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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가마솥에 뜸들인 눈물
이영백
◆ 프롤로그
대필하는 영광에 감히 제가 이 글을 적고 있다.
“막내 동생아! 시간이 나거든 언제든 좋다. 나의 6`25전쟁 참전기를 꼭 써 다오.”
나를 만날 때마다 간곡히 그렇게 셋째형은 말씀하였다.
나에게는 큰형, 둘째형, 지금 이야기로 펼쳐 나갈 셋째형이 있고, 끝에 넷째 형이 있었다. 이 중에서 셋째형은 살아서 차성인(車城人) 이덕숙(李德淑)이요, 돌아가심에 항렬자를 따라 호가 청곡(靑谷)이며 평백(平伯)이었다.
이 글을 쓰는 제 나이 예순 다섯인데, 꼭 저만큼 되던 해에 셋째형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무골호인 셋째형 인생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6`25전쟁 참전기를 셋째형 청곡 소원에 따라 꼭 남기고 싶었다. 이 내용을 아들`딸`후손들에게 전해주고자 할 따름뿐이었다.
셋째형은 일자무학이라 경험을 글로 남기지 못하였기에 무지몽매한 막내 동생이나마 이렇게 필을 들어 보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의 청곡인생 이야기일 뿐이었다.
국가로부터 훌륭한 전공을 인정받지도 못하였기에 나 스스로도 이 글 만큼은 남기지 아니한다면 너무나 죄스럽게 생각된다싶어 시작하여 본다. 서양은 무식이 삼대면 지게를 놓고도 A자를 모르며, 우리 속담에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도 하였다.
제1부 이덕숙
1. 감나무 집 셋째아이
셋째형은 송명(松明) 수상(壽祥)과 경주최씨 송계당(松谿堂)부인의 셋째 아들이었다. 토함산 밑 경상북도 경주군 내동면 시래리(時來里)에서 태어났다. 고조가 무후(無後)여서 증조는 먼 인척에서 양자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도 외동이었으나 운(?) 좋게도 4남매를 두었다. 그 중에 아버지는 둘째였다. 아버지 장가들자말자 연속 아들 셋을 낳았다. 자식이 많아야 살림 밑천이던 그 예전에는 칭찬받을 일이었다.
할머니는 가문을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고 좋아하였다. 손자가 갑자기 셋이나 생겼으니 좋아하지 않을 할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큰 아버지는 아들 하나, 작은 아버지도 아들 하나만 두었다. 고모는 시집갔으나 배태를 못하였다. 나중일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둘 더 낳았다. 할머니는 뒤에 낳은 손자 둘은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농사짓고 목수도 하여서 할머니집 앞에 직접 지어서 살았다. 오래전부터 있던 감나무에 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가을철이면 붉은 감이 먹음직스러웠다. 따다가 좋은 것은 곶감을 만들어 제사에 쓰고, 작은 것은 삭혀서 새참으로 먹었다. 감나무는 울타리 사이에 심어져 있었기에 땅을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이 오면 새싹 나오는 것을 보고 자연을 알았다. 감이 열리고서 감나무 밑에 거름을 넣고, 그 열매가 붉어지면 계절이 바뀌니 가을을 알게 되었다.
셋째형은 감을 모조리 따버리는 것이 아니라 까치밥으로 몇 개씩 남겨 두는 감나무 집 셋째아들이었다. 셋째형은 감나무 집 셋째로 불리면서 그 집에서 계속 살았다.
2. 어린 날 셋째형
셋째형은 큰형이 서당가고, 둘째형이 아버지 일 따라 가버리면 매우 심심하였다.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보아도, 동해 남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와서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릴없이 동사 마당에 나가면 사무실에는 동서기가 사무를 열심히 하는 것도 보았다. 혼자 자치기를 하다가, 팽이를 치다가, 구슬놀이를 하다가 할 수 있는 놀이는 모두 다 해보아도 혼자는 재미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서 풀 망태를 매고 풀 베러 나가 보았다. 도랑가 풀을 베는 데 제법 모아지면 망태에 꾹꾹 눌러 담아서 양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벤 풀은 송아지도 어미 소에게도 주면 고맙게 받아먹었다. 일손이 언제나 바쁜 어머니는 셋째아들이 혼자 심심해하면서도 시키지도 아니한 집안일들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에 신기해하였다.
“아이고! 덕숙이! 오늘 소 풀도 많이 베어 왔네. 착하네, 착해. 오늘 아버지 오실 때 사탕 사 오려나, 어디 보자.”
혼자서도 알아서 일을 찾아하는 셋째아들이 신통방통하여서 칭찬하는 따뜻한 어머니 목소리였다.
두 형이 집으로 일찍 돌아오지 않으니 철길 밑 우물가 회화나무 밑에서 놀다가 물총이 생각나 열매를 주워서 물총놀이를 해 보았다. 그것도 혼자라서 재미가 없었다.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오포(午砲)인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덩달아 동해남부선 부산 가는 기차가 힘차게 지나갔다. 왼고개 높은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데 기적소리와 그 칙칙폭폭∼하는 소리는 조용한 위시래 마을에 괜히 시끄럽게 만들었다.
보리밥 그릇을 받아 찬물에 말아서 된장을 반찬으로 밥 먹었다. 시원한 물이지만 비록 보리밥의 깡마른 밥을 물에 말아서 밥맛을 내었다. 반찬이라고는 시커먼 된장을 풀어 호박 넣고 멸치 섞은 최고급(?)의 반찬이었다. 언젠가는 잘 살 것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밥 먹을 때 참 맛나 하였다.
간혹 작은 아버지가 일하는 연장이나 숫돌을 빌러 왔다.
“덕숙아! 혼자 노니? 동사에 가 봐라. 넓은 곳에서 놀아라.”
“예. 작은 아버지.”
대답은 아주 간단히 하였다. 동사에 가도 일보러 오는 사람 말고 친구들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회의실에 문 열고 들어갔다. 어른들이 담배 피우고 담배꽁초만 쌓여 있었다. 조용하게 담배꽁초를 모아서 불태우는 곳에다 갖다 버리고서 친구들이 오는가를 기다렸다. 친구는 모두 바쁜 모양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를 아니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빨래를 이고 삼거리 빨래터를 찾았다. 빨래 방망이와 검정 비누통을 들고 따라 나섰다. 위에서 어머니 빨래하고, 셋째형은 아래쪽 물에 들어가 장난치고 놀았다. 작은 개구리 한 마리 잡아서 놀았다. 간혹 길 위에서 도랑으로 개구리가 뛰어 들었다. 어머니 깜짝 놀라지만 개구리는 순간에 도망쳤다.
저 멀리 논둑길에 논둑 콩 자라고 있었다. 잎이 피고 무성하여 논둑을 덮었다. 논에서 간혹 뜸부기 우는 소리 들리고, 농병아리 줄을 맞춰서 나들이 데리고 다녔다. 푸른 하늘에는 정찰기 소리 들렸다. 제트기가 하늘에 흰 연기를 뿜어 자기가 지난 길을 꼬리 만들어 놓았다. 이때쯤 동네 낮닭이 심심해서 한 번 울어 주었다.
평화로운 시골의 오후 방죽에서는 황소 울음소리 들렸다. 간혹 신작로에서는 급정거를 알리는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철길을 넘어 귓전까지 들렸다. 한가한 마을의 소음에도 물에서 장난치다가 어머니 빨래 모두 마치면 거들어 들고 집으로 가져 왔다. 빨랫줄에 걸고 바지랑대를 치켜세웠다.
또 오후의 황소울음소리 들리고 중간에 풀을 넣어 주었다. 큰 방에 들어가서 낮잠을 청하였다. 피곤한 하루가 언제이듯이 스르르 잠이 오고 말았다.
3. 끝에 오빠
셋째형은 동생이 없다가 밑으로 줄줄이 여동생이 생겼다. 큰 여동생, 둘째 여동생, 셋째 여동생이 있었다. 셋째형은 여동생들이 많아서 좋았다. 큰형은 매일 서당으로 직행하고, 둘째 형은 목수인 아버지 따라 일 나가고,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 셋과 소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보는 것이 즐거웠다.
가장 큰일이 소 풀을 베어서 지고 와야 했다. 외양간에 거름을 쳐 내고 새로이 바닥 짚을 깔아 놓았다. 무럭무럭 자라는 소들을 보며 즐거워하였다. 가장 돈이 잘 느는 것이 소 먹이 일이었다. 쇠죽을 끓이고 퍼다가 구유에 넣어주고 하는 일에 아주 숙달이 되어 있었다. 웬만한 집안일은 아버지 없이도 모두 척척해 내었다.
가까운 산에 가서 땔감을 해 오는 것도 주된 일이었다. 낙엽이나 갈비를 긁어 오고, 집에서 땔감으로 하는 나무를 모두 해 오는 것이었다. 나무하면서 땀 흘리는 만큼 그 결과는 즐거운 일이었다.
나무를 해 와서 방마다 군불을 때어야 하였다. 닭에게 줄 먹장 개구리를 잡아다 마당에 놓아먹였다. 큰 닭들이 소소한 용돈 버는 것으로 재미난 일이었다. 우물에 물 긷고 여물 썰고 풀 섞어 쇠죽을 준비하였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자꾸 낳아서 마릿수가 늘어난 것이 농촌에 사는 재미였다.
논농사도 넓혀서 마지기 수가 늘어나고, 일이 폭주하였다. 농사일은 할수록 늘어만 갔다. 농사철에는 둘째형도 아버지도 함께하여 재산이 늘어나는 재미가 소소하였다. 큰형은 언제까지 공부만 하려나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맏이니까 열심히 공부하여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언연 중에 알고는 있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올망졸망한 여동생들이 있어서 즐거웠다.
“끝에 오빠! 끝에 오빠!”
부르는 여동생들의 소리에 하루의 힘든 일이 저절로 녹아 내렸다. 아들 셋, 딸 셋에 부모님과 여덟 명으로 바글바글 함께 살았다. 사람 사는 재미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었다. 셋째형은 어린마음에 남자 형님도 여자 동생들도 많아서 매우 흐뭇해하였다.
아버지 글 배우지 못함으로 아들을 내리닫이 셋을 낳으면서도 부탁한 이름이 남자이름에 숙(淑)자를 항렬 아닌 항렬처럼 지었으니 이름들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족보도 찾게 되었고, 아들 이름을 개명하였다. 문숙(文淑)은 정백(正伯)이요, 무숙(武淑)은 성백(成伯)이요, 덕숙(德淑)에서 평백(平伯), 무부(武夫)에서 원백(源伯)으로 바뀌었다.
사랑채가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하였다. 넷째 여동생이 태어나고, 넷째 남동생도 태어났다. 아버지는 즐거웠다. 아버지의 뜻대로 자식들을 많이 낳았고, 모두가 쑥쑥 잘 자라났다. 자그마치 아들 넷에 딸 넷으로 식구가 어느덧 열 명이었다. 해방되던 해에 큰 형은 이미 열여덟에 장가를 가서 4년이 지났다. 둘째 아들 열아홉 살, 셋째형은 열여섯 살이 되었다.
여동생들도 나이가 들었다. 큰 여동생이 열네 살, 둘째 열한 살, 셋째 여덟 살, 넷째 다섯 살이 되었다. 남동생은 두 살이 되던 해이었다. 열 식구가 사랑채를 두고 외양간, 헛간이 있었고, 남으로 대문채에 오래된 감나무에서 감꽃이 피었다.
어느 하루도 일 없는 날이 없었다. 열여섯 송계댁 셋째 아들은 힘이 세었다. 동네에서 온갖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 내었다. 누구나 집집마다 사람이 재산이었다.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아버지는 고조의 무후에서 많은 자식이 필요하다는 인간생활의 띠를 알고 있었다. 자손만대 대대로 이어가는 자손의무를 잘 꾸렸다.
울 밑에 호박 심어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라듯, 뒤 곁에 박을 심고 초가지붕에 새하얀 박꽃을 피우듯 자식농사에도 부지런하였다. 1946년 다섯째 누이 종출(終出)이 태어났다. 그러나 잘 못 먹고 병약하여 3년 만에 염병으로 죽고 말았다. 1949 기축(己丑)년에 나는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영백(泳伯)으로 얻었다.
자식을 많이 두어 차성이씨 가문의 전통을 만들었다. 스스로 마을의 촌장으로서 어려운 일에도 앞장섰다. 도랑치고 가재 잡듯 동민을 위해 물길도 틔우고, 길 닦고, 마을 청소도 두루두루 하였다.
찾아오는 과객들 밥 먹여 주고, 잠재워 주며 후한 인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셋째형은 자라면서 아버지의 그런 행위를 언연 중에 배우고 느끼면서 자라났다.
4. 천수답 물대기
셋째형이 어렸을 때 논이 조금 늘었다. 경주분지에서는 거개가 천수답이었다. 관개수로가 정비되지 못해서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다. 자기모양 생긴 대로 도랑들이 뱀처럼 구불구불하였다. 그런 시대의 들판이었다.
어렵게 물을 구해 모내기를 한 논이었다. 이튿날 뜨겁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논바닥이 마르기 시작하였다. 논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터 갈라지고 심은 모는 물 달라고 애원하듯 하였다. 논에 댈 물은 없고 낮에는 아예 물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논에 물이 있어야 모가 자랄 텐데 문제였다.
물 대려면 새벽녘부터 단단히 준비를 하여야 했다. 함지박 네 귀에다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밧줄을 꿰었다. 각 두 곳씩 묶어서 낮은 곳의 물을 퍼 올릴 기구를 만들었다. 삽과 괭이를 들고 경주 남천 상류인 시래 거랑에 구덩이를 팠다. 거랑에 구덩이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추측을 한 뒤에 한 곳을 정해 파 들어갔다.
셋째형과 머슴들이 동해남부선 시래 철교 밑 하천에서 구덩이를 어느 정도 파내려가니 물이 비쳤다. 물웅덩이가 형성되었다. 깊이 팔수록 둘레의 흙덩이가 무너져 내렸다. 가마니를 펼쳐서 무너져 내리는 모래를 중지시켰다. 논에 물을 대기위한 급한 대로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물을 모아 두었다. 물을 찾아 두고서 어찌하면 논으로 물을 가져 갈 수가 있을 것인가 고민하였다.
푹 꺼진 하천의 물웅덩이에서 물을 논으로 가져가야 했다. 준비된 함지박을 이용하여 두 사람이 양끝의 끄나풀을 잡고 도랑 쪽 위로 물을 퍼 올려야 했다. 도랑의 길이는 약 천m를 타고 내려가야 천수답이 있었다. 이 도랑으로 하천바닥의 물을 퍼 올려 내려가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도랑으로 올라 온 하천바닥의 물은 아직 그 양이 많지 않아서 도랑바닥의 흙 속으로 사라졌다. 논으로 도착하기까지는 아직도 멀고 멀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무 짝 가래를 들고서 논으로 내려오는 도랑가에서 흙을 파 보기도 하였다. 퍼 올리는 물이 논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를 연구하였다. 이내 상황을 파악하였다는 듯이 누나들을 동원하여 들것에 헛간의 재를 모두 퍼 오라고 하였다. 사라지는 물을 조금이라도 덜 사라지게 하려고 우선 급한 김에 재를 퍼다 덮은 것이었다.
머슴과 셋째형은 물웅덩이 아래에서 도랑으로 연결된 입구로 물을 퍼 올리기 시작하였다.
“어 엿∼차 영차! 어 엿∼차 영차!”
“쏴아∼! 쏴아∼!”
가뭄에 물 한 방울 없는 도랑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전신의 힘을 다해서 웅덩이 물을 퍼 올리고 자꾸 퍼 올렸다. 이 물이 벼를 살려서 잘 자라도록 바라기 때문이었다. 벼는 물이 있어야 살았다. 마치 사람이 밥을 먹듯이 벼는 물을 먹어야 살 수 있었다.
낮이 되면서 머리 위의 태양은 마치 구워 먹을 듯 이글거렸다. 뜨거운 태양을 견딜 수 없어서 천막을 위에다 치고서 물을 퍼 올렸다. 머슴과 셋째형 둘이서만은 계속 물을 퍼 올릴 수 없었다. 사람을 바꾸어 물을 퍼 올려야 했다. 겨우 도랑에 물길이 이어지면서 천수답 논에 물길이 찾아오고 있었다. 도랑에 물줄기가 이제 따라 와서 논바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지나고 땅거미가 내렸다. 어둑해지면서 밤을 밝힐 등불이 켜졌다. 역 밑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천지가 캄캄하였다. 가장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새카만 들판의 언덕에 앉아 있기도 무섭고 그만 드러누웠다.
밤하늘의 무수한 잔별이 떠 있었다. 하늘도 하도 맑아서 별이란 별은 온통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은하수 가로질러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날 다리처럼 보였다. 가장 북쪽에 우뚝 서 보이는 북두칠성의 일등 별들이 제 빛 자랑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자기를 보라고 말하듯 하였다.
“간밤에 분명히 물을 댔는데 그 물은 어디로 갔는지 없네.”
우리 논은 천수답이었고, 물은 댈 때만 있었다. 물 대는 것을 떼버리면 금방 말라버렸다. 사라진 물은 모두가 벼 뿌리를 적시고 갈라진 논바닥 사이로 흘러들어 갔으니 그날 묘답 다섯 마지기의 모는 간밤에 퍼 올린 물을 먹고 싱싱하였다.
5. 개잎갈나무 아래에서 참외 팔기
셋째형은 이제 열여덟에 이르렀다. 어머니 따라 시장에도 다녀 보았다. 바쁜 틈바구니에서도 돈을 벌려는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밭이 귀했다. 셋째형은 밭농사가 즐거워 보였다. 막상 밭농사를 하려니 마땅히 가진 밭이 없었다.
셋째형은 꾀를 내었다. 집에서는 밭이 없지만, 신계나 외동면으로 나가면 밭이 많이 있었다. 밭농사를 하는 집으로 한가로이 구경 나섰다. 밭에서는 여름 농사로 참외와 수박을 심어 두었다. 이른 여름에는 아직 참외나 수박이 달리지 않는데도 농부들이 밭에 들어가서 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참외밭에 엎드려 햇순을 자르고 있었다. 밭농사 중에 참외농사를 하려면 부지런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셋째형은 번쩍하는 생각이 났다. 사람이 궁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남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참외를 사다가 다시 소매로 팔면 되었다. 가진 밭이 없어도 생산된 농산물은 팔면 이윤이 남게 되었다. 판매처는 무엇보다 관광지 불국사기차역 앞이 있었다. 관광객 소비자들이 모여드는 이곳에 참외장사를 시작하여 보자는 것이었다.
결정하였다. 이번 여름에는 참외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굳게 마음먹고 지게를 정비하고, 바지게를 얹어 참외 사러 나갔다. 그랬다. 참외는 다른 사람의 소유였다. 참외는 줄이 죽죽 난 개구리참외를 사러 가는 것이었다. 개구리참외를 하나 얻어서 껍데기 깎고 속을 들여다보면 깎인 자리 그 속이 붉다는 것을 알았다. 칼로 잘라서 한 쪽을 입에 넣어 보면 설탕이 거의 없던 시절에 설탕 이상으로 맛이 달았다. 개구리참외는 무게가 개당 600∼1000g에 달하였다. 일반 참외와는 달리 녹색바탕에 개구리 얼룩무늬를 띠고 있었다.
아예 소매장사를 위해 보자기와 작은 칼과 양푼이 그릇을 준비하였다. 종자돈으로 참외 밭에 가서 참외를 골라 샀다. 한 바지게 가득히 짊어지고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 앞에 사시사철 상록수인 개잎갈나무 아래 그늘에다 지게를 바쳤다.
잘 익고 얼룩져 있는 개구리참외를 보자기에 펴 놓았다. 일단 세 개씩 무더기를 만들어 두었다. 개구리참외가 맛있다는 것을 선 보여야 했다. 작은 칼을 내어 참외 꼭지로부터 꽁지까지 깎아 내렸다. 껍데기마저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쥐고 있는 손등 위로 남겨 두고 계속 깎았다. 개구리참외 속이 붉게 비춰 나왔고, 누구나 보면 침이 절로 넘어 가는 그런 참외를 선보였다.
양푼이 그릇에 깎은 참외를 잘라 모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참외장수가 되어야 하였다. 소리를 외쳐야 했다. 저만치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붉고, 달고, 맛 좋은 개구리참외 사이소! 그리고 맛도 보이소! 공짭니다.”
셋째형은 떠나갈듯이 고함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모기 소리보다 작은 소리밖에 나오질 아니 하였다. 그늘에 놀러 나온 어르신이 한 마디 거들었다.
“젊은이! 장사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 기운도 없이 기 들어가는 소리냐? 어디 젊은이답게 큰 소리로 질러 봐! 자! 여기 젊은이 참외를 가져 와서 판데요, 여기, 이리로 와 보세요. 그리고 공짜로 맛도 보세요!”
지켜보던 어르신이 하도 답답하여 소리를 질러 주었다. 무료하게 기차시간을 기다리던 관광객들이 공짜로 맛보라는 소리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양푼에 깎아 놓은 개구리참외 조각을 집어 들고 맛보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바지게에서 내려놓아 전을 폈다. 한 무더기 세 개씩 묶어 두었다. 한 바지게 한 접(100개) 개구리참외 무더기를 일시에 모두 팔았다. 장사가 제법 잘 되었다. 개구리참외를 다시 사러 가야 했다. 배도 고프고 힘들었지만 이렇게 잘 되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장사를 꽤 잘한 것이었다. 오전에 이미 벌써 두 번이나 다녀왔고, 점심을 요기로 때운 후에 벌써 두 행보를 하였다.
간혹 동해남부선에는 부산으로, 서울로 가는 기차가 들고나고 하였다. 허연 수증기를 뿜어내는 증기기관차가 왕래하였다. 관광객들이 타고 내리면서 개잎갈나무가 줄 지어 늘어선 역전의 그늘 아래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6. 전운에 묻혀
셋째형은 쇠풀을 베어야 하고, 방을 덥힐 허드레 나무를 하여야 했다. 산성화된 땅에 낼 퇴비를 만들어야 했다. 콩밭에 넣을 퇴비는 특히 외양간에 밟힌 짚에서 좋은 거름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나면 쇠스랑으로 외양간 거름을 모았다. 거름에다 도랑가에 나는 자연 풀을 베어 섞어서 질 좋은 퇴비를 비축하였다. 셋째형은 농사 짓고, 밭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셋째형은 누구보다 열심히 닭을 키우고 모이도 주었다. 강아지를 세 마리나 키워 푼돈을 만들고, 소를 키워 송아지도 낳고 하루하루가 즐거운 생활이 되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 장가를 보내서 살림을 내어 주었고, 둘째형과 셋째형을 데리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전쟁 소식이 들리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아버지는 피란을 가면서 다른 식구는 모두 두고 둘째, 셋째 형만 데리고 피란을 가버렸다. 어머니와 딸 넷과 넷째 형까지 가만 두었다. 피란 간 거리는 고작 4km이었다.
온통 나라 전체는 전운(戰雲)에 휩싸였다. 낙동강을 남기고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풍전등화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피란지 경주군 외동면 북토리에서도 집을 또 지었다. 피란민들이 들이 닥쳐 먹을 것이 동이 나고 말았다. 용케도 피란을 간 곳에서 보니 다행스럽게도 전쟁터가 안 되어 둘째형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0세 이상 남자는 모두 징집하여야 한다는 소식이 나돌았다. 대동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자꼭지들이 모두 잡혀가던 시절이 있었고, 큰 형은 감나무에 올라가서 잡혀가는 것을 피했다고 하였다.
대동아 전쟁은 남의 나라 전쟁이지만, 6`25전쟁은 우리나라 전쟁이었다. 셋째형은 국가관이 누구보다 투철하고 왕성하였다. 셋째형이 제일 먼저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다. 군대입대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징집자를 축하하였다. 어깨에 띠를 두르고 마을을 돌았다. 농악대들이 가는 곳마다 막걸리 통을 내어놓고 술을 주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곤 하였다.
셋째형은 군대로 자원입대 하여 갔다. 1950년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일찍 나온 보리 싹이 부끄러워하였다. 전쟁은 전면전으로 되었다. 큰형은 제주도로 가서 군대 훈련교관이 되었다. 둘째형은 서둘러 결혼한 후에 강원도 속초에 배속되었다. 자원입대한 셋째형은 김해공병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방에 배치되었다는 군사우편이 도착하였다. 아울러 종형도 입대하여 포항전투에 참가하였다.
셋째형 부대는 육군 공병으로 전투공병과 시설공병으로 구분되었다. 전투공병대는 보다 최전방과 전투현장에서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반면, 시설공병은 일반 민간건설 토목회사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투공병은 최전방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다.
셋째형은 온통 나라 전체에 번져 전쟁이 벌어지는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7. 셋째 형 6`25전쟁 참전기
셋째 형은 나와 열아홉 살 나이 차이가 났다. 나를 막냇동생이라고 해서 앉혀 두고 먼저 겪은 6`25전쟁 이야기를 어린 나에게 전해 주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에서 전쟁을 도발하자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시기에 셋째 형은 남자답게 국가가 부를 것을 미리 알고 큰형, 둘째 형, 종형 등 누구보다 먼저 자원입대하였다. 적성에 따라 육군 공병부대에 편성되어 부산 곁인 김해에서 특과교육을 받고 전방에 투입되었다.(중략)
셋째 형은 대한민국 육군 공병부대에 근무하였다. 아울러 전공을 세우기 위하여 제일 선봉부대에 편성되어 피비린내나는 전투현장에 투입되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개월이 지나면서 9월 초가 시작되었다. 전 세계 16개국 우방군과 의료진까지 지원되었고, 무기지원과 병력동원으로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포악 무도한 공산군을 무찌르게 되었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고착된 전황을 단숨에 뒤집는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월미도부터 점령한 미군은 이어서 인천에 상륙하여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했다. 상륙 초반 북한은 기습을 당했던 터라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 해병대가 내륙으로 진격해 가면서 이들의 저항도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6`25전사에서 살펴보면 인천 상륙작전은 미1해병사단이 주 공격군이 되었다. 여기에 한국 해병대 1개 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가 합세해서 상륙했다. 뒤이어 육군 7사단이 뒤따른 상륙작전으로 전위함대는 약 40척의 함선이었지만 후속하는 보급선까지 합치면 250여 척의 대부대였다.
1950년 10월 26일 셋째 형은 한국군 6사단 청성부대 7연대 선봉부대로 압록강 초산진에 최초로 도착해 수통에 물을 채웠다.(중략)
기쁨도 순간, 하늘이 시샘을 하였나? 호사다마였나? 다음 날 사단장 김×오로부터 짧은 전문이 왔다. “귀 연대는 위험에 처했음. 휴대할 수 있는 무기만 가지고 알아서 잘 철수하기 바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전문이었다.
조국의 통일이 눈앞에 보였는데 이 무슨 해괴한 전문이던가? 이 전문을 받은 부대에 속한 셋째 형은 앞이 캄캄하게 되었다. 한국군 6사단 7연대의 퇴로를 열기 위해 가던 2연대가 중공군 38군, 40군, 39군의 병력에 겹겹이 포위된 것을 확인하였다. 사단장은 청성부대를 포기한 것이었다. 장개석 300만군을 유린한 중공군 3개 군단(중국군 편제는 1개 군이 1개 군단 병력임, 15만 명 추산)에 포위된 청성부대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셋째 형이 속한 단위 부대는 전투에 임했지만, 인해전술로 다가오는 중공군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밤낮으로 퍼부어 대는 중공군의 따발총 소리에 포위되어 후퇴도 못 하였다. 전우들이 죽어나갔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오직 동료와 둘만이 소나무 위로 높이 올라갔다. 푸른 소나무 잎이 카키색을 위장하여 주었다. 낮이고 밤이고 중공군이 물밀듯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10월 말 찬바람이 불어서 나무 밑으로 중공군이 지나가고 동료가 죽어간 자리만 남았다. 건빵도 없었고, 수통에 물도 다 떨어지고 없었다. 꼭 일주일간 나무에 매달려 죽지 못해 생명만 건진 것이었다. 물, 물이 없었다. 입술이 부르트다 말라서 붙어 버렸다. 아,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구나를 느꼈다.
11월 1일, 마침내 중공군 개입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한바탕 전장을 치른 곳의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골짜기 맑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빨리 물을 먹어야 산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먹고 싶은 물이 바로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기어가서 물을 실컷 마셨다.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 그것은 맑은 물이 아니었다. 같이 싸우던 전우가 죽은 핏물의 도랑물이었다. 살기 위해서 마신 물이 죽은 전우 시체의 핏물이었다. 동료의 핏물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다른 생각도 못 하고 밤을 이용하여 후퇴로를 찾아서 도망하였다.(중략)
8. 특무상사 이덕숙
셋째 형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 대한민국 육군에서 미군부대로 전역했다. 그곳에서 양심적 근무로 인하여 승승장구 계급이 진급하여 누구나 부러워하는 특무상사까지 승진했다. 특무상사라는 계급은 당시 하사관에서는 최고의 계급장이었다.
셋째 형은 휴가를 나올 때 특무상사 계급장을 가득히 안고 나왔다. 군복 정장에 달린 계급장은 모자, 양 어깨, 오른쪽 가슴에 달렸다. 붉은색 계급장으로 통도배한 정장을 입고 왔다.
큰형도 군에 입대하였지만 제주도 군 훈련장에서 병장을 달고 제대하였고, 둘째 형도 강원도 속초에 근무하면서 병장으로 제대하였다. 셋째 형은 일자무학이면서 어찌 하사관 최고 계급인 특무상사로 진급하게 되었는가? 대한민국 육군도 아니고 미군부대로 전역하여 특무상사까지 달고 다녔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린 눈에 정장에 달린 모자, 양 어깨, 가슴의 붉은 계급장이 휘황찬란하게 보였다. 정장을 벗으면 평복에도 계급장이 수두룩하게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자랑스러웠다.
휴가를 올 때는 M1 소총을 항상 휴대한 채 왔다. 늠름하고도 믿음직스러운 셋째 형이었다.(중략)
9. 엄마의 편두통
엄마는 자식을 많이 낳았고, 산후도 산후이지만 가장 못 견뎌하는 것이 편두통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민간요법으로 산비둘기를 잡아 고아 먹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두통은 사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병으로 일반적으로 한쪽 머리가 아프면 편두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편두통은 연령 및 성별에 따라 유병률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주로 젊은 성인 여성에게서 많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셋째 형은 휴가 나올 때 무시무시한 M1 소총을 직접 메고 나왔다. 엄마가 편두통을 호소하면 알았다는 듯 겁도 없이 총 들고 앞산으로 산비둘기 잡는다고 나갔다. 우리도 하도 신기하여 따라나섰다.
앞산으로 뒤따라 올라가자 산비둘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조준을 하고 산비둘기를 향하여 격발을 하였다. 천지가 내려앉는 소리로 기억한다. 산골짜기마다 소리가 공명되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엄마 편두통약으로 쓸 산비둘기를 잡아서 내려왔다. 무려 세 마리나 잡았다. 1957년 사회가 불안할 때라 총소리를 듣고 지서에서 경찰 두 명이 나왔다. 산 아래에서 기다렸다.
“총을 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 접니다.”
“총을 왜 소지하였으며, 사격을 한 사유를 말하시오.”
“예. 저는 미군입니다. 총 소지증 여기 있습니다. 산비둘기를 약에 쓰려고 잡았습니다.”
“앞으로는 총을 함부로 쏘지 말기 바랍니다.”
시골에 경찰이 찾아왔으니 간이 콩알만 해졌다. 당당히 총 소지증을 내보이는 셋째 형이 더 늠름하게 보였다. 현역군인 정복을 입고 특무상사로 온통 붉은 계급장이 어깨며, 모자며, 가슴에 달려 있어서 더 자신만만해 하였다. 셋째 형이 대단해 보였다.
잡은 산비둘기는 뜨거운 물에 튀김을 당하고, 털이 뽑혀서 고이 가마솥 속으로 들어가 편두통 약이 되고 말았다. 정말 신기한 것은 엄마가 산비둘기를 고아 먹고는 그 후에 낫게 되었다. 그날부터 편두통이 사라졌다. 정말 민간요법이 통했는가? 다 나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중략)
12. 문맹 퇴치하는 동사(洞事)마을
(중략)
동네 반장이었던 셋째 형이 사전에 교육대상자 조사를 하여 문맹자들이 모여들었다. 한글을 못 읽는 분이 자그마치 남녀 삼십여 명이었다. 동사에 남폿불을 켜서 불을 밝혀 두고 낮에 일하던 어른들이 밤에 공부를 한답시고 동사에 나왔다. 그곳에는 셋째 형도 앉아 있었다.(중략)
자모를 먼저 배우도록 하였다. 먼저, 자음으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자까지 모두 7자를 가르쳤다. 읽는 법부터 가르치고, 나중에 쓰는 법을 익히도록 했다. 대다수 낮에 일을 많이 하여서 지쳐 그저 졸고 계셨다. 내가 맡은 것은 열심히 가르쳐 드려야 했다.
이튿날이었다. 자음 나머지 글자인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자를 가르쳤다. 다음은 모음으로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모두 10자이다. 오늘 배울 것을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음에는 쓰기를 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자음과 모음을 합하여야 한다. ㄱ에 ㅏ 하면 ‘가’ 하고, 가에 ㄱ 하면 ‘각’ 한다. 각 글자 밑에 그림이 있었다. 그렇게 글자와 그림을 유추하도록 교재가 짜여 있었다. 소설 상록수에서 채영신이 한글을 가르치던 것이 생각났다.
가로, 세로줄을 치고, 모음 10자와 자음 14자를 합하여서 글자를 만들면 140자 낱글자를 익히도록 하는 한글 도표가 되었다.
이 표는 가로로 읽어서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로 배웠다. 또 세로로 읽어서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이렇게 가로 세로로 왕복 읽고 쓰고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제정한 후로 우리 국민이면 배워서 알아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배운 것으로 글자를 깨치기에 셋째 형은 너무 부족하였다.(중략)
제2부 자수성가
14. 셋째 형의 혜안
미 육군부대에 편성되어 3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였어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아니하고 군 입대 7년 만에 동료의 사고로 인하여 특무상사에서 강등되어 대한민국 육군하사로 전역되었고, 마침내 예편하여 기다리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1957년 겨울 제대를 하고 오랜만에 시골 초당에 앉아 있으니 답답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답답한 시골 초당이 아니라 군대이지만 여지껏 여러 군데를 다녀 보았다. 사람이 전쟁터에서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보전하는지, 상대방을 피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방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활한 것이 아무래도 초당 머슴들과 일하기에는 답답하였을 것이었다.(중략)
경주군에서 가장 가까운 도회지가 피란지 부산이었다. 표를 끊어 손에 들고 묵묵히 차창의 바깥 풍경을 응시하였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불국사-죽동-입실-모화-병영-울산역을 지나치면서 한편으로는 겁도 났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4년째 되는 해 1957년, 누구나 먹고살기에 급급한 도회지 풍경을 스케치하러 간다는 것이 어쩐지 역발상이었다. 셋째 형은 개의치 아니하였다. 사람 살기가 어렵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움을 누가 더 잘 극복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참에 도회지 사람들의 삶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새로운 삶을 위해 틈새를 파고들어 가야 하는 것에 피 끓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사는 방법에서 그 해결의 장을 찾으려는 의도를 셋째 형은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산은 전쟁으로 인하여 매우 부산스러웠다. 하루에 두 번 끄떡 들어 올리는 영도다리에서 푸른 바닷물을 들여다보았다. 동래 범어사를 향하는데 온천장 곁 미남이라는 곳이 미나리꽝으로 덮여 있었다. 추후 발전되면 배후지로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일주일간 부산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도 자꾸 동래 미남의 미나리꽝이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밥상 하나를 사들고 왔다.
아버지 앞에 꿇어 엎드려 경천동지할 제안을 하였다. “제가 전쟁터에도 갔다 오면서 깨우친 것이 있어서 이 밥상을 놓고 제안 하나를 말씀 올리겠습니다.”
“여행은 잘했나? 그런데 이 밥상은 뭐~ 꼬?”
“밥상은 세상입니다. 제가 촌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사람들과도 살아 보았고, 이 밥상에 밥을 잘 놓아 먹으려면 현재 이곳을 떠나야 할 겁니다.”
“조상 산소는 누가 관리하고,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어디로 간단 말이고?”
“예. 부산에 다녀왔는데, 요즘은 한적한 곳이지만 앞으로 가장 발전할 곳이 동래 미남입디다. 논 팔아서 미나리꽝만 사면 앞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야가! 뭐라 카노? 조상 산소 내버리고, 이 많은 네 동생들 다 도시로 데리고 간다고? 네 큰집은? 작은집은 우짤라고? 미나리꽝 사자고? 허허허…. 일 낼 아이네.”
“아버지가 안 된다 카믄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둘러본 결과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앞으로 사람들에게 땅이 필요할 것이고, 땅이 곧 돈이 늘 수 있는 수단이라서, 많은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서 제안한 것뿐입니다.”
셋째 형은 이러한 혜안(慧眼)을 가지고 아버지께 제안한 것인데 아버지 철학과 맞지 아니하였다. 소가 열한 마리요, 머슴이 셋이요, 논이 일흔여 마지기였다. 밭이 사천여 평이고 선산이 구천여 평인 재산으로 부산으로 갔으면 모두가 사는 방법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셋째 형은 분명 혜안을 가진 것이었다.
그 후 동래 미남리의 지가(地價)는 호가를 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부산광역시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발전할 자리가 바로 미나리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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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박하농사
셋째형의 특용작물 재배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굳이 또 하지 말라는 박하(薄荷)농사를 짓겠다니 아버지도 할 말을 잃었다. 말리다가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을 하고 말았다.
셋째형은 합류지에 박하농사를 지으려는 것이었다. 아무도 소유하지 않고 내버려둔 습지였다. 마치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새끼줄 쳐놓고 한 번 물 퍼 가는데 한 냥씩 받듯 하였다. 박하농사를 지으려는 셋째형의 발상부터가 대단하였다.
박하는 11월 중에 종근(種根) 파종이나 이른 봄 3월∼4월초에 파종을 하며, 연 2∼3회 절초를 채취하여 양건(陽乾) 후 규격으로 잘라 팔았다. 박하는 꿀 풀과의 여러해살이 다년생 식물이었다. 저지대 습지를 좋아하고 60∼80cm 정도 자랐다. 빗자루 손으로 박하를 살짝 쓰다듬다 보면 코끝을 시원하게 하는 향기가 났다. 땅속줄기로 번식되어 나가기 때문에 무리지어 자라며 7∼8월이면 연보라색 꽃을 피웠다.
셋째형은 박하농사를 하겠다니 ‘대낮에 등불 들고 다니는 격’이었다. 합류지인 습지 둘레에다가 박하 종근을 심었다. 사래가 하도 길어서 놀라고 말았다. 한 사래를 갔다 돌아오려면 어린아이로서 한나절이 걸릴 거리이었다. 셋째 형은 그곳에 남이 웃을 박하농사를 지었다. 종근이 자연적으로 자라 박하 밭을 이루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습지 백사장에 셋째형만 아는 특수농사를 지었다.
박하는 대개 꽃이 피기 전에 수확하여 박하기름을 짜기 때문에 박하 꽃을 보기 힘들었다. 박하 잎을 살짝 비벼보면 역시 박하향기가 진하게 났다. 박하 꽃이 피기 전에 수확을 하여야 박하기름을 짜서 돈을 벌게 된다고 하였다. 박하를 베어서 동사마을에 쌓아 두었다. 4km 거리를 향기가 진동하는 박하를 베어서 짊어지고 왔다. 박하를 농사지어서 산처럼 쌓아 두고서 기름 짜는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 담배농사 때엔 사일로나 발사하기 전의 우주선처럼 생긴 박하기름 짜는 기계에다가 차곡차곡 짙은 녹색 박하를 집어넣었다. 문을 닫아걸고서 밑에다 불을 지폈다. 장작불을 때었다. 불을 피우고 있을 때 사리골댁 어른이 오셨다. 셋째형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이군! 박하 농사 질 지었는가?”
“예. 그저 도랑가에 종자 심어 두었던 것 거둬왔을 뿐입니다.”
“내 담배에 박하원액 한 번 묻혀 볼까?”
장작불을 지피고 있는 박하기름 짜는 기계 옆으로 다가섰다. 필터도 없는 막궐련에 지푸라기로 찍어서 원액을 살짝 갖다 대었다. 장작불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폼 나게 막궐련 담배를 한 대 피워보는데 깜짝 놀랄 소리를 하였다.
“아이고! 이군아! 사람 살려! 아니, 이놈의 박하기름이 이렇게까지 독할 줄 몰랐네. 아니 내 똥구멍까지 쐐∼에∼ 하데 이.”
사리골댁 어른도 희한한 소리를 하였다. 입으로 담배 피우는데 어찌 자기 똥구멍이 쐐∼하단 말인가? 셋째형 박하농사는 잘 지었다.
21. 담배농사
셋째형은 제대 후 담배농사를 지으면서 고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수입도 오르고 많은 경험을 하였다. 담배농사는 일이 많다고 해서 동네에서는 아무도 안 하는 농사였다. 식구들 전체가 반대를 하기도 하였다. 어려운 만큼 돈이 된다고 담배농사를 짓겠다고 우겼다. 기어이 담배농사를 지었다.
담배농사는 손이 많이 갔다. 봄에서 겨울까지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농사이었다. 손이 여러 번 가야 상품이 되어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농한기 겨울에도 쉬지를 못하는 농사이었다. 농사 중에서도 장시간 신경 쓰이는 농사였다. 이른 봄에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우는 것부터 어려웠다. 한 포기마다 정성이 들어가야 했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여하튼 양동이에 물을 길어두고, 물뿌리개에 뽀∼로∼록 물방울이 올라오도록 누르고 있어야 물이 찼다. 그 연약한 담배 모종에 물을 주의 깊게 살살 뿌려 주어야 하였다.
포기마다 물을 뿌려주지 않으면 당장 시들어가기 때문에 애처로웠다. 도랑의 물을 퍼서 넓은 담배 밭에 뿌려주기 시작하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을 들고 가서 포기마다 주어야 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포기마다 정성을 들여 돌보면 조금씩 자라서 밭이랑에 푸른빛을 만들었다.
또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뿌려 주어야 했다. 병 예방을 위해 농약도 살포하고, 순치기도 하였다. 다 자라면 노란 빛깔을 띠기 시작하여 밑동에 노란 떡잎부터 차례로 따서 말렸다. 새끼줄에 엮어 ‘황초 굴’이라 부르는 건조실 안에 매달고 문을 닫은 뒤 장작불을 지폈다. 담배 잎이 노랗게 마르면 새끼줄에서 하나씩 모두 빼내어 창고에 쌓아 두었다. 바쁜 농사를 먼저 하고, 담배농사는 잠깐 잊어버렸다.
겨울이 왔다. 마른 담배 잎을 꺼내어 노란 정도에 따라 분류하였다. 다발로 묶어서 잎담배 수매에 제출하여 좋은 등급을 받아야 수입이 늘었다. 문제는 일련의 담배농사 과정에서 사람을 가만 두지 않았다. 잠깐만이라도 때를 놓치면 상품에서 질이 떨어져 당장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꼼짝없이 일을 제때, 제대로 하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잎담배를 골라다 사랑채에 두고서는 곧잘 말아 비비었다. 담뱃대에 꼭꼭 눌러 재웠다. 수제품 당황(唐黃)을 화롯불에 대면 바로 불을 댕겼다. 대한민국 최고급의 잎담배를 피웠다.
담배농사는 힘이 들지만 잎담배를 결결이 곱게도 노란 빛을 띄우게 해야 최상품으로 인정받았다. 덤으로 두둑이 돈을 받을 때는 그 어려운 고생이 하루아침에 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담배농사 하는 농부의 심정이었다.
아버지는 셋째형이 군대에서 익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모든 일을 겁 없이 해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덩달아 형제들이 셋째형이 하고자 하는 일에 모두가 협조하여야 했다. 이로 인하여 깊은 마음의 응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 하였다. 힘든 일을 할 생각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사회적으로 팽배한 사고는 모두가‘안 된다’라고 미리 포기하고 말았다. 농한기철에 화투나 치면서 농사지어 조금 번 돈을 허탕에다 다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먹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부지런히 일할 생각은 조금도 없던 시대에 셋째형은‘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던 분이었다.
셋째형의 담배농사는 우리들을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부지런함은 반드시 노력의 대가가 있다는 사실도 증명하였다. 우리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2. 땅콩농사
도시 생활을 하면서 호프집에 자주 들렀다. 예전에는 대구 더위가 전국에서도 제일 더운 곳이었다. 종로술집에 나가면 집에 없던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에 동료들과 시원한 곳에서 얼려 둔 맥주를 마신 것은 잊지 못할 것이다. 맥주를 마시면 으레 따라 나오는 기본안주로 땅콩이 있었다. 땅콩은 술도 술이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손이 심심하여서 자꾸 속껍질을 벗겨서 하나씩하나씩 주워 곧잘 입 속으로 넣게 되었다.
땅콩은 낙화생(落花生)이라고도 하였다. 낙화생은 식물로서 콩과의 일년초였다. 모래땅에 심었다. 여름 동안 나비모양의 황색 꽃이 피었다. 협과는 자방이 땅 속에서 자라 고치 모양으로 익은 것인데 맛이 좋고 기름도 짰다.
셋째형이 낙화생 농사를 지어 둔 하천으로 가서 수확하자고 하였다. 가족 전체가 모두 동원되었다. 그러나 낙화생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무엇에 받힌듯 하였다. 어떻게 수확하는지도 몰랐다.
셋째형은 태연히 몰고 간 소에다가 쟁기를 매어서 하천 모래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낙화생이라 해서 열매가 바깥에 맺혀 있는 줄 알았다. 마치 고구마를 캐듯이 땅속뿌리에 달리는 열매이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농사를 처음 하는 것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셋째형은 허허허 웃으시기만 하였다.
“낙화생은 땅 속에서 자란단다.”
우리들은 처음 알았다. 당시만 해도 낙화생을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고 농사를 지었으니 우리도 참, 우물 안의 개구리이었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달려들어서 양동이마다 낙화생을 따 담기 시작하였다. 순간에 가마니로 열 가마니가 생겼다. 낙화생농사는 처음 지었다.
23. 사과농사
셋째형은 분가하여 직접 농사를 짓지만 논이 없었다. 논 한 마지기 반으로는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내다 팔기에도 바빴다. 논만으로는 많은 식구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2천여 평의 산을 개간하여 채소나 과일나무를 가꾸고 있기는 하였다. 때를 맞추어 중방마을에 도회지 외지인이 투자하여 사과밭을 경영한다는 데 일꾼이 필요하였다. 그 밭을 구입할 때부터 소개도 하였다. 구매하는 데 기여한 덕택으로 사과밭 일을 도맡아서 짓기로 한 모양이었다.
주인이 있는 사과밭 전체를 책임지고 맡아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바빴다. 겨울부터 사과나무 가지치기에 정성을 쏟아야 했다. 봄이 다가 오기 무섭게 사과꽃을 솎아내는 작업은 일시에 많은 일꾼이 필요하였다. 일꾼을 모아서 먼저 교육시켰다. 좋은 꽃만 남기는 것이 기술이었다. 꽃이 조금 자라면 또 적과(摘果) 작업도 하여야 했다. 가지에 너무 많은 과일이 달리면 무거워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오면 사과나무 밑에 풀을 제거하여야 하고, 아울러 병충해 방재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였다.
모든 일들이 계절을 두고 일어나는 일로서 전심전력을 하여야만 남의 사과밭 농사를 망치지 아니하였다. 가을에 붉은 사과를 보면 지나는 촌부부터 아이들까지 붉고 맛나는 사과를 따 먹고 싶어 하였다. 구석진 곳에 원두막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지키기를 하여야 수확이 늘었다.
사과농사는 일반농사와 달라서 계속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가야 하겠기에 봄이면 사과나무 가지에 새 품종의 싹을 구해다가 싹 접목까지를 신경 써야 하였다. 누구나 사과밭에 생산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과나무 밑에 클로버를 심어두었다. 들르는 사람마다 좋은 인상을 주었다. 어느 정도 사과 알맹이가 굵어지면 새나 까마귀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물을 쳐 두는 것도 잊지 아니하였다.
사과밭 농사를 짓는 사람은 일백 번의 손이 가는 농사라고 하였다. 더구나 농약을 칠 때는 상당한 주의를 하여야 했다. 마스크와 두터운 살갗가리개 옷을 덮어 입어야 하였다. 잘못하면 농약의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사과밭 농사도 자기농원이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1년간 사과농사를 짓고 나도 다달이 품삯처럼 받아서 생활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돈을 적게 주더라도 계속 일만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또 셋째형의 입장이고 보니 사과밭 농사일도 어려웠다.
하루하루 사과밭 농사를 어렵게 짓던 중 울산 막내매형께서 여유자금이 생겨서 사과밭을 사려고 하였다. 때마침 셋째형이 일하던 사과밭을 매도한다기에 막내매형이 구입하였다. 울산중앙시장에서 생필품 소매장사만 하다가 사과밭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쉽지 아니하였다. 아예 전담으로 셋째형에게 맡기기로 하였던 모양이었다.
남의 사과밭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셋째형으로서는 매제의 사과농사가 훨씬 일하기에 수월하게 된 모양이었다. 사과밭 아래에 단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채소를 생산하여 팔았다. 수입이 조금 올랐다.
단기채소로서는 짧은 기간에 땅을 이용하는 것으로 여러 품종을 개발하였다. 고추, 참깨, 들깨, 무, 배추, 쪽파, 토마토, 오이 등을 재배하였다. 공한지를 활용하였기에 셋째형에게는 이중 수입이 되었다.
셋째형은 사과밭에 일을 하면서 단기 재배농사도 겸하여 상당한 재미를 보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채소농사로 자립농원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재매의 사과밭이지만 자립의지는 남 못지 아니한 꿈을 그때부터 가지게 된 것이었다.
24. 배꽃가지 달에 반쯤 가린 자립농원
셋째형은 새로움을 발견하였다. 바로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이기에 자립농원을 만들려고 준비한 것을 실행으로 옮기었다. 1960년대 산지개간을 해 둔 2천여 평이 넘는 곳에 장기적으로 배나무를 심었다.
그랬다. 셋째형은 과거 내동이었던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시래 철교를 지나 바로 곁 밀개산에다 배나무 밭을 만들었다. 남의 사과밭 일할 때부터 알았던 것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원두막을 짓는 것이었다. 당장 제재소에 가서 원목 정리를 해주고 폐목을 그냥 얻었다. 기둥과 지붕을 얽고 아버지 목수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원두막 하나 짓기는 쉽사리 만들었다.
원두막에서는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이 북으로 난 창으로 내려다보였다. 밤이면 17번 국도에 울산~경주를 지나는 자동차 불빛으로 꼬리를 무는 것도 보였다. 간혹 동해남부선 기찻길에는 심심찮게 여객차며, 화물기차가 수시로 오르내렸다. 가끔 기적소리도 들었다.
남의 땅, 사과밭지기를 하다가 나의 땅에서 작은 배나무 묘목을 심으면서 최소 5년이 지나야 생산되었다. 그 5년이란 세월에 할 수 있는 것이 단기재배 채소농사였다. 이미 경험해 보았기에 한 평의 땅에서라도 심고 가꾸면 생산하여 돈이 되는 것이었다. 배나무가 자라는 동안 수입이 나올 수 있었다.
채소농사 품종은 고추, 참깨, 들깨, 무, 배추, 쪽파, 대파, 토마토, 오이 등이었다. 두고두고 장사가 잘 되는 것이 파 농사였다. 파 중에서 대파는 시장에 내다 놓기 바쁘게 팔려 나갔다. 덩달아 쪽파도 팔기에는 매우 쉬었다.
아직 작은 배나무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키워 나갔다. 마치 바람 앞에 세운 등불 같았다. 배나무는 낳아 키우는 꼭 자식 같았다. 잡초가 나면 아침부터 매주었다. 작은 배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서 달덩이 같은 배가 달리는 그날을 기다렸다.
봄이 시작되면서 채소는 무럭무럭 자라고, 배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들깨는 봄부터 잘 자라 주어서 초여름이 되기도 전에 잎을 따 모아 한 움큼씩 묶어 내다팔면 맛있다고 잘 팔려 나갔다. 오이는 옛날부터 농사 잘 지어서 팔아 온 경험도 있었다. 단기성 채소와 장기성 배나무의 궁합을 맞추어 시기를 기다렸다.
농장이 되려면 잘 지켜야 했다. 밤이면 고라니가 극성이었다. 푸른 잎 새싹이 나온 채소를 마구잡이로 뜯어 먹기에 이를 지켜야 했다. 궁한 돈이었지만 철조망을 사다 칠 수밖에 없었다. 철조망 세 겹을 올려 짐승들이 못 들어오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두었다.
원두막에서 밤을 맞아 앉아 있으면 삵인 납닥발이가 눈에 불을 흘리며 철조망 곁에까지 와서 밤새 셋째형을 지켜 주었다. 셋째형은 겁도 없이 납닥발이에게 고마움으로 달래었다.
‘우리 배 밭을 잘 지키고, 채소를 보살펴 주시면 큰 딸애 시집보낼 때 쓸 것입니다. 둘째 딸애, 큰 아들 장가도 보낼 것입니다. 부디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납닥발이 영물은 그 말을 알아듣던 말든 혼자서 무섭기도 하였고 축원을 비는 흉내라도 내어 보는 것뿐이었다. 정말 그 소원을 들어 줄는지는 기다려 보는 것이요, 어느 쯤인가 곁에 있던 그 영물이 사라지고 말았다.
단기성 채소로 수입을 올렸다. 배나무 농사는 장기적이지만 시간을 기다리는 지혜를 미리 터득하게 된 것은 어찌 우연히 얻은 지혜이었겠는가. 궁즉통(窮則通)은 어려우면 통한다고 모두가 가난하기에 살기 위해 얻은 지혜일뿐이었다.
셋째형에게는 배꽃가지 달에 반쯤 가린 배 밭이 조성되면서 자라나는 자식들에게 중요한 밑천이 될 것을 미리 지레짐작을 한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노력하면 나무는 그 뜻을 알아주는 것이었다. 그 배 밭은 미래 삶의 가장 큰 자산이고 연금(年金)이었다.
▷ 필자 약력
- 이영백(65) 씨
- 전 영남이공대 교무과장
- 현 'e이야기와 도시' 창작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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