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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계와 출신지 및 생졸년
충렬공(忠烈公) 위계정(魏繼廷)의 생애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문선》 《장흥 위씨 족보》 《개인 유고집》등에는 소략하게 기록돼 있다. 따라서 어떤 기록도 그의 생애를 온전하게 밝혀줄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우선 〈고려사 위계정열전〉부터 보자. 여기에는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했다”라는 사실만 기록돼 있다. 그리고 〈문종세가〉에는 “급제한 시기나 첫관직 등은 기록이 없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가계나 생졸년과 출신지 등은 제대로 밝힐 길이 없는 것이다. 다만 네이버 사전에는 “장흥 위씨의 중시조인 고려 초의 시중(侍中) 위창주(魏菖珠)의 후손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청렴하고 바른 말을 간하기로 유명했다” “또한 동시대인과 달리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각종 사서와 위씨 족보 등을 참고한 기술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정체는 기록을 토대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 장흥 위씨의 ‘본관’은 ‘장흥’이며 단일본이라는 점이다. 본관이 장흥인 이유는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시조 위경(魏鏡)은 중국 관서 출신이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나라 태종(이세민)에게 도예지사(道禮之士)의 파견을 청해 638년(戊戌) 자국의 한림학사를 보내니 이들이 팔학사이다. 위경은 동래한 이후 문화 창달에 이바지해 벼슬이 아찬(阿湌)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들은 298년간 실계(失系)로 인해 세계(世系)등이 분명치 않다. 그래서 고려 초에 시중(侍中)을 역임한 창주(菖珠)를 중조로 삼아 끊어진 세계를 이어왔다. 위계정은 장흥 위씨의 족보상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한 4세 기로(耆老)의 차남으로 정종 때에 태어났다. 생년은 확실치 않지만 일부 기록에는 1038년으로 적혀 있다. 동시대 최사추(崔思諏, 1034∼1115)나 임의(任懿,1041∼1117) 등과 선후배이니 맞게 보인다. 졸년은 1107년으로 이 부분은 이론이 없다. 이해는 16대 예종(睿宗) 3년, 북송(北宋) 대관(大觀) 원년 정해(丁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위계정은 1038년에 장흥에서 태어나 69세에 타계한 것이다. 사후 17년째인 1124년 인종(仁宗)은 “시호와 함께 예종묘정에 배향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런데 그의 묘소는 고향인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제암산 북쪽 기슭에 있다. 공의 묘소는 사후 633년만인 1740년에 찾은 것이다. 또한 일부 사서에서는 위계정이 “동시대인과 달리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몽고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에 활동했던 최자(崔滋)는 그의 저서 《속파한집(續破閑集)》에서 그를 “문장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정작 공이 남긴 작품은 거의 없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글이 남아 있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2. 遼와 宋과의 역학관계
위계정의 생애를 보다 정밀하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관계(官界) 진출시기와 당시 주변국과의 국제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국정을 담당하려면 주변 국가와의 외교관계가 자국의 안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맞대고 있는 요(遼)나라와 중원의 강국 송(宋)나라와의 관계를 더듬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과거를 통해 조정의 대신으로 활동하려면 상대국과의 외교관계는 불가피하다. 관직생활과 관련될 국제적 역학관계를 간략하게나마 파악해보고자 한다. <필자 주>
1) 요(遼)나라와의 외교관계
동북아에는 고려를 비롯한 요(遼), 송(宋)등이 정립해 있었다. 고려는 왕건이 918년 건국한 후 후삼국을 통일한 시기는 936년이다. 이보다 2년 전인 916년에 거란족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요하(遼河)에 요나라를 세웠다. 요나라는 926년 발해(渤海)를 멸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2대 야율덕광(耶律德光)은 조광윤(趙匡胤)이 960년에 세운 송나라로부터 북경 대동인근 16주를 할양 받았다. 요는 1004년에 송나라를 침략해 매년 비단과 은(銀)을 조공받기로 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후 100년간 유지됐다. 고려는 주변의 나라와 항쟁과 교역을 벌여 왔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원래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는 남방의 농경민족인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사이거니와, 이러한 남북 간 대립이 한국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동아 국제정세의 삼각관계에 기인하는 결과로서, 중국 남북민족간의 대립에 고려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했던 만큼 북방민족들은 고려가 타방의 여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침략하곤 했다. 10세기 초엽 고려의 건국이 있은 지 얼마 후 중국대륙에서는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고려가 수립한 대외정책은 북진, 친송 정책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마침 송의 북방에서 거란, 여진, 몽고의 유목민족이 차례로 발흥하여 송과 대치했다. 이와 같은 관계는 고려의 북진, 친송정책과 대립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결국 고려는 거란족의 遼와 3차례 이상이나 전쟁을 치르고, 여진족의 금과도 충돌을 일으켜 윤관이 이들을 정복하고 9성을 쌓는 등 외교 분쟁이 야기됐다. 고려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받으면 국내 문제에도 영향이 컸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게 마련이지만, 고려의 역사 전개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됐다. 고려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명분보다 실리를 취한 정책을 실시했다. 고려가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인하여, 어느 한쪽과 일방적 관계를 맺지 않은 채 고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한쪽과 관계를 유지하거나 단절하는 외교정책을 취했다. 송나라의 관계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요나라와는 송나라보다 치우쳤다. 숙종은 소갈병으로 앓은 선종(宣宗)으로부터 임시로 국사를 담당하면서는 관계가 한층 깊어졌다. 이때 고려는 요나라에 사은사, 고주사, 천안절, 예물진봉, 신년축하, 조문사 등의 이름으로 사신을 빈번하게 파견한다. 숙종의 경우 즉위 원년인 1094년만 4회를 비롯 2년 2회, 3년 4회, 4년 5회, 5년 3회, 6년 3회, 7년 2회 등이다. 요나라에 경도된 외교관계로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그만큼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송(宋)나라와의 외교관계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25년 이후 인종 4년까지 《고려사》세가에 따르면 문종대의 5회와 선종시의 4회 숙종, 예종의 치세에 각각 4회와 8회로 21차례였다. 한편 송으로부터 사신이 오기는 15회인데, 그 중 문종·선종·숙종시대에 각기 2회가 있다. 총 횟수만을 비교한다면, 양국이 사절을 파견한 비율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예종 13년을 기점으로 사행의 파견 양상에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송에 파견된 21회의 고려사행은 예종 13년 이전에 있었으나, 송에서는 9회의 사절이 왔을 뿐이다.
북송과 남송과는 의학교류가 활발했다. 북송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9년(1016년)과 천희(天喜) 5년(1021년)에 곽원(郭元)과 한조(韓祚)는 귀국할 때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1000권을 가져왔다. 또 송 휘종(徽宗)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년)에는 고려의 사절 임의(任懿)와 백가신(白可信)이 귀국할 때 태평성혜방 1000권(卷)과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 1100권(卷)을 하사받아 가지고 들어오는 성과를 거뒀다. 같은 해 왕하(王嘏)와 오연총(吳延寵)은 태평어람(太平御覽) 1000권(卷)을 하사했다. 특히 송나라와 고려간의 사절은 의학가들의 왕래가 매우 빈번했다. 사서(史書)에 의하면 송나라에서 8차에 걸쳐서 116명의 한의사와 한의학자들을 고려 조정에 보내서 한의학 이론을 가르침은 물론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중 대다수는 송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의관(醫官)들이다.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4년(1059년) 송나라 정부에서는 강낭동(江郎東)의 명의를 천주(泉州) 상인(商人) 황문경(黃文景)과 소종명(蕭宗明)과 함께 보내서 고려의 왕족들과 대신환자들을 치료해 주라는 임무를 띠는 경우도 있다. 송나라 영종(英宗) 치호(治乎) 5년(1068년)에 개봉(開封) 명의 신수(愼修)와 진잠고(陳潛古)와 저원빈(儲元賓) 등을 고려에 보냈는데 신수는 박학다식하며 의학에 정통한 명의였다. 신수의 아들 신안지(愼安之)도 명의였는데 고려에서 한의학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치료하라고 파견했다. 신종(神宗) 희녕(熙寧) 5년(1072년) 송나라에서 의관 왕유(王愉)와 서광(徐光)을 고려로 보냈다. 희녕 7년(1074년)에 송나라에서는 양주(揚州)에 살고 있는 명의 마세안(馬世安)을 비롯하여 8명의 의사들을 고려에 보냈다. 원풍(元豊) 3년 7월(1080년) 마세안은 두 번째 고려를 방문했다. 고려 문종(文宗)이 풍비(風痺)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종은 송나라 신종에게 의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고려의 왕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송나라 신종은 한림의관(翰林醫官) 형조(邢慥)와 주도능(朱道能)과 심신(沈紳)과 소륜(邵倫) 등 모두 88명의 의료인을 고려 문종에게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신종은 문종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한약을 100여 가지나 보냈다. 양국 의학가들 교류를 통하여 고려와 송나라의 의학은 더욱 발전했다. 고려의 의제는 당제(唐制)였으나 이때 송제(宋制)로 전환했다. 의학교육과 의업과거제도를 실시하고 태의감과 상약국(尙藥局)등의 기구를 설치했으며 태의감(太醫監), 감(監), 소감(小監), 승(丞), 박사(博士), 의정(醫正), 어의(御醫), 직장(直長)등의 직함을 썼다. 의학박사는 의학을 가르쳤고 의업(醫業) 과거(科擧)는 소문, 갑을경, 명당경, 맥경, 침경, 유연자방(劉涓子方), 옹저론(癰疽論), 본초경 등 중국의 의서들이었고 후에 화제국방 등이 첨가됐다.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했다. 송나라는 고려로 많은 종류의 약재를 보냈다. 종류와 수량도 엄청났다. 중국 남방 열대산 약재 예를 들면 천축황(天竺黃)과 안식향(安息香)과 같은 열대산 약재들은 송나라 상인들에 의하여 수입된 약재들이었는데 보내 준 것이다. 한편 고려의 명귀 약재도 10여 종 이상 송나라로 보냈다. 의서출판 사업도 활발했다. 1058년 인종 가우 3년 충주목(忠州牧) 황제팔십일난(黃帝八十一難)이 복제됐다. 1059년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서역의 군정기구)에서 주후방(肘后方)등 3종의 의서가 새로 조각되어 출판됐다.
선종(宣宗)은 1093년 황종의(黃宗懿)를 송나라 철종(哲宗, 元祐 8년)에 파견해 황제침경(黃帝針經) 9권(卷)을 증정했다. 그 당시 송나라에서는 황제침경이 분실되어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송나라에서는 다행으로 고려에서보내준 황제침경의 원본을 복사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가 송나라 의학에 크게 공헌한 또 한 가지 사실이다. 고종 13년(1226년) 고려 의학가 최종3준(崔宗峻)이 본초경과 천금방과 소문과 태평성혜방과 성제총록(聖濟總錄)을 기초로 해서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을 편찬했다. 문종이 송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큰 이유는 고급문화를 수입하려는 의도가 있다. 당시에는 문화의 선진국이 오직 송나라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종 자신과 병약한 왕자들의 치료를 위해 의약품과 용한 의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나라 땅을 밟지 않고 해상으로 송나라에 사절을 파견하려 큰 선박을 만들고자했다. 사실은 유목민족인 요나라를 속으로는 야만족으로 멸시하는 정서가 깔려 있었다. 문종 이후 선종과 숙종도 송나라와 깊은 관계를 갖고 싶었지만 요나라 눈치를 봐야했다.
3)역대왕의 중요연보
◇ 11대 문종(文宗․1019~1082)
․1046년 즉위(28세)
․1055년 그 해 7월 압록강 동쪽에 요나라가 성을 쌓는 것을 보고 항의
․1057년 재차 항의
․1058년 송나라와 국교수립을 위해 서해를 항해할 큰 선박 조선하명.
신하들이 요나라의 눈치 보느라 반대해 성사되지 못함
․1068년 송나라에서 국교수립제의, 문종 기뻐함
․1071년 민관시랑 김제 송나라에 파견, 국교수립. 신하들은 반대함
․1082년 서거(8월)
◇ 12대 순종(順宗․1047~1083)
․1083년 즉위(37세)
․1083년 서거(재위 2개월)
◇ 13대 선종(宣宗․1049~1094)
․1083년 즉위(34세)
․1084년 그해 9월생일 때 요나라가 이가급(李可及)을 사절로 파견하며 조롱
․1086년 4월 조정대폭 개편
․1086년 5월 요나라가 압록강변 각장(榷場) 설치 항의
․1088년 중추원 부사 이원 국경수비대 시찰, 전쟁불사 의지표명
․1088년 태복소경 김선석 요나라에 파견, 강력항의
․1091년 예부의 주장 수렴 유교현인 72인 벽화 그림
․1094년 서거(5월)
◇ 14대 현종(顯宗․1083~1097)
․1094년 즉위(11세)
․1097년 서거(3년)
◇ 15대 숙종(肅宗․1054~1105)
․1095년 즉위(41세)후 조정 대대적 숙청
․1099년 부여후 왕수 경상도 상주로 귀양
․1101년 남경 개창도감설치, 고주법, 해동통보 1만5천관 분배
․1102년 그해 4월 동여진 사절 맞고, 10월 사절파견
․1104년 동여진과 전쟁, 임간 윤관 대패, 화의조약 체결
․1105년 고구려 동명왕 제사지내고 귀로에 서거
◇ 16대 예종(睿宗․1079~1122)
․1105년 즉위(27세) 그해 10월 즉위
․1106년 12월 위계정 문하시중임명
․1107년 17만대군으로 여진정벌(함주․영주․옹주․복주․길주․공험 9성 축성)
․1110년 윤관을 후임 문하시중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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