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장 10-20
이사야의 말씀은 앗수르의 발흥으로 말미암아 유다와 예루살렘에 엄청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계시로 전해진 말씀이다.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은 황폐화되고 조금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나무가 다 잘려서 그루터기처럼 되어 있는 상황이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상황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고 하는데, 다윗과 솔로몬 시대가 오르막이었다면, 이사야의 시대는 내리막이었다. 내리막도 거의 막판에 도달해서 조금 남아 있었다.
10절에 이사야는 관원과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면한다.
특별히 그들의 예배에 대해서 비평한다. 하나님이 무수한 제물과 번제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가증히 여기고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예배를 싫어하고 무겁고, 피곤하다고 말씀하신다. 왜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싫어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당시의 예배는 위선적이었고, 외식적이었다. 참된 예배가 아니라 사람 앞에 보이러 오는 그야말로 마당만 밟을 뿐인 예배였다. 표면적이고, 건성으로 드리는 예배였다.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자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둘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다. 당시 예루살렘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피묻은 손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듣지 않았다.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들을 도와주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이 나아가야 할 길이 바로 이것이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바로 이것이다. 선행을 배우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있을 때 예배가 참 예배가 된다.
예배는 삶의 중심이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성전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그야말로 전체 삶의 센터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가 올바르게 드려진다는 것은 삶의 중심이 바로 서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마당만 밟는 예배가 아니라 마음으로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참된 예배는 삶의 예배이다.
제사장과 예언자의 차이점이 여기에서 부각된다. 제사장은 예배를 중시하고, 보통 왕과 권력자에서 복속되어 종교 기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보통 제사장은 보수적인 일면이 강하고, 안정을 지향하는 특성이 있다. 반면 예언자들은 야인이었다. 그들은 체제의 문제점을 기꺼이 전파하는 비판가들이었다. 그런데 이사야는 제사장이면서 예언자였다. 이 때는 예언자적인 메시지로 성전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변론>하자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과의 변론. 공동번역 성경은 하나님과 시비를 가리자고 되어 있다. 이것은 참만남을 가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변론해야 한다. 이것이 기도이다. 사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신앙인의 삶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대화와 변론이 삶을 이끌어가는 신학이며 사상이다.
하나님의 변론에 있는 약속 하나는 너희 죄가 주홍 같아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고, 너희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된다고 한다. 죄사함의 예언이다. 깨끗함의 예언이다. 사실 이보다 기쁜 예언은 없다.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과거에 지은 피들, 잘못들, 죄악들 이것이 씻김 받을 수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참된 예배의 기쁨은 이러한 죄사함의 기쁨이다. 다시 거룩하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학자들은 이사야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를 거룩으로 꼽는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거룩을 바라신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