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10.26운명의 밤
궁정동거사 新軍部등장 빌미/ 판결문 공개않은채 김재규 전격처형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5.18 광주항쟁 발 발로 남한 전체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나날들, 그 와중에 5월 24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구치소 내 교수형장에는 내란목적살인 등의 죄명으로 5월 20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金載圭 前 중앙정보부장(54)과 朴 善浩중정의전과장(46)·朴基柱중정경비원(32)·柳成玉중정 운전원(37)·金泰元중정 경비원(33)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오전 7시 두명의 교도관에 의해 팔을 낀채 포승을 앞으로 묶은 손에 염주를 든 金載圭는 교수대 앞에 앉아 집행관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나라에 이제부터 민주화가 올것이다.
나는 내 생명과 유신체제를 바꾸었다.
훗날 사가들은 나를 다시 재판할 것이다.
부모님을 뵙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어 자루로 얼굴이 덮이는 순간 金은 염주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판이 내려진 후 金은 이내 절명했고 교도의는 사망이 확인된 金을 검은색 목조관에 입관시켰다.
흰색저고리에 적힌 수번은 101번. 이어 30분 간격으로 나머지 4명의 형이 집행됐다.
金등의 처형은 계엄하의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구치소측은 사형을 집행하면서 수인들의 가족에조차 알리지 않았으며 집행 후 시신을 가져가라고 연락했다.
당시 보안사는 金의 가족들에게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이에 따라 金의 장례는 수도통합병원 영안실에서 훈련중 사망한 일반 사병들처럼 조용히 3일장으로 끝났다.
경기도 수원시 판교인터체인지 부근 남한산성 공원묘지에 金의 시신이 운구 될때는 헌병 1개소대가 따라 붙었다.
보안사의 요구로 가족들은 무덤에 묘 비를 세우지 못했다.
보안사가 대법원의 형확정 4일후에 전격 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것은 당 시 서서히 일기 시작한 金에 대한 구명운동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80년 4월 LA 교민회등 해외단체들은 金載圭구명운동을 시작했으며 일부 대학대자보는 金을 '의사'로 표현하고 있었다.
역사는 구조적 필연과 돌발적 우연의 복합체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50.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발생한 김재규의 박정희대 통령 총격살해 사건은 5.16이후 20년 독재가 빚은 국가모순·권력내부갈등 의 필연이자 金載圭라는 역사 실행자의 행위가 빚은 우연의 결과였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朴正熙는 揷橋호 준공식 행사를 마치고 오후에 宮井동 중정식당에 도착했다.
十長生 8폭 병풍이 둘러쳐진 요정식 식당에 는 중정부장 金載圭·비서실장 金桂元·경호실장 車智澈·여가수 沈守峰 ·한양대생 申才順등 6명이 참석했다.
朴正熙대통령은 오후 7시 TV뉴스 를 시청하다 金泳三당시 新民黨총재 관련 보도가 나오자 기분 나쁜 듯 TV를 끄고 이내 沈씨가 노래를 시작하는 주흥이 벌어졌다.
도중 金부장이 자리를 뜨고 약 20분후 돌아와 갑자기 車실장에게 짜식 너는 너무 건방져 하는 말과 함께 독일제 32구경 7연발 권총을 1발 발사했 다.
총알은 車의 손바닥을 관통했고 놀란 車는 방에 딸린 화장실로 도피 했다.
(이상 沈守峯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문예당刊. 당시 金載圭가 金桂 元에게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라고 한 발언, 車에게 이 버러지 같은 놈 이라고 한 발언등은 사실과 다르다고 봄이 옳음) 이어 金은 朴대통령의 흉부를 향해 권총을 1발 발사했고 또 재사격을 시도 했으나 권총의 격발이 되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갔다.
金은 수분후 38구경 5 연발 리벌버 권총을 구해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온 車실장이 탁자를 밀어 붙이며 저항했다.
그러나 金은 탁자를 관통해 車에게 재차 사격, 車는 흉부에 총탄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어 金은 沈양의 팔에 안긴 朴正熙대통령의 머리를 겨냥, 제 2탄을 발사했다.
金載圭가 朴대통령에게 확인사살을 하고 방을 뛰쳐나간 시각은 10월 26일 오후 7시 43분이었다.
이때 방밖에서는 金의 발사음을 신호로 朴善浩가 응접실 대기중이었던 경호처장 鄭仁炯·부처장 安載松을 사살했고 朴興柱(중정부장 수행비서관·육군대령)·李基柱·柳成玉등은 주 방에서 대기중이던 경호실 특수차량계장 金容太·경호관 金鏞燮을 사살한 후 경호관 朴相範(93년 金泳三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됨)에게 중상을 입혔다.
金泰元은 직후 M16소총으로 安載松·鄭仁炯·車智澈·金鏞燮에게 각각 확인사살을 했다.
총격이 끝난 후 김재규는 이미 약속을 해 현장의 다른 방에 기다리고 있던 鄭昇和육참총장을 승용차에 태워 육본 벙커로 갔다.
이때 시각이 밤 10시 25분. 金으로부터 朴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사실만을 전달받은 鄭총장은 1군과 3군 에 비상태세를 발령하고 수도권 지휘부대장을 불러 들였다.
이후 金載圭는 군지휘관과 국방장관·金奎元비서실장등이 모인 밤 11시 20분께 참석자 전 원에게 '대통령유고'를 알리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金은 이어 金桂元비서 실장에게 우선 계엄을 선포하고 혁명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군사혁명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 보안사 합수부 발표) 그러나 金桂元은 鄭총장에게 金이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귀띔했고 鄭 총장은 밤 11시30분 金에 대한 체포계획을 수립했다.
헌병감과 보안사 수 사관이 金을 무장해제했고 곧 보안사로 압송했다.
金載圭에 대한 처형으로 10.26사건의 완전한 진상은 현대사의 미결로 남게 됐다.
다만 여기서 한가닥 의혹을 벗기는 일은 당시 5월 20일 작성되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의 판결문을 공개하는 일이다.
이 판결문은 관례 대로라면 법원공보와 대법원 판례집에 수록되어 하급법원의 지침으로 활 용된다.
그러나 80년 5월 이후 어디에도 金載圭등 사건에 대한 판결문은 없다.
더욱이 전원합의체 재판부에서 金의 사형에 반대의견을 냈던 5명의 대법관 들은 동년 8월 8일 일괄사표를 내고 법복을 벗었으며 상당기간 변호사 개 업도 못했다. 밝혀야 할 진실은 이렇게 쌓여있는 것이다.