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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몽테뉴의 ‘엣세’론
고 봉 진
1. 서 언
요즘 우리 주변에는 ‘수필’ 또는 ‘에세이’라는 이름을 한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어쩌면 단군 이래 이런 종류의 글이 가장 많이 발표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커다란 붐을 이루고 있다. 서점에 가보면 매일 쏟아져 나오는 많은 신간 서적 중에서 학습용이나 실무용 책을 제외하고, 가장 흔한 것이 수필이거나 그 아류의 책들이고, 그것들의 대부분이 기성인이나 신인들의 작품집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외국 사람들이 쓴 글도 많고, 새로 읽히는 옛 사람들의 글도 많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풍요롭게 보이지만 실속은 그런 세(勢)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양적으로 빈곤하던 옛날보다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새로운 작품들을 만나 보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무엇 때문에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바쳐 이런 글을 써야 했는지, 또 그런 글로 결국 아까운 물자 낭비나 될 책을 굳이 만들어 펼쳐야만 했는지 모를 글들도 많다.
수필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백귀가 야행을 하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으니, 당연히 수필의 질을 따지는 논의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면 ‘수필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가 그 토대가 되어,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좋은 작품’, ‘바람직한 작품’을 가려내는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수필이라는 글이 차지하는 장르가 원래 불확실해서 그런지 아직도 그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 와서는 수필이라고 하는 글을 너도 나도 쓰고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나는 수필이라는 것을 이렇게 본다’는 일언거사(一言居士) 식의 ‘수필론’이 또한 봇물이라도 터진 듯이 쏟아져 나와 백가쟁명을 하고 있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럴 때는 더 이상 무익한 논의에 무작정 골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위대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만나기 위해서는 박물관으로, 미술관으로, 도서관으로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곳에는 많은 유물들이 세월과 사람과 그리고 그것 자체의 운명에 의하여, 기가 막히도록 잘 선별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수필이라는 것들, 에세이라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만날 때 시대 순이라든가, 지역 순으로 대상들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 동서고금 너무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으면 좋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 중에서 우선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들을 찾아가 살펴보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좋은 수필’과 그런 글의 ‘요건’이 우리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순서를 잡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맨 처음 찾아가 보게 되는 곳은 흔히 『수상록』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몽테뉴의 ‘엣세’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에세이’란 말의 어원에 해당하는 ‘엣세’란 말이 처음으로 만들어져 저서의 이름으로 사용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2. 몽테뉴와 그가 산 시대
『엣세』를 저술한 미셀 에이켐 드 몽테뉴(MicheI Eyquem de Montaigne)는 프랑스의 서남쪽 옛 이름이 뻬리고르(Péigord)라는 지방의 중심 도시 보르도(Bordeaux) 근교 쌩 미셀 드 몽테뉴(Saint Michel de Montaigne)라는 마을에서 1533년에 태어나 1592년에 59세로 사망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이 그는 그 지방 귀족으로 상업 시민계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남다른 교육열로 2세 때부터 가정교사에 의하여 라틴어를 배웠는데, 집안에 라틴어를 쓰는 사람만 두어 그 말로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6세부터 보르도에 나가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고대 로마의 문학 고전들을 섭렵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21세에 지방 법원 판사가 되었고, 38세에 보르도 최고법원 판사 자리에서 퇴임하기까지 17년간 법관 생활을 했다.
그 후 그는 자기 성에 틀어박혀 독서와 사색에 의한 내성적인 생활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들을 모아 1580년에 각각 57장과 37장의 두 권으로 된 『엣세』 초판을 보르도에서 출간했다.
그 해부터 지병인 신장결석을 치료하고, 몸을 보양을 하기 위해 프랑스 동부 지방, 독일 남부 지역, 스위스, 이탈리아 등의 온천 지역을 돌고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는 등 한 차례 여행을 했다.
1581년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보르도 시장으로 선임이 되자, 곧 귀국해서 85년까지 재직했다. 퇴임 후 다시 독서와 집필 생활로 돌아가 1588년에는 처음의 제1, 2권에다 대폭 증보 가필을 하고, 새로 쓴 13장으로 구성된 제3권을 추가하여 『엣세』의 개정 신판을 파리에서 출간했다. 그 후에도 그가 사망하기까지 4년간 계속 그 책의 난 외 여백에 자필로 방대한 가필과 수정을 계속했다. 그것을 대본으로 한 새로운 책이 1595년에 『저자의 사후에 발견된 신판』이란 이름으로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언뜻 생각하면 그는 한 지방의 여유 있는 귀족으로 평온한 일생을 보낸 것 같고, 그의 저서도 독서와 명상을 즐긴 한 한가한 지식인의 파적물 정도로 보이기 싶다.
그러나 그가 생존했던 당시의 유럽은 오랜 중세의 정체기를 벗어나 근대를 가져오게 되는 일련의 지각 변동이었던 르네상스, 대 항해, 종교개혁이 이어지는 커다란 변화와 격동의 와중에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직전의 15세기와 그가 생존했던 기간의 16세기에 일어난 위의 세 가지 변혁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447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개발하다.
이후 그리스 로마의 고전 보급이 촉진되어 비기독교적 세계관의존재가 지식인들에게 알려진다.
▶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바하마 군도에 도달.
그 뒤에 신대륙의 발견임을 알게 된다.
▶ 1517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95개 조항의 의문을 제기하여 종교개혁이 발화되었다.
▶ 1522년 마젤란 선단(船團)이 세계일주 항해를 달성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증했다.
▶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동설을 발표했다.
▶ 1562년 프랑스에서의 신·구 교도간의 종교 전쟁인 위그노(Huguenot) 전쟁이 시작되다.
▶ 1562년 프랑스에서 국왕 샤를 9세가 개력을 해서 1년의 시작을 부활절 전일로부터 1월 1일로 변경했다.
▶ 1582년 바티칸에서 율리우스력으로부터 그레고리오력으로 개력을 하여 그 해 달력 10월에 10일간이 소멸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 동안 모든 사람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의지해 왔던 세계관이나 신앙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세계가 이 세상 한 구석에 존재 해 왔음을 알게 되고, 1천 년이나 믿어 왔던 교회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가장 확실하게 1년 4계절의 운행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 캘린더조차도 인간의 새로운 천문학적인 지식과 생활상의 편의를 위해서는 인간의 임의로 얼마든지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때의 지식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극히 불안한 전환기적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가 살았던 뻬리고르 지방은 프랑스에서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방의 하나였다. 빈부 차이가 심했고, 부한 귀족과 가난한 평민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신·구교 교도간의 알력과 투쟁이 격심해서 서로 살상을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빈발했고, 무지와 미신으로 인한 마녀 사냥 등 무고한 인명 살상이 자행되고 있었다. 또한 신의 노여운 징벌로만 해석되던 페스트도 유행했다.
몽테뉴는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살았고, 그 속에서 『엣세』를 썼다.
3. 엣 세
우선 그의 『엣세』를 처음 펴들면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하여, 놀라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내용을 읽어 가다가 보면 처음에는 그 불후의 고전이라는 평판에 비해 너무 시시한 주제들에 대한 요설에 가까운 만연체의 서술과 논리적으로 무리한 비약이 잦은 논의 전개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제1권 제I장 ‘사람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 제5장 ‘포위된 군대의 대장은 담판을 하기 위해 성을 나가야만 하는가’ 같은 것들이 그 적절한 예가 된다. 그러나 참고 읽어 가다 보면 차츰차츰 그의 끈질긴 설득력과 인간적인 성실성에 이끌려 깊이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는 『엣세』 초판에 ‘독자에게’라는 글을 썼는데, 그 글 속에서 아무런 꾸밈도 없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그 자신을 제재로 하여 ‘정직 외곬으로 쓴 글’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자에게 자기를 알리거나 도움을 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집안 사람이나 친지들만의 편의를 위해서 쓴 글이라면서, 이런 하잘것 없는 주제에 대한 글을 읽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것은 독자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출간을 해서 널리 배포를 한 것을 보면 그가 내건 말에 모순을 느끼지만, 『엣세』가 그 자신에 대한 탐구의 여러 가지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그의 탐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이다. 비록 그 탐구가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회의주의에 이르기도 하지만, 몽테뉴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자신의 판단력이었다.
제3권 제13장 ‘경험에 대하여’에서 그는 ‘나의 근저에는 판단력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제1권 제50장 ‘데모크리토스와 헬라크레이토스에 대해서’에서는 ‘판단력은 모든 일에 쓰이는 도구이며 또한 어디에라도 관여를 한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서 판단력의 시험(essais)을 하는데 모든 기회를 이용한다’고 했다. 책의 이름 『엣세』는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바로 그의 글이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하여 그의 판단력을 시험해 본 결과에 대한 보고서임을 뜻한다.
『엣세』는 앞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3차례의 판으로 순차적으로 증보되었다. 그의 글은 제1, 2권으로 구성된 초판에 실렸던 글의 문단 앞에는 a라는 기호, 그 뒤 제3권이 추가된 증보 신판에서 추가된 글에는 b, 그리고 그의 사후에 발간된 전 3장에 걸쳐 대폭 증보 가필된 소위 ‘보르도 판’이라고 불리는 그의 사후 개정판에 추가된 글에는 c라는 부호를 매겨 두었다. 그렇게 해서 각각의 집필 시기에 따른 그의 사상과 표현의 변천을 알기 쉽게 구분해 두었지만, 그와는 별도로 그의 초판에 나타난 독서 대상의 연구를 통해서 초판을 내기까지 그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더 세분할 수 있다. 그래서 각 판별 문장 구분과는 별도로 『엣세』에서 그의 사상 변전을 대략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엣세』의 집필을 시작한 1572년에서 74년경까지다. 어떤 주제에 대하여 그리스, 로마의 고전으로부터 여러 가지 실례를 모아 주로 비교하는 방법이 사용된 기간이다. 그가 판사라는 지위를 버리고 자기 성에 칩거하면서,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하도록 만든 동기는 동료이자 친구인 라 보에시의 사망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의 최대의 관심이 쏠린 곳은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상황이었고, 그것이 주제였다.
제1권 제20장 ‘철학을 한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죽는가를 배우는 것이다’가 그 대표적인 글이다. 그는 세네카, 키케로 등의 저작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는 것으로 생의 자유를 지향하는 스토아주의적인 극기주의 사상에 도달하고, 육체나 정염의 욕망을 극복하여 아타락시아(ataraxia)에 이르는 것을 추구했다.
두 번째 단계는 75년에서 76년경으로서 회의주의 사상에 깊이 빠진 시기다. 제2권 제12장 ‘레이몽 스봉에 대한 변호’는 방대한 분량으로 『엣세』의 거의 6분의 1을 차지하는데, 그 기에서 그는 인간의 이성, 판단력, 인식력, 그리고 학문적 지식의 허망함을 프로타고라스등의 저작에서 재료를 인용해서 역설하고,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지적 능력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한다.
세 번째 단계는 78년에서 80년경으로서 ‘자기’ 자체를 『엣세』의 주제로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는 시기다. 그 자신의 육체, 정신, 모든 부위에서 살아 있는 모습의 인간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고, 나이고, 나의 본질이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을 통해서 보편적 인간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몽테뉴의 ‘나’에 의한 인간성의 연구는 후세에 그를 프랑스의 전통적 모랄리스트(인간 관찰자)의 비조로 꼽게 만든다.
네 번째 단계는 그의 만년의 사상을 이루는 것으로 주로 플라톤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제3권 제13장 ‘경험에 대하여’라는 『엣세』의 마지막 장에서는, 종래의 비교하는 방법에 덧붙여, 개인이 인간 전반으로 통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에 대한 묘사를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정신과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옹호하고 그것이 인간 일반의 적정한 생활의 존중, 인간의 다양성을 나무라지 않고, 전체로서 받아들이는 입장에 이른다. 사람은 자연에 따라 살고, 자연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적인 쾌락은 쫓아다녀도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스토아주의적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쾌락주의에 가깝다. 쾌락의 공허함을 과장하고, 무리하게 피하려고 하는 것은 정신의 병이다. 우리의 병 중에 가장 야만스러운 것은 우리 존재를 경멸하는 것이다.
성서는 우리 인간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졌다. 그런데 왜 교회는 정신적으로 살아갈 것만을 요구하고, 신이 준 육체적 쾌락을 멸시하는가? ‘나는 기쁘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자연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고 그것에 만족한다. 자연이 주는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은 저 위대하고 전능한 증여자에게 미안한 일이다’라고 그는 ‘경험에 대해서’의 장에서 이야기한다.
그의 이러한 쾌락의 긍정은 전통적인 쾌락주의의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그의 사상은 쾌락주의라기보다는 인위적인 속박을 부정하고 과도한 것을 물리쳐, 인간성을 본래 그대로 발양토록 하려는 본연 존중의 사상이다. 결국 인간은 바르게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즐겨야 신과 같은 절대적인 완성을 이루는 것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몽테뉴가 끊임없이 역설하고자 한 것은 인간성의 존중과 평화였다. 인간이 이 세계를 그리고, 신의 섭리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받아들인 작은 지식이나 근거 없는 맹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재단하고 죽이고 있는 세태, 신앙에 의한 종교전쟁의 허망함과 무익함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한 진실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래서 몽테뉴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구교도였건만, 그의 『엣세』는 바티칸에 의하여 거의 17세기 중엽까지 금제서(禁制書)로 묶여 있었다.
몽테뉴는 이상에서 간단히 본 그의 사상을 『엣세』에서 현재 우리의 안목으로 보면 아주 장황하게, 그리고 상당히 과장을 해가며 술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 구석 구석에는 적절하게 절제된 만담조의 해학이 자주 엿보이고, 은밀하게 감추어야 할 그 자신의 부끄러운 일에 대한 숨김없는 고백도 나오고,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들의 인용도 많다. 읽기 시작하면 우선 재미가 있어서 지루한 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끝까지 읽게 되고 만다.
그런 매력은 결국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일부 사람들의 폄훼(貶毁)에도 아랑곳없이 이 『엣세』가 부동(不動)의 명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고전으로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까닭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댓글 공부가 되는 글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난 에쎄를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고, 시간도 부족하니 욕심을 내지는 않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에 한 번 읽으렵니다.
참고로 글을 올리실 때에 볼드체(굵게)는 되레 일기에 불편합니다. 가는 서체 대로 두시고 대신 행간을 넓혀서 읽기 편하게 하면 좋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몽테뉴의 에세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에세이도 같은 무게를 두고 음미해야 할 대상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별로 재미없는 중수필같지만 그래도 수필의 감각을 익히기에 둘러보아야 할 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