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학교가 같았고 집이 한 동네였다는 것 말고는 달리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던 우리 두 사람이 가까워진 동기는 우리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찾아온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무근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한다.
그 해 1979년을 지금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중국과 미국이 공식수교를 맺은 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은 어쩌면 필연이지 않았을까. 미국이 소위 빨갱이 국가와 공식외교를 맺은 국제적 현실을 외면하고, 박정희 정부는 여전히 북한 공산당들은 도깨비요 그곳의 인민은 모두 거지라는 식의 반공교육을 고집했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북쪽은 빨강으로 남쪽은 파랑으로 나누어 색칠한 한반도 그림 위에 뒷목에 커다란 혹이 달린 배불뚝이 하나를 눕혀 놓고 커다란 군화로 콱 밟는 그림을 제출하면 의례적인 칭찬과 더불어 교실 뒷면에 그림이 걸리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는데, 그 전통(?)은 중학교에 올라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직방형의 교실 앞에는 짙은 초록의 커다란 칠판이 벽면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뒤편에는 공지사항이나 학생들의 미술작업 따위를 장식하는 널찍한 게시판이 걸려 있었다. 왼편은 교실이 햇볕을 받아들이기 쉽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높이가 천장부터 책상 약간 위까지에 너비는 거의 전면을 차지하는 유리창들의 조합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앞과 뒤에 각각 여닫이문이 있었고 두 문 사이에 있는 유리창들은 조금 높이 위치해서 어린 우리들로서는 의자를 밟고 서야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오른편의 바로 바깥은 복도였다. 교실 앞의 중앙은 선생님이 책 따위를 놓고 서서 강의할 수 있는 강단이 세워져 있었고 왼편에는 선생님만 사용할 수 있는 책걸상 한 쌍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칠판 위로 세 개의 액자가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들어있었고 왼쪽에는 교훈이 오른쪽에는 급훈이 각각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교실 뒤편은 청소도구를 넣는 상자, 학급문고라 부르던 책꽂이, 쓰레기통 따위가 있었다. 천정은 키가 큰 편인 아이들은 폴짝 뛰어 손끝이 닿을 정도였다. 전등은 막대기 형태의 형광등.
팝송과 통기타와 해외펜팔과 장학퀴즈와 해외로부터 전해오는 스포츠 스타 들은 거의 모든 중고등학생의 관심사였고, 일부 아이들은 그 때 막 라디오를 통해 활약하기 시작한 개그맨들에게 관심을 표했으며, 우리 남학생들 사이엔 이소룡의 무술영화와는 색이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준 성룡의 무술영화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인기에 힘입어 태권도, 쿵푸, 합기도 따위를 익히는 아이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쌍절곤을 책가방에 넣고 다니는 녀석들도 꽤 있었다. 교실 뒤편은 큰 소리로 떠들며 액션 배우들을 흉내 내는 녀석들 때문에 쉬는 시간마다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드물긴 했지만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에서 가성 부분을 따라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당시 내 취미는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팝송 가사를 해석해서 친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중학교 진학하기 전에 아버지의 집중적인 노력(이라야 저녁마다 하는 검사가 전부였지만) 덕분으로 내 영어실력은 당시 교과과정을 기준으로 하면 이미 중학교 3학년 1학기 수준까지 가 있었다. 우리가 교실 안팎에서 일으키는 먼지에는 이상한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난 친구들에게서 나는 비린내가 나에게서도 날까 생각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랬을 거다. 미숙의 비린내였을 테니까. 그 비린내를 가위질하는 소리를 내며 앞문이 열렸다.
“대통령이 죽었대!”
앞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는 틀림없이 그렇게 외쳤다.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누가 죽었다고? 대통령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2년 전이었던가. 아이의 눈동자는 반 전체를 훑고 있었다.
“누가 죽었다고?”
뒷자리에 있던 목소리가 물었다.
“나 방금 교무실에 갔다가 선생님들이 하는 소리 들었어.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대.”
당시 학급 서기였던 나는 아침마다 학급일지를 가지러 교무실에 가야 했기 때문에 반장과 부반장 못지않게 담임선생님을 자주 접하는 아이였다.
“그럼 앞으론 누가 김일성하고 싸워?”
“누가 죽였대? 간첩이?”
“전쟁 나는 거나?”
“그럼 대통령은 누가 하지? 대통령 아들?”
“야, 넌 사회시간에 뭐했냐? 국무총리가 대신 하는 거잖아.”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우리나라 국무총리는 너무 순하대. 김일성한테 질 걸?”
“맞아.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우리나라는 군인이 대통령해야 한댔어.”
웅성거림 속에서 몇몇 아이의 입에서 나온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독재자이고 김대중은 선동가이다. 왜 우리나라 국민은 박정희 아니면 김대중밖에 생각 못하는지 모르겠다.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는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곧잘 “박정희는 독재자, 김대중은 선동가” 운운하는 말씀을 하셨다. 독재자.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될 것 같은 낱말. 선동가. 듣고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낱말.
“독재자가 하나 죽었을 뿐이야.”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가운데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은 다른 친구들에겐 별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는지 비린내 나는 웅성거림을 잠재우진 못했다. 창가 쪽으로 뒤에서 두 번째에 앉은 저 아이다. 원유근. 친구들과 별로 섞이는 일이 없고 성적이 우수하거나 예체능 방면에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그 동안은 내게 별반 존재감이 없었던 아이. 그의 입모양은 틀림없이 그 낱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독. 재. 자.
수업을 마치면 종례라는 것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은 대통령 각하, 서거, 슬픈 일, 비극 따위의 어휘를 동원하며 사뭇 비장한 어조로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 태극기를 조기로 달아야 한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나는 힐끗힐끗 유근을 보며 어서 종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유근에게 말을 걸어 동행을 청했다. 씨익 웃으며 그래, 하는 유근의 눈빛에는 여느 친구들과 달리 비린내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표현할 수 있다. 고정관념이 전혀 서려있지 않은 자유로운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학교에서와 달리 유근은 의외로 말을 썩 잘하는 친구였다. 독재자 발언에 대한 나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 그가 한 대답은 놀라웠다. 원유근은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만 교회의 목사였는데 설교 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그만 감옥에 끌려간, 소위 양심수였다. 그의 어머니는 무근의 형제(남동생이 하나 있다)에겐 아버지가 선교 때문에 미국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시지만 무근은 속는 척하고 있을 뿐 자기 아버지가 수감 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회의 문을 닫기 전 신도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본능적으로 그 일이 어머니에게 매우 슬픈 사건일 게 틀림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박정희의 죽음은 그에겐 미국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는 그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기도 했다.
유근은 내가 해석한 팝송 가사를 아주 재밌게 읽고 있다며, 그의 엄마가 나를 칭찬하기도 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집은 내가 전에 살던 집과 아주 가까웠다. 걸어서 불과 10분이면 닿을 거리. 그날 나는 유근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숙제를 했다. 비틀즈 음악을 들으며.
“비틀즈 멤버가 한 사람이라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많이 슬플 거야.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훗날 내가 본명보다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부르게 될 이 유쾌한 벗과 나의 우정은 독재자가 죽은 날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은 그 이듬해 12월에 총에 맞아 죽었다. 무근은 정말 친형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슬퍼했다. (두 죽음 사이에는 광주의 비극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진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새로운 독재자의 나라는 의거를 사태라 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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