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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2023년 11월 4일 (토)
o 날씨: 흐림
o 경로: 흥인지문 - 광희문 - 남산 - 숭례문 - 돈의문 - 인왕산 - 창의문 - 북악산 - 숙정문 - 혜화문 - 낙산 - 흥인지
o 거리: 24.6km (도상거리 19.2km)
o 소요시간: 7시간 40분
o 걷기정보: 서울한양도성
o 지역: 서울
o 일행: 나홀로
o 트랙:
▼ 코스지도
전국적으로 주말 비가 예보되어 있는 가운데 그나마 서울은 소강상태라고 해서 내년 봄 예정하고 있던 한양도성길 종주를 나섰다.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한 서울도 좋지만 가을빛이 짙어가고 있는 서울의 모습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흥인지문에서 출발하여 서울도성길을 종주한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거리는 대략 20km 정도 되니까 5~6시간 이면 충분할 것으로 계획을 잡고 흥인지문 옆 관리소에서 스템프투어 지도를 입수한 후 출발~~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약 70%, 13.7km(2023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숙정문 · 광희문 · 혜화문을 중건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 중에서 발췌)
[흥인지문] 조선시대에 한양의 도성을 보호하는 문은 모두 8개였다. 흥인지문은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삼은 시기인 1396년에 지어졌다. 조선의 제6대 임금인 단종 때 손질한 기록이 있고, 고종 때인 186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 흥인지문은 돌을 쌓아 만든 아치 모양의 홍예문, 2층의 멋스러운 문루, 반달 모양의 튼튼한 옹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특한 점은 도성에 있는 8개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흥인지문에만 있는 옹성이다. 이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옹성 한쪽을 터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흥인지문의 규모는 크고 웅장한 숭례문에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숭례문이 조선 초기의 건축 특징을 가진 반면,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DDP를 자세하게 돌아보고 싶은데 한양도성길은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기 때문에 DDP 내부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광희문]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희문에서 다산성곽을 잇는 광희장충 성곽마을은 옛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문화 도심지이나, 일제강점기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문화주택단지 조성 과정에서 대부분의 성벽이 멸실/훼손되거나 주택 아래로 묻혀 있는 '한양도성성곽멸실구간'으로 이곳을 걷다보면 잔존해 있는 성곽을 볼 수 있다...
국립극장을 지나면 남산방향인데, 하필 한양도성길 정비사업이 진행중이라 안내판이나 다운받아온 트랙이 무용지물이다. 좌로 우로 몇번 우왕좌왕하다가 남산벚꽃길로 우회하여 접속을 하고...
K문화와 관광도 Globally 인기가 많은가 보다. 남산을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국인.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날씨라 흐리고 습도가 높은 것이 흠이다. 청명한 날씨면 서울 곳곳이 깨끗하게 내려다 보일텐데...
[남산타워] 서울시 용산구 남산공원길에 있는 전망타워와 문화·상업 복합시설을 통칭한다. 전망대·송신탑 부분인 N서울타워와 문화·상업 시설 부분인 서울타워플라자로 구성되는데,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며 남산타워 또는 서울타워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타워의 총 높이는 탑신 135.7m와 철탑 101m를 합하여 236.7m이며, 남산의 해발고도 243m를 합하면 타워 정상의 해발고도는 479.7m에 달한다.
원래 방송국의 전파 송출을 위한 종합 전파탑으로 건설되었다. 1969년 12월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 3개 민영 방송국의 공동 투자로 착공하여 1971년 콘크리트 탑신과 공중선 철탑을 준공하였고, 1975년 8월에 전망대를 완공하였다. 완공 후 체신부를 거쳐 체신공제조합이 소유하였으며, 처음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전망대를 공개하지 않다가 1980년 10월부터 서울타워라는 명칭으로 일반에 공개하였다. 1982년에는 세계거탑연맹(WFGT)에 가입하였다.
이후 2000년 4월 YTN이 인수하여 2005년 4월 타워층을 CJ그룹 계열사인 CJ푸드빌에 임대하였으며, 타워층은 전면 개보수 공사를 거쳐 2004년 12월에 N서울타워라는 명칭으로 재개장하였다. 또한 2013년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하여 종전까지 타워 하단부의 본관층에서 상주하던 각 방송사 직원들이 철수함에 따라, 본관층은 문화·상업 복합 공간인 서울타워플라자로 개보수되어 2015년 12월에 개장하였다. 지하 1층부터 P4층(플라자 4층)까지는 서울타워플라자, 그 위층들은 N서울타워로 구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산봉수대]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남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하여, 갑오경장 다음해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어 왔다.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대라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게 되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5개소가 있었다 하는데, 현재 봉수대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 자리를 확인할 수는 없는데, 『청구도』등의 관련자료를 종합하여 1개소를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산을 내려오면 한양도성유적 전시관과 안중근 기념관 그리고 백범광장을 지나 숭례문으로 이어진다. 백범광장에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서 뭔가 했더니 '수요포럼'이라는 단체행사인데 서울시장이 함께하고 있었다. 행사도 좋지만 모든 정치인들이 민생에 집중했으면...
[숭례문]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도성의 남쪽 정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숭례문을 지나면 도심속 빌딩숲 사이를 지나 아펜젤러기념공원과 배재어린이공원을 통과하여 정동으로 이어진다. 정동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 답게 젊은 기운이 넘친다. 정동길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들이 노란색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서울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곳이다...
돈화문은 일제강점기때 철거되고 없지만 돈화물박물관마을이 대신하고 있다. 문화행사도 열리고 있고. 돈화문박물관마을을 지나면 서울시 교육청과 시민대학 그리고 월암근린공원을 지나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돈의문]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대에 서전문(西箭門: 서살문)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금까지는 평지길이었지만 인왕산부터 북악산을 넘기 까지는 산길이다. 비록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걷기가 아니라 등산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인왕산 자락에도 이런 저런 볼거리가 많은데 오늘은 갈 길이 멀다...
인왕산 정상에도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 간편/간단 차람의 외국인들도 제법 보이고. 도심과 가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산들이 있다는 것도 서울의 경쟁력 일 것이다...
[인왕산] 서울시를 분지로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산의 높이 338.2m이며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경희궁 뒷편 사직동 한국사회과학자료원 앞 인왕산로 1길을 서울성곽이 이어지며 인왕산 선바위를 지나 범바위를 지난다. 서울성곽은 인왕산 정상부로 이어지는데 메부리바위, 치마바위, 삿갓바위로 이어지고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자하문(창의문)과 연결되고 그 다음 북악산으로 이어진다. 인왕산은 고려시대부터 불교사찰이 많았던 곳이며 현재도 5~6곳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 조선 중기 명나라 사신이 임금을 보필한다는 의미에서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연유로 필운대(弼雲臺)와 필운동(弼雲洞)의 이름이 남아있다. 필운대에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집터가 남아있다 옥인동은 옥류동과 인왕동이 합쳐진 이름인데 계곡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었다. 북쪽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이 있다. 인왕산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은 원래 남산(南山)의 산신(山神)인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산신당(山神堂)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神士)를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 다양한 이름들이 지어져 있다. 선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데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 모자를 닮은 모자바위, 돼지를 닮은 돼지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가 있고 남쪽 능선 정상에 있는 달팽이바위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형상으로 유명하다. 호랑이 굴이 있는 남쪽 능선에 호랑이바위, 정상부에 이르면 뾰족한 메부리바위가 있으며 삿갓모양의 삿갓바위가 인왕산 정상이다. 그외 치마바위, 해골바위, 기차바위, 부처님바위 등이 있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仁王山圖)》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대와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표기하기도 하였으나, 현대에 들어서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다.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 21일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의문 부근에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한 장소와 시설이 많다. 오늘도 '윤동주 문학제'가 열리고 있고 또 단체로 찾아온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고...
[창의문]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2015년 12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왕산을 내려와 창의문을 지나면 북악산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 걷고 있는 거리가 길어지면서 점점 힘이 딸린다. 몇년전에 완주한 대간길과 정맥길을 생각하면 이건 평지와 다름 없는데ㅋ. 북악산으로 오르는 성벽길에서는 평창동과 북한산 비봉능선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곳에 지금처럼 누렇고 울긋불긋한 단풍색 대신 봄에 샛노랑 개나리와 분홍의 진달래가 만발해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북악산] 서울 경복궁(景福宮) 북쪽에 솟아 그 진산(鎭山)을 이루어온 산이다. 고려 숙종 때 북악산 아래는 남쪽의 수도인 남경(南京)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당시에는 북악산을 면악이라 기록하여 전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북악산을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악산신(白岳山神)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게된 이름이다. 이후 도성(都城)인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악산(北岳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남쪽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을 남산(南山)이라고 불렀다. 북악산의 높이는 342m이며 남쪽으로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모양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난 형상으로 주변의 산에 비해 도드라져 보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되면서 태조 이성계의 신망이 두터웠던 무학대사(無學大師)에 의해 왕가의 기운을 받은 명산으로 칭송되었으며 그 아래 조선왕조의 궁궐을 세우고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산정부에는 백악산신을 모시는 신사가 만들어졌다. 1394년(태조 4년)에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축성하였으며 대한민국에 들어서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景武臺)도 이곳에 위치했다. 현재도 대통령의 집무실인 청와대(靑瓦臺)가 북악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
기반은 화강암으로, 인왕산(仁王山)·낙산(駱山)·남산(南山)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이들 산지 능선을 연결한 옛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일명 紫霞門)이 남아 있으며 부암동 뒤쪽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 계곡이 있다. 북악산은 예전부터 소나무가 울창한 경승지를 이루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계곡을 찾아 탁족회(濯足會)를 자주 열었던 곳이다. 하지만 이후 소나무가 벌채로 사라지고 현재는 참나무류가 많다. 북악산 산정을 내려와 남쪽 기슭에 청와대가 있다. 창의문에서부터 정릉(貞陵) 입구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三淸)공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을 지나면 청운대와 백악곡성 그리고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 안내소로 이어진다. 11월초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서울은 아직 가을이 한창이다.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단풍이 성곽과 어울어져 얼마나 아름다운지...
[숙정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있는 조선전기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북쪽 문(門)으로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길이 매우 험하다. 또 성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 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한양에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소문을 통과했지 숙정문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숙정문보다 동소문이 한양 출입에 훨씬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문을 폐쇄해도 통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남문인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서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이라고 한다.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숙정문이라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으로도 표기된 것을 볼 때,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이다.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흔히 숙정문 대신에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말바위 전망대 갈림길에서 한양도성길은 와룡공원 방향이다. 이정표도 보이지 않고 해서 별다른 의심없이 쭉 직진했더니 삼청공원방향이다. 길안내앱이 자꾸 '코스를 벗어났다'는 알림을 울렸지만 내려가면 어디쯤에서 만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덕분에 약 1km를 내려갔다가 되돌아 오는 고생(?)을 했다...
삼청공원이 성곽 안쪽을 따라 내려가고 와룡공원은 성곽 바깥쪽이다. 10m 도 되지 않는 성곽의 안팎이지만 그 차이는 여차하면 큰 알바를 할만큼 엄청나다^^. 와룡공원 주변도 성벽의 안팎으로 길은 있지만 헷갈릴 수 있는 곳이다...
성곽을 따라 서울과학고등학교 부근으로 내려오면 경신중고등학교를 시계방향으로 돌아서 마을길을 따라 혜화문으로 이어진다. 서울과학고등학교 부근에서도 길안내 앱이 정신을 못차리는 바람에 방향을 잡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몇번을 왔다 갔다 했던지ㅎ..
[혜화문]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의 북동방에 설치한 문(門)으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혜화문을 지나면 369성곽마을을 통과하여 낙산까지는 성벽과 나란히 걷는다. 몇번의 작은 알바를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걸은 거리가 한양도성길 전체 도상거리를 넘어섰고 소요시간도 예상을 훌쩍 넘은지 오래라 마음은 초조한데 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벌써 어둠이 밀려오는 느낌도 들고...
[낙산]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 조선시대 한양 성곽이 낙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동서(東西)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으로, 높이는 약 125m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낙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만들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東小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다. 신대약수에는 강세황의 글씨인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암각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과 이별하고 이곳 낙산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순왕후는 폐서인되어 낙산 아래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고 창신동 골짜기에서 비단에 자색 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샘물이 있던 곳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암각자가 남아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68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府)의 총무당이 있었는데, 1880년에는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아래 위치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萬)의 집인 이화장(梨花莊)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찰로는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청룡사(靑龍寺)가 있고,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미타사는 여승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있다. 근래에는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성곽이 복원되었으며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산에서 흥인지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주변은 멋스러움으로 장식한 카페들이 성업중이다. 볼거리와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먹을 것이 함께하는 것이 이치리라. 볼거리와 먹거리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
알바를 감안하더라도 도상거리 19.2km 보다 약 5km 이상이 더 걸었다. 도상거리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몇개의 작은 알바가 이런 큰 차이를 만든 것일까? 소요시간도 계획보다 2시간은 더 걸린 것 같고. 내년 꽃피는 봄에 다시 한번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