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믿음을 계승시켜라!
디도서 1:1-4
우리가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라틴어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서 나온 단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로마의 신들의 명칭들 가운데 하나인 “야누스”(Janus)라는 신에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물론 로마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은 인간들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만든 신들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신이 야누스라는 신입니다. 이 야누스라는 신은 본래 문을 지키는 신이었습니다. 라틴어로 “야누아”(Janua)라는 이름이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문에서 양쪽의 정반대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신입니다. 앞에 있는 그림이 바티칸 박물관에 야누스의 신을 그린 조각상입니다. 이 그림에 보면, 야누스는 과거와 현재라는 정반대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1월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특별히 지나간 한 해를 뒤로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경계선상에 서 있는 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금년에 맞이하는 1월의 신년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해의 삶이 미래지향적이고 창조적인 삶이 될 수 있는가 하면, 또 다시 지나간 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과거 지향적인 옛날로 퇴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안고 있는 시간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지나간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결심과 결단을 합니다. 물론 작심삼일로 끝나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순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더 주님을 닮고 더 성화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별로 성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더 집착하면서 매우 과거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시편 29편 11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주는 힘이 아닙니다. 환경이 주는 힘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주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의지하여 주님을 더 닮아가고, 더 성화되어서 금년 한 해 하나님의 일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결단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두 가지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고향과 자손입니다. 죽음이 가까워 오면 짐승도 자기 집을 찾고, 사람도 자기 삶의 뿌리인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이것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손을 찾는 것은 ‘자기 연장의 본능’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인 자손을 찾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손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자손을 남겼다는 사실보다는 어떤 자손을 남겨서 어떤 영향력과 가치를 후대에 계승했느냐에 따라서 그의 평생의 삶이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자손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에게 육신의 자손이 있었다는 그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울에게 영적인 자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영적인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 정도는 마치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기를 때 쏟는 정성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자녀들을 통한 신앙의 계승이야말로 바울이 생애 가운데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에서 바울은 디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참 아들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나의 아들”, “참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디도 뿐만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그가 쓴 서신들을 통해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디모데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2절에서 디모데를 향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빌레몬서 10절에 보면 바울이 자기의 아들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했기 때문에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직접 전도하고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자기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바울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가히 전세계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한편 바울은 특별히 몇몇 사람을 아주 집중적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특별하게 신앙적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들을 자기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사역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영광스럽게 계승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계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죽었을 때에 우리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저 분은 내 믿음의 어머니이다.”
“저 분은 정말 내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냥 형식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신앙이 그들에게 충격과 감화를 주어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전도하고 그들에게 신앙적인 격려와 권면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는 나의 신앙을 전폭적으로 전수 받아 그들을 가리켜서 내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나를 향해서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계승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물려주고자 하는 자신의 믿음의 내용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물려주고자 하는 믿음의 내용이 있습니까?
나의 신앙을 전폭적으로 전수해 주고 싶은 믿음의 정체성이 있습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믿는 그 믿음을 내가 죽은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계승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럽지만 내 믿음을 계승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그 믿음을 붙잡고 지키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디도서를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디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의 계승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도에게 자신이 믿는 그 믿음의 내용을 계승하기 위해서 기록하고 있는 서신이 디도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디도서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누리던 삶의 특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자부심과 그 특권을 계승시키고자 했던 디도에 대한 바울의 기대와 부탁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특권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어마어마한 신분상의 특권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이 두 가지의 표현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던 때는 전세계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의 수가 로마 시민의 네 배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종(노예)들이 흔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종들은 누구의 종이냐에 따라서 신분이 결정되었습니다. 얼마나 지체가 높은 귀족의 종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였습니다. 로마 황제인 시저의 종쯤 되면 어깨에 힘을 주고 돌아다닐만 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종은 왠만한 귀족들 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의 종이다.”
사실, ‘종’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그다지 유쾌한 단어가 아닙니다. 종은 자신의 자유를 깡그리 박탈당하고 주인에 의해서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이 여기에서 ‘종’이라는 단어를 자신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미로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대단한 자부심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합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이 고백에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신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 앞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에게는 이 신분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종 됨에 대한 신분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란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그분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엄청난 신분상의 특권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장차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그분을 대표하는 것을 바울은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이 자기의 특권 그 자체보다는 어떻게 해서 어마어마한 특권이 자신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세 가지의 위대한 재산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세 가지 재산 때문에 자신이 바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세 가지의 재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주어졌던 것과 동일한 하나님의 종이자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재산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재산은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사람들마다 제 각각인 개별적인 전혀 다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어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과 동일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자신의 믿음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믿음은 다른 누군가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계승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복음 앞에 응답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한 그 믿음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복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재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자신에게서 끝나버리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받아들인 이 믿음도 누구에게로부터 계승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이 나에게 계승됨으로 인하여 나도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누군가에게 이 믿음을 공유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을 계승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재산은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그냥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이 다 우리를 유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지식은 우리의 인격을 황폐화시키며, 우리의 삶을 타락시킵니다. 이런 지식은 지극히 자신만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 잘못된 지식이 한 인간과 한 집안에 준 피해는 어마어마합니다. 잘못된 지식 때문이 나라가 망합니다. 백성이 망하고, 가정이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식이 진리의 지식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식을 진리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경건함에 속한”이라고 번역된 것은 그렇게 정확한 번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옮기자면 “경건함에 이르는”, “경건함에 도달하게 하는”이어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경건하게 사는 진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함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지식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디도서는 디모데전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목회서신은 사도들로부터 계승된 복음의 내용에 충실하면서 온갖 이단으로부터의 공격과 악에 맞서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서신에서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목회자의 역할과 자기 훈련, 가르쳐야 할 내용, 그리고 성도들이 지켜야 할 신앙적 자세와 도리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결국 자신을 경건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앎과 지식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건함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지식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그런 지식은 사람과 교회 공동체를 어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4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에서의 지식은 세상적인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식은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지식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어떤 경건한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소유한 진리의 지식은 우리 자신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 지식은 우리를 경건에로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건은 구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에로 나아가는 보다 적극적인 삶의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경건’이라고 하면 무조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혹은 절대로 세속적인 일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합니다. ‘경건’(敬虔)이라는 한자 단어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훨씬 더 쉽게 그 본래적인 의미에 접근하게 합니다. ‘경건’에 해당하는 ‘goodliness’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과 닮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인격, 혹은 하나님을 닮은 삶이 바로 경건인 것입니다.
같은 목회서신으로 분류되고 있는 디모데전서를 보면 ‘경건’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건의 열쇠는 바로 “자족하는 마음”(딤전 6:6)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경건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바로 경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경건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붙잡았던 경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목표였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해치는 원수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저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살려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를 촉구하는 그런 진리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금년 한 해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경건함에 이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 재산은 영생의 소망입니다.
영생의 소망 ….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재산 가운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특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생의 소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는 자를 위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3절에서 이렇게 확정적으로 말씀합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가진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영생의 소망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었습니다. 영생의 소망이 없이는 아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계승하시겠습니까?
내가 전도하여 세운 믿음의 형제들에게 계승시켜 주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계승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믿음의 계승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믿음의 단절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믿음의 계승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받은 그 구원의 믿음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조차도 믿음을 계승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믿음의 단절자가 되지 말고, 믿음의 계승자가 되어 주십시오. 내가 받은 이 위대한 복음을 나에게서 끝내지 말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의 확장자가 되어 주십시오.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전하는 자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금년 한 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건강한 믿음의 삶을 보여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이 믿음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끊임없이 계승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와 여러분의 자손만대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며,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인 주의 몸된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