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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賈] 씨
본관은 소주(蘇州) 단본(單本)이다. 원래 중국의 성씨로서 요제(堯帝)가 작은 아들 공명(公明)을
가(賈)에 봉함으로써 성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전사한 중국 명(明)나라 장
수 유약(維鑰)이 시조이다.
그때 아들 상(祥)과 침(琛)도 함께 왔는데, 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전사하자 부산 도독동
(都督洞)에 장사한 후 귀하하였다.
그러므로 가씨는 모두 부산지방에 정착한 침의 후손이고, 현재 충청남도 서산·홍성·당진·예산 일
대에 많이 거주한다.
그리고 지금은 소주, 양주, 초락, 태원, 해평 가씨로 5본관으로 나누어졌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4,412명으로 성별 순위가 258성 중 제109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1,
783가구로 274성 중 제111위였다.
간(簡) 씨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로 간백(簡伯)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문헌자료는 없다.
우리나라 가평간씨 시조로 알려진 간균(簡筠)은 1164년(고려 의종 18)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
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풍덕(豊德) 백후동(栢後洞 : 오늘의 加平 지역)으로 내려가 시문을 벗 삼아 살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후 손자인 간주(簡柱)가 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관향을 가평으로 하여 세를 이었다고 한다.
본관은 청주(淸州) ·양주(楊州) ·양근(楊根) ·양성(陽城) 등 22본이 전하지만 이 중 청주 ·양주가 대종이다. 시조 미상으로 여러 문헌에 갈성남(葛成南)이 최초의 갈씨인 듯이 전하고 있으나, 복성인 제갈씨(諸葛氏)에서 갈린 성씨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제갈씨의 시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양(諸葛亮)의 아버지 규(珪)인데, 그의 20대손 공순(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신라에 귀화하였고, 그 뒤 고려 고종 때 홍(泓) ·형(瀅)의 두 형제가 복성을 각각 하나씩 나누어 쓰기로 하고, 형 홍은 제씨로, 아우 형은 갈씨로 분종(分宗)하여 갈씨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역사상 드러난 인물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장수왕 때 갈로(葛盧)라는 무장이 등장하지만 오늘날의 갈씨와 동계(同系)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갈씨는 총 307가구가 있었는데, 1960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1,837명으로 성별순위가 258성 중 제129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737가구로 274성 중 제132위였다.
본관은 합포(合浦) 단본이다. 합포는 경남 창원의 다른 이름으로 창원감씨라고도 한다. 감씨는 원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셋째아들 숙대(叔帶)를 감후(甘侯)에 봉하였으므로 나라 이름을 따서 감씨라 하였다고 전한다. 감씨가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감씨의 시조는 고려 말 우왕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낸 성조(成朝)로 알려져 있다. 감씨의 인물로는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 군위현감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 등을 역임한 상중(尙中)이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전국에 335가구가 있었으며 1960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2,857명으로 성별순위가 258성 중 제118위, 1985년도 조사에서는 1,227가구로 274성 중 제121위였다.
강(康) 씨
본관은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 ·충주(忠州) ·임실(任實) ·용인(龍仁) ·강령(康翎) 등 10본이 전하고 있으나 신천 ·곡산 ·재령 강씨가 대종이며, 오늘날 이들 3본 이외의 강씨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득성조(得姓祖) 숙(叔)은 주(周)나라 왕족으로, 198년 기자(箕子)와 함께 평양에 들어와 기자의 중신(重臣)이 되었다고 하며, 시조 호경(虎景)은 고려 태조 왕건의 외(外) 6대조이고, 그의 4대손 보육(寶育)은 왕건의 외고조부로서 왕덕대왕(王德大王)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그러나 강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중시조(中始祖:1세)는 충렬공(忠烈公) 지연(之淵)으로 그는 몽골 침입 때 고려 고종(高宗)을 따라간 호종공신(扈從功臣)이며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신성은 신천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이때부터 신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강씨는 지연의 후손으로, 곡산강씨의 중조(中祖) 상산백(象山伯) 서(庶)는 6세이며, 재령강씨의 중조 안릉군(安陵君) 득룡(得龍)은 8세로서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그의 친누이동생이다. 득룡은 고려 공민왕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결심, 관악산에 들어가 암자에 살면서 매일같이 산에 올라 개성(開城)을 향해 통곡하였는데, 이곳이 연주대(戀主臺)와 연주암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안릉은 재령의 옛 이름)에 봉하여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그의 후손은 재령에 관적(貫籍)하였다. 제주강씨의 이른바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永)은 신덕왕후의 사촌오라버니로, 전라감사를 지내다가 왕자의 난 때 제주도로 피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쳐 오늘날 제주강씨들은 모두 영의 후손이 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강씨의 분포상황을 보면 총 1만 5428가구 중 절반 이상인 9,600여 가구가 평남 ·평북과 황해도 일대에 밀집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0년도 조사에서는 8,500가구에 4만 7266명으로 성별순위가 258성 중 제55위였으며,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4,000여 가구가 제주도에 집중해 있었고, 85년도 조사에서는 1만 6763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0.1 %로서 274성 중 제58위였다.
강(姜) 씨
본관은 문헌상으로 100여 본이 전하나, 확실한 것은 진주·금천(衿川)·안동·배천(白川)·해미(海美)·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7본이다. 모두 진주의 지파로 오늘날 모든 강씨가 진주의 유일본을 내세우고 있어, 진주강씨의 도시조(都始祖) 이식(以式)이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이식은 고구려의 병마원수(兵馬元帥)로,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고구려에 보내오자, ‘칼로써 대답하자’고 주장,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30만의 수군을 대파하여 무공을 세운 명장이다. 그는 그후에도 을지문덕과 함께 100만의 수군을 무찔러 다시 한번 용맹을 떨쳤다.
강씨는 하(河)·정(鄭)씨와 더불어 진주·진양의 3대 성으로, 특히 하씨와는 다같이 이 지방의 토성(土姓)이므로 전통적으로 가까이 지내고 있다. 강씨는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부산 지방에서, 그 다음으로 전남·경북·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대표적 파는 박사공삼형제파(博土公三兄弟派)·은열공파(殷烈公派)·인헌공파(仁憲公派:금천강씨)인데, 각 파는 도시조 이식으로부터 각 중시조(中始祖)까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동보(同譜)를 못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 [姜] (두산백과)
강전(岡田) 씨
망절씨 (網切)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태어난 ‘망절일랑’을 시조로 1970년에 생긴 일본 귀화성이다. 현재 1가구만이 존재한다.
개(介) 씨
본관은 여주(驪州) 단본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나타난 성으로, 당시 함북 종성군 행영면(行營面) 행영리(行營里)에 영순(永順) ·관오(官伍) ·영준(永俊) 등의 3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영순에 의하면 본래 경기 여주에서 살다가 9대조 때 함경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7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245위였고, 1985년도에는 274성 중 제215위였다.
견(甄) 씨
본관은 황간(黃磵)·전주(全州) 2본이다. 황간견씨의 시조는 신라 말기의 사불성( 沙弗城:尙州)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이고, 전주견씨의 시조는 아자개의 아들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이다.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의 후손으로 본성이 이씨(李氏)였으나 견훤이 15세 때 성을 견으로 바꾸었다. 견훤은 그후 900년(효공왕4)에 완산주(完山州:全州)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990명으로, 274성씨 중 158위를 차지하였다.
견(堅) 씨
본관은 천녕(川寧:驪州) 단본이나, 문헌상으로는 사량(沙梁:水原)·김포(金浦)·충주(忠州) 등도 전한다. 시조는 견권(堅權)으로, 그는 왕건(王建)의 휘하 장군으로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고, 936년(태조 19)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神劍)과 마지막 결전을 할 때 대상(大相)으로서 좌익(左翼)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총 47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24가구는 황해도에서, 나머지는 주로 경상도에서 살았다. 1975년도 조사에서는 249성 중 194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99가구 452명으로 274성 중 181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견 [堅] (두산백과)
경(慶) 씨
본관은 청주(淸州) 단본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성세(盛勢)를 이룬 성씨로, 고려 19대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진(慶珍)이 시조이다. 그의 아들 대승(大升)을 비롯하여 후손 사만(斯萬)·복흥(復興)·보(補)·의(儀) 등이 모두 출중한 인물로 고려 때의 명신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세창(世昌)·세인(世仁)·혼(渾)·섬(暹)·취(冣) )등 14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총 771가구가 경기도 여주·연천·고양(高陽) 등지와 충청북도 괴산·충주·음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 6,159명으로 258성씨 중 99위를 차지하였으며, 1985년 조사에서는 2,418가구로 274성 중 제104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 [慶] (두산백과)
경(景) 씨
본관은 태인(泰仁) 단본이다. 기자(箕子)를 따라 한국에 왔다는 경여송(景汝松)을 시조로 하며, 고려시대에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를 지내고 태산부원군(泰山府院君)에 책봉된 차(磋:文穆公)를 중시조로 한다.
차는 후일 문하시중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손 중에 고려시대의 명신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차의 아들 설정(洩淨:文翼公), 설정의 아들 상조(祥祖)와 상록(祥祿), 상록의 아들 대훤(大暄), 대훤의 아들 세정(世貞), 세정의 아들 일창(日昌) 등은 모두 학문이나 무용(武勇)으로 뛰어난 명신이었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총 431가구 중 257가구가 황해도에, 77가구가 전북에 분포되어 있었다. 1960년 조사에서는 2,007명으로 성별순위가 258성 중 제127위였으며, 1985년 조사에서는 885가구로 274성 중 제126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 [景] (두산백과)
ㅇㅇ
계(桂) 씨
본관은 수안(遂安) 단본이다. 시조 계석손(桂碩遜)은 본래 중국 톈수이[天水] 사람으로 명(明)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는데, 고려시대에 한국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 수안은 지금의 황해도 수안군이다. 그의 아들 3형제 가운데 맏이인 원호(元祜)의 자손은 평안북도 선천(宣川)·강계(江界)에, 그의 아우 원우(元祐)의 자손은 강화도에, 막내 원시(元禔)의 자손은 평안남도 강동(江東)에 자리잡고 살아 각기 한 파를 이루었다.
역사상의 인물로는 조선 영조 때 학자로서 찰방(察訪) 등을 역임하고 문집 《봉곡계찰방유집(鳳谷桂察訪遺集)》을 남긴 덕해(德海)와, 1920년의 청산리 싸움에 참가하고 북만주 일대와 시베리아를 왕래하며 항일투쟁을 벌이는 한편 대종교(大倧敎)의 정교(正敎)로서 종교운동에도 헌신한 화(和)가 있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계씨는 총 2,231가구로 성별 순위는 제82위였는데 그 중 약 90%가 평안도 지방에 살고, 남한에는 166가구가 살았다. 그러나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 3,661명으로 258성 중 제114위로 떨어져 북한에 더 많이 살고 있음을 보여 주었고, 1985년 조사에서는 1,501가구로 274성 중 제115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 [桂] (두산백과)
고(高) 씨
본관은 제주가 대종(大宗)이며, 장흥(長興)·개성(開城)·연안(延安)·용담(龍潭)·담양(潭陽)·의령(宜寧)·고봉(高峰)·옥구(沃溝)·상당(上黨:청주의 옛 이름)·횡성(橫城)·김화(金化)·토산(兎山)·회령(會寧)·안동(安東) 등 10여 본이 문헌에 전하나, 횡성(橫城)을 제외하고 모두가 제주의 분종(分宗)이다. 양씨(梁氏)·부씨(夫氏)와 함께 탐라(耽羅:제주)의 지배씨족으로, 탐라개벽설화(耽羅開闢說話) 삼성혈(三姓穴) 전설로 전해지는 삼신인(三神人) 중의 고을나(高乙那)가 시조다. 시조로부터 45세(世)까지 탐라군주(耽羅君主)를 세습해 오다가, 46세에 말로(末老)가 고려에 입조(入朝)하여 그가 모든 고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고씨의 세계(世系)는 중시조 말로의 아들인 고유(高維)·고강(高綱)·고소(高紹) 3형제가 모두 고려시대에 등과(登科)함으로써 사환(仕宦)의 길이 트여, 이 무렵을 전후하여 탐라의 고씨가 잇달아 육지로 진출하게 된다. 특히, 말로의 장자 유(維)는 고려 문종 때 우복야(右僕射:정2품)에까지 이름으로써 고려에 벼슬한 최초의 탐라인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9상서(尙書)·12한림(翰林)을 고려 때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고씨는 중시조 말로의 증손인 영신(令臣) 때부터 20여 파로 나뉘는데, 그 중 제주고씨 영곡공파(靈谷公派:得宗), 장흥고씨 장흥백파(長興伯派:仲樸), 옥구고씨 문충공파(文忠公派:慶), 개성고씨 양경공파(良敬公派:令臣), 청주고씨 상당군파(上黨君派:恭益), 제주고씨 성주공파(星主公派:仁旦), 제주고씨 전서공파(典書公派:臣傑), 횡성고씨 화전군파(花田君派:仁庇) 등의 후손이 많고, 특히 그 중에서도 영곡공파가 가장 많아 오늘날 모든 고씨의 5분의 1이 영곡공파에 속한다.
고씨는 조선시대에 총 77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 중 장흥이 29명, 제주가 28명, 개성이 8명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 [高] (두산백과)
곡(曲) 씨
본관은 용궁(龍宮) ·면천(沔川)의 두 가지로, 용궁 곡씨는 당(唐)나라에서 귀화했다고 한다. 연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태조 때 평찰(評察) 벼슬을 한 곡긍회(曲矜會)가 있었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74명이 나타나, 성별순위가 258성 중 제209위였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89명으로 274성 중 제211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곡 [曲] (두산백과)
공(孔) 씨
본관은 곡부(曲阜) 단본이다. 시조는 중국의 공자(孔子:丘)이며, 1351년(충정왕 3) 53대손 소(紹)가 원(元)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하여 고려에 왔다가 귀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 창원(昌原)을 식읍으로 받아, 한국 공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국의 창원을 본관으로 같이 할 수 없다 하여, 1794년(정조 18) 공자의 고향인 곡부를 본관으로 하사받아 곡부공씨가 되었다. 대표적 인물로는, 평장사·육위(六衛)대장을 지낸 여(帑:소의 아들), 조선시대 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지낸 부(俯), 고려시대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시대 벼슬을 마다하여 절개를 지킨 은( 㒚:부의 아우), 조선 중종 때 강직한 문신으로 대사헌·경기감사 등을 지낸 서린(瑞麟:소의 10대손) 등이 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는 8명이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700여 가구로서 주로 경남·전남·경기·충북·경북 순으로 집단거주하였고, 1960년 조사에서는 4만 4617명으로 성별 순위가 258성 중 제57위, 1985년 조사에서는 1만 7207가구로 전국가구구성비 0.2%, 274성 중 제56위였다. 2000년 조사에서는 22,758가구 총 73,093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 [孔] (두산백과)
공(公) 씨
본관은 8본이 전하나, 김포(金浦) ·문천(文川)을 제외한 6본은 자세하지 않다. 755년(경덕왕 14)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예인 공윤보(公允輔)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김포에 정착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김포공씨는 윤보의 후손으로 조선 성종 때 계공랑(啓功郞)을 지낸 명례(明禮)가 시조이며, 문천공씨는 같은 윤보의 후손으로 세종 때 함남 문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한 보언(普彦)이 시조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 성균관전적(典籍)을 지내고 시문(詩文)에 능한 규(珪)가 있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437가구로서 성별순위 제119위를 차지하였는데, 이 중 353가구가 평북 벽동군에 집중 거주하고 남한에는 10여 가구만 살았다.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 359명으로 순위가 258성 중 제159위로 떨어져 대다수가 북한에 거주함을 보여주었고, 1985년 조사에서는 420가구로 274성 중 제146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 [公] (두산백과)
곽(郭) 씨
본관은 현풍(玄風)·청주(淸州)·선산(善山)·해미(海美)·여미(餘美)·봉산(鳳山) 등 문헌상으로는 50여 본이 전하나, 청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현풍의 분파로, 현재는 현풍·청주 두 본 외에는 자세하지 않다.
현풍곽씨는 1123년(인종 1) 송(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곽경(郭鏡)을 시조로 하며, 청주곽씨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시중(侍中)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고, 고려 때 형부상서(刑部尙書) 등을 지낸 곽원(郭元)을 중시조(中始祖)로 한다. 청주곽씨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후손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청주곽씨는 개성부윤(開城府尹)·통헌전법판사(通憲典法判事)를 지내고 청원군(淸原君)에 책봉된 곽원의 10세손 연준(延俊)이 청주에 낙향하고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조선시대의 문과 급제자는 57명, 이 중 현풍곽씨 30명, 청주곽씨 14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곽 [郭] (두산백과)
구(具) 씨
본관은 문헌상 3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능성(綾城)·창원(昌原)의 2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총 1만 6704가구, 인구 9만 6482명으로, 성별 인구순위는 258성 중 제38위였다. 그 중 약 45%가 영남에, 20%가 서울 ·경기 지방에 살고 있었다.
1985년도 조사에서는 3만 7563가구, 인구 15만 7526명으로 순위는 274성 중 제40위였다. 능성구씨의 분포를 보면, 도원수파(都元帥派)는 광주(廣州)를 중심한 서울·경기 일원, 판안동파(判安東派)와 판사파(判事派)는 당진(唐津)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원, 좌정승파(左政丞派)는 영남 일원, 낭장파(郞將派)는 충청남도 서천(舒川)·보령(保寧)지방, 시랑중파(侍郞中派)는 전라남도 화순(和順)지방, 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는 전라북도 일대에 밀집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 [具] (두산백과)
구(丘) 씨
시조 구대림(丘大林)은 후한(後漢)의 유신(儒臣)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울진)의 월송정(越松亭) 근처에 표착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낸 구선혁(丘宣赫)을 1세조로 하고, 평해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 6명을 배출하였는데, 역대 인물로는 태조 때 판서를 지낸 천우(天雨)와, 경학(經學)과 역학(易學)의 대가로서 문장이 뛰어난 공조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천우의 증손 종직(從直), 집의를 지낸 치강(致崗), 대사헌을 지낸 치곤(致崑),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달손(達孫) 등이 있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충남 서천군 일대 300가구, 부여 48가구, 경북 영양 47가구가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0년도 조사에서는 6,114명으로 성별 순위가 258성 중 제100위, 1985년도 조사에서는 2,665가구, 1만 859명으로 274성 중 101위, 2000년도 조사에서는 4,128가구 1만 3,176명으로 103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 [丘] (두산백과)
구(邱) 씨
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호적부를 중심으로 한 중추원(中樞院) 조사에 따르면 1930년대 초 경북 김천시 농소면(農所面)에 처음으로 1가구가 나타났다. 구씨(丘氏)는 많아도 구씨(邱氏)는 드문데, 중국의 구씨(丘氏) 가운데는 공자의 휘(諱)가 구(丘)였기 때문에 피하여 구씨(邱氏)로 개성(改姓)한 경우가 있었다고 전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1960년도 조사에서는 경북 14명, 강원 2명 등 16명으로 나타났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62가구, 307명으로 제195위, 2000년에는 280가구, 875명으로 178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 [邱] (두산백과)
국(菊) 씨
196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으로서 본관과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960년도 인구는 총 17가구 108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92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총 109가구로 274성 중 제187위였다.
국(國) 씨
백제 팔족(八族)의 하나.
군(軍) 씨
1930년의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면(進永面)-현 진영읍-에 1가구가 나타났으며, 1975년의 조사에서는 249성 중 제236위였고, 1985년의 조사에서는 49가구, 229명으로서 274성 중 제206위였다.
궁(弓) 씨
단본으로 시조는 고려 숙종 때의 우문감(右門監) 제(濟)이다. 근대인물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달초(達楚) ·억로(億魯) ·현섭(顯燮) ·인성(寅聖) 등이 있는데, 특히 평남 순천(順川)군 출신의 인성은 독립단 평남도지단장으로 활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른 바 있고,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당시 350가구 중 80 %에 가까운 269가구가 평남 순천군과 개천(价川)군 등지에 살았고, 남한지역에는 겨우 10가구 안팎이 살았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궁씨 인구는 300여 명이고,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64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총 134가구로 249성 중 제177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궁 [弓] (두산백과)
권(權) 씨
본관은 안동(安東)·예천(醴泉)만 현존하는데 그 중 안동이 대본이며, 모두 고려 때 사성(賜姓)된 것이다. 안동권씨의 시조 행(幸)은 원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김씨로 이름이 행이었는데, 930년(태조 13) 고려 태조 왕건에게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初諱는 吉) 등과 함께 귀부(歸附)하자 태조는 이들에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라는 작위를 내리고, 김행에게는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하다는 뜻으로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행을 안동권씨의 시조로서, 김선평을 신안동 김씨의 시조로서, 장정필을 안동 장씨의 시조로서, 이 3인을 '태사(三太師)'라 하고, 이들을 모시는 '삼태사묘'가 안동에 있다.
한편, 예천권씨의 시조 섬(暹)은 원래 흔(昕)씨였는데, 고려 충목왕의 휘(諱)가 흔(昕)이어서 '국휘(國諱)를 피한다’하여 나라에서 그의 아버지 흔승단(昕昇旦)이 안동권씨 백서(伯凱)의 사위이므로 백서의 딸인 어머니의 성을 좇아 권씨로 고치게 하였다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 [權] (두산백과)
근(斤) 씨
본관은 청주(淸州)-현 청주시- 단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워낙 희귀한 성이라 그 진부를 알 수 없다. 옛날 한국에도 없고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성으로, 1930년 인구조사 때 처음으로 충남 부여군 세도면(世道面) 청송리(靑松里)에서 1가구가 발견되었다. 근윤섭(斤贇燮)이라는 이름으로, 본관이 청주라 하였고 조상은 약 100년 전에 충남 청양군 정산(定山)에서 이주해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후인 1960년 인구조사에서는 근씨 인구는 100명으로 늘어나 성별 인구순위는 제197위였으며, 1985년 조사에서는 110가구 450명으로 274성 중 제182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 [斤] (두산백과)
금(琴) 씨
본관은 봉화(奉化)인데, 이 밖에도 계양(桂陽:인천)·강화·안동·평해(平海)·문화(文化)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봉화금씨(奉化琴氏:鳳城琴氏)의 분파로서 현재는 봉화금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고려 초의 공신 태사(太師) 용식(容式)이고, 명종(明宗)∼고종(高宗) 때의 명신 영렬공(英烈公) 의(儀:太師의 7代孫)를 중시조로 하고 있으나 원조(遠祖)는 기자와 함께 동래(東來)하였다는 응(應)이라고 한다. 그러나 응으로부터 용식까지, 또 용식 이후 6대를 실전(失傳)하여 의를 1세로 하고 있다. 의는 고려 명종 때 문과에 올라 고종 때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는데, 당대의 명관으로서 지공거(知貢擧) 시관을 맡아보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금학사(琴學士)라는 칭호를 얻었다.
금씨 인구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국에서 1,561가구로 나타났고,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3,319가구로 나타나 인구순위 제82위였으며, 1985년 국세조사에서는 4,833가구에 인구 2만 355명으로 나타나 274성 중 제83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 [琴] (두산백과)
기(奇) 씨
시조는 기우성(友誠)으로 기자(箕子) 48 대손이다.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40대손)의 후손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3형제가, 각각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순우(純祐)의 손자 윤위(允偉) ·윤숙(允肅)이 고종 때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이장대(李將大)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각각 격퇴하였다. 명종 때는 부원수 탁성(卓誠)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충렬왕 때는 자오(子敖)가 내안(乃顔:원나라 태조의 동생)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평장사 윤숙(允肅)의 현손녀, 자오의 딸은 1334년(충숙왕 복위 3) 14세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후궁이 되어, 40년(충혜왕 복위 1)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기황후(奇皇后)가 되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약 1만 2409명으로 258성 중 성별순위 8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5,447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0.1 %, 순위 274성 중 79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 [奇] (두산백과)
길(吉) 씨
본관은 해평(海平:경북 구미) 단본이다. 중국 송(宋)나라의 길당(吉塘)이 고려 문종 때 귀화하여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진 데 연원을 두고 있다. 그 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었다가 후손인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시우(時遇)를 시조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신라 때의 인물로 길문(吉門:波珍飡) ·길선(吉宣:阿飡) 등의 이름이 나오지만 지금의 길씨와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해평길씨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고려 삼은(高麗三隱)’으로 일컬어지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음덕(蔭德)으로 역사상 길이 명문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길재는 1353년(공민왕 2) 경상도 선산부(善山府) 해평에서 금주지사(錦州知事:忠南錦山의 守令)를 지낸 길원진(吉元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몽주 ·이색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박사 ·문하주서(門下注書) 등을 지내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왕조가 개국한 뒤 태종(당시 東宮)이 글친구였던 그를 불러서 정종에게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주었으나 사양하였다. 정종도 그의 절의(節義)와 효도에 감동하여 납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뒤에 세종이 즉위하면서 길재의 아들 사순(師舜)을 벼슬에 등용하였다. 그는 부모가 죽었을 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3년상(喪)을 극진히 마침으로써 유도(儒道)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후손으로는 길회(吉誨)와 길면주(吉冕周)가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길회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호종(扈從)의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길면주는 철종 때의 학자로서 길재의 시문을 모아 《야은속집(冶隱續集)》을 간행하였다. 길씨는 조선 왕조 때 7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이며,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한 길선주(吉善宙)가 유명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총 4,848가구로 성별 순위가 250성 중 제62위였으나, 60년도 조사에서는 1만 9562명으로 258성 중 제72위가 되었다. 이로 통해 길씨가 남한보다 북한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5년도 조사에서는 7,300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는 0.1%,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제73위로 나타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 [吉] (두산백과)
김(金) 씨
<경주 김씨>
신라의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알지는 65년 경주 계림에서 소나무에 걸려 있던 금괘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왕이 김(金)이라고 성씨를 지어 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김해김씨계와 더불어 김씨의 2대 주류를 이루는 대보공(大輔公) 알지계(閼智系) 가운데서도 그 대종을 이루는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분파와 지파가 수십 개에 이를 정도로 매우 복잡하다. 대표적인 분파로는 영분공파(永芬公派)·대안군파[大安君派:은열공파(殷說公派)]·태사공파(太師公派)·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장군공파(將軍公派)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6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 54만 2018가구에 173만 67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분공파〉 영분공 명종(鳴鐘)은 신라 경순왕의 셋째 왕자로 전한다. 이후 수은공파(樹隱公派)·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두계공파(杜溪公派)·참찬공파(參贊公派)·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등의 14개로 분파되었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3명의 왕비 가운데 한 사람인 정안왕후는 월성부원군 천서(天瑞)의 딸이다.
〈대안군파〉 파조 은열(殷說)은 경순왕의 넷째 왕자로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으며,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다. 그의 14세손 덕재(德載)로부터 병판공파(兵判公派)가, 17세손 문기(文起)로부터 백촌공파(白村公派)가, 17세손 인찬(仁贊)으로부터 익화군파(益和君派)가 분파되었다.
〈태사공파〉 태사공 인관(仁琯)은 경순왕의 후손 또는 헌강왕의 7대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8대손 자수(自粹)는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자결하여 충절을 지켰고, 그의 8세손이며 조선시대의 황해도 관찰사인 홍욱(弘郁)의 자손에서 3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대안군파 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영의정 흥경(興慶), 예조판서 이주(燎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노경(魯敬), 서예가 정희(正喜), 판서 노응(魯應), 좌의정 도희(道喜), 영조의 국구(國舅)이며 어영대장을 지낸 한구(漢耉), 우의정 관주(觀柱)가 모두 홍욱의 후손이며, 또한 노론(老論)의 거두 유경(有慶)은 그의 종증손이다.
〈판도판서공파〉 경순왕의 후손 장유(將有)를 파조로 하며,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는 판서·제학 정(淨)이다.
〈장군공파〉파조 순웅(順雄)은 고려 초기에 대장군으로서 황해도병마사를 지냈다. 그의 13세손 균(稛)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계림군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균의 후손에서만 정승 3명과 많은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으니, 좌의정 명원(命元), 판서 남중(南重), 숙종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부친 주신(柱臣), 좌의정 사목(思穆), 판서·대제학 창희(昌熙), 고종 때의 총리대신 홍집(弘集)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밖에 고려 인종 때의 명신이자 사학자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부식(富軾)은 호장공파(戶長公派)인데, 그 후손은 전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김씨 [慶州金氏] (두산백과)
<강릉 김씨 - 경주 김씨에서 분리>
시조는 신라시대 시중(侍中)과 명주군왕(溟州郡王)을 지낸 김주원(金周元)이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상대등(上大等)·시중을 지낸 김유정(金惟靖)이다. 777년(혜공왕 13)에 이찬(伊飡)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785년 선덕왕(宣德王)이 후사 없이 죽자 당시 병부령(兵部令)이던 김주원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그가 수도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건널 수 없게 되자, 상대등인 김경신(金敬信)이 왕으로 추대되었다(이후 신라 38대 원성왕이 됨). 이후 김주원은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이주하였으며, 명주를 중심으로 익령(翼嶺, 지금의 양양), 삼척(三陟), 평해(平海, 지금의 울진) 일대를 다스렸다. 787년(원성왕 2) 김주원은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으며, 이후 자손들이 세습·번성하면서 강릉김씨가 형성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시조 김주원의 묘소(명주군왕릉)와 위패를 모신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강릉김씨는 크게 한림공파(翰林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옥가파(玉街派), 평의공파(評議公派) 등의 4개 파로 구분된다. 인물로는 3대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김상기(金上琦), 김인존(金仁存)·김고(金沽) 형제, 김인존의 아들 김영윤(金永胤)·김영관(金永寬) 형제, 조선시대의 예조판서 김첨경(金添慶), 판서 김시환(金始換)·김시형(金始炯)·김시위(金始登)·김상성(金尙星), 판윤 김시영(金始煐), 우참찬 김노진(金魯鎭),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판서 김화진(金華鎭)·김상중(金尙重), 우참찬 김계락(金啓洛)·김상집(金尙集), 공신·판서 김기종(金起宗), 서예가·목사 김행(金行), 40여 년 간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반(金泮) 등이 있다. 김반의 후손을 세칭 ‘강서김씨(江西金氏)’라고도 한다. 또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릉김씨 [江陵金氏] (두산백과)
<광산 김씨>
신라 신무왕의 셋째아들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컫는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3세손 김길(金佶)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여 명문 가문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大匡)에 오른 김정(金鼎)의 아들인 약채(若采)·약항(若恒)·약시(若時) 3형제대에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은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集)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槃)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구영언》을 낸 가인(歌人) 김천택(金天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희(金喜), 이조판서 김상휴(金相休)·기만(箕晩)·기은(箕殷), 대제학 김만기(金萬基)·만중(萬重) 형제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摠戎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유명한 김만중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진규(金鎭圭)는 김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영의정을 지낸 김양택(金陽澤)은 김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 10권을 남긴 문인 김춘택(金春澤),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영수(金永壽)는 김진규의 형이며, 판서·참찬을 지낸 김진구(金鎭龜)의 후손이다. 조선시대 총 265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고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산김씨 [光山金氏] (두산백과)
<김녕 김씨>
김시흥은 고려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며 명종 때 김녕군으로 봉해졌다. 김녕은 김해의 옛지명으로 김해김씨와 혼돈이 있어 김녕김씨를 후김(後金)으로 불렀다가 조선말 고종의 왕명에 의해 김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 평장사 김향(金珦), 병부상서 김정병(金挺丙) 및 판도판서 김광저(金光儲)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판서 김익생(金益生)·김윤달(金潤達)·김문기(金文起), 좌찬성 김인찬(金仁贊), 한성판윤 김종남(金從南)·김응수(金應壽), 그리고 방어사 김언공(金彦恭)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녕김씨 [金寧金氏] (두산백과)
<경해 김씨 - 김수로왕 시조>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제12대손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김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金克一·金馹孫·金大有)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仇衡)의 증손으로, 그의 조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무력(武力)이고, 그의 부친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서현(舒玄), 그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해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문무명신(文武名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에 속하며,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여 역대 정승 가운데도 숙종 때의 김우항(金宇杭)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한말 이후 김해김씨는 으뜸가는 성씨 인구에 걸맞게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삼현파의 파조(派祖)인 김관은 고려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고, 그 5세손인 김극일(克一)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차자(次子) 김맹(金孟)의 준손(金駿孫)·기손(金驥孫)·일손(金馹孫) 등 세 아들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나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하였다.
이밖에 이조참판·시문가(詩文家) 김현성(金玄成), 사군파 파조(派祖) 김익경(金益卿), 예조판서 조, 고려의 좌시중(左侍中) 김보(金普), 조선시대의 무장(武將) 김경서(金景瑞)·김완(金完), 학자로는 김자정(金自貞)·김덕승(金德承), 화가로는 김홍도(金弘道)·양기(金良驥) 부자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해김씨 [金海金氏] (두산백과)
<김해 김 씨- 김충선 시조>
본명(本名)이 사야가(沙也可)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左先鋒將)이 되어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내침했으나 조선(朝鮮)의 문물(文物)이 뛰어남에 감화되어 경상(慶尙) 좌우(左右) 병마(兵馬) 절도사(節度使) 박진(朴晉)과 김응서(金應瑞)에게 귀화(歸化)의 뜻을 밝혀 조선(朝鮮)의 장수(將守)로 울산(蔚山)과 경주(慶州)ㆍ영천(永川) 등지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음. 특히 그는 조선(朝鮮)에 화포(火砲)와 조총(鳥銃)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地域)의 왜적(倭賊)의 성(城)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음. 본관(本貫), 창성(創姓) 유래(由來): 일본에서의 귀화(歸化) 성씨(姓氏)임. 조선(朝鮮) 선조(宣祖) 임금은 친히 김충선을 불러(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고 하며, 김씨(金氏)로 사성(賜姓)하고 정2품 관계(官階)인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除授)했음. 수로왕(首露王) 계통(系統)의 김해 김씨와 혼동(混同)을 피하기 위하여 우록(友鹿) 김씨(金氏)로 칭관(稱貫)하기도 했음
<안동 김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은열의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안동김씨〉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다. ‘구안동’은 김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김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김흔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김윤(金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김선의 아들 김승용(金承用)은 대제학, 김승택(金承澤)은 평장사, 김영돈(金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김영후(金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김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김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김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김질, 영의정 김수동(金壽童), 이조판서 김찬(金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과 그의 조카 김시민(金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김시양(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김휘(金徽), 숙종 때의 시인 김득신(金得臣: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김응하(金應河)와 훈련대장 김응해(金應海) 형제,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신안동김씨〉 흔히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신안동’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 개국공신·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김선평의 후손들은 김극효(金克孝)의 아들대에서 김상용(金尙容)·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김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김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김상헌의 형 김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수항(壽恒)과 김수항의 아들 영의정 김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김달순(金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儷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김조근(金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김수근(金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州)·병덕(炳德)·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金玉均), 독립운동가·장군 김좌진(金佐鎭)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김씨 [安東金氏] (두산백과)
<의성 김씨>
경순왕의 아들이며 고려 태조의 외손인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김용비(金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세계가 갈린다. 김용필계에서 대제학·학자 김안국(金安國), 참판·학자 김정국(金正國) 형제가 나왔고, 김용비계에서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대사헌 김우옹(金宇勒) 등이 배출되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인 근세 인물로는 학자 김흥락(金興洛), 독립운동가·유학자 김창숙(金昌淑)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성김씨 [義城金氏] (두산백과)
<전주 김씨>
전주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 김태서(金台瑞)이다. 1232년(고종 19)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상장군(上將軍)·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김치원(金致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김씨 [全州金氏] (두산백과)
<청도 김씨>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8대손이며 고려의 평장사 김지대(金之岱)이다. 조선시대에 좌참찬 김점(金漸), 대사간 김난상(金鸞祥), 공신 김희방(金希邦), 학자 김응하(金應夏)·익동(翊東),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 등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