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권할 생각이 있었다면 바로 대통령직을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육.해.공 참모총장들이 대통령을 하라고 권유한 일은 있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崔圭夏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피의자 신문조서(제1회) 1995년 12월3일 안양교도소
정치 보복
문 피의자는 현재 무슨 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제가 구속되기 전 저의 변호인인 李亮雨 변호사로부터 듣기로는, 검찰이 1년 2개월에 걸쳐 조사한 후 기소유예했던 소위 12.12 사태에 대한 軍형법상의 책임을 지고 구속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문 지금부터 앞서 말한 12.12 사태의 발생배경이라든가 진행과정, 그에 따른 피의자의 형사책임 등에 관해 질문하겠는데 순순히 진술에 응하시겠나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12.12 사태에 관한 질문은 어떤 사항에 대해서도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문 그렇다면 피의자는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문 묵비권을 행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그저께(1995년 12월1일) 오후 저의 변호인인 李亮雨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서 출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주위 사람들과 상의한 결과, 이번 소환이 저에 대한 정치보복을 위해 행해졌다고 판단, 어제(12월2일) 아침 9시 저희 집 앞에서 국민을 향해 金泳三 대통령의 답변을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번 검찰 수사는 전직 대통령인 저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특히 이 사건은 검찰에서 조사하여 저와 盧泰愚 대통령 등 모든 관련자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한 것인데 다시 재론하는 것은 법 집행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에 관해서는 저의 입장을 밝히는 답변서를 검찰에 제출한 바 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로 답변에 응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문 다른 관련자의 진술과 상반되는 부분을 확인하려고 하는 데는 협조하겠는가요.
“이미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저의 입장을 모두 밝혔으므로 협조하지 못하겠습니다”
문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데 다른 이유는 없는가요.
“저는 평생을 명예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인데,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구속하니,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조사에도 응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문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진술에 응하시겠나요.
“제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 사건을 맡고 있는 검사 개개인에 대한 불만이 있다거나 검사들이 저를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검찰의 재수사 착수 및 저의 구속이 정치보복일 뿐만 아니라 12월2일 제가 성명서를 발표한 데 대한 일종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12 사건 재수사와 5.18 특별법 제정 등 저와 측근들에 대한 일련의 불순한 움직임을 즉각 취소하면 진술에 응하겠습니다.”
문 그러면 12.12 사태의 본질적인 내용 이외의 사항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시겠나요.
“그런 사항에 대해서는 순순히 진술에 응하겠습니다”
문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1979년 3월5일경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게 된 1980년 4월14일경까지 재직했습니다”
盧載鉉 장관이 보안사령관 추천
문 피의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나요.
“1979년 3월5일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盧載鉉 장관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법률상 임명권자는 국방부장관이지만, 내정 과정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 피의자는 누가 발탁했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盧載鉉씨가 평소에 朴대통령이 저를 총애하는 것을 알고, 저를 적극 추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 배경은 어떤가요.
“당시 金載圭, 車智澈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은 등 朴대통령 주변 인물 몇몇분 사이에 권력암투가 있었습니다. 金載圭는 자신의 측근인 문홍구 장군을, 車智澈은 자신의 측근인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천거했으며, 盧載鉉 국방부장관은 저를 추천했는데, 朴대통령이 저를 직접 낙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10.26 사건 발생 직후 합수본부장에 취임했는데 결국 피의자의 당시 보직이 보안사령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12.12, 5.17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이 되고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의 인생에 있어서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이 그 후의 인생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인가요.
“저는 그것이 인생에 있어 운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 10월26일 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安家 식당에서 朴대통령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 車智澈 대통령 경호실장과 함께 만찬을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나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저녁 행사를 보안사령관이 알 리가 있는가요”
문 그날 軍에 비상이 발령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요.
“직원 격려차 서빙고 분실로 가고 있는 중이었으며, 서빙고 분실에 도착하여 비상이 발령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盧載鉉 국방부장관이 즉시 국방부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고 해서 국방부로 갔습니다”
문 국방장관과 軍 수뇌부가 陸本 B2 벙커로 소집되었을 때 피의자도 B2 벙커에 소집되었나요.
“국방부로 갔더니 다른 사람이 陸本벙커로 가라고 하여 그리로 갔습니다”
문 朴대통령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陸本 벙커에서 다시 국방부장관실로 장소를 옮겼더니 그곳에서 盧載鉉 장관이 이야기 해주어 알게 됐습니다”
문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金載圭를 체포하기 위해 김진기 헌병감이 유인하고 제가 오일랑 중령에게 金載圭 체포를 지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金桂元 비서실장이 대통령 전용차에 신원을 알아 볼 수 없는 시신을 싣고 와 국군서울지구병원 대통령실에 안치시켜 놓고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한 후 돌아가고, 신원 불상의 남자 2명이 시신을 지키고 있으면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보안사 참모장, 감찰실장 등 보안사 간부들이 그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병원장 등 병원측과 통화했고, 그 결과 코드 원(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고소인들 주장에 의하면 피의자가 즉시 시신을 확인하고 시신을 지키는 자들을 체포하여 추궁했더라면 쉽게 범인을 색출하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는데,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피의자가 내란을 방조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鄭昇和를 의심한 이유
문 피의자에게 金載圭를 체포하라고 누가 언제 지시했으며, 누가 언제 金載圭를 실제로 체포했나요.
“盧載鉉 국방부장관이 지시했고, 김진기 헌병감이 金載圭를 유인하고 제가 보안사 오일랑 중령에게 金載圭 체포를 지시하여 보안사 직원들이 체포했습니다”
문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계엄사령관 직속 기구인데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을 연행 조사하려면 그 당시 어떤 절차를 밟았어야 했나요.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제가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할 때에도 체포 및 조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2~3회에 걸쳐 당시 盧載鉉 국방부장관에게 사전 보고한 바 있습니다”
문 盧載鉉 국방부장관은 그와 같은 보고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이어서 그를 체포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므로 시간을 충분히 두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문 피의자는 盧載鉉 장관의 위와 같은 말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나요.
“저는 鄭昇和 참모총장의 체포 및 조사의 필요성은 승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金載圭 등을 조사한 결과 鄭昇和가 金載圭의 범행을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상세히 말하십시오.
“궁정동에서 朴대통령 시해사건 발생 당시, 鄭昇和 총장이 金載圭의 연락을 받고 사건현장 부근에 가 두 시간 가량이나 있었던 점, 부근에서 朴대통령이 만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렸음에도 그 경위와 범인을 확인하지 않았던 점, 金載圭가 피묻은 와이셔츠 바람에 맨발이었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터임에도 경위도 알아보지 않고 그 승용차에 탔던 점, 金載圭가 준 껌을 먹지 않을 정도로 의심하면서도 그와 행동을 같이 한 점, 陸本으로 가는 승용차 속에서 계엄선포시의 병력이동 및 배치계획을 金載圭와 의논했던 점, 陸本에서 임의로 비상소집, 병력이동, 배치 등을 지시한 후 金載圭에게 이를 보고했던 점, 수경사령관, 대통령 경호실 차장과 통화하여 車智澈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金載圭를 체포하지 않았던 점, 金載圭가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鄭총장을 이에 참가시키려 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鄭昇和 총장이 金載圭의 범행에 방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문 그러나 계엄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국방부장관에 대한 구두보고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요.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계엄사령관을 체포한다는 것은 고도의 보안성을 요하는 것이었고 저의 生死와도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12.12는 우발적 충돌일 뿐
문 崔圭夏 대통령에게는 鄭昇和 총장의 체포 사실을 사전에 보고했나요.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문 鄭昇和 총장이 金載圭의 내란 범행에 동조했다면 10월26일 당일 국무회의의 대세 파악과 金載圭의 원조를 위해 국무회의장에 상주했을 것인데도, 국무위원들이 있던 장소에는 5분 정도 머문 외 陸本 벙커 내 상황실에서 상황조치만을 시행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鄭昇和 총장이 金載圭의 내란 범행을 방조했다면 당시 그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 않나요.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金載圭가 국무회의를 거의 주도했습니다”
문 鄭昇和 총장이 金載圭의 내란 범행 방조를 위해 한 조치 중 가장 적극적인 조치는 金載圭와 협의하여 9여단과 20사단을 출동시켰다는 것인 바, 출동명령 직후 鄭昇和 총장이 국민의 혼란을 우려하여 9여단의 출동을 자정 이후로 정정 명령했음에도 사전.사후에 金載圭에게 그처럼 중요한 병력이동 명령의 변경에 대해 전혀 상의 내지 통보한 사실이 없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오래된 일이라서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문 鄭昇和는 朴대통령 시해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金載圭가 범행 후 자신의 승용차 속에서 朴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려주어 비로소 알았다는데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 鄭昇和는 金載圭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승용차 속에서 중앙정보부장인 金載圭와 대통령 사망으로 인한 혼란 등 수습대책을 의논했을 뿐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사실과 다른가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 또 鄭昇和는 대통령 비서실장 金桂元으로부터 金載圭가 朴대통령 살해범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金載圭가 범인인 줄 알았으며 그 즉시 金載圭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아닌가요.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문 합수부측에서 鄭昇和가 1차 조사를 받을 때, 계엄사령관의 직위를 이용,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는가요.
“당시 정경식 검사가 鄭昇和 총장을 참모총장실로 방문하여 조사했는데 제대로 조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문 피의자는 11월6일 10.26 사건 수사결과 발표시 鄭昇和는 아무 관련이 없고 오히려 사태수습을 적절히 잘했다고 발표한 사실이 있는가요.
“鄭昇和 총장은 당시 서슬이 시퍼런 계엄사령관인데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사실대로 발표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 피의자는 12.12 사건의 성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나요.
“12.12 사건이란 계엄사령관인 鄭昇和의 내란방조 혐의를 합동수사본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사시설이 되어 있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모셔오는 과정에서 鄭총장측의 무력행사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사건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문 그러면 우발적인 사실일 뿐 합수부측의 계획적인 범행이 아니란 말인가요.
“결코 사전에 계획한 사건이 아닙니다”
문 관련 참고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12.12 당일 30경비단에 군장성들이 미리 모여 있었고, 鄭昇和 총장측의 수경사령관 張泰玩 등을 연희동 소재 요정으로 유인해 둔 사실이 인정되는데 일련의 준비상황에 비추어 보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軍權 찬탈을 시도한 사건이 아닌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에 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문 鄭총장 연행 보고서의 대통령 재가 문제와 관련하여 재가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요.
“제가 알기로는 재가의 의미는 단순히 회람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서명한다는 의미밖에 없고 그런 전례가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구두보고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車智澈.金載圭 갈아치우라고 건의하려 했다
문 피의자가 10월27일 朴대통령에게 부마사태로 인해 어수선한 시국을 수습하는 대책을 건의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10월27일 朴대통령에게 그러한 대책을 건의하기 위해 면담 허가 신청을 했는데 10.26 사건이 발생해서 보고드리지 못해 그 보고문서를 폐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요 골자는 부마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대통령 심복들간에 권력암투가 있어서 그런데 어수선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車智澈 경호실장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을 갈아치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 10월26일 사건과 관련하여 피의자가 직무유기로 구속한 당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 이재전 장군을 鄭昇和 총장이 피의자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석방하여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제가 합수본부장으로 이재전 장군과 당일 경호실 당직 사령 강태춘을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한 사실이 있는데, 주범격인 이재전 장군을 鄭총장이 친분이 있다는 관계로 석방하고, 종범격인 강태춘을 그대로 구속한 상태로 두었기 때문에 제가 공정한 사건 처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시정을 건의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 12.12 당시 수개월 안에 정권을 인수할 계획도 수립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12.12 사건 이후 서빙고 분실에서 피의자와 李鶴捧 중령이 張泰玩 장군을 만났을 때 피의자가 張장군에게 張泰玩은 군단장을, 鄭총장은 장관을 시켜주려 하였다고 말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요.
“張泰玩을 만난 사실조차 없습니다”
문 피의자가 12.12 사건을 주동했던 것은 朴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및 軍 인사 등과 관련하여 계엄사령관인 鄭총장이 피의자 간에 의견대립이 심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鄭총장은 저의 직속상관으로서 계급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의견 대립이란 있을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문 12월9일 鄭총장이 태능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면서 盧장관에게 합수본부장의 경질을 건의했다는 말도 있는데 어떠한지, 위와 같은 정보를 金容烋 국방차관 등을 통해 12월10일 오전에 입수했다고 하는데 그러한지, 이로 인해 당초 12월16일로 예정된 거사일을 12월12일로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문 최근에는 盧泰愚 前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은 실로 엄청난 충격과 분노, 그리고 심한 자괴감에 빠져 12.12와 5.18 사건을 통해 집권한 두 전직 대통령의 집권과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두 분의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 최근 盧泰愚 前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이번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떠한 절차로 처리되기를 바라고 있는가요.
“12.12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검찰에 출석하여 진술했고, 정확한 진상이 규명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검찰이 이미 제출된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며 또한 공개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아가 앞으로 이러한 수사 및 재판결과가 자료가 되어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요망합니다”
피의자 신문조서(제2회) 1995년 12월7일 안양교도소
계엄사령관 예우 차원에서 대통령 결재 받으려 했다
문 10.26 사건 수사 결과 鄭昇和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鄭昇和 총장이 10.26 사건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요.
“그런 소문은 시중에서도 나돌고 있었지만, 軍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이 돌고 있었으며, 장교들 사이에 그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문 피의자는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兪學聖, 黃永時, 車圭憲, 盧泰愚 장군 등과 접촉하여 鄭昇和 총장에 대한 軍내 여론을 탐문하면서 鄭총장의 연행.조사문제를 협의한 결과,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피의자는 1989년 12월31일 국회에서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黃永時, 車圭憲, 兪學聖, 盧泰愚 등과 접촉하면서 鄭총장의 연행.조사문제, 軍 개혁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사실이 있다”고 증언한 사실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답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요.
“당시에는 국회 증언 자료를 급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증언한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피의자는 합수본부장은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수사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통령의 사전 결재 없이도 계엄사령권을 연행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아시나요.
“대통령 결재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없지만, 저는 鄭총장이 계엄사령관이기 때문에 예우 차원에서 재가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례들, 예컨대 姜文奉, 尹必鏞 사건 등에서는 대통령에게 구두로 귀띔만 하고 체포한 것으로 압니다”
문 그렇다면 재가를 거절하는 崔圭夏 대통령을 설득하여 재가를 받기 위해 12월12일 밤에 노력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鄭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문 10.26 사건의 합수부 수사 주무였던 백동림은 10.26 사건 수사결과, 鄭昇和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보고서를 피의자에게 제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백동림의 진술에 의하면, 피의자 역시 백동림의 위 보고에 수긍하였다는데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문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연행 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였나요.
“1979년 12월 초경으로 기억합니다”
문 鄭총장의 연행.조사를 피의자 혼자서 결정했나요.
“鄭총장에게 혐의가 있다는 수사관들의 건의를 여러 차례 받고, 최종적으로 저 혼자 결정했습니다”
큰 충돌 예상 못해
문 鄭총장을 연행할 경우, 鄭총장의 추종세력이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요.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鄭총장을 연행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추종세력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양심에 비추어 그 정도는 용인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일이 그렇게까지 크게 번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문 만약 鄭총장을 연행하여 조사를 했는데, 혐의가 없어서 그냥 돌려보내면 피의자는 괘씸죄에 걸려 어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텐데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혹시 실패할 경우 대형 군사 충돌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나요.
“일이 최악으로 진행되면 대형 충돌 사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큰 저항 없이 연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상태도 엉성했던 것입니다”
문 鄭총장 추종세력이 병력을 동원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계획이었나요.
“결과적으로 張泰玩 수경사령관이 이성을 잃고 완강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일이 커졌던 것이고, 처음부터 이쪽에서 병력을 동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문 피의자는 1979년 12월 초순경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 대공 2 과장 겸 합수부 수사 제1국장에게 鄭총장 연행, 조사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 수립을 지시했나요.
“李鶴捧인지, 許三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지시하여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 鄭昇和 총장 연행, 조사 계획인 소위 12.12 거사 계획은 鄭총장을 실제 연행하는 계획, 연행에 찬동하는 장성들을 30경비단장실에 집결시켜 지원하게 하는 계획 연희동 요정으로 鄭炳宙 특전사령관 등 실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鄭총장 추종 수도권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병력 동원을 차단하는 계획, 수경사 30, 33경비단 및 헌병단 병력을 활용하고 필요하면 지원 병력을 동원하는 계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許三守 대령 등은 許三守, 禹慶允 대령이 직접 鄭총장을 만나 연행하기로 하고 보안사 수사관 7명을 동원하여 3명은 부관실에서 수행부관, 경호장교를 제압하고, 2명은 成煥玉 대령, 이종민 중령과 함께 총장공관 입구 초소 경비병을 제압하고, 나머지 2명은 총장공관 현관 주변에서 외부상황에 대처하는 한편, 崔石立 중령은 수경사 33헌병대 1개 중대병력 60여명을 동원하여 공관촌 입구 해병대 초소를 제압, 퇴로를 확보하고 총장공관과 해병대 경비막사를 제압하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모든 것을 지시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사전 병력동원 계획 없었다
문 현직 계엄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을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 혐의자로 연행 조사한다면 당연히 계엄사령관의 해임 조치가 수반될텐데, 후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등 인사문제도 보고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는가요.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기 위한 보고서에는 인사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후임 참모총장 등 인사문제는 이튿날 아침 일찍 盧載鉉 국방장관이 대통령과 상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문 현직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내란사건 관련 혐의자로 연행 수사하는 것은 계엄업무에 영향을 주는 중요사항일 뿐 아니라 육군 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의 인사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국방장관 소관 사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수사 대상자가 지극히 중요한 인물일 때에는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을 뵙고 직접 구두로 보고드리고 처리한 전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은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았으며, 전에 이미 2~3차례 盧장관에게는 구두로 보고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 1979년 12월12일 18시30분경 수경사 30경비단장실로 兪學聖 등 장군 9명과 張世東, 金振永 대령을 집결토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혹시 일이 잘못되어 피아간에 군사충돌이 발생하면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불러모은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커진 것은 張泰玩 때문이며, 처음부터 병력동원까지 예상한 것은 아닙니다”
문 피의자측에서 제출한 자료에는 12.12 저녁 30경비단에 집결한 黃永時 1군단장, 盧泰愚 9사단장 등은 직속 상관인 李建榮 3군사령관의 외출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나, 李建榮 3군사령관은 黃永時 등이 부대를 이탈한 사실에 대해 사전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녹음한 테이프에 의해서도 李建榮 3군사령관은 黃永時 등의 부대이탈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한 것이 인정되는데, 당시 피의자 黃永時 등을 30경비단에 집결시킬 때 극비리에 집결하도록 요청한 것이 아닌가요.
“부대이탈 승낙 여부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으나 극비리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문 그날 경복궁 모임의 암호명이ꡐ생일집 잔치ꡑ였다는데요.
“저는 모릅니다”
문 1.3.5 공수여단장, 9사단장 등 12.12 사태시 실제 병력이 동원된 부대 지휘관들이 30경비단장실에 모두 집결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경우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동원할 사전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병력동원을 하려고 사전에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연희동 음식점 모임의 진상
문 鄭총장을 연행할 경우 鄭총장이나 그 측근 군 지휘관 등이 이를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군을 동원하여 합수부 등을 공격해 올 것도 예상되므로 필요하면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솔직히 말씀드려 합수본부장인 제가 朴대통령 시해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鄭총장을 연행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복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대편의 대응이 그렇게 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 鄭炳宙, 場泰玩, 金晉基 장군을 1979년 12월12일 18시30분 연희동 음식점으로 초대한 사실이 있지요.
“예”
문 연희동 만찬은 1979년 12월10일경 피의자가 수경사 헌병단장인 趙洪에게 장군 진급 예정자로 선정되었음을 미리 알려주며 趙洪의 진급 축하 및 계엄업무로 고생하는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헌병감을 위로하는 만찬을 주선하도록 지시하여 이루어졌다고 趙洪이 진술하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 趙洪이 훨씬 전부터 자기가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몇몇 선배 사령관들을 모시고 한턱 내겠다고 하여 모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 趙洪의 진술과는 다른데요.
“제가 초청한 자리가 아니라 趙洪이 한턱 낸다고 해서 마련된 자리입니다”
문 그 당시 장군 진급심사는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12월6일부터 12월12일까지 진행되어 12원12일 16시경 진급심사위원장인 車圭憲이 참모총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는데, 어떻게 그 며칠 전에 趙洪이 장군 진급 예정자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제가 진급 예정사실을 먼저 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안사령관으로 있으면 사전에 그런 것을 알게 되는데, 제가 趙洪에게 진급 예정 사실을 알려준 것 같습니다”
문 피의자가 12월12일 보안사령부를 출발하여 대통령으로부터 鄭총장 연행 보고 문서에 재가를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도착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보안사에서 총리공관으로 막바로 간 것이 아니라, 30경비단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장군들을 만나고 난 다음 총리공관으로 간 것 같은데, 출발 시간이나 도착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총리공관으로 갈 때, 李鶴捧 중령을 대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가 수사 책임자였기 때문에, 제가 대통령 질문에 답변이 막히면 대신 답변하게 하려고 함께 간 것입니다”
문 보안사령관인 피의자와 수행원의 복장은 어떠했으며, 각자 권총 등 무기를 휴대했는가요.
“전투복 차림이었던 것 같고, 권총은 당연히 휴대하지 않았습니다”
문 당시 총리공관의 경비상태는 어떠했는가요. 그 때 이미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그곳에 와서 경비를 맡고 있었는가요.
“총리공관의 경비상태는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문 崔대통령에게 무엇이라고 보고했나요.
“朴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鄭총장에게 혐의가 있어 연행조사를 해야겠다고 보고했습니다”
문 그때 崔대통령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국방장관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국방장관과 같이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崔대통령의 결단
문 대통령께서는 연행을 승인하는 태도이던가요, 승인하지 않는 태도이던가요.
“저는 대통령께서 鄭총장 연행 사실은 묵시적으로 승인을 하시되, 절차상 국방장관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피의자가 대통령이 승인하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만약 대통령께서 승인하시지 않겠다면 그 자리에서 명시적으로 ꡐ鄭총장 연행은 불가하다ꡑ고 말씀하셨을 텐데, 그런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면 대통령이 왜 그 문서에 재가를 하지 않았겠나요.
“절차상 주무장관인 국방장관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 피의자 등이 재가를 하도록 崔대통령을 위협하거나 강요한 사실은 없었는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강요한 사실이 없습니다. 崔대통령께서는 항상 침착하고 중후하신 분으로 저는 그 분을 대통령으로 모시는 동안 한 번도 결례를 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세간에서는 崔대통령이 유약하고 무능했으며, 피의자가 상당히 무례했던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崔대통령은 매우 훌륭하신 분으로 그런 사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문 일부에서는 피의자가 崔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재가를 강요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문 崔대통령이 1980년 8월16일 왜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고 생각하나요.
“저로서는 답변할 수 없으며, 답변할 성질의 질문도 아닙니다”
문 검찰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79년 12월12일 21시경 尹誠敏 육군 참모차장 등 陸本 수뇌부, 張泰玩 수경사령관 등이 대응조치 움직임을 보이자, 합수본부장인 피의자 등이 필요한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장악하기로 하고, 朴熙道 1공수여단장에게 그 준비를 지시하여 같은 날 21시10분경 朴熙道 1공수여단장이 이기룡 부여단장에게 국방부와 陸本으로 출동준비를 하는 한편 병력 진입시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하고, 21시20분경 이기룡 대령이 1공수여단 각 대대에 병력집결 명령을 하달하여 21시45분경 1공수여단 1대대 병력이 출동을 전제로 부대앞 신월동 삼거리에 집결하고, 이기룡 부여단장은 22시경 용산 삼각지까지 진출하여 국방부, 陸本 관계자와 접촉을 시도한 사실이 있는데요.
“검찰에서 이미 제출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참고하여 어느 쪽이 먼저 공격했는지에 대해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 그 무렵 위와 같은 1공수여단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陸本 수뇌부가 1공수여단 병력이 陸本으로 출동하는 것으로 보고 정식 작전명령으로 수도권 공수여단 중 유일하게 합수부측에 가담하지 않은 9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陸本을 방어하기로 한 사실이 인정될 뿐 보안사나 30경비단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병력출동을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9공수여단 병력이 실제 12월13일 5시경 출동한 것은 사실이나 합수부측에서 9공수여단 병력이 출동하기도 전인 12월12일 21시20분경 1공수여단에 출동준비를 지시하거나 같은 날 22시경 특전사령관 체포준비를 지시하고 24시경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사실에 비추어, 피의자측이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이 아닌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사실은 검찰에서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 군 통수계통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으로부터 鄭昇和 총장 연행에 대해 아무런 지시나 재가가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尹誠敏 육군 참모차장, 張泰玩 수경사령관 등 육군 정식 지휘계통의 지휘관들이 鄭昇和 총장 연행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반란으로 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 출동 준비를 하는 등 대응 조치를 취한 것을 두고, 鄭昇和 총장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나아가 반란 또는 내란한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鄭昇和 총장 연행이라는 정당한 공무집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등 합수부의 공무집행에 저항하려 했기 때문에 병력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문 1979년 12월1일경 崔대통령 권한대행을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조사결과는 어떠했는가요.
“제가 陸本의 전창렬 중령을 인솔하고 가서 全중령이 조사한 사실은 기억나고, 崔대통령이 金載圭를 범인인 줄 알고도 잡지 않았다는 혐의를 조사한 것으로 압니다 결국 崔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해소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이는 鄭총장 연행 조사에 대해 崔대통령이 재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전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미리 조사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문 1980년 8월16일에 이루어진 崔대통령의 급작스런 하야는 피의자 등이 조사한 위 조사 내용을 가지고 崔대통령을 협박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軍 지휘권 찬탈의사 없었다
문 1980년 1월8일 崔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12.12 사건은 정당한 업무집행이었다고 밝혔다고 하는데, 그 경위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그 당시 崔대통령이 12.12 사건을 정당한 업무집행이었다고 밝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위는 알지 못합니다”
문 崔대통령이 12월13일 새벽 사후 재가를 한 것은 사실이나 대통령의 재가 없이 鄭昇和 총장을 연행하여 이미 범죄가 성립된 이상 사전에 필요했던 재가를 사후에 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성립된 불법은 여전히 그대로 남고, 다만 재가권자가 기왕에 행해진 처분이나 행위를 사실상 용인하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며, 崔대통령이 이미 발생한 상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사태를 수습하는 의미에서 鄭총장 연행을 재가했지만, 이미 형성된 형사상 또는 행정상의 위법이 소급하여 치유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 12.12 사건의 준비과정을 살펴보면, 합수부의 10.26 사건 수사와는 직무상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방부 군수차관보, 일선 군단장과 사단장, 특전사 여단장 등 수도권지역 주요부대 지휘관들과 鄭昇和 총장 연행조사 문제를 협의하고, 이들을 사전에 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하도록 하는 한편, 같은 시각에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육본 헌병감 등 육본 직할부대장들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는 등 사전조치를 했고, 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12.12 사건 당시 지휘부를 형성하여 집단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요구하고, 병력동원, 육군 정식 지휘계통의 핵심 지휘관 체포, 국방부.陸本.중앙청 점령 등의 조치를 협의 결정했으며, 나아가 그들이 실제로 병력을 동원하여 軍의 정식 지휘계통을 와해시킨 점 등으로 보아, 필요한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鄭昇和 총장의 제거를 관철하고, 결국 軍의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軍 지휘관을 찬탈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문 앞서 나온 바와 같이 그 직후인 1979년 12월13일자로 李熺性, 盧泰愚, 鄭鎬溶 등이 軍의 주요한 보직을 모두 차지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軍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요.
“軍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다면 제가 참모총장에 올랐어야 할 텐데, 저와 친하지 않은 李熺性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한 것만 보아도 저희들이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은 억울합니다”
문 12.12 주도세력은 당시 정권을 장악할 의도를 갖고 있었고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 5.18 사태 등을 통해 실제 집권하고 대통령직에까지 올랐으므로 내란에 해당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요.
“그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더 할 말이 있는가요.
“만약 제가 12.12 사건 당시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피의자 신문조서(제4회) 1995년 12월10일 안양교도소
문 피의자는 崔圭夏 대통령이 10.26 사건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80년 헌법개정, 1981년 상반기 선거, 1981년 6월 정권이양이라는 정치발전 일정을 밝히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합헌적 절차에 따라 평화적인 정부 이양의 선례를 수립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사실을 알고 있지요.
“알고 있습니다”
문 그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피의자 등이 1979년 12월12일 鄭昇和 총장을 강제 연행하여 내란방조 혐의로 구속하고,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鄭昇和 총장 계열 장성들을 강제 전역시킨 후 軍내 핵심 요직을 차지하여 軍權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나요.
“그렇습니다”
문 그후 피의자 등은 불필요한 계엄의 지속으로 학생들이나 국민들이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시위할 경우에 대비하여 1980년 2월18일 수도권 및 후방 주요 부대에 소요 및 폭동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했나요.
“충정훈련이 시위진압 훈련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나 1980년 2월경에는 제가 충정훈련 강화를 지시할 입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문 그 무렵 비상시국 타개와 관련하여 3金씨 불가론과 崔圭夏 대통령 불가론을 자주 이야기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이 없으며, 오히려 鄭昇和 총장이 언론인 등에게 두 차례에 걸쳐 3金씨 불가론을 이야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 주변에서는 피의자가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들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결과적으로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집권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그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피의자의 집권 과정에는 누가 핵심적으로 관여했나요.
“저의 밑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입니다”
문 피의자의 집권 과정에 혹시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이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닌가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權正達 정보처장은 정보처장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문 權正達 정보처장이 보안사령관인 피의자를 보좌하면서 피의자의 집권을 위한 계획수립 등을 주도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집권과정에서 許文道씨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문 李鶴捧, 鄭棹永, 許三守, 權正達, 許和平 등이 피의자의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위해 수시로 盧泰愚, 鄭鎬溶, 兪學聖, 車圭憲, 黃永時 등 12.12 주도세력과 모임을 가졌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들은 맡은 바 임무만을 충실히 했다고 생각하며,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K공작계획
문 10.26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부에 기획관리실, 치안처, 법무처, 행정처와 함께 언론관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보도처가 설치되고, 문공부,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제기획원, 서울시청, 육.해.공군 등에서 파견된 50여명으로 보도 검열단이 구성되어 시울시청에서 신문, 방송, 잡지, 통신, 대학신문 등 모든 언론매체에 대한 보도검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와는 별도로 보안사 내에 李相宰 준위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을 설치한 사실이 있는가요.
“언론대책반은 보안사의 처장급 중에서 누군가가 주도했던 것으로 기억되나, 그 구체적인 설치 목적이나 경위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론대책반 운영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지휘관인 저의 책임입니다”
문 소위 K공작계획에 대해 들은 바 있는 가요.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문 K공작계획의 1단계가 1980년 3월24일부터 시작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계획은 적어도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입안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계획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수립된 것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문 세간에는 K공작계획의 K가 King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그것은 유언비어라고 생각합니다”
문 K공작계획은 그 목적을 ꡐ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 있다ꡑ라고 적시하고 있어, 피의자 등 新軍部만이 혼란을 제어하고 안정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언론에 주입시켜 집권 기반을 다지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 K공작계획은 그 실시 시기, 내용, 구체적인 시행 과정 등에 비춰 볼 때, 언론을 통해 3金씨 등 기성 정치인들간의 경쟁을 왜곡 선전하고, 북한의 남침위협을 과장하며, 崔圭夏 정부의 허약성을 강조하는 등 여론을 조작하여, 이른바 新軍部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정지작업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피의자는 1980년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했는데, 피의자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한 이유는.
“중앙정보부는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가지고 국가안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입니다. 그런 중요한 기관이 10.26 사건 이후 국민들로부터 범죄집단시 되어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께서는 중앙정보부를 활성화하여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저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하게 됐던 것입니다”
문 피의자가 1980년 3월 말경 申鉉碻 국무총리를 찾아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일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문 그 자리에서 申총리가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명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점에 관해서는 자세히 기억할 수 없으나, 위에서 진술한 것과 같은 이유로 제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金씨 주도권 쟁탈전
문 피의자는 崔圭夏 대통령에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겠다는 의사를 직접 밝힌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토록 하는 문제는 누가 崔圭夏 대통령에게 건의했는가요.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周永福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문 그 무렵 崔圭夏 대통령은 申鉉碻 총리에게 “중앙정보부장에는 민간인을 임명해 정보계통을 軍과 양립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말하면서“보안사령관 全斗煥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은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문 피의자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된 것은 피의자에게 그 무렵부터 집권 의도가 생겼기 때문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문 1980년 5월 초순경부터 학생들과 재야 민주인사들이 일제히 軍部와 유신 관료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규탄하며 피의자인 全斗煥의 퇴진 등을 요구하고, 정치권에서도 계엄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는 등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시국상황이 전개되었지요.
“본인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 피의자는 그 당시 이러한 시국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요.
“솔직히 말씀드려 그 당시 시국상황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져 가고, 특히 3金씨 사이의 노골적 대립과 주도권 쟁탈전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문 그때 국가의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피의자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저는 崔圭夏 대통령이 업무 수행을 잘 하고 계셨기 때문에,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당시 崔圭夏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었나요.
“저는 사심없이 崔圭夏 대통령이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전적으로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문 1980년 5월 초순경 金永先 당시 중앙정보부 2차장이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남침 위협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다고 하면서 담당국장과 함께 보안사령부로 찾아와, 피의자와 보안사 참모들이 대책회의를 한 일이 있었나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남침 위협 심각하다고 판단
문 이러한 남침 위협 관련 첩보는 군의 자체동향 분석 결과 과장된 정보임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당시 북한의 남침 위협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나요.
“저는 일본으로부터 입수된 정보 이외에도 다른 정보들에 의해 북한의 남침 위협이 심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문 사실은 남침 위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는 1980년 5월12일 중앙정보부 국장으로 하여금 임시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남침위협을 보고하도록 한 사실이 있는가요.
“북한의 남침 위협을 국무회의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문 피의자 등 新軍部가 근거도 희박한 북괴 남침설을 강조한 것은, 정권 장악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등의 명분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닌가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 1980년 5월10일 崔圭夏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와 이를 진압하기 위한 대규모 軍병력 투입 준비 등으로 불안정한 국내 상황에도 불고하고, 중동 순방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당시 국내 정치상황이 다급했던 것은 사실이나, 국제적인 기름 파동으로 기름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에, 경제 각료들의 건의에 따라 중동 순방을 강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혹시 중앙정보부에서 강력히 권유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 당시는 민주화 시위로 국내 사정이 어수선하고 항간에는 군부 등장설이 파다하여 대통령으로서 어떤 결단이 필요한 시기여서 崔圭夏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반대하는 견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등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崔圭夏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하게 되었다는데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 1980년 5월14일관 5월15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의 35개 대학,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했지만, 이런 대규모 시위가 피의자 등 新軍部측의 정권탈취 기도에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 1980년 5월15일 밤 대학생들이 시위를 자제하고 해산했다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요.
“예”
문 崔圭夏 대통령이 귀국하던 1980년 5월16일 밤 청와대에서 심야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피의자도 그 회의에 참석했지요.
“예”
지역계엄은 '종이 호랑이'
문 피의자는 그 당시 어떠한 대책이나 의견을 제시했으며, 崔圭夏 대통령은 이에 대해 어떤 지시나 조치를 했는가요.
“金鍾煥 내무부장관이 그동안의 시국상황을 보고했고 崔圭夏 대통령께서는 큰 일이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요.
“지역계엄은 ꡐ종이 호랑이ꡑ에 불과하여, 이것만으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학생 데모 등 집단 행동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으므로, 좀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교환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국무회의 의결이나 대통령의 재가도 있기 전인 5월14일 이미 계엄군 전면 투입준비를 지시하여 곧 전국의 주요 대학과 기관 및 시설에 계엄군을 투입하기로 했다는데, 이러한 계엄군 전면 투입 준비계획은 어떤 경위로 수립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그것은 계엄사령관의 소관사항이므로, 제가 관여할 성질의 일이 아닙니다”
문 1980년 5월17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周永福 국방부장관 주재로 全軍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나요.
“예”
문 이러한 全軍 주요지휘관회의는 周永福 장관이 독자적으로 소집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新軍部측의 요청에 따라 新軍部가 계획한 계엄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등을 추진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 아닌가요.
“국내 사정이 다급하여 대통령이 해외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한 상황에서 周永福 장관이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柳丙賢 당시 합참의장에 의하면, 周永福 장관이 외부 요청에 의하여 全軍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합니다. 실제로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이 요청한 결의 내용이 全軍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그대로 결의된 사실에 비추어 보면, 피의자 등 新軍部가 全軍 주요지휘관회의 소집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全軍 주요지휘관회의에서의 논의를 거쳐 군부의 집약된 의견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계엄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방안' 등은 어떤 경위로 수립되었으며, 그 수립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에 의하면, 1980년 5월 초순경부터 비상계엄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가 5월10일경 학생시위가 심화되자, 피의자에게 시국 수습방안으로 그와 같은 조치를 검토하여 보고했고, 피의자는 이를 승인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국회 해산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배경이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할 수 없습니다”
문 周永福 국방부장관이 全軍 주요지휘관회의 후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全軍 지휘관들이 모여 집약한 결론임을 특별히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국무회의에서 제안 설명을 하면서도 軍部의 집약된 의견이라는 점을 강조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데 軍部의 결의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요.
“사실이 아닙니다”
문 軍部가 전면에 나서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기구를 설치하거나 정치활동을 규제하겠다고 한 것은, 결국 軍部를 장악하고 있는 피의자가 실질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권까지 장악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는가요.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문 5월17일 全軍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리는 시간에, 피의자는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장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崔圭夏 대통령을 찾아가, 金大中 등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 金鍾泌 공화당 총재 등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들에 대한 연행.조사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나요.
“예. 대통령뿐만 아니라 계엄사령관에게도 보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이런 보고에 대한 崔圭夏 대통령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당시 누가 배석했는가요.
“崔대통령이 대상자 명단을 자세히 보시고 그중 몇 명은 제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이 때 계엄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에 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는가요.
“그 당시에는 보고한 적이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1980년 5월1일 16시경 金모 변호사를 대동하고 청와대에 가 崔圭夏 대통령에게 “全軍 주요지휘관회의가 끝났는데 軍은 현재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통령의 비상조치를 원하고 있다”면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해산, 5.16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국정자문협의체의 설치, 각급 학교 휴교 조치 등을 건의했으나, 崔대통령이“그같은 상황은 5.16 하나로 족하고 특히 軍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중단 사태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비상계엄 확대를 제외한 나머지 조치들은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장을 대동했던 것만 기억날 뿐, 그 이외의 사항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병력 동원은 나와 무관”
문 周永福 국방부장관과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5월17일 全軍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친 다음, 申鉉碻 국무총리와 崔圭夏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특별기구 설치 등의 시국 수습방안을 보고한 결과는 어떠했는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1980년 5월17일 21시42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안건을 심의하기 위한 제42회 임시국무회의가 소집되었지요.
“예”
문 그 당시 중앙청 정문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청 현관에서 국무회의장까지는 양쪽에 1m 간격으로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이런 조치는 어떤 경위로 이루어진 것인가요.
“병력 운영은 저의 소관사항이 아니므로, 그 점은 잘 모릅니다”
문 당시 중앙청에 배치된 군병력은 수경사 병력이었는데, 盧泰愚 당시 수경사령관과 사전 협의를 했나요.
“저는 모릅니다”
문 5월17일 21시42분부터 같은 날 21시50분까지 8분간 중앙청 회의실에서 임시국무회의가 열리는 동안 회의장 복도에까지 수경사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단순한 경비가 목적이었다면 중앙청 건물 외부에 배치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문 피의자 등 新軍部 세력들은 중앙청 국무회의장 안팎에 군병력을 배치, 위압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강제하여 결국 헌법기관인 국무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국무회의가 열릴 당시에는 이미 계엄 확대에 따를 전면적 병력 투입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일부 부대 병력은 이동까지 했는데, 국무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력 전면 투입을 강행할 방침이었는가요.
“당시에는 계엄상황이어서 軍이 24시간 비상 대기상태에 있었으므로 국무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력이 전면 투입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여하튼 병력 동원은 저의 소관 사항이 아닙니다”
정치활동 금지시킨 이유
문 당시 제주도에는 軍을 투입해야 할 만한 소요 사태나 사회질서 교란 사태가 없었는데도 굳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역계엄은 ꡐ종이 호랑이ꡑ에 불과하여, 그것만으로는 당시의 긴박한 시국 상황을 수습하기에 한계가 있고, 전국계엄을 선포하여 계엄사령관에게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부여하여 시국을 수습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당시의 헌법, 계엄법, 계엄법시행령에 의하면 비상계엄은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할 수 있는 것이고, 사회 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이라 함은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한 전투지역 또는 그 인접지대로서 민심이 동요하고 치안이 혼란하여 정상적이 행정 또는 사법기관이 그 기능을 상실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습니다”
문 10.26 사건 이후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나 사회 내부로부터 국가안보를 위협할 정도의 혼란이 전혀 없었으며, 더욱이 유신 헌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이 계속되거나 확대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 피의자 등은 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과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포토록 했는데, 정치활동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엄사에서 한 일이므로, 저는 잘 모릅니다”
문 정치활동 중지 방안은 어떤 경위로 최종 결정되었는가요.
“계엄업무는 국방부의 주무부서와 계엄사에서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잘 모릅니다”
문 포고령 10호의 핵심 내용인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조치에 대해 崔圭夏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는가요.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문 李熺性 계엄사령관에 의하면 포고령의 형식적인 문안 작성은 계엄사령부 담당부서에서 했지만, 포고령 10호의 정치활동 금지 등 조치에 대해서는 합수본부로부터 지침을 받아 작성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문 왜 舊정치인들을 일정기간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생각했나요.
“저는 당시 시국이 시끄러운 이유가 3金씨가 순리적인 정치 일정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권력을 잡을 욕심에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문 그 후 5공화국 헌법 부칙에 정치활동 규제 근거를 마련하고 그에 따라 정치활동 규제법을 제정하여 상당수 舊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도 결국 5.17 계엄 확대에 따른 정치활동 규제 조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舊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은 부패한 舊정치인들을 일정기간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집권 시나리오는 말도 안돼
문 그후 金大中 등 핵심 기성 정치인 등을 체포.구금 또는 연금하고,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것은, 피의자 등 新軍部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고, 결국 新軍部가 정권을 장악하는 이른바 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말도 안되는 주장입니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舊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것은 그들이 정치적 욕심 때문에 사회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金大中은 학생 소요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하게 되었고, 金鍾泌은 舊공화당 시절 부정부패의 대표적 인물로서 재산을 환수하게 된 것이며, 金泳三은 가택 연금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정권을 차지할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 金大中.金鍾泌 등 주요 정치인, 재야인사에 대한 구체적인 연행.조사 계획은 어떤 경위로 수립되었는가요.
“李鶴捧이 책임자로 있는 합수부 수사단에서 수립한 것입니다”
문 학생 시위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들에 대한 선정 작업은 어떤 경위로 했는가요.
“실무자들이 보안사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를 기초로 선정 작업을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
문 피의자는 1980년 5월13일 20시경 보안사령관실에서 李鶴捧 대공처장, 權正達 정보처장과 함께 국기 문란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선정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 선정기준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요.
“실무자들이 보안사에서 존안하고 있는 인물카드를 기준으로 선정한 후 저에게 보고하여 제가 승인한 것입니다”
문 정치인 연행.조사 계획을 崔圭夏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는가요.
“예,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한 후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았습니다”
문 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5월20일 오전 9시 상도동 자택에서 5.17 조치를 강력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려 하자, M16 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병력이 그날 8시경 집 주위를 에워싸 金총재를 가택연금한 사실이 있는데, 金총재의 가택 연금은 어떻게 결정된 것인가요.
“金泳三 총재가 그당시 시국을 혼란스럽게 한 책임이 있기에 가택 연금을 한 것입니다”
문 1980년 5월18일 새벽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더불어 수도군단 예하 33사단 101연대 병력이 국회에 투입되어 국회를 점령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계엄사령부에서 한 일이므로,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문 국회를 점령한 병력이 국회의원의 국회출입을 통제하고 5월20일 10시에는 黃珞周 의원 등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여 결국 제104회 임시국회가 개회조차 못하도록 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 사실은 신문보도를 통해 알고 있으나, 제 소관이 아니라 그 경위는 모릅니다”
문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 사법사무는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여전히 국회 권한에 속하므로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여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케 한 명백한 헌정중단 조치라고 생각되는데요.
“역시 계엄사에서 한 일이므로 제가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광주 진압 과정에 참여 안해
문 피의자는 1980년 5월18일 7공수여단 병력이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된 후, 계엄 확대와 金大中 공동의장 체포에 항의하는 광주시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그들의 공분과 저항을 유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소요 진압을 명분으로 11공수여단, 3공수여단, 20사단 병력이 순차적으로 투입되어 발포를 하는 등 무자비한 광주 재진입 작전이 감행됨으로써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된 소위 광주사태를 알고 있지요.
“광주사태는 계엄사령부의 작전권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저희 합수부는 병력동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보안사령관이던 저는 작전 상황만을 파악하여 계엄사에 알려주었기에 그 내용만 알고 있을 뿐이며, 진압 과정에는 전혀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는 崔圭夏 대통령과 周永福 국방부장관, 李熺性 계엄사령관 등 최고 지휘부와 광주사태 대책 등을 협의했나요.
“저의 업무와 관계가 없으므로, 대통령 등 광주사태에 관해 협의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피의자나 盧泰愚 수경사령관, 鄭鎬溶 특전사령관 등과 상의하여 광주사태에 대한 진압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가요.
“李熺性 계엄사령관은 책임감이 투철한 분으로 2군 사령관 등 관계 지휘관과 참모들의 보좌를 받아서 결정하여 진압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문 광주에 처음 투입되었던 7공수여단 2개 대대 이외에 11공수여단, 3공수여단, 20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는데,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이나 戰敎司 사령관으로부터 증파 요청을 받은 바 없음에도 위와 같이 병력이 추가 투입된 이유와 경위는 무엇인가요.
“계엄사에서 한 일이므로,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문 1980년 5월20일 밤 광주역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다가 차량 시위 등으로 밀리게 되자,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요.
“저는 그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저의 소관도 아니므로, 제가 어떤 조치를 취한 바는 없습니다”
문 1980년 5월21일 새벽 4시30분 계엄사령관실에서 계엄사 대책회의가 열려 '①계엄군을 광주 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 ②자위권 발동 ③1개 연대 추가 투입 ④전투력 공백 보전책으로 2개 훈련단 훈련동원 소집 ⑤폭도 소탕작전으로 5월23일 이후에 의명 실시 ⑥경계 강화 조치'를 결정했는데, 그 때 발포방침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문 1980년 5월21일 9시경 광주에 내려갔던 특전사령관 鄭鎬溶이 피의자의 지시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을 주도하면서, 계엄사령관을 만나 자위권 발동 또는 발포 명령에 대해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가요.
“저는 아는 바 없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의 군부 내 입지로 보아 당연히 발포 명령 과정에 관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가요.
“저는 발포 명령에 전혀 관여한 바 없습니다”
崔雄 사단장이 진압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러
문 1980년 5월 25일 8시경 전남도청에서 발생한 독침사건과 5월23일 서울역 앞에서 체포된 남파간첩사건은 시위대에 내부 소란을 일으키고 광주사태가 북한 간첩 등 불순분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 널리 알리기 위해 피의자 등이 주도하여 계엄당국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제 기억으로는 위 독침사건과 간첩사건은 사실대로 있었던 사건이며, 전혀 조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문 1980년 5월25일 피의자의 권유에 따라 광주를 방문한 崔圭夏 대통령은 재진입 작전시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를 듣고 재진입 작전에 명백히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데, 진입 작전 전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문 戰敎司 작전참모 白南伊 등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사태 기간 동안 피의자가 광주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 기간 동안에 광주에 간 일이 전혀 없습니다”
문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현지 31사단장이나 戰敎司 사령관은 자신들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현지에 상주한 崔禮燮 보안사 기획처장과 洪性律 제1군단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받은 피의자와 盧泰愚 수경사령관, 수시로 광주에 내려간 鄭鎬溶 특전사령관 등 이른바 新軍部 실력자들이 대책을 협의하여 발포명령을 하는 등 진압부대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31사단장 鄭雄은 진압 과정에 잘못을 범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허위 주장을 하는 것이지,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 등 新軍部 세력들이 崔圭夏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민들의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비상계엄 확대와 金大中 등 민주인사들의 연행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이는 학생, 시민 등에 대하여 진압봉 및 대검을 사용하고 발포하는 등의 도발적인 강경진압으로 무장항쟁을 유도한 다음, 진압 명목으로 무차별 발포하여 살상하는 등 내란을 범하고, 내란목적 살인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광주사태 문제는 기본적으로 계엄사의 문제이지, 보안사나 합수부의 업무와는 무관합니다”
國保委 설치 배경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계획은 피의자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핵심참모인 許和平, 許三守, 權正達, 李鶴捧 등 4명이 주도하여 수립했나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계획은 위 4명이 주도하여 수립한 것이 아니라, 저와 보안사 참모장을 비롯한 참모진 모두가 관여하여 만든 것입니다”
문 그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한 이유 및 경위는 어떤가요.
“제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즉 ꡐ國保委ꡑ를 설치하게 된 배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1979년 3월 제가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처음 을지연습을 해보니까, 전쟁이 발발하여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우리 軍의 작전 업무에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점이란, 원래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이 모든 군사 업무와 입법, 행정, 사법 등 3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군사작전 업무만 해도 계엄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업무량이 벅찬데 거기다가 입법, 행정, 사법 업무까지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업무 모두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밖에 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6.25나 5.16 때와 달리 요즘은 국력과 경제규모가 방대해졌는데, 실정을 잘 모르는 군인들이 각 행정부처에 파견되어 복잡한 행정업무까지 관여하다가는 경제를 비롯한 국가 기능이 마비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軍은 군사작전 업무에만 전념하고 행정부는 행정 관료들이 업무에 전념하되, 계엄법의 정신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대통령 직속 자문.보좌기관으로서 일종의 비상기구를 설치하여, 행정부의 전문관료와 軍 장교를 함께 근무하게 함으로써 업무가 유기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보안사 참모진에게 그 방안을 연구, 검토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계엄 하이던 당시 상황에서 위와 같은 비상기구의 설치.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그 기회에 위와 같이 연구된 방안을 실천에 옮기게 됐던 것입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에 관해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았나요.
“물론입니다. 대통령에게 저의 생각을 보고하자, 대통령도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문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인 피의자가 대통령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에 관하여 건의할 권한이 있는가요.
“당시 저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건의한 것입니다”
國保委는 정책 건의 기능밖에 없어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5.16 이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어떻게 다른가요.
“5.16 이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행정부 기능만이 아니라 법률 제정 기능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단지 정책을 건의할 수 있는 기능밖에 없었으므로, 국가재건최고회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문 결국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계엄령 하에서 행정부의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었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문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수반인 행정부를 군부에서 기술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新軍部측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를 위해 피의자는 新軍部 세력의 핵심이었던 盧泰愚, 鄭鎬溶, 黃永時, 兪學聖, 車圭憲 등과 사전에 협의한 사실이 있나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문 1980년 3월 말경 보안사팀이 정권 장악에 뜻을 두고 집권계획 연구에 착수하여, 같은 해 4월 말경 비상권력기구로서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방안과 그 위원 인선 등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 崔侊洙 비서실장의 진술에 의하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당초 계엄확대와 동시에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권력기구로 계획되었는데, 崔圭夏 대통령과 申鉉碻 국무총리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긴급조치 발동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설치를 반대하자, 그후 합법적인 외관을 갖추기 위해 대통령령에 근거한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崔侊洙 비서실장의 진술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상임위원장에 임명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국방부장관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한 것입니다. 그때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그만 두었습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존속하는 동안, 의장인 崔圭夏 대통령이 직접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전체회의를 주재한 것은 발족하던 날을 포함해 두 번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로 설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장인 대통령이 두 번밖에 회의를 주재하지 않았던 것은 상임위원장인 피의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제가 상임위원장의 자격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운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법적으로는 대통령령에 의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을 강력히 조정, 통제하면서 국정 전반을 장악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상임위원장인 피의자가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닌가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정책 결정권이 없습니다. 다만 대통령에게 정책을 건의하여 대통령이 결정, 시행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의 어디를 보아도 입법 기능은 커녕 행정 기능조차 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숙정, 사회惡사범 일소, 괴외금지 등 행정과 입법 기능을 수반해야 하는 조치들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에게 위와 같은 정책을 건의하여 각 부처별로 시행한 것입니다”
國保委에서 개헌안 연구
문 자문기구 내지 보좌기관에 불과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대통령 내지 행정부 소관사항인 위와 같은 조치들을 입안하여 집행한 것은 월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초법적인 조치이므로 그 자체가 국헌문란 행위로 보이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이른바 新軍部의 실세이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출범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許三守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도 1988년 10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5.16 후 설치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슷한 혁명위원회의 성격이 있었다고 자인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그것은 許三守가 그 내용을 모르고 잘못 말한 것입니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행정 및 입법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단지 정책 자문.보좌기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문 피의자는 1980년 6월 말경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하여 개헌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문 위와 같이 지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崔대통령께서 그 무렵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정부 내에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헌법연구회가 있기는 하지만, 제가 헌법개정에도 관심을 가지고 개헌에 관한 의견을 건의해 달라고 하여 지시한 것입니다”
문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과 朴哲彦, 禹炳奎 법사분과위원이 주도하여 같은 해 7월 중순경까지 개헌안 시안을 만들도록 하였나요.
“예,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직후에 법사분과위원들로 하여금 정부의 헌법개정 심의위원회와 별도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추진한 것은 결국 집권을 염두에 두고 다음 공화국의 헌정구도를 그려보고자 한 것이 아닌가요.
“앞서 진술한 대로 崔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연구한 것입니다”
문 피의자, 盧泰愚 수경사령관, 보안사의 鄭棹永 보안처장, 權正達 정보처장, 許三守 인사처장, 李鶴捧 대공처장, 許和平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의 李鍾贊 총무국장, 許文道 비서실장 등이 1980년 7월15일 10시경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대통령 선출 방법, 대통령 임기, 국회의원 선거구제 등 헌법개정안, 정치일정 단축 방안, 崔圭夏 대통령의 하야 문제 등에 대해 토의를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대통령 선출방법과 관련하여 당시 국민적 합의가 직선제였고, 대부분의 법사위원들도 직선제를 선호하고 있었다는데,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답변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법사분과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헌법 개정 작업의 진행 상황을 崔圭夏 대통령에게 보고한 일이 있는가요.
“다른 일로 대통령께 보고를 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진행 상황을 가끔 보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5공화국 헌법에서,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데 대한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유는, 포고령에 의한 정치활동 중지 조치, 軍 병력에 의한 국회 점령과 국회의원의 국회 등원 저지, 金鍾泌.金大中.金泳三 등 이른바 3金씨의 체포.구속.연금 등 주요 정치인 제거 조치로 국회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고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활동이 규제된 헌정중단 상황을 헌법적으로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요.
“저로서는 답변할 성질이 아닙니다”
문 피의자가 1980년 8월 중순 禹炳奎, 朴哲彦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분과위원들에게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 임기 7년을 관철하도록 지시하고, 李龍薰 법제처장으로 하여금 이를 반영시키도록 하는 등 사실상 헌법 개정작업을 주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헌법 개정작업을 주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新헌법의 대통령 임기와 관련하여 임기가 6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너무 짧은 것 같으니 단임제로 하되 7년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전달한 바는 있습니다”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은 조작 아니다
문 합수부에서 1980년 5월22일 金大中이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학생소요를 배후 조종했다고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한 사실이 있지요.
“예”
문 金大中에 대한 韓民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범죄인지 후 7년 동안이나 수사를 하지 않았던 부분이고, 1980년 2월29일 단행된 사면.복권 이전의 일이므로 사실상 사면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건인데 새삼스럽게 수사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합수부 수사 관계자로부터 보고를 듣기로는 金大中씨의 韓民統 관련 부분은 7년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정보를 입수하고도 수사에 착수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보류하고 있던 부분인데, 어차피 계엄령 하에서 金大中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으니 7년 전의 범죄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문 1980년 7월4일 계엄사에서 발표한 金大中 사건의 수사결과 발표문을 崔圭夏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는가요.
“물론입니다”
문 金大中과 재야인사 등이 내란음모 등을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新軍部 세력을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을 불법적으로 체포, 감금하고, 고문, 가혹행위 등을 통해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金大中씨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서는 그 후에도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저는 그 사건이 결코 조작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국회 권한을 대행할 기구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성하기로 계획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신헌법이 만들어지고 있을 무렵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법률가가 저에게 문제점으로 신헌법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새 국회가 개회될 때까지는 입법기능을 수행할 기구가 없으므로 위와 같은 기구를 헌법 부칙에서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채택한 것입니다”
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대통령령에 의하여 설치된 대통령의 자문기관에 불과하여 입법 권한이 없으므로, 그 명칭이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되었다 하여 입법 권한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 설치 근거는 헌법에 있으므로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崔圭夏 대통령 하야 문제
문 피의자들이 12.12 사건, 5.18 광주사태, 5.20 국회 봉쇄사건 등을 일으켜 헌법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킨 후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혁명위원회 성격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가보위입법회의의 활동은 내란 수행의 과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본인은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피의자가 1980년 6월20일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 李鍾贊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李相淵 보안사 정보처 보좌관, 尹碩淳 중앙정보부 총무부국장 등에게 창당 작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진술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시기는 6월이 아니라 8월 이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金元基 전 부총리는 1980년 초여름 무렵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인 피의자로부터 잠깐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부총리 자리를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짐작하고 피의자를 찾아갔더니, 피의자가 돈 1백억원을 달라고 하여, 崔대통령에게 보고한 다음 그 다음날 국무회의를 열어 예비비에서 1백억원을 지원하도록 결의해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요.
“예, 그런 사실이 있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그 돈도 신당 창당작업에 사용된 것이 아닌가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피의자 등 新軍部가 사실상 모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등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 헌법 개정작업과 함께 신당 창당을 추진한 것은 결국 피의자가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저로서는 그 당시까지 그러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문 피의자는 피의자의 측근들과 함께 崔圭夏 대통령의 하야를 논의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崔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압력을 가해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한편 원로들을 동원하여 설득하는 등 양면작전을 구사하여 崔대통령으로 하여금 하야토록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사실과 다릅니다”
문 피의자와 盧泰愚, 鄭鎬溶 등은 육사 11기 동기로서 동기생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여 온 민석원을 통하여 그와 매우 가깝게 지내는 金貞烈씨를 알게 되어 어른으로 모시게 되었나요.
“민석원이 저희와 같은 육사 11기 동기생이고 또 그가 金貞烈씨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제가 가깝게 지낸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 등은 1930년 동경 유학 시절부터 崔圭夏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인 金貞烈씨에게 崔圭夏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하여 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金貞烈씨가 崔圭夏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처음 몇 차례 설득에 나섰을 때는 崔圭夏 대통령이 “지금 국민들은 군인들이 나서는 것보다 나같이 별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 과도정권을 끌고 가기를 원하고 있다”며 하야를 거부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문 金貞烈씨가 1980년 7월30일 청와대 접견실에서 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장장 5시간 동안 崔圭夏 대통령과 담판을 벌인 끝에 崔圭夏 대통령이 하야하기로 결심했고, 金貞烈씨가 그날 자정 무렵 이촌동에 있는 자신의 장미맨션 아파트로 돌아와서 피의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내용을 통보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崔圭夏 대통령이 다음 날인 1980년 7월31일 피의자를 청와대로 불러 하야 결심을 밝히고 내 자리를 대신 맡아달라고 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崔圭夏 대통령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들 입니다”
문 崔圭夏 대통령이 金貞烈씨의 수차례에 걸친 설득에도 불구하고 하야를 계속 거절하자, 金貞烈씨가 끝까지 하야를 거부한다면 新軍部가 金載圭 내란사건과 관련하여 崔대통령을 내란방조 혐의로 문제삼으려 한다면서 은근히 협박조로 말했다는데 그 사실을 아는가요.
“그런 사실을 아는 바도 없고 들은 바도 없습니다. 또한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崔대통령은 매우 강직한 분”
문 盧泰愚 수경사령관이 고등학교 선배인 申鉉碻 국무총리에게 崔圭夏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申총리가 거절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문 崔圭夏 대통령의 하야 결심 과정에 피의자 등 新軍部가 폭행이나 협박 등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崔圭夏 대통령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들입니다”
문 시중의 소문에 의하면 崔대통령에게 하야의 대가로 1백억원을 주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터무니 없는 모함입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본 검사에게 崔圭夏 대통령이 하야를 하게 된 솔직한 배경을 진술해 줄 수 있는가요.
“그것은 崔圭夏 대통령이 답변할 성질입니다. 그러니 위 질문은 崔圭夏 전 대통령에게 해주십시오”
문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崔대통령의 하야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고 있는 입장에 있으므로, 제가 아무리 진술해 봐야 변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 崔圭夏 대통령의 성품이 어떻다는 말인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분의 성품은 매우 강직한 성품으로서 신중하고 추진력이 강하신 분입니다”
문 金泳三 총재의 정계은퇴를 추진하기로 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문 1980년 7월30일경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실에서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이 있는 가운데 李鶴捧 대공처장에게 “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경남고 선배이니 정계 은퇴를 선언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장을 통해 1980년 8월15일까지 金泳三 총재가 정계은퇴를 하도록 하되, 은퇴 성명에는 “시국이 어려워진 책임이 3金씨 등 정치인들에게 있다,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서 이 나라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 점을 포함하게 하고, 만일 정계은퇴를 거부할 경우 여자 관계와 정치자금 문제 등 약점을 언론에 폭로, 파렴치한으로 몰아 도덕적으로 매장하겠다고 협박하라는 취지로 지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陸.海.空 참모총장이 대통령직 권유
문 피의자는 1980년 8월16일 崔圭夏 대통령이 하야함에 따라 全軍 주요지휘관회의에서 피의자를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한 다음, 1980년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9월1일 취임했나요.
“제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사실이나 全軍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추대토록 조종한 일은 없고, 그 무렵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이 보안사령관실로 저를 찾아와 현시국 수습을 위해서는 제가 대통령직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고 돌아간 사실이 있습니다”
문 비상계엄의 확대, 정치인의 체포.연금, 정치활동의 금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헌법 개정 작업의 추진, 신당 창당 등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 軍의 주도권을 장악한 軍部 최고 실력자로서 합동수사본부장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고 있던 피의자가 崔圭夏 대통령의 사전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추진한 조치들로서, 새로운 정권 창출의 준비 또는 기초행위로서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집권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계엄령 하에서 제가 집권할 생각이 있었다면 바로 대통령직을 빼앗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런 의도가 없었던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문 피의자는 결국 12.12 사건으로 軍지휘권을 장악하고 불과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 올랐으며 그 준비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고 외관상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던 점에 비추어 계획된 절차가 아니었나요.
“결과적으로 제가 대통령직에 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와 같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만, 대통령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崔圭夏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으며,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朴正熙 장군과의 차이
문 피의자 등 이른바 新軍部 세력들이 12.12 사건으로 軍權을 장악한 후에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비상계엄 전국 확대, 金大中, 金鍾泌 등의 불법 체포.구금, 포고령 10호에 의한 정치활동 규제, 국회의 봉쇄.점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崔대통령의 강제 하야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내란을 한 다음, 피의자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사실과 다릅니다”
문 피의자가 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해 대학가의 시위가 중단되고 북한의 남침 동향이 없음에도 남침위기설을 조작하여 대통령의 재가없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강행하고, 이를 구실로 계엄군을 동원하여 대학과 국회를 점거.봉쇄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는 등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항거하는 시위가 예상되는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을 투입하여 학생,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유혈사태를 야기하는 등 비상상황을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초헌법적 비상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운영함으로써 대통령과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1980년 8월16일 崔圭夏 대통령을 하야시킨 것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하여 내란하고, 그 과정에서 군을 정권찬탈의 목적에 이용하여 군형법상의 반란을 하는 등의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 朴正熙 장군이 집권한 과정과 피의자가 집권한 과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朴正熙 장군은 분명히 혁명을 하여 정권을 잡았고, 저는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을 뿐입니다”
문 더 할 말이나 유리한 증거가 있는가요.
“지금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특별법은 소급입법으로서 헌법에 위반된다고 생각합니다. 소급입법을 하여 처벌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우리 헌정사에 불행한 일이므로 신중을 기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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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두환이.. 12.12군사반란 = 12.12군사쿠테타 하느라 수고혔어
--- 그런데, 어떤 대통령이 사면 해줬나요 --- Y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