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의 목회를 꿈꾸는 L목사님에게
왜 주기도로 기도하는가?
L목사님.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전합니다. 당신의 사역과 근황을 A와 B 목사님을 통해 간간히 듣고 있던 차에 당신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학창 시절 추억을 더듬다가 우리는 끝내 목회와 신학에 관한 얘기에 이르렀지요. 그리고 곧 기도로 귀결되었지요. 목회자의 최우선순위는 말씀선포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참으로 소박한 결론을 얻으셨다 하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만 거룩해지는 때문이라고요.(딤전 4:5)
당신은 제게 기도에 관한 책 정보를 물었습니다. 글깨나 읽는 목사이니 좋은 책을 소개해 주면 당신의 영성과 설교 강단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하셨지요. 저는 대뜸 주기도로 기도하기를 권했고, 그에 관한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이 책,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를 추천했지요.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001년 「타임」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신학자입니다. 물론, 「타임」의 권위를 등에 업으려는 수작이 아니라, 아직 우리 신학계에 알려지지 않는 분이라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윌리엄 윌리몬인데, “영어권 최고 설교자 12인”에 선정되었던 분입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두 저자의 조합입니다. 하우어워스는 윤리학자이고 윌리몬은 설교학자입니다. 한분은 대학교수이고, 다른 한분은 대학교목입니다. 한분은 성공회 교인이고, 다른 한분은 감리교인입니다. 이들의 콤비에서 이른 바, 이론과 실천, 교회와 대학, 학문과 현장을 고루 갖춘, 그래서 주기도문으로 설교하기에 안성맞춤이며, 실제 기도하게끔 하는데 더 없이 유용합니다.
왜 주기도인가요? 기도에 관한 세미나와 책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기도의 방법론에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단순이 기도라고 하면 그만일 것을, 무에 그리 기도에 이름이 많은지요. 그 각각이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닐 테고, 그 나름 실용성과 효용성을 입증되었기에 회자될 테고, 누구에겐 가는 유익할 테고, 배울 마음만 있고, 창조적으로 적용하기만 한다면 더 없이 유익하건만, 선뜻 수용하기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통성 기도나 삼창 기도는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에게 강제하는 기복주의 신앙의 전형인 것 같고, 좋게 보아도 보채는 어린아이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어색합니다. 가톨릭의 관상기도와 동방정교회의 예수의 기도는 다른 전통과 지평에 서 있기에 제대로 배우기란 쉽지 않고, 뭔가 신비적이어서 말씀 중심의 전통에서 나고 자란 당신으로서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주기도는 제 욕심을 기도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을 협박하여 승인 받으려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뜻을 구하고, 이 땅에 실현되기를 청원하는 것은 기복적 기도의 치료제입니다. 게다가 성서 중심적 신앙, 기도와 말씀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는 목사님에게 성서로 기도한다는 것,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기도로 기도한다는 것이야말로 대안이지요.
목회와 신앙을 묻다가 도달한 결론은 기도였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주기도문이냐고요? “그리스도인이란 다름 아니라 주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이다.”(27) 이것이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갑니다.(21) 내 욕망을 신에게 투사해서 본전을 뽑아내려는 이방인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때를 구하는 이 기도야 말로, 이 기도의 의미와 정신에 투철하게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그리스도인됨의 표식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고 부름 받았듯이, “우리가 이 기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도가 우리를 선택하”(24)기 때문에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그 나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도록 명령하는 소환장입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로 기도함으로써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분을 떠나는 무리가 되거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주의 기도로 기도하느냐, 나의 기도로 기도하느냐 말입니다.
주기도문인가? 주문인가?
L목사님.
한번은 저희 교우가 이런 말을 전합니다. 한때 집사일 정도로 교회에 충실히 다녔던 분이 계신데, 주기도문을 예배나 모임이 마칠 때 사용하는 것이 싫어서라도 교회 다니지 않는답니다. 정당한 사유라기보다는 궁색한 핑계 같아 보입니다. 주기도문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똑똑히 잘 안다면 교회를 안 다닐 리 만무할 테니까요.
주일 낮 예배보다는 주일 오후예배나 수요예배, 혹은 각 기관 모임을 으레 주기도문으로 마치곤 하지요. “주기도문으로 예배를/모임을 폐하겠습니다.” 낮 예배야 목사님 축도나 성가대 찬양이 있으니 괜찮지만, 다른 때는 공식적으로 어떻게 마쳐야 할 지 몰라 습관처럼 주기도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느 신학자는 뜻 없이 외우는 주기도문은 기도가 아니며, 마침을 알리는 표시가 된 주기도문은 주문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더군요.
목사님이 보시기에 이런 비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태의 주기도문은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경고(6:7) 다음에 등장합니다. 중언부언은 아시다시피 빈말입니다. 뜻 없이 되풀이 하는 말입니다. 했던 말 또 하고, 같은 말을 자꾸 덧붙입니다. 그러니 주기도문을 본래의 의미와 맥락을 간과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중얼중얼 거리는 현재의 주기도문 사용은 그야말로 중언부언의 대표적 사례일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 기도를 암기할 것을 그리고 이 기도를 거듭거듭 반복할 것을 요청한다.”(26) “이 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우는 일, 이 기도가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도록 만드는 일은 시간이 걸리며 습관적인 반복이 필요한 일이다.”(27) “당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당신이 이 주기도를 소리 내어, 공적으로, 습관을 좇아 기도하기 때문이다.”(41)
“습관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손을 물끄러미 본적이 있습니다. 전혀 칼을 의식하지 않고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능숙하게 요리를 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지요. 숱하게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그 몸의 일부가 된 양 익숙합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일들은 말 그대로 습관처럼 합니다. 그렇게 반복하는 와중에 우리 안에 암묵적으로 침투한 세속적 문화와 정신이 점차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습관이 되도록 반복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밝히지 않았지만, 주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습관적인 반복의 금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응당 응답해야 하는 근거나 공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6:7, 새번역) 하나님께 내 말을 많이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내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속속 스며들도록 반복해야겠습니다.
이 말에 용기를 내어 예배 중에도, 예배를 마칠 때에도 주기도를 바칩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식사기도를 할 때에도 다 같이 암송한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도 있으니 안성맞춤이더군요. 아, 그랬더니 아이들이 배도 고프고 음식 식으니 짧게 기도하자고 하더군요. 왜 갑자가 뜬금없이 주기도문이냐고요. 형편 봐가며 하지만, 주기도가 습관이 되도록 계속 할 참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니라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는 신자를 신자되게 한다.
L목사님.
기도에 관한 한, 당신의 고민은 저와 다르지 않더군요. 한편으로 기도에 대한 갈망으로 기도 관련 도서를 탐독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기도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순종과 영성으로의 전환이 왜 이리 힘든지요. 다른 한편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이들일수록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고, 모난 성품이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과 성품 변화는 다른 것일까요? 기도의 시간과 양, 응답의 횟수로 보자면 흠잡을 데 없지만, 내면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많은 책들이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합니다.”(21) 기도의 종류가 무엇이고, 기도하는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고, 왜 기도해야 하고, 왜 응답받지 못하는가, 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기적을 부정하는 근대와 다종교적 사회에서 기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촘촘히 논증합니다. 기도를 머리로 알게 해 주는 책들 덕분에 기도를 더 많이 알게 되었지만, 기도를 더 많이 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요?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의 처방은 주기도를 배우라, 입니다. 두 사람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식과 교리 체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기도입니다. “이 책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일련의 신조가 아니라 당신이 배워야 하는 기도다.”(22) 그리스도인이기에 주기도를 하고, 주기도를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갑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 기도에 관한 책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에 대한 책이다.”(21)
그렇다고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습니다. 기실 신학도 하나의 실천 행위라는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이념으로 치부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교리가 기도에 복무하는 역할임을 상기시킵니다. “교리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하도록 돕는 것”(23)입니다. 신학과 교리도 알고 보면 기도요, 실천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기도를 몸이 아니라 머리, 실천이 아니라 관념으로만 습득하면서 생긴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며, 주기도문은 치료제입니다.
이 책은 기도를 기도답게 하며, 신자를 신자답게 만듭니다. 주기도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단단하기가 철옹성이던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주기도 안에서 이웃을 만나고 자기를 발견합니다. 그다지도 밉던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며, 원수의 얼굴이 다름 아닌 내 얼굴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여, 나도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나 또한 누군가의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용서하게 됩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탐내던 고삐 풀린 욕망을 거두어들이게 되지요.
다른 성서의 기도도 그러하거니와 특별히 주기도는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 뜻이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뜻에 부합한지, 왜 더 많은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에 한정해서 달라고 하는지, 왜 매번 용서에 관한 기도가 기도의 중심인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분으로 우리 속사람이 꽉 차게 되는 거지요. 주기도를 통해 기도를 배우게 되고, 내면 성품이 변화되는 영적 여정에 들어서게 되는 거지요. 주기도를 습관처럼 반복해야 하고, 두 사람의 저술을 필독서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공동체를 창조합니다.
L목사님.
목사님에게 기도는 그저 목사님 한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와 관련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성전을 정화하시며 하신 말씀처럼 교회란 본디 기도하는 곳이니 교회가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면서도 기도만 열심히 하는 교회가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교회가 한 공동체, 하나됨의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다른 어떤 기도보다도 공동체적인 기도는, 아니 어떤 면에서 성서의 모든 기도가 공동체적이지만 공동체라는 특성이 도드라지는 기도가 주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걸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저는 지금껏 주기도문을 수도 없이 외웠지만,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한번도 ‘우리’라는 단어를 의식하거나 주목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나는 우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아우르는 보다 큰 구원의 드라마의 일부입니다.(146) 그러하기에 그 맥락을 간과하면 기독교 신앙을 축소하는 거지요.
기도 가운데 하나님 이름을 부를 때 그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아빠입니다. 김세윤박사가 주기도문의 구조를 분석한 것을 토대로 볼 때, 여섯 개의 청원들 중 후반부의 세 개, 즉 일용할 양식, 죄 용서, 시험으로부터의 보호는 ‘우리’ 청원이라 명명할 정도로 한 개인을 위한 한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가 공동체를 위해 드리는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주기도와 견주어볼 때, 마태복음의 주기도가 예배를 위한 기도라는 특성을 감안할 때 자연스럽습니다. “마태는 교회 예배용으로 기도의 정형을 이루어 이 주기도문을 잘 발전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주기도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 공동체와 예배의 맥락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기도의 공동체적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기독교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며, 그 몸 곧 교회 안에서 사는 문제”(44)라는 점도 포함시켜야 하겠지요.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아빠’로 호명함은 우리 모두가 같은 하나님을 같이 아빠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라는 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기도를 함께 드리면서 우리는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됩니다. 우리는 주기도를 나 홀로 드릴 수 없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일부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주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우리가 친구들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38) 주는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일체의 것들을 상대화합니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그러하고, 혈연에 기초한 가족과 집단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교회가 곧 가족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우리의 가족 너머를 보라고, 우리 자신을 세례를 통해 모든 가족, 나라, 종족, 문화로부터 불려 나온 참 가족 - 이것이 교회다 - 지체로 보라고 가르친다.”(50)
일용할 양식도 한 개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목사님께 이실직고 하겠습니다. 지금껏 나와 나의 가족, 너와 너의 가족의 빵을 위해 기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기도임을 인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실토합니다. 그저 내 문제이거나 너로서의 성도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빵이 공동체적 산물일 뿐 아니라 공동의 책임이라는 뜻”(125)입니다.
두 번째 ‘우리’ 청원인 용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여태껏 저는 용서에 방점을 두고 이 기도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에서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중요하다”(136)고 역설합니다. 무릇 죄란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고, 공동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나와 무관한 듯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한 죄악들에 실상은 연루되어 있다고, 폭력적 권세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음을, 주기도는 나를 고발하고, 그런 삶의 현장으로, 그러면서도 기도의 자리로 나를 소환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 주고받은 상처를 용서하고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서 빚어지는 죄악들을 용서함으로써 세상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세 번째 청원도 우리를 유혹하는 실체가 사회를 배경으로 하기에 나 하나 힘들게 하는 시험의 종류를 나열하지 않습니다. 경제, 인종, 민족, 성, 국가 안보, 미디어 등이 교회와 신자를 죄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149-50) 동시에 그런 권세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대안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공동체(교회)에 입양되며, 그 안에서 드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응답받”(159)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 우리 누구도 홀로 주기도를 기도할 수 없고, 주기도의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한다면 주기도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제대로 기도하지 못한 것일 테지요.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저신 대로 기도할 수 없다. 아멘”(181) 그러니 주기도로 공동체가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워지고 자라나갈 것입니다.
기도는 정치입니다
L목사님.
기도는 정치다, 라는 말에 아마 당신은 눈살을 찌푸렸을 것입니다. 나라와 위정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차원도 아닌 듯 하고, 구제와 봉사의 영역도 아니고 신앙의 심장부인 기도마저 정치화한다는 것이 떨떠름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이것만이라도 순수 그 자체로 내버려두면 좀 좋으냐는 말을 할 법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기독교 신앙에 정치적 요소가 다분하지만, 그걸 정치로 일괄 환원한다면 기독교의 고유한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느냐는 당신의 반론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지요.
당신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으나 정치에 대해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요. 아마도 당장 눈앞의 한 영혼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도 감당키 벅차다는 목회자의 현실, 점차 나이를 들어가면서 안정된 위치에 서면서 예전의 사회 역사 인식에 균열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 사안이 생기면 외골수로 보던 것이 전면과 총체를 파악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지요. 해서, 성향이 전혀 다른 일간지를 두 개를 구독합니다.
더 나아가 신학적인 측면도 강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사회 참여는 당연하고 기본이라는 신학적 확신에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작금의 상황이 당신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모종의 회의, 거리를 두도록 했을 테니까요.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보수정당을,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정치에 대한 기독교 관점과 참여에 대한 당신의 의구심을 증폭시켰지요. 기독교는 기독교로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보수나 진보와 동일시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우선, 왜 주기도가 정치인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주기도의 요체인 하나님 나라가 정치입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청원입니다.” 주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 권세, 영광은 철저히 정치적입니다. 상당히 위험한 용어입니다.(165) “한 왕과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서약은 다른 왕과 다른 나라에 대한 충성과 양립할 수 없”(161)습니다. 특정한 국가에 살면서 자신의 시민권을 다른 국가에 두고, 충성과 헌신을 다른 나라에 한다면, 이야말로 반역입니다.
정치라고 했을 때, 어떤 정치, 누구의 정치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무릇 언어가 그러하듯이 정치라는 말은 단색이 아닌 때문입니다. 그 쓰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권력과 폭력, 무력으로 정치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약함과 섬김, 희생으로 정치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나라를 지배하기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다.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그가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던 나라였다.”(84)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좌와 우도,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나라에 온전히 충성할수록 세상 전체와 대립하게 되는 정치입니다. 세상 질서 전부와 전면적인 대결을 펼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특정한 국가, 즉 미국적인 것으로 축소하려는 시도에 강렬히 저항합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주기도를 기도하는 일과 미국적인 방식대로 사는 일이 양립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15) 그들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자연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며 미국인이라면 당연히 될 수밖에 없는 부산물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입양되는 것이다.”(89)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지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날마다 기도하는 이가, 그분을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해서도 안 되겠지요. 전쟁이나 폭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행할 수는 없지요. 이를 두 사람은 신성모독이라 잘라 말합니다.(78) 복음을 미국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제한하고, 그리고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는 방편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지요.
두 사람의 주기도 해석은 오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상황에 적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의와 해방의 실천이 아니라 특정 권력 감싸기와 때리기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주일 낮 예배에서 자신이 견지하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매주 대표기도 내용이 상반됩니다. 설교도 그러합니다. 자신이 읽는 신문의 논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해서, 교인들은 자기 입장에 부합한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심한 불쾌감을 표현합니다.
주기도는 이 땅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16) 우리의 정체와 관점을 결정하는 것은 주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주기도를 ‘국익이요’라는 한 마디에 일체의 사고와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거래하는 매매행위를 막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도전적이고, 정치 참여적이고, 공적인 일 가운데 하나”(112)입니다.
주와 함께 아멘!
L목사님.
지금까지 주의 기도로 기도하기 위해 왜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책도 주기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입니다. 해설인 한에 있어서 저자들의 신학이 스며있답니다. 성경 각 권이 저자의 개성과 신학, 정황을 배제하고 결코 읽을 수 없듯, 그것들이 계시의 한 방편인 동시에 오늘 우리가 성경을 깨치는데 유효하듯, 이 책 역시 하우어워스의 신학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학의 요체를 파악하기에 안성맞춤인 책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가 다르다는 진부한 표현이 전혀 빤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신학자들의 작업 - 저는 그 중에 김세윤의 책을 추천합니다. - 과 더불어 다른 전통과 지평에 서 있는 책들을 함께 읽을 권합니다. 유럽의 정치신학의 맥락에서 쓰여진 로흐만의 「기도와 정치」, 그리고 남미 해방신학자 보프의 「주의 기도」를 이 책과 곁들여 보시면 풍성하리라 봅니다.
주의 기도는 위험한 기도입니다. 주기도의 끝 간 데를 탐색한 이 책도 당연히 위험할 수밖에요. 이 책의 출판사는 이 책이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온한 책이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주기도 자체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강령이어서 “우리가 주기도를 기도하면 마귀들이 들고 일어난다”(152)는 저자의 말에 수긍한다면, 응당 주의 기도를 다루는 책 역시 위험할 수밖에요. 우리에게도 위험합니다. 일용한 것들을 더 많이 축적하고 싶고, 용서하기는 죽기보다 싫은데, 그걸 버리면 끝장일 것 같은데, 그만두라고, 버리라는 기도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지와 욕구, 성향을 거슬러 ‘아멘’을 외칩니다. 주의 기도대로 살겠다는 다짐이지요. 주의 기도의 마지막 말은 ‘아멘’입니다. 지적으로 ‘옳다’이고, 시간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다’는 확신이요, 실천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결의입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승리에 찬 함성입니다. 저는 이 책을 덮고 나서 ‘아멘!’하고 응답했습니다. 목사님에게서도 ‘아멘’을 기대합니다. 부디 바라기는 주님이 몸소 모범을 보이시고 가르쳐 준 기도와 이 책을 통해 목사님의 기도의 목회에 하늘의 은총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빤한 기도, 주기도문. 너무 빤해 마치 주문처럼 중얼중얼거리도 했었지요. 또 한때 이 기도를 할때마다 흘렸던 눈물도 기억납니다. 기도문이 너무 거창해, 하늘에 있는 아빠로 고쳐 기도하는 날이 더 많았지요. 그 좋았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응답을 기다릴때 계속 주기도문을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도 다시금 주기도문을 해야겠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드디어 오늘 내 손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