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파란 2호(2016년 여름호)
편집부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B6 / 488쪽 / 2016년 8월 10일 발간
정가 15,000원 / ISSN 2466-1481 / 바코드 9772466148008 62
신간 안내
<계간 파란> 2호(2016년 여름호)가 2016년 8월 10일,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에서 발간되었다. <계간 파란> 2호의 이슈(issue)는 독자들께 약속드린 바와 같이 ‘시론’이다. 허만하, 정현종, 문정희, 이하석, 원구식, 백무산, 송재학, 허수경, 오정국, 나희덕, 박용하, 이원, 함기석, 이수명, 김참, 정재학, 김언, 이재훈, 이영주, 이준규, 신동옥, 신영배, 이현승, 장석원, 이근화, 정한아, 이제니, 정영효 등 현재 한국 시단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원로와 중진, 신진 시인 28명의 시론이 실려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여러 문학 관련 잡지들에서 다양한 코너들을 통해 시인들의 시론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지만, 시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불러일으키거나 현 시단의 여러 의제들을 논의할 때, 심지어는 해당 시인의 시를 읽을 때조차 시론에 눈길을 두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근래 들어서는 ‘시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글을 마주하는 일마저 드물다. 이런 현상은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 논의해 봐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일 것이다. 이에 <계간 파란>에서는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시인들의 시론을 한자리에 모아 그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고 도모하고자 한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시론은 시인 자신과, 그의 실제 작품과, 시 일반에 대한 반성적 기획이자 기투다. 이번 <계간 파란> 2호에 실린 28편의 시론들이 앞으로 한국 시단에 진지한 자기반성과 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예고하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번 <계간 파란> 2호에는 김민정, 김성규, 김현, 박성우, 박소란, 박순원, 송경동, 안희연, 오은, 유현아, 윤성학, 이범근, 이영광, 전윤호, 정다운, 최승철 등 16명의 시인들의 시가 각각 3편씩 실려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과 감수성 그리고 예리한 직관으로 우리 세계 내 도처에 미만한 ‘정치적인 것’에 대해 시로 돌파해 온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를 한 지면에 모은 까닭은 향후 한국시에서 주목하고 지향해야 할 어떤 정치적인 지점들과 그 방향을 살펴보고 꿈꾸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계간 파란> 2호부터 지난 계절에 실린 시들에 대한 평론을 두 편씩 싣는다. 이 글들은 단지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들에 대한 일별이 아니라, 현재 한국 시단에서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들과 <계간 파란>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중심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번 호에는 지난 <계간 파란> 창간호에 실린 신진 시인들의 시 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로 마련하였다.
차례
002 권두언 실패들
issue 시론
010 허만하 시와 철학의 경계
023 정현종 창, 알, 여명 그리고 무한
027 문정희 나의 펜은 피다
041 이하석 풍경의 언어
051 원구식 상징 형식으로서의 시
069 백무산 시는 현실이다
079 송재학 시를 응시하는 시론들
088 허수경 시인이라는 고아
099 오정국 육성의 시, 야생의 목소리
111 나희덕 혀들은 말한다
121 박용하 한 줄의 시
132 이원 기계-무당
144 함기석 고독한 사물들의 세계
156 이수명 그러나 시를 쓴다는 것
168 김참 환상과 초월
178 정재학 파편의 일부
193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5
209 이재훈 잉여시론
221 이영주 공장과 숲
229 이준규 어느 날의 시론
239 신동옥 문장론
256 신영배 사라지는 시
267 이현승 Poetic Justice
279 장석원 우리의 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290 이근화 시를 쓴다는 것
299 정한아 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310 이제니 풀을 따라 걷는 마음
324 정영효 시와 마주하는 상태들
poem
334 김민정 삼합 외 2편
344 김성규 피의 찬양 외 2편
351 김현 잔잔한 마음 외 2편
364 박성우 오디 외 2편
371 박소란 빛의 주인 외 2편
378 박순원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외 2편
384 송경동 고름 외 2편
391 안희연 폐쇄 회로 외 2편
397 오은 옛날 시 외 2편
406 유현아 증명의 시대 외 2편
413 윤성학 몇 해 전 선거일에…… 외 2편
419 이범근 산양이 누웠던 자리 2 외 2편
426 이영광 서울역 외 2편
432 전윤호 천사들의 나라 외 2편
436 정다운 로봇개를 샀다 외 2편
443 최승철 염전(鹽田) 외 2편
criticism
451 이찬 그로테스크의 몸과 말
473 이이체 언어 내적인 시와 언어 외적인 시
권두언 실패들
슬라보예 지젝이 소개했던 헤겔식 농담을 요약하면 이렇다. 유태인과 폴란드인이 기차 안에서 만났는데, 폴란드인은 유태인이 돈을 어떻게 버는지 그 비법이 궁금하던 차였다. 그래서 폴란드인이 그 방법을 묻자 유태인은 일정 금액을 주면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폴란드인이 돈을 건네자 유태인은 좀 괴상한 대답(“우선 죽은 생선의 머리를 잘라서 그 내장을 물 잔 속에 넣어 봐. 그러고 나서 보름달이 뜬 날 자정에 그 잔을 교회 묘지에 묻어야 해.”)을 했는데, 폴란드인은 성급하게도 그게 비법의 전부냐고 물었다. 물론 유태인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그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돈을 더 내라고 했다. 이런 과정들이 몇 번 있고 난 후 폴란드인은 급기야 유태인에게 사기꾼이라며 고함을 지르면서 화를 냈는데, 그때 유태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제 알겠지? 유태인이 돈을 어떻게 버는지.”(<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좀 과장되어 보일 수도 있겠고 어떤 이들에겐 불쾌할 수도 있겠는데, 그리고 실은 무척 낭만적이기까지 한데, 나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시인과 독자 그리고 시론 간의 관계에 제법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유태인이고, 독자는 폴란드인, 시론은 유태인이 들려주는 괴상망측한 대답, 이렇게 말이다. 시? 시는 폴란드인의 환상의 대상, 곧 그가 유태인이 꼭꼭 숨겨 두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그 돈벌이 비법이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게 지금 시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앞자리에서 좀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이야기가 적확하지 않거나 왠지 겸연쩍어서가 아니라 현재 한국 시단의 형편이 이미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폴란드인은 이제 유태인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니 폴란드인은 유태인에게 실은 그 어떠한 비밀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천년대 이후 이런저런 문예지들이 비 온 뒤 죽순처럼 급증했고 그 문예지들마다 시인의 육성을 전하는 지면들을 나름대로 꾸준히 생산해 왔으며 여전히 생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온갖 이야기들은 시인의 시를 읽는 데 하다못해 징검돌이 되기는커녕 시인을 그저 히스테리 환자로 만드는 일에 오히려 일조하고만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구나 할 말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헤겔식 농담에서 만약 하나 더 배울 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유태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거래를 계속 가능하도록 추동하는 유태인의 기괴한 속삭임들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거짓이고 유태인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유태인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비의를 전수하고 있는 셈이다. 시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론이란 가까스로 시의 미미한 부스러기 정도를 적을 수 있을 뿐이거나 어쩌면 결코 제대로 된 언사 하나 하지 못하는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바로 그러함으로써 시를 증거하고 있다고. 유태인의 상술이 거짓말을 통해 실제로 구현되듯이, 시인의 시는 필패하고야 말 시론을 거쳐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그런 만큼 시인의 시론 쓰기는 숭고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무한한 실패라는 의미에서, 실패로 실패를 갱신할 수밖에 없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자, 여기 그러한 실패들이 있다. 이 실패담들은 시에 대해 적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거나 때로는 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시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발행인 채상우
책 속으로
허만하, 「시와 철학의 경계」 중에서
작품은 그것을 쓴 사람의 넉넉한 상상력과 뛰어난 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것은 동시에 쓴 사람을 지우는 것, 무명성에 돌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작품의 임무이고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뼛속부터 쓸쓸한 것이다.
정현종, 「창, 알, 여명 그리고 무한」 중에서
시는 시간을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게 하고,
시는 어떻든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요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이고,
그 빛이 만드는 웃고 있는 무한이다.
그런데 그 무한은 무슨 추상적인 게 아니라
눈 속에 들어 있고
온몸을 물들이는 그런 것이다.
문정희, 「나의 펜은 피다」 중에서
나의 펜은 페니스(pen is penis)가 아니라 피다.
이하석, 「풍경의 언어」 중에서
여전히, 시의 말은 간절한 것이며, 지성스러운 것이며, 절실하고, 지극한 것이라고 여긴다. 간절함은 지성스럽고 절실한 것을 이름이며, 지성스러움은 지극히 정성 어린 데가 있는 것이다. 절실함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며, 지극함은 더없이 극진한 것이다. 이런 말들에 대한 기대를 더욱 애틋하게 갖는 것은 내가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고, 새롭게 생을 되새겨 보는 나이에 들어섰기 때문일까? 그렇진 않으리라. 나이를 의식하기보다는 앞에 든 덕목들은 모든 예술에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다시 ‘시인은 자신이 아는 것을 모르는 자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긍정함을 깨닫는다.
원구식, 「상징 형식으로서의 시」 중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시의 정의 불가능성을 철회하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시를 정의한다. ‘시는 상징 형식이다.’ 그 형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대와 상황과 장소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그 형식은 공시적이고도 통시적인 구조를 가지는데, 그 내용은 같다. 그러나 그 해석은 다르다.
백무산, 「시는 현실이다」 중에서
그(루소)가 언어의 기원에 관해 말을 할 때도 어떠한 지식을 동원하기보다 곧장 자신의 몸을 통과해서 그 근원을 제시한다. 언어 발생의 기원에 관한 루소의 말을 요약하면, 인간의 말의 최초 동기는 정념이었고, 최초의 표현은 비유였으며, 최초의 말은 시였다는 것이다. 몸의 언어에서 말로 옮겨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시였다는 것이다. 현대적 논리에 비추면 낡은 주장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시의 동기는 인간 신체의 야생적 상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이것을 돌려 말하면, 시가 인간과 세계의 신체로부터 분출되는 긴장을 벗어 버리면 야생성은 사라지고 시는 더 이상 인간적 유대를 관리하는 역할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송재학, 「시를 응시하는 시론들」 중에서
물론 좋은 시는 시론을 필요하지 않지만, 그건 시론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시론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시들 속에는 필연적으로 시론이 스며 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것과 밝은 것처럼, 긴 것과 짧은 것처럼, 떫은 것과 단 것처럼, 짝을 맞추게 되어 있다. 독이 있다면 해독제가 있고, 병이 있다면 약이 있다. 그 둘은 서로 노려보고 어깨를 마주치고 결국 같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허수경, 「시인이라는 고아」 중에서
어쩌면 내 시 쓰기의 모든 시간들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내 세대들은 아직도 자신을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또 어떤 의미에서 내 세대는 ‘적’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적’의 얼굴을 닮아 갔는지도 모르겠다. 내 세대는 유감스럽게도 ‘개인’을 발견하고 인식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당한 억압을 통하여 내면을 해방하는 것에 실패한 세대인 것이다(‘내 세대’라고 적었지만 이건 나만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인이라서 시를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내 안에 든 수많은 나와 타자, 다양한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정의되지 못하는 ‘인간의 시간’을 보고 싶었다. 시의 사회적인 역할이 있다면 그 즈음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오정국, 「육성의 시, 야생의 목소리」 중에서
시인은 잠자코 풍경과 사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풍경은 언제나 완결된 상태이다. 이음새가 없고 물 샐 틈이 없다. 사물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히 침묵하는 게 아니다. 사물 속에 잠자는 침묵의 언어들. 그 외부는 무한하다. 무한의 빈 공간이 홀로 불탄다. 여기에 절대의 무한성이 있다. 따라서, 시인은 허기를 느낀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허기이다.
나희덕, 「혀들은 말한다」 중에서
시인들은 시를 쓰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실어증의 증세를 경험한다. 시를 쓰는 일은 죽은 몸 위에 스스로 비문을 새기는 일처럼 늘 답답하고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말의 통로를 잘 더듬어 가다가 어떤 문장(말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운)을 발화하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혀에 대해 아주 다른 감각을 느끼게 된다.
박용하, 「한 줄의 시」 중에서
시인은 고통당하는 자가 아니다. 당한 고통을 쓰고 있으면 너무 늦다. 세계의 고통이든, 인간의 고통이든, 언어의 고통이든 시인은 먼저 고통하는 자다.
이원, 「기계-무당」 중에서
모르는 자로 돌아간다는 것. 영원한 증인의 자리에 선다는 것.
함기석, 「고독한 사물들의 세계」 중에서
사물들은 모두 유장한 호흡과 맥박, 비탄과 격정을 지닌 시다. 스스로 육체의 색채를 탈색하는 전위적 화가다. 마지막 문장을 꿈꾸는 시인이다.
이수명, 「그러나 시를 쓴다는 것」 중에서
배치한다고 생각하면서 배치된다. 배치의 친근함, 배치의 친절함, 배치의 고통, 배치는 놀라지 않는다. 탐구하지 않는다. 배치의 확신, 배치의 방황, 배치는 갇혀 있다. 배치는 숨을 쉬지 않는다. 배치는 끝을 낼 수가 없고 시작할 수가 없고 멈출 수가 없다. 더 많은 공간과 더 빠른 속도 더 강력한 무위, 배치는 두렵고 배치는 배치를 낳고 배치는 시 속에서 죽지 않는다. 배치의 공격, 배치는 시를 염려하고 시를 송두리째 망친다. 배치는 더 이상 포즈가 없다. 가망이 없다. 배치의 실패, 배치의 불가능, 그러나 다시 배치의 회복, 아랑곳없는 재배치, 배치는 뛰어나다. 배치처럼 보인다. 사실상의 부재를, 어디에도 없는 배치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코 배치되지 않는 배치.
김참, 「환상과 초월」 중에서
언어가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것들은 거짓이 된다. 언어를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은 참이 아니다. 언어가 없는 세계에는 거짓이 없지만 언어로 재현된 세계는 거짓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늘 마주하는 이런 반쪽의 세계를 뒤틀어 놓을 때, 우리가 어떤 통로를 통해 세계의 반대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언어와는 다른 의사소통 체계를 얻게 된다.
정재학, 「파편의 일부」 중에서
시가 직접적인 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에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어쩌면 시는 늘 실패하면서도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유일하고 내밀한 문학 형태이기 때문이다. 혹여 시가 직접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더라도 그것은 현실을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대상들을 통해 정신적으로 소외된 곳을 향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환멸의 일부들일 것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5」 중에서
극점과 극점이 과연 만나는 것이라면, 극점과 극점이 될 만한 목록을 더 뽑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이런 것들. 시를 소설처럼 쓰는 것과 소설을 시처럼 쓰는 것. 또는 나를 남처럼 얘기하는 것과 남을 나처럼 얘기하는 것. 또는 있지도 않은 질문에 미리 대답하는 것과 대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 모든 언어로 번역 가능한 문장과 어떤 언어로도 번역 불가능한 문장을 상상하는 것. 실험하는 것. 실천하는 것. 양 극단을 같이 실험하면서 얻어지는 결론은 언제나 한 가지를 향한다. 둘은 한통속이라는 것.
이재훈, 「잉여시론」 중에서
시인은 이별을 많이 해야 한다. 이별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동물이건 자연이건 간에. 나는 지금 어떤 연애를 하고 있을까. 돌과 연애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속을 알 수 없는 아침 안개와 연애하고 있을까.
이영주, 「공장과 숲」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진실은, 사랑을 향한 갈구에 있는가 아니면 사랑의 실패를 외면하는 데에 있는가. 나는 실패를 말하는 데 더 익숙하다. 실패를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으니까. 쓴다는 것은 실패를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한 번 실패하는 일이야. 적어도 내게는. 그러니까 사랑을 향한 갈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쓰고,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서 쓰기도 하는데, 결국은 외면에도 실패한다는 것을 쓰지. 이것이 나의 진실이라면 진실일까.
이준규, 「어느 날의 시론」 중에서
내가 계속 쓰려고 하는 이유는 어쩌면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텍스트는 죽음과 거의 같다.
신동옥, 「문장론」 중에서
문장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기회를 마련하면서 이어진다. 통제할 필요가 없는 자유, 바로 분절(segmenting)의 당위성. 머리만으로, 몸통만으로, 팔다리만으로 전진할 수 있는 ‘몸’을 생산한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부정하면서 문장을 놓아 버리면서 문장을 구축할 가능성. 분절을 통해 언어가 문장에 투항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문장은 끊어지고 잇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시행(詩行)’이라는 절벽을 구축한다. 행과 행이라는 몸체를 만들어 낸다. 왜 잇고 끊는가? 천치처럼, 말더듬이처럼 한 뭉텅이 한 뭉텅이 말뭉치로 자신을 발언하려 드는가?
신영배, 「사라지는 시」 중에서
먹고 싶은 것이 없을 때 시를 꺼내 본다. 시가 맛있었으면 좋겠다. 입고 싶은 것이 없을 때 시를 꺼내 본다. 시가 투명한 맨몸이었으면 좋겠다. 가지고 싶은 것이 없을 때 시를 꺼내 보자. 아름다운 가난을 쓰자. 일어나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창문을 두드리는 낮이었으면, 시가. 어두운 길에서 만나는 환한 숨결이었으면, 시가. 시가 사람이었으면.
이현승, 「Poetic Justice」 중에서
나는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오늘 시가 아프다면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도덕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미학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우리 자신의 의심이나 자신의 몽상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이며, 아직 말이 되지 않는 그 생각을 더디게 따라갈 용기이다.
장석원, 「우리의 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중에서
보들레르는 시인이었고 비평가였다. 정지용은 시를 썼고, <문장>의 중심이었고, 청록파를 문학사에 등장시켰다. 김수영은 시인이었고, 시를 열렬히 읽고 시인을 가슴 깊이 사랑한 비평가였다. 시인이 주인이었다. 문학사의 사실들이다.
이근화, 「시를 쓴다는 것」 중에서
내 말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무수한 나를 이끄는 언어의 관대함. 언어는 물렁물렁한 나를 주무르고 나는 기쁘고 즐겁다.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거기에 놓여 있어서 내 안에 숨 쉬는 타자들의 향연. 그것이, 그들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한아, 「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중에서
현대의 예술가는 점점 자기 지시적이고 비평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낭만주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기술을 연마하고, 사라진 천재의 이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인이 되려 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천재가 아닐 가능성에 사로잡혀 깊은 밤,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셴바흐와 폴란드 소년이, 험버트와 롤리타가, 하이데거와 첼란이, 그리고 이 모든 관계들을 적든 많든 해석해 내는 독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자연인이 한 몸에 산다.
이제니, 「풀을 따라 걷는 마음」 중에서
그러나. 다시.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그리하여. 이 현재는. 이 순간은. 매번 다시 새로 쓰여져야만 하기에. 그리하여. 나는 계속해서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정영효, 「시와 마주하는 상태들」 중에서
지금 나는 시의 위치에서 시를 바라보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시가 아닌 것들이 더 많다. 그래서 시를 이야기하는 동안 시가 아닌 것들을 자주 생각한다. 시가 아닌 것들도 언제든 시를 바라보는 위치에 올 수 있다. 언제든 시로 들어올 수 있다. 시의 가치가 가장 우월적이지 않듯이 시가 무엇을 배척할 자격은 없다. 이런 사실까지 시의 경계 안에 둘 수 있는 자세가 시를 쓰는 내 마음가짐이 되기를 바란다.
❚펴낸곳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07552)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대로59길 80-12, K&C빌딩 3층(등촌동) Tel 02-3665-8689 Fax 02-3665-8690 Internet-Fax 070-8867-8690 E-mail bookparan20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