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교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동' 혹은 '노동자'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나 역시 그랬다. 중학생 때 아니, 어쩌면 고등학교 입학 당시에도 노동이라고 하면 공사장을 떠올렸고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 혹은 폭동 같은 것을 떠올렸다. 다행히 지금은 점필재 캠프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내 주변의 친구들은 아직 과거의 나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얼마전 학교에서 노동운동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런 빨갱이 사상이 담긴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훗날 지금의 10, 20대가 이끌어갈 우리나라의 사회는 참담할 것이다. 갑질은 더욱 포악해질 것이며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점필재 캠프와 같은 활동이 더욱 활성화 되고 국가차원에서의 노동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도 기업의 노조 뿐만 아니라 군인, 소방관 등의 노조가 생기고 노동자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옳은 사회가 될 것이다.그런데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왜 진작에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점필재 캠프와 같은 노력은 청년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충분히 시행될 수 있지만 국가차원의 교육과 같은 거시적인 대책은 시행되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진다. 어휘선택이 과감할 수도 있지만 이는 기득권층의 계략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시는 하종강 교수님의 강의에서 소개된 '카트'라는 영화이다. 예고편을 보고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어느 순간 극장가에서는 사라져버렸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과 무려 엑소의 디오라는 분도 출연을 하였는데도 극장가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개봉 즉시 보았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내에서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나 뿐이었다. '카트'의 실화 내용은 강의에서 소개되었으니 생략하고 '또 하나의 약속'의 실화는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 판단하여 간단하게 소개만 하겠다. 무려 삼성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갤럭시를 만들어내는 삼성전자의 이야기이다.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 일부가 백혈병에 걸리고 사망을 하자 유가족들이 산재를 신청하였으나 삼성을 개인의 불찰이라며 산재를 거부하였다. 현재는 일부만 산재 인정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내가 삼성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하다. 영화가 개봉하자 삼성의 고위 관계자분들과 그런 분들과 잘못된 만남을 가지고 계신 몇몇 분들이 썩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극장가에서 빨리 사라졌으리라 짐작된다. 노조가 있었다면,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우리사회가 그런 일에 제대로 분노할 줄 알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하지 않은 정도는 아닐지라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정말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고. 실제로 근대의 경험주의 사상가 가운데 흄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을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라고 한다. 솔직히 도덕적 행위까지 바라지 않는다. 그저 다란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그것이 그나마 현실적이고 가능성 있기 때문이다.
공감과 함께 지식인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라고 하면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 박사 학위를 단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자식인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명성 또는 타이틀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돕고 기울어진 사회를 바로잡는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지식인이다. 그런데 요즘 공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중학생도 욕을 한다. 신분제를 되살려야 한다, 국민은 개돼지이다, 파업은 불법이다, 비정규직을 늘려야한다 등등 정말이지 뭐 같은 말을 해댄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기득권층이라는 것이다. 모둔 기득권층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기득권층이 그렇니까,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사회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생각을 해보자. 기득권층이 노조를 만드는 것을 막고 비정규직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는 등의 행위의 이유는 무엇일까? 기득권층이라는 용어의 뜻 그래도 그들이 가진 것들을 위해서이다. 돈, 권력, 명예 등이다. 그들은 일반 국민들이 가진 것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사회적 희소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대물림이 극심한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적으로나 사회구조적으로나 큰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자손들에게 기득권의 물질적, 비물질적 자산들이 물려질 것임에도 악착같이 그것들을 끌어다 모은다. 물론 극심한 대물림도 해결되어야 할 우리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이지만 작은 것 부터 해낸다는 생각을 하고 기득권층의 만행을 우선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청년들은 준비가 되었다. 이 점필재 캠프만 봐도 그렇다. 나는 이제 학생의 신분으로는 참가할 수 없지만 많은 후배들은 내년에도 그 다음에도 계속 이 캠프에 참가할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사회에 나갈 것이고 이미 나간 선배들도 많다. 다시 말한다. 청년들은 준비가 되었으니 기득권층이 한 발 물로서게 하는 등 조금만 물꼬를 트게 하자. 그러면 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이루어져있고 강자가 약자를 이용하는 것이 절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사회가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점필재 캠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