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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代 數 |
合計 |
韓國人 |
外國人 | ||||||
計 |
男 |
女 |
計 |
男 |
女 |
計 |
男 |
女 | |
33,161 |
77,933 |
38,253 |
39,680 |
77,391 |
38,036 |
39,355 |
542 |
217 |
325 |
6) 位置와 氣候
⑴ 位置
◦ 聞慶市의 地理的 位置는 동쪽은 東經 128도 22분인 東魯面 石項里 매봉으로 醴泉郡 上里面 鳴鳳里와 境界하고, 서쪽은 東經 127도 53분인 加恩邑 完章里로서 忠淸北道 槐山郡 靑川面 이평리와 接하고, 南쪽은 北緯 36도 31분인 籠岩面 內西里로서 尙州市 外西面 大田里와 接하고, 北쪽은 北緯 36도 52분인 東魯面 鳴田里로서 忠淸北道 提川市 德山面 도기리와 境界를 이룬다.
◦ 緯度上 비슷한 位置의 主要地域은 洪城, 鳥致院, 淸州, 安東, 英陽, 後圃 等이며 經度가 비슷한 地域은 咸鏡南道 惠山, 新浦, 江原道 麟蹄, 忠北 堤川, 慶北 尙州, 慶南 陜川, 晋州 泗川 等이다.
◦ 世界的으로 緯度上 비슷한 位置의 主要 都市로는 스페인 南部의 말라가, 알제리의 알제이, 튀니지의 튀니스, 地中海의 몰타, 이란의 테헤란, 中國의 칭따오, 란조우, 日本의 나가노, 히타치, 美國의 라스베가스, 테네시주의 내시벌, 버지니아의 포츠머드 등이며, 經度上 비슷한 地域으로는 시베리아 레나강변의 불룬, 아무르지방의 블라고 베시첸스크, 中國의 무딴쟝, 太平洋 沿岸의 東티모르지역, 濠洲 中西部의 포레스트 등이다.
⑵ 氣候
◦ 嶺南地域의 西北部에 位置하고 있어 山勢가 아치형으로 둘러싸인 關係로 地形的인 影向을 많이 받는 盆地形 山岳氣候에 屬한다.
◦ 最近 數年間 年度別 平均氣溫 分包를 보면 最低가 1993年度에는 10.9度씨였고, 最高는 1994年度에 12.5도씨였으므로 年平均氣溫의 平均率은 작다고 할 수 있다.
◦ 지난 數年間 聞慶市 年平均 降水量은 1,319.6mm로 他地域에 比해 多雨地域에 屬하며 最多 降水量은 1998年에 1,847.4mm이고, 最小 降水量은 1994년에 857.8mm이다.
1872郡縣地圖 -聞慶-
# 聞慶새재 製3關門인 鳥嶺關부터 店村 茅田까지 區間이다. |
*自然環境
동쪽은 醴泉郡, 서쪽은 白頭大幹을 境界로 忠淸北道 槐山郡, 남쪽은 尙州市, 북쪽은 白頭大幹을 境界로 忠淸北道 提川市·忠州市와 접하고 있다. 東經 127°52′∼128°22′, 北緯 36°31′∼36°52′에 位置한다. 面積은 911.17㎢이고, 人口는 7만 5784명(2015년 現在)이다. 行政區域으로는 2개 邑, 7개 面, 5개 行政洞(11개 法定洞), 215개 行政里(119개 法定里)가 있다. 市廳은 慶尙北道 聞慶市 茅田洞에 있다.
서쪽과 북쪽에 白頭大幹에서 흘러나온 小白山脈이 뻗어 내리며 북쪽의 忠淸北道와 境界를 이룬다. 동쪽의 白頭大幹에서 西南쪽으로 뻗어 나온 小白山脈의 中央部에 속하는 險峻한 地域으로, 東北部는 險山峻嶺이 둘러 있고, 中部에서 南部에 걸쳐 盆地狀으로 平地를 이루고 있으며, 東南部는 石灰岩地域으로 카르스트(Karst)地形이 發達되어 있다.
山系는 一般的으로 山勢가 險峻하고 高度가 높아서 大略 700m 以上의 기복차를 나타낸다. 시의 중앙부 남쪽 (烏井山, 811m)에서 始作해 북쪽으로 (富雲嶺, 535m)·(檀山, 956m)·(鳥項嶺, 673m)·(雲達山, 1,097m)·(馬轉嶺, 946m)·(大美山, 1,115m)이 있고, 大美山에서 동쪽으로 (黃腸山, 1,077m), 黃腸山 남쪽으로 (功德山, 913m)·(天柱峰, 845m)이 있으며, 이들 山嶺이 形成하고 있는 山脈은 북쪽으로 이어진다. 市의 北西部에는 (大美山, 1,115m)에서 시작해 (布巖山, 962m)·(主屹山, 1,106m)·(馬牌峰, 925m)·(鳥嶺山, 1,017m)·(梨花嶺)·뇌정산(雷霆山, 991m)·(白華山, 1,064m)·(曦陽山, 998m)이 있다. 南西部에는 (長城峰, 915m)·(大耶山, 931m)·(屯德山, 969m)·(鳥項山, 951m)·(靑華山, 970m)이 있다.
雲達山과 功德山에서 始作되는 大下川과 黃腸山에서 發源한 東魯川이 山北面 大上里에서 錦川에 合流해 山北面·山陽面을 貫流해 永順面 達池里를 거쳐 洛東江으로 흘러든다.
南西部 山地에서 發源한 陽山川과 籠岩川은 加恩川으로 흘러든다. 鳥嶺에서 始作되는 鳥嶺川과 大美山에서 始作되는 身北川은 聞慶邑 馬院里에서 蘇耶川에 흘러들고 麻城面의 中央部를 貫流해 鎭南橋에서 加恩川과 合流해 영강(潁江)을 이룬다.
永順面과 山陽面 地域에 들어서면, 周邊에 띠모양의 길고 좁은 약간의 平野地帶를 이루고 聞慶 都心地 남쪽에서 利安川과 合流해 永順面 남쪽에서 洛東江에 흘러든다. 이 潁江은 관산(觀山)·견탄(犬灘)·주평(舟坪)·長坪·泳順 들판의 農業用水와 聞慶시멘트工場의 工業用水로 供給되며, 聞慶市民의 食水로도 利用되고 있다.
地質은 주로 花崗岩質 片麻岩과 이를 傾斜不整合으로 덮고 있는 朝鮮系 大石灰岩統이 發達되고 있으며, 여기에 貫入된 化成岩層에는 各種 金屬 및 非金屬 鑛物을 많이 含有하고 있고, 東南部의 平安系와 大同系 地層에는 石炭이 埋葬되어 있다.
높고 험한 山勢와 內陸에 位置한 까닭으로 大陸性氣候의 性格이 강해 寒暑의 차가 큰 편이며, 年平均氣溫 12.0℃, 1월 平均氣溫 -2.0℃, 8월 平均氣溫 23.6℃이며, 年降水量은 1,505.3㎜이다.
▣ 점촌(1~5동)의 지명유래 탐색
▶점촌1동 <밋발이∙진마을∙점마∙점촌(店村)>
1400년경부터 돈달산 기슭이 매의 발처럼 생겼다하여 "매발"이라고 부르다가 변음되어 밋발이로 불리어졌으며, 또 한편으로는 산기슭에 길게 형성 된 마을이라고 하여 "긴마을" 또는 "진마을"로 불리어지다가 1829년경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모여 옹기점·기와점이 생기고 또한 점방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개편때 점촌이라고 칭하게되었다.
[지명유래]
<밋발이∙진마을∙점마∙점촌(店村)>
정확한 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1400년경부터 지세와 산세 즉 돈달산 기슭이 마치 매의 발처럼 생겼다고‘매발’이 변음되어 맷발로 또는 밋발, 다시 밋바리, 혹은 밋발이로 불리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산기슭에 길게 형성된 마을이라고‘긴마을’로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진마을이라고 불리다가 1829년경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 모여 옹기점 기와점이 생기고 또 점방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정리때 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편‘밋발이’이란 동명은 돈달산 기슭이 옛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미(묘)’가 많이 있는 발치라 해서 ‘밋발, 밋발이’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추측된다.
▶점촌2동 <제골,기와골,와곡(瓦谷)>
점마, 개와골이라 불려오던 동네가 1914년 지방관제 개편때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로 되었고 그후 면세가 점차 확장되면서 1956년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되고 점촌리가 1~6리로 분리되었다. 1986년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점촌4~6리와 영신동을 합하여 시내의 중앙에 위치하고 점촌시의 중심부 역할을 한다고 하여 중앙동이라 행정명을 개칭하였다.
[지명유래]
<제골,기와골,와곡(瓦谷)>
지금의 여고 정문 앞마을이 바로‘기왓골’인데 이곳은 흙이 점토로서 기와 굽기에 알맞은 곳이라 조선 중엽부터 기와를 굽기 시작하여 1950년경까지 기와공장이 있었다. 따라서 기와를 굽는 골이라고 해서 와곡(瓦谷)이라 칭해 오다가 변음되어 제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기왓골로 부르기도 해 왔다.
<영신동(永新洞)>
- 동칫마∙동치마∙하거리(下車里)
영신들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다. 1600년경 들 수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수차(水車) 2개를 아래위에 설치하게 되니 한 개는 상거(上車)라 하였고 또 다른 한 개는 하거(下車)라 하여 상거(上車)에 해당되는 곳을 1里 .하거(下車) 해당하는 곳을 2里 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게 1里 ∙2里가 똑같이 수차(水車)를 동시에 설치하였다는 뜻으로 동치(同置)마라 부르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침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는 하나‘동침’이란 침(沈), 즉 잠긴다는 뜻으로 혹 강물에 침수되었다는 뜻으로 '동침'이란 침(沈), 즉 감긴다는 뜻으로 동침(洞沈)마라고도 추리할 수 있다. 물을 퍼 올리는 동치(동치)가 있던 곳이라 동치마가 동침마로 변음되었다고도 한다.
- 한신마∙영신(永新)
현 영신동(現永新洞)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점촌(店村)에서 남동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1800년경 동리가 다소 번성해지자 동민들이 농악놀이 등 민속놀이를 즐기게 되었는데 10여명이 한 사람같이 신명나게 잘 놀았다고 하여‘한신마’라 불러 왔다고 한다. 1906년 세부측량(細部測量)에 의하여 행정구역정리로 영신(永新)이라고 개칭하였다. 또 다른 추리로서‘한신’이란‘한’은 크다는 뜻이고‘신’이란 새로 생겼다는 뜻으로‘새로 생긴 큰 마을’즉‘한신’이라고도 추상할 수 있다.
- 수통맥이
이 마을은 1600년경 영순면 포내리에 거주하던 황씨(黃氏) 한 분이 영신동 수로(水路)를 개설하기 위하여 수차(水車) 2대를 설치하고 도로 교량을 큰 돌로 쌓아 수통(水筒)을 놓았다고 하여 수통맥이라 불러왔다. 또 달리 수통맥이 아닌‘수통목’으로 해석하면 들이 넓기 때문에‘수통’을 설치함에 수통을 설치한 가장 윗자리인 즉 목 부분이란 뜻으로‘수통목’으로 불러오다가 목이 맥으로 변음하여 수통맥이라고 해석된다.
<윤직동(允直洞)>
원래는 함창현 북면에 속한 마을인데, 도분고시(道分告示) 2호로 당교(唐橋), 쌍화(雙花), 두산(頭山 )의 각 리가 상주군 함창면 윤직리가 되었고, 1989. 1. 1자로 �하신기 마을�을 포함한 일부가 구점촌시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 뙤따리(唐橋里, 允直 2里)
시계에서 철로위 육교를 지나 첫번째 마을인데 한말까지 주막(酒幕)거리를 이루어 상주, 문경, 용궁방면으로 가는 갈림길 목으로 도부상, 소장사 등의 왕래가 많아 흥청거렸다고 한다(옛적에 唐橋院이 있었다 한다). 지금의 마을은 그 후 새집들이 들어서서 이룩 되었다.
- 당교리의 전설
당교(唐橋)는 모전동과 윤직리의 경계를 이루는 모전천에 놓여 있는 다리의 이름인데 이 일대를 뙤따리라 불렀다. 삼국유사 기이편 제29 태종대왕조(三國遺事紀異編第 29 太宗大王條)에 보면 “또 신라의 옛 전기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를 치고서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무르고 있으므로 이에 김유신이 그 꾀를 알고 당병을 대접하면서 짐주(짐주)를 먹여 죽게 하여 쓸어 묻었으니 지금의 상주경계에 있는 당교가 바로그 곳이라 한다.”라 하였고 다른 전설에 이르기를“고종때 신라 태종왕 7년에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이 곳에 병사를 주둔시킨 까닭으로 이름하였다”라고 전한다.
(原文) 又新羅古傳云定方旣討麗薺二國又新謀羅而留連於是庾信知其謀饗唐兵之
皆死坑之今尙州界唐橋是其坑地
一云高宗時新羅太宗王七年唐將蘇定方餠兵於比故名之云
(자료 : 문경지방의 산성 p31외)
- 임진왜란과 당교
당교의 위치는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와 서울로 향하는 분기점(分岐點)에 해당하여 그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하겠다.
“임진년(1592) 4월 27일에 왜적의 일대인 모리휘원(毛利輝元)군이 하풍진(河豊津:지금의 영순면 이목리)을 건너 당교에다 진을 치고, 영남좌우도와 기호(畿湖)간의 왕래를차단하고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므로 우리측에서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당교의 적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는지 그 해 12월에 경상좌병사 한효순(韓孝純)이 올린 장계(狀啓)에,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목구멍)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창성하니 무엇보다도 이 적을 치기로 목표를 세워 수개월이 가까웠으나 적이 편리한 지점에 점거하여 있고,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등이 어렵게 여기어…”라 하였다. 그 후에도 쉽사리 탈환하지 못하다가, 상주전투에서 적을 크게 파하고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으로 수복한 바 있는 상주판관(尙州判官) 정기룡(鄭起龍)장군이 원병요청을 받고 상주에서 당교에 급진하여 일전으로 적을 크게 파하고 적진을 소탕하니 적군이 상주부근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자료 : 선조중흥지 권3 매헌실기, 문경지역의 산성에서)
- 하신기(下新基)
현 문경시의회가 있는 주령과 남쪽으로 연접한 산의 기슭에 있는 마을로 1914년에 상주군 함창읍 해곡리에서 모전동으로 편입되었다.
- 왜진고개(倭陣峙)
하신기 마을 북쪽의 고개는 옛적에 큰 길인데 임란(壬亂)때 왜적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여 이름하였다.
- 택거리 바위
하신기 마을 뒷산 동쪽 기슭에 큰 바위가 있다. 옛적에 장사꾼이나 나무꾼이 이 곳에서 쉬면서 턱걸이를 하였다 하여 이름 하였다.
- 용지(龍池) 마을
하신기 마을에서 남쪽으로 600m 지점에 야산이 돌기(突起)해 있고 기슭에 5~6호 되는 마을이 있다.(중앙동 소속) 옛적에 영강(潁江)이 범람하여 물길이 들 서쪽으로 나서 산 아래에 상∙하의 두 큰 소(沼)가 있어서 용담(龍潭)이라 불렀다. 산 위에 기우단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옛날에 두 마리의 용이 있었는데 소에서 나와 서로 다투다가 한마리가 죽음에 이 곳에 묻어 용무덤이라 불렀다]
(原文)
左郡北五里孤山臨野起岩下有上下燈潭深不可測俗傳昔有二龍自潭中相鬪
其一死因理于比號龍檀上有祈雨壇 (자료:咸昌郡邑誌)
- 원윤직이(元 允直)
뙤따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500m거리에 있는 마을로 한말까지 함창군 북면 소재지였다.
(함창읍 소속)
- 쌍화리(雙花里), 사아매(四岩)
이조 중엽에 이 마을에 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가 함께 대과에 급제하여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금의환향하였다 하여 쌍화리라 부른다. (함창읍 소속) 이 마을에 원래 4개의 바위가 있었다.(사아매의 유래) 일제때 두개는 길을 닦을 때 없어지고 나머지 중 한 개는 옛부터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있다. 크기는 높이 2m, 둘레가 7m정도이며 항시 솔가지로 덮여 있어 바위의 참모습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매년 정월 13일에 새 솔가지를 묵은 솔가지 위에 덧씌우고 이튿날 동제사를 올린다. 동신 바위가 햇빛이나 달빛에 노출되면 마을 부인들한테 좋지 않다는 전설이 있다.
- 두산, 머리뫼(頭山)
원 윤직 마을 남쪽 600m에 있는 마을이며(함창읍 소속), 호연정(浩然亭:진사 申?가 세움)이 있고, 고인돌(남방식)과 선돌(立石)이 있으며, 서쪽 마을 600m 야산의 능선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있다.
▶점촌3동 <흥덕골(興德谷) ∙ 원 흥덕(元 興德) ∙ 본 흥덕(本 興德) >
1914년 지방관제 개편때 호남 (戶南).호서(戶西) 양면이 호서남면으로 개편되면서 점촌, 흥덕.모전.우지.창리.신기.유곡.불정.공평.영신등 10개 법정리가 있었고 그후 면세가 점점 확장 발전되면서 1956년에 호서남 면이 점촌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1월1일자 법률제 3698호로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흥덕.우지 창리 3개리를 병합 흥덕리를 중심으로 새 흥덕이란 뜻으로 신흥동으로 이름붙였다
[지명유래]
<흥덕동(興德洞)>
- 흥덕골(興德谷)∙원 흥덕(元 興德)∙본 흥덕(本 興德)
흥덕동에서 가장 먼저 거주하게 된 마을이란 뜻이다. 15세기경 경주 김씨(慶州金氏)와 정선 전시(旌善全氏)가 거의 동시대에 입주하여 집성촌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혼성의 거주촌으로 변모했다.
- 갈밭마(葛田村)∙운천(云川)
옛날에 영강 물이 굽이쳐 흘렀던 강가의 마을로 원래는 갈대가 우거졌다고 하여 갈밭마운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개촌(開村)은 경주 정씨(慶州金氏)라 한다.
- 깃골∙귀골(貴谷∙龜谷)
고려 때 상산김씨(商山金氏) 문중이 이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기 때문에 깃골 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예골(禮洞)∙이골(李谷)∙예동(芮洞)
고려 때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의 터전으로 번성을 누렸으나 상주로 집단 이주후, 연안 이씨(然安李氏)가 살았기 때문에 이골(李谷)이라 불렀으나 예의를 숭상하는 마을이라고 예동(禮洞)이라 호칭하고 있다. 일설에는 고려조 때 영순현(永順縣) 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하여 옛 고을-옛골∙예골로 불리었다 한다.
- 새동네∙신동(新洞)
호서남초등학교로부터 점촌동 쪽으로 일제말경부터 서서히 구성된 부락이었으나 지금은 도시풍의 상가 거주지 지역으로 변모했다.
- 신흥동(新興洞)
’88년에 토지개발공사가 택지조성을 한 문경중학교 남쪽의 거주지를 일컫는 동명이다.
<우지동(牛池洞>
- 소못골∙소지∙우지(牛池)
1600여년경 평산신씨(平山申氏)가 흥덕(興德) 예동(芮洞)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할 때 주위의 산이나 못(池)이 마치 소와 같은 모양을 한 형상이라고 하여‘소지’라고 불러오다가‘지(池)’를‘못’으로 고쳐‘소못골’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1906년 행정구역 정리 때에 우지(牛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못이 있으나 그 모양이 많이 변하여 ‘소’모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편 소못골리를 돈달산이 둘러싸고 동리의 앞산 일대는 풍수설에 와우혈(臥牛穴)이라고 전해 오고 있어 바로 마을 남쪽 산 갈라진 곳이‘소목’이란 뜻으 ‘소목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도 추리할 수 있다. 못이 소 모양이기에‘소못골’, 산이 소의 목과 같다고‘소목골’이라는 이름은 모두 형상에 의해서 동명이 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다르쟁이
소못골의 동쪽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며 뒷산에 다래덩굴이 우거져 가을이 되면 달고 있는 다래를 얼마든지 따 먹을 수 있다고 하여 다래쟁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다래덩굴을 찾아볼 수 없다.
- 도릿마
소못골에서 서쪽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산모퉁이에 돌아앉았다는 뜻으로 도릿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시 척박한 토질이었으나 지금은 과수원 특작등으로 개간하여 살기 좋은 마을로 발전되고 있다.
- 거릿마
소못골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점촌에서 창리(創里)로 가는 길거리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서‘거리’즉 길거리에 위치하고 동네 입구란 뜻에서 거리마, 거릿마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지고 점점 발전됨에 따라 우지리 중심 마을의 구실을 하고 있다.
- 양지마∙양지동(陽地洞)
거릿마에서 북서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며 아침에 해가 떠서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는 양지바른 마을이라고 하여 양지마 또는 양지동(陽地洞)이라 불려진다.
- 큰마∙음지마∙음지동(陰地洞)
양지동의 맞은편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며 1600年경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사도(申思道)란 분이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한다. 이 마을이 본래 우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란 뜻에서 큰마라 부르기도 하고 응달진 동리라고 음지마 또는 음지동(陰地洞)이라고도 부른다.
- 소곡(掃谷)∙씨실골
거릿마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1㎞들어가면 2가구가 살고 있다. 큰 재사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재사이고 2가구는 그 재사를 관리하는 집들이다.
<창동(創洞)>
조선시대에 호현창고가 있었다고 호창마라 불러오다가 1914년 3월 1일 호서면과 호남면이 통합 호서남면이 되면서 창리라 불러오다가 1986년 1월 1일자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신흥동에 속해 창동이라 하게 되었다. 마을유래는 1480년경 이 마을을 개척한 신계종이란 사람의 호를 따서 송연마을, 송평이라고도 하는데 송평마을은 지금의 송평들에 있었다고 하며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대홍수로 마을이 쓸리고 영강물줄기를 이루 다 한다. 또 송평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솔밭이 있고 들이 넓어 송평이라 하다가 지금은 장평들로 부르고 있다.
- 새동네(新洞)∙아랫창리
창동 아래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인데 동리가 발전하여 새로 생긴 동네라고 새동네 또는 아래 창리라 부르고 있다.
- 창마∙창리∙호창리(戶創里)
창동은 들 가운데 있는 동네로 웃마, 중간마, 새동네, 윳고개, 뒷들 이렇게 산재해 있는데 원 웃마, 웃 창리가 먼저 개척된 마을이고 그 후 마을이 번성하니 농사짓기 편리하게 중간마(중창리)가 생기고 그후 중간마에서 약 1㎞떨어져 새로 생긴 동네라 새동네라 하였고 윳고개는 창동과 신기동을 잇는 고개밑에 위치한 동네로 마을 윗쪽에 있다고 웃 고개∙윳고개로 불리어 오고 있다. 뒷들은 마을 뒷편들 산밑에 있는 동네라 뒷마, 뒷동네라 부르고 있다. 창동은 신당보로 유명한데 지금으로부터 400년전에 신계종이 축조하였다.(宋淵集)
- 송연동(宋淵洞)
중간창리와 우로보(洑)의 사이에 있던 마을로 1500년경부터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살아오다가 1800년대 중반에 수해로 마을을 옮겼다.
▶점촌4동 <틀모산 ∙ 기제동(機堤洞), 꽃밭모리 ∙ 화전동(花田洞), 새터 ∙ 신기...>
점촌4동은 문경시 동지역 면적의 64.3%로 관할구역이 방대하여 축산ㆍ과수농업이 발달하였고, 문경 발전의 원동력인 신기 공단이 위치하고 있고, 중부내륙고속도로 및 3번 국도의 통과로 교통이 편리하며 청소년 수련관, 자연휴양림, 산악자전거 도로, 문경관광 사격장등 휴양 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관광휴양의 고장 문경의 중심 선에 있으며 문경운전면허시험장의 유치로 지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명유래]
<신기동(新機洞)>
새터라 불려오던 마을이 1914년 4월 1일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새터(新機)와 틀모산(機堤)을 합하여 신기의 신(新)과 기제의 기(機)를 따서 문경군 호서남면 신기리로 호칭했고, 문경군에서 분리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호계면 별암2리(舟坪)를 합쳐 신기동으로서 유곡, 불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가 1999년 문경시 신평동에 편입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공업지역으로써 쌍용 양회 공업(주)문경공장, 쌍용 정공등이 가동되고 있고 46,000평의 공업단지가 새로 조성되었으며 앞으로 경상북도 상설 자동차 면허시험장이 들어서면 지역발전에 더욱더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 되고 있다. 북쪽을 흐르는 영강을 경계로 호계면과 접하면서 비옥한 주평들이 펼쳐 있고 동서로 문경, 가은선 산업철도가 관통한다. 특히 신기초등학교, 우체국, 점촌농협지소, 경찰관파출소, 주평역등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 틀모산∙기제동(機堤洞)
조선 선조(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을 당하여 江? 金氏 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절 이름이 기제사(機堤寺) 또는‘틀모사’라고 하여 그 절 이름을 따서 동명을‘틀모산’혹은 기제동(機堤洞)이라 불러온다.
- 꽃밭모리∙화전동(花田洞)
온 산천에 봄이면 철쭉꽃이 만발하여 마치 온 산이 큰 꽃봉오리처럼 보였으며 1892년경에는 마을에 목화를 심어 목화꽃이 활짝 피어 앞 뒷 뜰이 온통 꽃밭이 되었으며 가을에는 목화송이가 또 한번 활짝 피어 꽃밭을 이루게 되니 사철 온통 꽃밭마을 같다고 하여 산모롱이의 모롱을 붙여‘꽃밭몰이’또는 화전동(花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신기(新機∙新基)
1893년에 유곡(谷)에 거주하던 평산신씨(平山新氏)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동네를 이루고 새 터전을 개설하였다는 뜻으로‘새터’라고 불리어졌으며 1906年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신기(新機)라고 고쳐 불리게 되었다. 지명과 우연한 일치인지 1950년대에 정말 새로운 현대식 양회공장이 서게 되어 마을은 물론 우리고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뒷골∙후곡(後谷)
새터가 점점 번성하여 가구수가 늘어나게 되자 새터 사람들이 幽谷里로 넘어가는 산골쪽 뒷골에 새로 한집 두집 집을 짓고 마을이 형성됨에 이 마을을 뒷골 또는 谷이라 칭하게 되었다.
- 뱃들(堤坪)
지형이 마치 큰 배(舟)처럼 생겼다 하여 뱃들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호계면 별암2리였던 것이 1986년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신기동에 편입 되었다. 1945년 이전에는 뱃들(舟)에 불과 4~5가구가 살았는데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기간산업체(國家基幹産業體)인 시멘트공장(工場)이 건설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공장부지가 일부는 점촌읍 신기리요, 일부는 호계면 별암리로 양읍면(雨邑面)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1955년에 문경탄전(聞慶炭田)에서 생산되는 석탄(石炭)과 신기에서 생산되는 양회를 수송하기 위해 산업철도인 문경선(聞慶線) 철도가 부설되고 주평역(舟坪驛)이 생겼으며 5일시장이 개설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당시로서는 호계면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 비행장(飛行場)
대한양회공장(大韓洋灰工場) (현 쌍용양회) 서북편 평탄한 잔솔밭에 비행장(飛行場)이 생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 전설(傳設)(1)
뱃들의 지형이 흡사 큰 돛을 단 배와 같아 우물(샘)을 파면 마치 배(舟)에 구멍을 뚫은 것과 같다 하여 샘을 파지 않았는데 주평시장의 인구가 급증하여 식수를 해결코자 당시 호계면에서 굴정(堀井)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몇 군데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을 했다고 한다. 외형상 보기에는 영강 가까이라 어디서든 물이 나올 것 같으나 주평시장 안에 지금의 공동샘에서 겨우 물이 조금 나오긴 하나 물맛이 영강물만도 못하다고 한다.
- 전설(傳設)(2)-뱃들의 백마계주(白馬鷄舟)
신기동 일원인 뱃들(舟坪)에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의 천하명당(天下名堂)인 백마계주혈(白馬繫舟穴)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믿는 수많은 지사(地師)들이 이곳의 명당(名堂)을 찾아오고 수많은 시체(屍體)들이 이곳에 묻혔다가 옮겨간 곳이다. 백마계주혈(白馬鷄舟穴)이란 흰빛 말(馬)을 배(舟)에 매어 놓은 형(形)이란 뜻으로 이 혈(穴)에 묘를 쓰면 자손중에 삼갈팔신[三葛八信 :중국 삼국시대의 위대한 전력가였던 제갈양(諸葛亮) 같은 사람 셋과 상승장군(常勝將軍) 한신(韓信)같은 사람 여덟사람]이 난다고 하는 명당(名堂)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마계주(白馬繼走 :흰 말이 계속 달린다)라고도 하는데 문경선(聞慶線) 철도(鐵道)가 생겨 기차(汽車 : 鐵馬)가 달리게 되어 철마계주(鐵馬繼走)가 되었다고도 말한다.
<대성동(大成洞)>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관할내에 대성탄좌 문경광업소가 있어서 대성동이라 명명하였으며, 신기동, 불정동, 유곡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였다가 1999년 신평동이 신설되면서 폐지되었다.
- 유곡동(幽谷洞)
(1) 유곡(幽谷)
고려시대부터 유곡역(幽谷驛)을 개설하여 찰방(察訪)이 배치되었는데 이 유곡찰방(幽谷察訪)이 18개 속역을 관장한 큰 역촌(驛村)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역이 넓고 골이 깊숙하여 그윽한 골이라고 해서 유곡(幽谷)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역(驛)이 생기고 인구가 늘고 생활이 넉넉해지자 도둑이 자주 들어 왔다고 하여 마을을 수호하는 뜻에서 수호신단(守護神壇)을 설단하고 제사 지낸 후에는 이 수호신의 보호로 한번 들어온 도둑은 밤새도록 헤매어도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하여 유령(幽靈)의 영험을 나타내는 뜻으로 유곡이란 동명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2) 한적골∙한절골∙대사동(大寺洞)
유곡의 남동쪽으로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으면 자그마한 동네가 있는데 바로‘한적골’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고 하여 한절골(大寺洞) ‘한’은 크다는 뜻으로 큰 절골이란 뜻이다. 그후 점점 변음되어‘한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지금은 그때의 절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옛날의 약수터인 장군수(將軍水)의 맑은 샘물만은 지금도 남아 있어 동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 장군수(將軍水)샘물도 뭔가 유래가 있음직 하나 고증할 도리가 없어 아쉽다. 한편‘한적골’이란 동명도 또 다른 추상적 고증으로‘한적’이란 우리나라 말의 뜻으로 보면 한가롭고 조용하고 편안하다는 것으로 통한다. 따라서 한적골이란 조용한 곳이란 뜻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3) 마본(馬本)
유곡리 서쪽에 위치하여 고려초부터 영남(嶺南)과 한양(漢陽)을 잇는 역촌(驛村)의 본거지로서 영남지방 18개 역을 관장하던 찰방(察訪)이 역마(驛馬)를 사육하고 관리하던 곳이라고 하여 마본(馬本,)이 한다.
(4) 새마을∙신리(新里)
유곡리 동쪽에 새로 형성된 부락으로 옛역촌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사람이 많이 모여 살게 되자 이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어 새로 되었다는 뜻으로 새마을 혹은 신촌, 신리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5) 아골∙앗골∙아동(衙洞)
주막마을에서 서쪽으로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유곡역 찰방이 집무하던 관아(官衙)가 있었으며 아전(衙前)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아동(衙洞)이라 불러오다가 아골∙앗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주막(酒幕)
유곡 역촌이 번성해짐에 따라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요로(要路)가 되어 오가는 통행인이 많아지게 되므로 한길 주변에 주막이 생기게 되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휴식처가 되었다고 하여 주막∙주막걸(주막거리)로 칭하게 되었다.
-불정동(佛井洞)
(1) 부처샘∙불정(佛井)
1650년경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운암사(雲岩寺)가 있는 절골의 부처샘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이 마을로 흐른다고 하여 부처샘이라고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확정때 한자로 불정(佛井)이라 동명을 개칭하게 되었다.
(2) 굴모∙굴모랭이∙원골∙원곡(院谷)
이곳은 석회암(石灰岩)으로 된 동굴이 많아 굴모랭이로 부르다가 차츰 변음(變音)되어 굴모리(굴 모롱이)로 또는 굴모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때 원(院)이 있어 길손들의 숙박시설로 이용되었다고 하여 일명‘원골’또는 원곡(院谷)이라 칭한다. 한때 대성광업소가 있어 탄굴이 더욱 많이 생겨 옛 굴모랭이(굴모리)라는 지명과 더욱 일치하게 되었다.
(3) 새터마∙신동(新洞)
불정리에 석탄광산이 개발되자 외지에서 광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산골짜기 오막살이 주택이 지어지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새터마’∙‘신동(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4) 수통배기
불정역의 남동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한 운암사(雲岩寺) 부처샘에서 흐르는 물을 여기서 조절하였다 하여 수통배기라 일컬어 왔는데 1930년경에 시멘트관(管)으로 수로(水路)를 보수하였다.
(5) 쟁마∙재궁마∙장촌(長村)
불정의 동편에 형성된 자그마한 부락인 바 마을의 모양이 길쭉하게 생겼다고 하여 장마∙쟁마∙재궁마라고 부르다가 장촌(長村)이라고도 불러 왔다. ‘재궁마’라는 뜻으로 보아‘재궁’∙‘재사’가 있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6) 동막골(東幕谷)
석탄광산이 개발됨에 따라 장촌(長村)의 동편(東便)으로 막사(幕舍)가 세워지고 광부들이 거주하게 되어 이 마을을 동막곡(東幕谷) 또는 동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7) 양달마∙양지촌(陽地村)
음달마의 맞은 편에 위치하며 운암사(雲岩寺)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하며 해가 떠서 하루 종일 양달이란 뜻으로 양달마 또는 양지촌(陽地村)이라 불러 왔다.
(8) 음달마∙음지촌(陰地村)
양지촌의 맞은편 음달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전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해가 떠서 한나절이 되어서야 햇빛을 볼 수 있는 음지(陰地)에 있다고 하여 음지마 또는 음지촌(陰地村)이라 부른다고 한다.
<공평동(孔坪洞)>
점촌읍 공평리(1~4)가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모전동에 소속되었다가 1999년 신평동이 신설되면서 신평동에 편입되어 신평동 동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 배실 ∙ 이곡(梨谷)
임촌(林村)에서 북쪽으로 약 1.5㎞지점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로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지형이 배(舟)와 같이 생겼다고 배실(行舟形) 또는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뜻으로 배실(梨谷)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때의 배나무는 한그루도 찾아볼 수 없고, 앞산모양이 배와 흡사함은 사실이다.
- 미리실 ∙ 구엉마 ∙ 꿩마 ∙진곡(辰谷)
임촌에서 서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지형이 꿩이 엎드려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호계면(虎溪面)의 견탄(犬灘)과 영순면(永順面)의 포내(浦內포수)가 있어 개와 총(犬∙ 銃)이 두려워 꿩이 날지 못하고 기어 다녔다 하여 구엉마라고 불러오다가 후에 꿩마로 불렀다 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이 [구엉마]라고 함은 바위에 구멍(굴)이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공암(孔岩)이라 불린 것이 정설이다. 공평(孔坪)이란 이름이 구엉마에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孔岩里 로도 불렀으며 孔坪의 유래도 여기에 있다. 진곡(辰谷)을 미리실이라 하며 미리는 옛 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보통원(普桶院)이 있었다.
- 임촌(林村)
1660년경에 평택인(平澤人) 임시익(林時益)이 충주(忠州) 단월에서 이주하여 개동하고 林氏 들만의 집성촌이라 하여 林氏이라 불려지고 있다.
- 잡살모리 ∙ 작살모리 ∙ 작사동(作沙洞)
임촌의 맞은편 3번국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촌에서 거주하던 임씨(林氏) 일부가 모래와 돌무지가 많은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모래와 돌무지의 땅을 일구었다 하여 작사(作沙)동이라 칭하다가 산모퉁이에 위치하였다는 것으로 좀더 세분하여‘작사모리’, ‘작살모리’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그때의 모래더미가 마을 뒤에 남아 있다. 마을 앞에 신평동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 장승백이 ∙ 장승리(將丞里)
배실에서 북서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며 1592년 임진왜란때 전사한 將軍의 비석(碑石)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고 하여 장승백이 또는 장승리(將丞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의 장군이 누구인지, 참고할 도리가 없다. 비석도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또한 옛날 이정표인 장승이 서 있던 마을이라 장승백이라 한다고 한다. 1999년에 지명에 걸맞게 마을 앞에 장승을 깎아 세워 오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다.
- 표석골(表石谷)
공평리(孔坪里)에서 가장 큰 마을로 상주군 사벌면(商州郡沙伐面)에서 이주한 평해황씨(平海黃氏)가 처음으로 개척하였다고 하며, 신라 때 김유신(金庾信)장군이 함창과 점촌사이에 있는 뙤다리(唐橋)에서 당군(唐軍)을 물리치고 이곳에 전승비(戰勝碑)인 표석을 세웠다고 하여 표석골(表石谷)이라 칭하여 왔으나 그때의 표석(表石)을 찾아볼 수 없다.
▶점촌5동 <음지마 ∙ 음촌(陰村), 조개실∙ 합촌(蛤村), 상신기(上新基) >
1579년경 경주 이씨가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이곳이 황무지로서 띠풀이 무성해졌다 하여 띠밭이라고 불러오다가 조선시대 지방관제 개편때 호서면 모전리가 호서남면 모전리로 개편되었으며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공평리를 합쳐 모전동으로 행정동의 명칭을 붙이게 되었으나 1999년 1. 1 공평동이 신평동으로 분리되었다.
[지명유래]
- 대보탈∙대보평(大洑坪)
현 모전리 앞 시민운동장 입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며 옛날 이곳에 큰 보(洑)를 막아 반쟁이 들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다고 대보평(大洑坪)∙대봇들이라고 칭하여 오다가 언젠가도 모르게 대봇들이 대보탈로 불리게 되었다.(지금의 시 체육관 앞 동네)
- 띠밭∙모전(茅田)
옛날 이곳에 띠가 무성하고 지형이 평탄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이주하여 개척한 후 띠밭이라고 불려지다가 행정구역 획정때 모전(茅田)으로 한자 동명을 붙이게 되었다.
- 양지말∙양촌(陽村)
모전동리 양지쪽에 남향으로 위치하여 해돋이가 빠르고 햇빛이 잘 비치는 마을이라고 양지말 또는 양촌(陽村 )이라고 불렀으며 경주이씨가 이룩한 마을이다.
- 음지마∙음촌(陰村)
모전동 동쪽에 서북향으로 위치하여 양지마을 맞은편에 있어 그늘이 많이 진다는 뜻으로 ‘음지마’라 불렀다.
- 조개실∙합촌(蛤村)
음지마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며 옛날에 동네 앞에 작은 연못이 있어 이 못에‘조개’가 많았다고‘조개실’이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마을 모양이 흡사 조개모양을 했다고 조개실(蛤村) 또는‘조개마’로 부르기도 했다. 혹은 조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여 조가실(趙家室)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리할 수도 있다. 지금은 마을이 더욱 번성하여 모전이란 큰 동네로 발전하였다.
- 상신기(上新基)
1900년 이전에는 울창한 산림지역이었으나 인구가 늘고 지역이 발전함에 따라 산림지역을 택지로 개발하여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으며 그 위치가 지역적으로 윗땀에 있다 하여 상신기(上新基)라고 칭하였다.(지금의 연초조합이 있는 부근)
- 중신기(中新基)
상신기에서 남동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여 1900년경까지는 마을이 없는 산림지역이었으나 점점 발전하여 마을이 형성되고 옹기와 기와를 굽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상신기와 하신기의 중간지점이라 하여 중신기라고 칭한다.(지금의 문경시의회 앞 일대)
- 기왓골
지금의 문경여고, 동산여고 정문앞에 위치한 동네로서 기왓굴이 있고 기와를 만들어 낸 동네라고‘기왓골’이라고 불렀다.
聞慶市
경북 서북부에 있는 시. 1995년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되어 문경시가 되었다. 문경읍 조령산 부근을 문경새재라고 부르며 지역이 알려졌다. 문경새재는서울과 영남지방을 이어주는 험한 고개인데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다'는 뜻을 갖고있다. 가은읍에 있는 석탄박물관에서는 과거 석탄산업으로 발전해 온 문경시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면적 911.17㎢, 인구 75,784(2015).
* 다양한 볼거리로 유명한 곳, 문경새재도립공원 *
경상북도 서북부에 있는 시. 예로부터 서울과 영남을 이어주던 고갯길인 문경새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문경새재는 '새재' 혹은 '조령(鳥嶺)'이라 하는데 높이 1,017m인 조령산을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석탄산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도시이나 1987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석탄산업 정리사업으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전국 334개의 탄광이 모두 폐광되었고, 문경시에는 1999년 개관한 가은읍의 석탄박물관만이 남아있다.
행정구역은 문경읍·가은읍·영순면·산양면·호계면·산북면·동로면·마성면·농암면·점촌1동·점촌2동·점촌3동·점촌4동·점촌5동 등 2개읍 7개면 5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 11개동). 시청 소재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당교로 225이다. 면적 911.17㎢, 인구 75,784(2015).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있었음을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의 발견으로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근기국(勤耆國, 지금의 산양면 일대)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에 관산현(冠山縣)으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문희군(聞喜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태종 때의 군현제 개편으로 문경현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문경새재의 중요성이 재확인되어 1708년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에 경상북도 문경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상주의 두입지 5개면과 예천의 두입지인 동노소면이 편입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14년의 군면 폐합으로 동노소면·산북면·호서남면 등을 제외한 다른 면들은 통폐합되었다. 1956년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1973년 문경면과 가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되어 문경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점촌시
1995년 통합 전 점촌시의 인구는 1956년 읍 승격 당시 2만 800명이었으며, 해마다 증가해 1986년 1월 1일 시로 승격될 당시는 5만 3,571명이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1991년까지는 광산경기의 침체로 인구가 계속 감소했다. 문경군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나, 비교적 인구변화는 적었다.
1975년 인구는 16만 1,115명으로 1965년의 16만 1,116명과 비교해 볼 때 변화가 없는데, 이는 농업 외에 광업 발달에 따른 고용기회의 증대가 인구유출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광업의 쇠퇴로 인해 인구유출이 두드러졌다. 1990년의 인구는 7만 2,075명으로 1975~90년에 55% 정도의 인구감소율을 보였다.
문경시와 점촌시가 통합된 1995년의 문경시 인구는 9만 8,543명이었다. 이후 감소추세가 이어져 2015년 기준 인구는 7만 6,384명을 기록했다. 전체 시인구의 약 58%가 통합 이전의 점촌시 지역에 분포한다. 행정동별로 볼 때 문경읍(7,368명)·점촌5동(1만 6,514명)·점촌3동(1만 98명)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동로면(1,988명)·호계면(2,673명)은 인구가 적다.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있었음을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의 발견으로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근기국(勤耆國:지금의 산양면 일대)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6년(아달라왕 3)에 신라가 계립령(鷄立嶺)을 개척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고대부터 영남과 그 이북을 연결하는 지역으로서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때에는 고사갈이현(高思曷伊縣:또는 冠文縣)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관산현(冠山縣)으로 개칭해 고령군(古寧郡:함창)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문희군(聞喜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문경현으로 개칭했다.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이때 상주의 속현인 가은현(加恩縣:신라의 加害縣, 757년 가은현으로 개칭)을 병합했다. 조선 태종 때의 군현제 개편으로 문경현이 되었으며, 호계현(虎溪縣:신라의 虎側縣 또는 拜山城, 757년 호계현으로 개칭, 1018년 상주에 소속)이 문경으로 이관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문경새재의 중요성이 재확인되어 1708년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안동부 문경군, 1896년에 경상북도 문경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상주의 두입지인 영순면·산동면·산서면·산북면·산남면과 예천의 두입지인 동노소면이 문경에 편입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14년의 군면 폐합으로 동노소면·산북면·호서남면 등을 제외한 다른 면들은 통폐합되었다. 즉 읍내면·초곡면이 문경면으로, 신남면·신동면이 마성면으로, 가은면·가동면·가현면·가북면이 가은면으로, 가서면·가남면이 농암면으로, 호현면·산서면이 호계면으로, 산동면·산남면이 산양면으로, 영순면과 용궁군 서면이 영순면으로 합해졌다. 1956년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1973년 문경면과 가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되어 문경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점촌시
1995년 통합 전 점촌시의 인구는 1956년 읍 승격 당시 2만 800명이었으며, 1970년에 3만 7,366명, 1975년에 4만 1,698명으로 해마다 증가해 1986년 1월 1일 시로 승격될 당시는 5만 3,571명이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1991년까지는 광산경기의 침체로 인구가 계속 감소하여, 1986~91년에 약 9.4%의 인구가 감소했다. 문경군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나, 비교적 인구변화는 적었다. 1975년 인구는 16만 1,115명으로 1965년의 16만 1,116명과 비교해 볼 때 변화가 없는데, 이는 농업 외에 광업 발달에 따른 고용기회의 증대가 인구유출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광업의 쇠퇴로 인해 인구유출이 두드러졌다.
1990년의 인구는 7만 2,075명으로 1975~90년에 55% 정도의 인구감소율을 보였다. 문경시와 점촌시가 통합된 1995년의 문경시 인구는 9만 8,543명이었으며, 1996년 인구는 그보다 약간 감소한 9만 5,777명이다. 2015년 현재 인구는 7만 6,384명이고 전체 시인구의 약 58%가 통합이전의 점촌시 지역에 분포한다. 행정동별로 볼 때 문경읍(7,368명)·점촌5동(1만 6,514명)·점촌3동(1만 98명)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동로면(1,988명)·호계면(2,673명)은 인구가 적다.
시의 서·북쪽은 소백산맥이 뻗어 있어 산세가 험준하며 동남쪽은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이다.
시의 중동부는 운달산(雲達山:1,097m)·대미산(大美山:1,115m)·황정산(皇庭山:1,077m) 등이 북으로 이어지며, 북부산지는 대미산에서 시작해 주흘산(主屹山:1,106m)을 거쳐 충청북도 괴산 쪽으로 이어진다. 서부는 마폐봉(馬閉峯:922m)에서 시작하여 조령산(鳥嶺山:1,017m)·조항산(鳥項山:951m)·청화산(靑華山:970m)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문경분지를 이루며, 조령·이화령 등은 예로부터 서울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했다.
수계의 발달은 미약한 편으로 남부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조령천·신북천과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이 흐른다. 옛 점촌시의 중부를 중심으로 고생대 조선계 지층의 석회암이 분포해 곳곳에 카르스트 지형이 나타나며, 이곳에서 생산된 석회암이 일대의 시멘트 공장에 공급된다. 불정동과 유곡동 일대에는 고생대·중생대의 평안계지층이 분포해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다.
산세가 높고 내륙에 위치해 대륙성기후의 특성이 뚜렷하다. 통합 전 문경시 지역은 연평균기온 12.5℃ 내외, 1월평균기온 -4℃ 내외, 8월평균기온 25.4℃ 내외, 연평균강수량 1,079㎜ 정도이다. 한편 통합 전 점촌시 지역은 연평균기온 12℃ 내외, 1월평균기온 -2.3℃ 내외, 8월평균기온 25.1℃ 내외, 연평균강수량 1,170.1㎜ 정도이다. 온대성식물 생장지로 비교적 적합하며, 박달나무의 군락이 자생한다.
산악지역에 해당하여 경지면적은 전체의 13.69%뿐이다. 논이 67.75㎢, 밭이 57.09㎢로 논이 더 많다(2013). 농경지는 영순면·산양면 등에 집중분포하나 토질은 척박한 편이다. 쌀·보리 등이 생산되고 담배·송이버섯 재배와 양잠 등이 활발하다. 임야면적은 704.45㎢, 임야율은 77.28%에 이르며, 목재생산이 많으나 유용재의 생산증대가 시급하다.
조선시대 서민의 그릇을 굽는 작은 촌락이던 이 지역에 경북선 등 철도가 부설되면서 1960년대말부터 무연탄·흑연·석회석 등의 풍부한 지하자원 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광업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석탄산업의 합리화 시책에 따른 석탄의 수입자유화와 함께 경쟁력을 잃고 광업이 사양화되었다.
1991년 47만 73t을 생산하여 1986년의 109만 6,000t에 비해 그 생산량이 현저히 감소했다. 2013년 기준 전체 41개 광구 중 22개소에서 규석·장석 23만 5,142t을 생산했다. 또한 문경읍 일대는 점토와 좋은 물, 화목을 쉽게 구할 수 있어 도자기공업이 활발하다. 공업은 매우 영세하며, 55개 공장에서 2,286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다.
경북선이 시의 남부를 지난다. 도로는 이화령을 지나 충주-서울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예천·안동·김천 등과 통하는 도로가 있다. 그밖에 단양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동로면·산북면·산양면·영순면을 지난다. 도로총길이 604.49km, 도로포장률은 66.9%이다(2013).
국가지정문화재(보물 8, 사적 1, 천연기념물 2, 중요무형문화재 2),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15, 기념물 6, 민속자료 1, 무형문화재 5), 문화재자료 18점,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흥덕동에서 마제석촉이 발견되었으며, 문화재로는 내화리3층석탑(內化里三層石塔, 보물 제51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37호), 봉암사3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보물 제169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보물 제171호), 대승사목각탱 및 관계문서(보물 제575호) 등과 봉암사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미륵사지마애여래좌상 등의 불상이 있다.
사적으로는 문경관문(사적 제147호, 제1관문 主屹關, 제2관문 鳥谷關, 제3관문 鳥嶺關)이 있으며, 농암면의 반송(천연기념물 제292호)과 홍귀달선생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등이 있다. 이외에 조선시대 40개 찰방역(察訪驛) 가운데 하나였던 유곡역에 관한 사실을 알리는 유곡역지비석(幽谷驛址碑石)들이 점촌북초등학교 정문 앞에 수집되어 있다.
한편 불정동의 수정봉 기슭에 있는 운암사(雲巖寺)는 신라 무열왕 때 의상이 창건한 고찰로서 주변의 빼어난 카르스트 지형과 더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문경향교·근암서원·한천서원·소양서원·능연서원·영고서재 등이 있었는데 문경은 영남학파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학문이 발달했던 곳이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대한제국 말기에 세워진 육영학교, 1930년대에 세워진 심상소학교, 1934년에 세워진 호서남공립보통학교(지금의 호서남초등학교), 1943년에 세워진 유곡간이학교(지금의 점촌북초등학교)를 비롯해 문경공립학교·농암공립학교·문경농림학교 등이 있었다.
2014년 기준 유치원 26개소, 초등학교 17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6개교, 전문대학 1개교가 있다. 문경문화원은 매년 10월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노인대학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문협 문경지부에서 기관지 <백화문학>을 발간하고 있으며, 나래시조문학회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이 지방의 민속놀이로는 석전·지신밟기·타구놀이 등이 전하며, 설화로는 <최명길과 문경새재 성황신에 얽힌 이야기>·<견훤의 출신지에 관한 이야기>·<뙤다리(唐橋) 전설>·<영신들전설> 등이 구전된다.
전래되는 민요로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문경아리랑>을 비롯해, 발달했던 직포수공업과 관련된 민요인 <누에노래>·<뽕따는 처녀노래>·<베틀노래>등의 노동요와 동요·주무요·유희요 등이 주류를 이루며, <새재노래>·<보리타작노래>·<달강노래> 등이 불려지고 있으나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공도서관·공연장·실내체육관·문화회관 등이 있다.
2013년 기준 의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 1개소, 병원 1개소, 요양병원 2개소, 의원 44개소, 치과의원 17개소, 한의원 14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23개소가 있다. 사회복지시설은 노인여가복지시설 366개소, 노인주거복지시설 2개소, 노인의료복지시설 15개소, 재가노인복지시설 9개소, 아동복지시설 1개소, 장애인복지생활시설 3개소, 보육시설 39개소가 있다.
행정구역은 대상리·서중리·대하리·이곡리·종곡리·내화리·약석리·회룡리·가곡리·월천리·지내리·흑송리·거산리·우곡리·석봉리·김룡리·전두리·호암리·창구리·가좌리·소야리 등 21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25개리). 면사무소 소재지는 산북면 금천로 586이다. 면적 111.78㎢, 인구 2,924(2016년)
경상북도 문경시 동부에 있는 면. 면의 대부분이 1,000m 내외의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단산(956m)·운달산(1,097m) 등이 솟아 있다. 산간곡저를 흐르는 소하천 양안에 소규모의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한다. 사과·표고버섯·산송이·산나물 등의 지역 특산품이 생산된다.유물·유적이 풍부하다. 전두리에 있는 대승사 경내에는 금동보살좌상을 비롯하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와 복장유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내화리에는 삼층석탑(보물 제51호), 김용리 김용사에는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640호) 등이 있다. 이밖에 대하리에는 수령 400여년의 소나무(천연기념물 제426호)가 있다.
문경시의 행정 구역은 2읍, 7면, 5행정동(11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3통, 216리의 행정통리와 119개리, 11개동의 법정통리가 있다. 문경시2이며[1], 인구는 2010년 12월 31일[2]
지도[편집]
읍면동 | 한자 | 세대 | 인구 | 면적 | 법정동·리 |
---|---|---|---|---|---|
문경읍 | 聞慶邑 | 3,439 | 7,700 | 156.68 | 상리, 하리, 교촌리, 요성리, 지곡리, 마원리, 진안리, 각서리, 상초리, 하초리 고요리, 팔영리, 당포리, 갈평리, 용연리, 평천리, 중평리, 관음리 |
가은읍 | 加恩邑 | 2,166 | 4,477 | 152.42 | 왕능리, 작천리, 갈전리, 성저리, 수예리, 민지리, 전곡리, 성유리, 하괴리 저음리, 상괴리, 죽문리, 원북리, 완장리 |
영순면 | 永順面 | 1,342 | 2,976 | 38.54 | 의곡리, 김용리, 포내리, 사근리, 금림리, 왕태리, 오룡리, 달지리 이목리, 말응리, 율곡리 |
산양면 | 山陽面 | 1,724 | 3,743 | 32.65 | 불암리, 존도리, 녹문리, 현리, 부암리, 과곡리, 형천리, 위만리, 우본리 진정리, 반곡리, 연소리, 송죽리, 평지리, 신전리, 봉정리 |
호계면 | 虎溪面 | 1,461 | 2,899 | 53.25 | 막곡리, 견탄리, 호계리, 부곡리, 선암리, 지천리, 가도리, 구산리 우로리, 봉서리, 별암리 |
산북면 | 山北面 | 1,573 | 3,217 | 111.21 | 대상리, 서중리, 대하리, 이곡리, 우곡리, 석봉리, 김용리, 거산리, 전두리 호암리, 창구리, 가좌리, 소야리, 종곡리, 내화리, 약석리, 회룡리, 가곡리, 월천리 지내리, 흑송리 |
동로면 | 東魯面 | 921 | 1,844 | 15.6 | 적성리, 석항리, 노은리, 생달리, 명전리, 수평리, 마광리, 인곡리, 간송리 |
마성면 | 麻城面 | 2,021 | 4,132 | 74.77 | 마성리, 모곡리, 신현리, 오천리, 외어리, 남호리, 상내리, 하내리, 정리 |
농암면 | 籠巖面 | 1,520 | 3,034 | 103.46 | 농암리, 종곡리, 연천리, 궁기리, 내서리, 화산리, 율수리, 갈동리, 사현리 지동리, 선곡리 |
점촌1동 | 店村洞 | 2,674 | 6,464 | 0.87 | 점촌동 일부, 모전동 일부 |
점촌2동 | 3,576 | 8,483 | 4.58 | 점촌동 일부, 영신동, 윤직동, 모전동 일부 | |
점촌3동 | 3,919 | 10,211 | 8.94 | 흥덕동, 우지동, 창동 | |
점촌4동 | 1,731 | 3,822 | 29.6 | 공평동, 유곡동, 불정동, 신기동 | |
점촌5동 | 5,094 | 14,931 | 2.09 | 모전동 일부 |
※진하게 표시된 리는 읍·면사무소 소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