을 이루다가 라오스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다.
다시 태국과의 국경을 이루면서 길게 태국 남부까지 흘러내려가다가 캄보디아 땅을 종단해 내려가고 마침내 베트남 남쪽에 거대한 메콩델타를 만들며 바다로 들어간다. 4000km가 넘는, 동남아에선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12번째로 긴 강이다. 그냥 크고 길다-라는 말로 정리해버리기에는 메콩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담고 있다. 이 강 위에서 수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몇 나라에 몇 명이나 될 것이며 이 거대한 강이 실어나르는 흙과 양분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먹는 곡식과 채소를 만드는 근본이 되어왔고, 또 계속 될 것이다.
내가 메콩강을 처음 만난 건 2006년 베트남에 처음 갔을 때였다. 캄보디아와 하노이, 호치민을 둘러보고 톤레샵 호수투어를 했다. 그래도 거대한 강과 그 강에서 사는 사람들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첫 만남이었다. 이게 메콩강이구나! '메콩강가-공원'은 우리네 한강시민공원과 같이 산책을 나온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 축구․에어로빅․런닝․운동하는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고 휴식하는 공간이다.
조용하고도 장엄하게 흐르는 강변에서 수많은 라오스 사람들과 간단히 눈인사를 하며 강변을 걷는다. 메콩강 개발 공사는 라오스 역사상 최대의 축제의 한마당이 될 루앙프라방으로부터 비엔티안으로의 수도 천도 45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기 위해 수행되었다. 이 공사는 수해에 대비해 강둑을 높이는 등의 재정비 사업의 하나로 14헥타르의 넓은 면적에 잔디밭, 쉼터, 산책로 등이 들어섰다. 메콩강 둔치는 마치 한국 서울의 한강 둔치를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강가에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라오스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또 땅인지 물인지 모르게 거대한 황토빛을 띠고 도도하게 무게감을 과시하는 그 물을 보고 있으면 특별한 존재감이 저절로 느껴진다. 그렇게 씨엠립의 메콩강을 보고 또 지금 육로로 이동해서 도착한 비엔티엔에서 저녁이면 강가에 와서 강으로 내려앉는 태양빛 아래서 강이 선물한 자이언트 피쉬를 구워 맥주와 함께 먹는 라오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황홀해 한다. 메콩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그 순박함에서 메콩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강변에는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강변을 끼고 길다랗게 늘어선 레스토랑, 저녁이 되면 여기저기서 생선 굽는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강변을 따라 불을 밝히는 주점들마저 아름답다. 저 너머 불빛은 태국의 가옥들이다. 라오스에서 메콩강을 끼고태국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 해도 좋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저녁 고기뷔페를 먹을 예정이므로 이곳에서의 맥주는 패쓰. 특히 야간 노점상들이 판매하는 식음료, 메콩강의 시원한 바람이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현지 주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나아가 불빛으로 치장된 강 건너의 태국 마을도 인상적이다.
위앙짠에 있던 메콩강 노점에서 팔던 홈메이드 찹쌀 아이스크림! 구경하며 지나가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잡으면서 자기가 직접 집에서 만들었다고 하면서 하나 먹으라고 권한다. 가격도 5000k(500원)이라서 그냥 하나 사먹었다. 앉아서 쉬면서 먹고 있는데 아이스크림 아래에 찹쌀밥이 들어있다. 쫀득쫀득하니 맛있긴 했지만 아이스크림은 다 먹고 밥은 남겨두었다.
라오스를 여행하다 보면 흔히 맥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냉장고 보급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라오스에서는 시원한 맥주, 시원한 콜라를 마시기 위해 흔히 얼음을 넣어 마신다. 그런데 콜라를 제조하는 방법이 독특하다. 라오스를 여행한 여행자들은 누구나 한번씩 마셔봤겠지만, 여기서는 봉지에 얼음을 집어넣고, 콜라를 따라주는 일명 봉지콜라가 보편화되어 있다. 이는 주로 거리에서 냉장시설 없이 시원한 콜라를 팔려는 게 목적이지만, 공병을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가끔은 봉지콜라의 비위생적인 얼음 때문에 배탈이 날 때도 있지만, 봉지콜라의 시원한 맛은 언제나 라오스 여행의 '추억의 맛'으로 남아 있다. 기껏해야 봉지에 얼음조각을 넣고 콜라를 부은 것뿐인데, 라오스를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에게 봉지콜라는 오래오래 잊을 수 없는, 짜릿하고 시원한 맛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메콩 강물로 해가 떨어지고 해는 지고 어둠이 찾아 들고, 강변에는 커다란 동상을 비추는 조명이 있다. 공원 앞에서 5시 부터 시작된 에어로빅이 7시가 넘어서도 끝날 줄 모른다. 비엔티안 시내에는 란쌍 왕조를 빛낸 왕들의 동상이 베엔티안 내 4곳 + 1곳에 세워져 있다. 왕조의 시작부터 왕조의 부흥기의 왕들의 동상들, 란쌍왕조의 초대왕 팡훔왕동상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루왕프라방 길의 중간 호텔 노보텔과 레지던스호텔파크뷰가 있는 지점에 공원이 있고, 그곳에 팡훔왕(짜오 팡훔)의 동상이 있다.
1353년 100만마리 코끼리라는 뜻의 `란쌍(Lang Xang)' 제국을 세운 팡훔왕은 병력 1만 명을 동원, 메콩강 유역의 무앙(Muang) 지역과 남쪽의 크메르 국경, 북쪽의 운남까지 정벌해 라오스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열었으며 불교 전파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라오스 국민들은 자주 이 동상을 찾아 과일과 음식 등을 바치며 경의를 표시하는데, 여기에는 고단한 삶을 극복하고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염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3대 란쌍왕조의 왕 세타티랏 왕의 동상, 탓루앙을 재건한 왕이기에 탓루앙 정면에 그 동상이 세워져있다. 우리의 세종대왕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음은 란쌍왕국의 마지막 왕 짜오아누봉(아누봉 왕)의 동상이 메콩강 강변에 세워져있다. 타이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체 태국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왼손에 칼을 차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장군이 메콩강을 바라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동상 주변에 있다. 동상 앞에는 사람들이 놓고 간 꽃도 수북히 쌓였다. 사람들은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간전한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동상은 프랑스지배하의 왕, 짜오 시사왕봉 왓타나(시사왕봉 왓타나 왕) 동상으로 왓씨사켓(씨사켓 사원) 옆에 공원이 있고 그 공원 내에 세워져있다. 라오스는 1975년 라오스 인민혁명당이 유일하게 창설된 이래 그 집권하에 있으며, 당의장 카이손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가 유지되어왔다. 1989년 총선거 후 최고인민의회는 1991년 8월의 신헌법 제정을 포함한 법 체계의 정비에 전념하였고 1992년 11월 카이손이 사망하자 당의장 캄타이 시판돈(Khamtay Siphandone), 전대통령 누학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로 바뀌었다. 신헌법에 근거하여 1997년 12월에 제2회 국민의회 총선거를 실시하였고 1998년 2월 캄타이 시판돈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신헌법에 따르면 라오스의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이자 최고인민평의회 의장이다. 의회(국민의회)는 단원제로 임기 5년의 의원 99명으로 이루어지고, 라오스 인민혁명당의 서기장이 총리직을 맡는다. 라오스 인민혁명당은 정치국에 의해 통솔되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조직·운영된다. 각 지방행정 단위에는 라오스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받는 인민혁명위원회가 있다. 옛 우파의 왕국 군대는 왕제 폐지와 더불어 해체되고, 파테트라오군(軍)을 모체로 하는 인민해방군이 구성되었다. 행정부의 주요 장관 등이 현역계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병역은 형식상 지원제이나 사실상 징병제이며, 복무연령은 17~26세이고 기간은 18개월이다. 병력은 5만 5150명이며, 정규군·지방군·민병·게릴라 부대로 구성된 지상병력이 주병력이고 5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외교는 비동맹을 원칙으로 하며, 베트남과 유대가 밀접하고 중국과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었으나 최근에는 긴밀해지고 있다. 카이손은 쿠바의 체케바라, 김일성과도 대등시되는 공산주의 혁명가의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라오스에 처음 도착한 날, 나는 라오스를 보고 우리나라와 정말 다르다고 느꼈다. 바로 옆 나라인 태국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었는데, 옆 나라인 태국과도 정말 다른 모습이었기에 기분이 참 이상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태국↔라오스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라오스는 중국. 베트남.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와 접한 인도차이나-반도(국가)로 그 중 가장 가난한 나라로 통한다.
국제표준수치 GNP 800~1000불의 나라 '라오스', 그런 표준적인 수치를 생각하고 라오스로 오시는 분들은 그 '수치(GNP)'와 '라오스의 물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주변국에 비해 빈곤하면서 물가는 상대적으로 20%내외 비싼 나라 라오스. 라오스는 한반도-면적 1.1배 넓은 나라로 남한-인구의 10분에 1로 땅은 넓고 인구분포는 낮은 나라, 자체생산보다는 해외에서 수입으로 의존하는 나라. '그런 경제에서 라오스속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의문이 자연적이고 당연히 생길 수 있다.
아마 우리네 여행자속 공존(레스토랑, 술집 등)하는 라오인들은 나름 라오스에서 중*상위 소득에 위치한 사람들로 라오스의 표준소득을 대표하는 서민들은 비엔티안 변두리쪽 그리고 북라오스 고산지역, 남라오스 외국인이 흔히 찾지않는 곳에 사는 진짜. 전통적인 라오인들의 경제수준이 아닐까? 그리고 문화를 즐기는 수준과 횟수의 차이가 아닐까? 한편으로는 우리가 진짜 전통적인 라오인들의 삶을 따라할 수 없으면서 GNP만을 맹신하며 한국에서 저녁 한 끼 가격으로 라오스에서 황제의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라오스를 잘 이해하지 못한 오해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라오스의 물가는 밥 한 끼에 우리 돈 2000원~4천원의 나라로 우리네 물가대비 절반 수준의 나라이다.
라오스를 여행하며 라오스가 매력적이고 맛나게 느껴지는 이유는 라오스여행에 대한 다양한 테마와 재미도 있겠지만 라오스(속) 맛집에 대한 매력도 대단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베이징duck '카오야(북경오리)', 서민들은 사먹지 못한다. 10만원도 넘은 어마어마한 경비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히 먹을만큼 착한 양도 아니기에. 라오스에서는 단돈 12$로 '카오야'(베이징덕;북경오리)를 맛볼 수 있다. 오리껍질을 포~떠서 딱딱한 식감이 아닌 살점이 좀더 붙은 식감이 부드러운 '카오야(북경오리)', 엷은 중국식 전병 그리고 신선한 야채와 함께하면 지구상 마지막 남은 미식세계의 낙원이 따로 없다.
우리네 입맛에 맞는 중국식 고기덮밥 '카오란나'도 맛본다. 우리네 장조림(고기) 덮밥인 듯 우리네 식감에 딱맞다. 52도 중국술 '이과두주'도 맛볼 수 있는 라오스 비엔티엔속 차이나레스토랑.라오스에는 다수의 베트남인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다양한 베트남음식을 저렴하고 흔히(쉽게) 맛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베트남쌀국수-'퍼' 한 그릇이 만원내외로 맛볼 수 있지만 라오스 비엔티엔(위앙짠)에서는 '퍼(베트남쌀국수)' 뿐만아니라 '베트남-쌈', '베트남-샤브샤브'까지 다양한 베트남음식을 저렴하게 맛보는 매력이 있다. 깔끔하고 넓은 베트남food-레스토랑. 맛이 음식을 다양한 소스로 찍어 신선하고 다양한 쌈을 우리네 전병과 같은 베트남-쌈에 싸서, 딱딱하게 나오는 베트남-쌈에 물기를 살짝 묻혀 연하게 만드는 것이 비법이다. 베트남-샤브샤브도 맛본다. 그 밖에 다양한 베트남음식도 먹을 수 있다.
※ 태국에서는 '무앙까올리(쓰끼식 불판)'라고 고기뷔페의 일종으로 둥근-봉오리 같은 불판에 원을 두르며 홈이 파인 골에 육수를 붓고 끓여 고기를 구워먹는 동시에 각종 오뎅류, sea-food, 채소, noodle까지 다양하게 '샤브샤브'해서 먹을 수 있다. 라오스 국왕동상 반대편(여행자 place) 메콩강을 따라 2층 라이브 레스토랑 '가라오케' 30~50m쯤 지나 우측편에 있다. 메콩강이 훤히 보이는 메콩강 고기-샤브샤브 뷔페, 우리네 저렴한 인공숯불과는 차이가 난다. 화력도 엄청 좋다. 이곳 라오스는 쌀국수 하나라도 먹으면 외부에서 술을 가져가서 먹어도 괜찮다. 메콩 여행자 거리 작은 로컬마트에서 참소주(18000k)를 구입할 수 있다. 라오스에 왔으니 비어라오 맥주로 시원함을 달래보는 것도 훨씬 더 운치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두꺼운 돼지비계로 불판을 달구어 돼지고기와 소고기 등 다양한 육류와 야채, 다양한 noodle 그리고 몇몇 sea-food까지 가져와서 요리를 한다. 소스는 미리 만들어놓은 것을 가져와 먹으면 된다. 베트남쌈, 춘곤, fried noodle 등 요리된 음식도 있다. 동남아 음식이 우리네처럼 반찬문화가 아니라 주문한 음식만 가져다주는 문화라 포만감은 덜할 수 있으나 저렴한 가격(1인 30,000kip(4200원) '고기-샤브샤브'뷔페, beef(소고기), port(돼지), 닭고기 등 다양한 육류와 샤브샤브로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어묵과 채소 그리고 면류 등)에 행복한 포만감을 위해 종종 먹을 만한 곳이다. 갈비찜, 볶음밥 등 요리된 먹거리도.
저녁을 먹고 메콩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비엔티엔의 길거리음식 중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메콩강변의 포장마차다. 강변을 걷고 있는데 빨간색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풍경이 반가워 일단 자리에 앉아 조금만 주문한 직화구이 치킨 바비큐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완전 반해버린 우리는 홧 타이와 스티커 라이스(우리나라 찰밥) 그리고 비어 라오까지 주문하여 환상적인 저녁식사를 하였다. 가격 또한 아주 저렴하여 그렇게 많이 먹고도 4000Kip(우리나라 돈 5000원 정도)이었다. 생선을 먹고싶다면 그것도 메콩강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을 먹고싶다면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음식 이름, "빠!"를 외친다.
생선은 종류가 아니라 크기로 가격이 정해지고, 배를 갈라 속을 채워 숯에 구워 풍미가 아주 독특하다. 민물고기에 대한 막연한 비린내의 추억은 잠시 내려놓은 채 정신없이 먹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만해도 한가하던 포장마차는 본격적인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빈자리 하나없이 꽉 찼다. 대부분이 가족 외식을 즐기러 나온 현지인들이다. 덕분에 우리도 마치 일상을 즐기듯 그들과 어울려 너무나 흥겹고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보면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맛집보다 때로는 이처럼 이름없는 길거리 식당에서 즐기는 유쾌한 한 끼 식사가 훨씬 더 따뜻하고 오랜 추억을 안겨준다.
또한 메콩강 강변에서는 통유리로 되어 있는 화려한 클럽에서는 모델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생일파티를 즐기는 상류층 젊은이들의 화려하고 여유로운 밤문화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방비엥이나 루앙프라방에는 만나볼 수 없는 라오스의 현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엔티엔이 다른 나라의 도시처럼 화려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다. 도시라고 하기엔 골목이 너무 좁고 지저분하며, 툭툭이가 일으키는 흙먼지 때문에 저녁이면 손톱 밑이 새까맣게 되기 일쑤다.
벼가 자라는 소리, 쌀이 익어가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곳. 아시아에서 가장 길고 넓은 메콩강이 흘러가는 강 유역은 라오스를 포함해 세계 제일의 벼농사 지역으로 손꼽힌다. 아열대 기후인 라오스에서는 벼농사가 3모작까지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욕심 부리지 않고 1모작 농사를 짓고 만다. 2모작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힘들게' 살 이유가 있느냐는 식이다. 밥은 라오스어로 '카우'라고 한다. 찹쌀밥은 따로 '카우 냐우'라고 하는데, 우리 입맛에 딱 맞다. 볶음밥 '카우 팟'도 우리 입맛에 잘 맞는 편이다.
흔히 동남아를 여행하는 한국의 여행자들은 밥이 맛없다고 여길 때가 많은데, 라오스에서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라오스의 밥맛은 동남아에서도 우리의 밥맛과 가장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의 밥하는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우리가 밥을 물에 끓여서 한다면, 여기서는 물이 끓는 수증기에 밥을 찐다. 라오스에서는 밥을 할 때 화덕을 사용하는데, 우선 화덕에 장작불을 피운 뒤, 그 위에 들통같은 원통의 물통을 올려놓고 물통에 물을 부은 다음, 물통 위에 다시 고깔 모양처럼 생긴 채반을 올려 그 안에 쌀을 안친다. 그러고나서 화덕에 불을 때면 뜨거운 김이 올라와 밥이 쪄지는 것이다. 이럴 경우 채반의 위쪽에 있는 쌀은 익지 않기 때문에 번갈아 위아래를 뒤집어준다. 그러면 골고루 밥이 익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밥을 하고 나면 이들은 코코넛 잎이나 산죽으로 엮은 밥통에 담아 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떠다 먹는다. 이들의 밥통은 아침에 공양통으로 바뀌는데, 승려들이 딱밧(탁발)을 돌 때, 이 공양통을 가지고 나와 한 움큼씩 공양을 하는 것이다. 라오스의 거리에서는 종종 찹쌀밥을 팔거나 찹쌀떡을 팔기도 하는데, 그 맛은 우리 입맛에도 안성맞춤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기는 없지만 일행들은 술 생각이 나서 노천식당을 찾았다. 시장 갈 때 얼핏 지나쳤던 현지인 먹거리 노점시장을 발견했다. 외국인은 거의 없고 다 오리지날 현지인들만 오는 그런 곳이었다. 맛난 것들이 많았다, 찹쌀밥, 돼지갈비 숯불구이, 야채볶음들, 생선구이, …. 우리는 편한 자리보다 시원한 밤공기를 쐬고 싶어서 야외 자리에 앉았다. 메콩강변에서 라오족의 전통 생활상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라오스는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아 나는 막걸리 생각이 나 '라오 하이'를 주문하고, 소주를 즐기는 이는 라오족의 전통술인 '라오 라오'를 주문했다.
라오스에 가면 여행자들이 꼭 한번씩 맛보는 술이 있다. 라오스의 전통술, 라오라오(Lao Lao)다. '라오 라오'에서 앞의 라오는 라오스를 뜻(라오스에서는 자기네 나라를 그냥 '라오'라고 부른다)하는 것이고, 뒤의 라오는 '술'이란 뜻의 라오 말이다. 그러니까 '라오라오'는 '라오스의 술'이란 뜻이다. 라오라오는 일종의 곡주(Lao Rice)인데, 우리나라의 발효주 또는 증류주 방식으로 내리는 소주와 흡사하다. 라오라오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쌀을 발효해 위에 뜬 맑은 술을 떠낸 발효주 라오라오와 발효주를 한번 더 소줏고리에 붓고 불을 때서 술을 받아내는 증류주 라오라오가 그것이다.
라오스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두 가지 라오라오를 모두 맛보았는데, 발효주 라오라오는 마치 우리나라의 한산 소곡주를 연상시키듯 달착지근한 게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었다. 그러나 증류주 라오라오는 마치 몽골이나 러시아의 보드카를 마시는 것처럼 독하고 쌉싸름했는데, 먹고 난 뒤 머리까지 아팠다. 발효주 라오라오는 보통 15도 정도이고, 증류주 라오라오는 30도가 넘는 독한 술이다. 흔히 술집에서 파는 '라오 라오'는 후자에 속하는데, 메뉴판에는 '라오 위스키'라 적혀 있다. 루앙프라방의 몽족시장이나 메콩강변 전통마을 등에서는 라오 위스키에 뱀이나 전갈을 넣은 술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뱀술과 전갈술은 라오스에서 정력주로 알려져 있지만, 약간 혐오스러워 선뜻 구입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전갈술과 뱀술은 시장이나 전통마을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는 인기 품목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음식을 더 소개하자면 다이어트에도 좋고 피부에도 좋아 늘씬한 미인들이 즐겨 먹는다는 메콩 여행자 거리 근처에 있는 '솜땀(spicy papaya salad)', 태국뿐만 아니라 라오스에서도 아주 대중적이고 사랑받는 청정한 음식이다. '솜땀'(15000k)을 처음 맛볼 때는 더운 나라에서 땀이 날만큼 맵고 짭조름한 젓갈맛에 한 젓가락 먹고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 심오하고 독특한 맛에 익숙해진다면 '솜땀' 매니아가 된다.
'솜땀'은 '매운 파파야 샐러드'를 말하며 태국 북동부 이산푸드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파파야와 라임쥬스, 우리네 젓갈과 같은 생선소스나 새우젓갈, 그리고 고추, 땅콩, 토마토 등으로 조리되고…, 4,000K(560원) 달콤하고 담백한 음료로 시작, 늘씬한 미녀들의 음식인 '솜땀' 15,000K 맛본다. 매운 '솜땀'에 튀김과 쌀국수 담백함의 조화. 그 맛은 달고 시고 매운맛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있다. '솜땀'은 미녀들의 음식으로 이곳에는 젊고 늘씬한 미녀들로 가득하다. 얇게 썰은 (생)파파야의 새콤함과 칠리소스의 매운맛, 새우젓갈의 짭잘함 그리고 땅콩의 담백함까지, '솜땅' 한입하면 처음 맛보는 이들도 충분히 맛나게 경험할 수 잇을 듯하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때에는 메콩강변에서 라오스 전통음식으로 차려진 만찬을 꼭 맛보기를 권한다. 고원지대에서 재배한 라오스 쌀은 베트남과 달리 차져 씹을수록 고소한데다 모든 음식이 담백해 부담이 적다. 대체적으로 칼로리가 낮아 배부르게 먹어도 살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진한 맛이 매력적인 '라오 맥주'를 곁들이면 여독은 눈 녹듯 사라진다. 맥주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마셔 본 맥주 중에 라오맥주가 단연 으뜸이었다. 미얀마에서도 3년 동안 살다 라오스에 와서 식당을 한다는 사장은 작은 키와 마른 체구에 새까맣게 그을려 현지인들과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숙소로 향하며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포장마차. 야시장에선 비엔티엔 현지인 뿐아니라 관광객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포장마차에서는 개구리 등을 바로 숯불에 구워서 판매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개구리 뒷다리 구워먹던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 포장마차와는 다른 메뉴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용하면서도 활력이 느껴지는 비엔티엔의 야시장의 모습이다. 야시장 주변 상인들도 친절하고 밤에 다녀도 치안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야시장에서 먹어봐야할 길거리의 먹거리들, 가격도 대부분 천원미만으로 부담도 없다. 원하는 과일을 직접 갈아주는 쥬스도 시원하게 마시며 비엔티엔의 밤거리를 걸어다녔다. 2시간 정도 비엔티엔의 밤거리를 걷다가 메콩강 옆에 위치한 숙소에 돌아왔다. 젊은이들이 더러는 마리화나도 피우고 있는 모습도 보이지만 라오스의 카페는 대체적으로 11시면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광란으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비엔티엔의 밤풍경을 하루밖에 느낄 수 없어서 너무나도 아쉬웠다.
라오스의 어둠이 내리고 시원해지면 젊은이들 거리에는 생과일 쥬스와 스낵을 먹으려는 젊은이들이 모인다. 여기는 시험 사거리. 라오프라자호텔 앞길에서 공항 방향이다. 싱싱한 과일을 즉석에서 갈아 생과일 쥬스를 만들어준다. 달콤한 남완. 과일즙에 설탕 시럼을 넣어 달콤하게 만들어놓은 쥬스. 통 가운데 비닐봉지가 들었는데,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과일을 주문하면 주걱으로 휘저으며 절구로 찧는데 절구는 음식을 직접 찧는 것이 아니고 옆을 찧어서 약간의 즙이 배어 나오게 한다.
라오스엔 저장창고 시설이 부족하고 과일을 보관하지 않기에 제철과일들이나 먹을 수 있고 지난 과일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5월에는 망고(막 막무앙), 람부탄(막 응어), 망고스틴(막 망쿳)은 과일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맛있는 과일이다. 막 렁껑, 사과(애쁜), 파인애플(막 낫), 메론, 용과(막망껀), 투리안, 야자수(막 파오), 바나나, 수박, 그외에도 우리의 잣 익기 전 벌어지기 전 모습으로 생긴 그리고 크기는 큰 솔방울만한 막끼얍(너무 달다), 막 먼카이, 구아바(막 시다) 등 수많은 과일이 있다.
라오스 여행기
첫댓글 루앙파방, 방비엥 좋죠. 한번 가셔도 후회가 안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